1959년 6월 인제 보궐선거가 실시된다. 그러나 또 실패. 자유당 후보측은 색깔론으로 김대중을 잡았다. 동교동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김후보와 일면식도 없는 전라도 사람을 데려다 김후보가 마치 공산당과 관련 있는 것처럼 선거구를 돌아다니며 허위 모략을 하게 만들었다. 또 유권자의 7할 이상이 군인이었는데, 군부대 투표장에서는 여당 후보란에만 기표시키는 부정행위도 공공연히 자행했다”고 한다. 인제 선거는 김대중의 미래를 시사하는 대목이다. 사상(색깔) 시비는 평생 그를 따라다녔기 때문이다.
인제 선거까지 세 번의 선거 실패로 김대중은 궁핍의 나락에 떨어졌다. 그 와중에 1960년 4·19 혁명이 나고 그해 8월 5대 민의원 선거가 실시됐다. 끼니조차 걱정할 정도로 어려워진 김대중은 다시 인제로 나가 근근이 싸웠으나 1000여 표 차이로 낙선하고 만다. 네 번째 실패였다.
그러나 소속 정당인 민주당은 압승을 거두어 장면 총리 내각이 발족한다. 이때 김대중은 현역 의원들을 제치고 민주당 대변인으로 발탁된다. 머리 좋은 청년 능변가, 그러나 선거에는 지독히도 불운했던 그에게 다행히 중앙정치 무대가 문을 열어준 것이다.
선거 빚 때문에 아내까지 잃는(자살) 비운을 맞긴 했지만 정치적으로 서광이 비추기 시작했다. 김대중을 이긴 민의원이 3·15 부정선거에 연루된 사실이 드러나 의원 자격이 박탈되고 보궐선거가 실시된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1961년 5월13일 보선에서 김대중은 정계 입문 7년 만에 의원 배지를 달게 된다. 5월14일 인제군 선관위에서 당선 확인증을 받았다. 파란만장의 끝인 줄 알았다.
그러나 더 큰 풍파와 좌절의 시작이었다. 이틀 뒤 5·16 군사 쿠데타와 함께 국회 해산. 등원 한번 못한 채 다시 무직이 되고 만다. 그 무렵 DJ 주변에 권노갑 강원채(나중에 삼성당출판사를 세워 출판업으로 성공. 민한당 국회의원) 엄창록 등이 나타난다. 동교동 인맥의 배태기에 해당한다. 권노갑은 목포상고 후배로서 고교 시절 선배 김대중의 즉석 웅변에 감동해 운명적인 끈을 맺게 된다. 동국대를 나와 영어교사를 하다가 인제 선거 때 동지로 합류한다. “내 묘비에 ‘김대중 비서실장’만 적어주면 아무 여한이 없겠다(권노갑의 발언)”고 하는 평생 인연의 시작이다.
엄창록(1988년 사망)은 함북 주을 출신. 선거판의 귀재로 불리는 재주꾼이다. 원산사범학교를 중퇴하고 인제에서 신사장이라는 사업가를 도우며 생계를 꾸리고 있었다. 신사장이 김대중을 도왔기 때문에 그도 선거참모가 됐다. 상대(여당) 후보의 조직과 자금을 이기기 위해 의표를 찌르는 전략에 뛰어났다. 한마디로 기발했다.
야당 운동원이 양담배를 꼬나물고 다니며 여당 후보를 찍으라고 권유한다든지, 야당 운동원이 봉투에 담기에는 치사한 액수를 담아 여당에서 돌리는 돈이라고 뿌린다든지, 여당 후보 이름으로 고무신을 돌린 뒤 ‘번지수가 잘못돼 다른 집에 보내야 한다’며 되찾아 간다든지 하는 수법으로 여당을 교란하는 전술은 모두 엄창록의 창안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엄창록은 김대중의 마지막 국회의원 출마가 되는 1967년 총선에서 그 출중한 아이디어를 십분 발휘한다. 박정희는 그해 총선에서 목포를 ‘정책지구’라 해 김대중을 의도적으로 낙선시키려 했다. 그 지독한 십자포화에서 김대중을 기사회생케 한 것은 바로 엄이었다. 체신부장관을 지낸 군 출신 김병삼의 자금력과 조직에 맞서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김대중 특유의 선전선동과 조직 분야에서 엄창록의 게릴라전(카운터펀치)이 어우러진 결과였다.
김옥두 이수동 한화갑 가세
그 선거에 이김으로써 김대중 자신을 포함해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 벌어진다. 4년 후 야당 대통령 후보가 되고 박정희와 겨루어 540만표(100만표 차로 낙선)를 거두는 놀라운 성취로 내달리는 것이다.
김대중이 1963년 목포 선거에서 당선, 재선(사실상 초선)으로 등원하면서 참모 비서 등 식구도 늘어나게 된다. 1963년 민주당 선전부장으로 있을 때 선전부 차장이 김상현이었는데 그는 김대중이 인제 낙선을 전후해 소공동에서 웅변학원을 경영할 때 강사로 있었기 때문에 한솥밥 인연이 오래됐다. 그리고 1964년 서울 서대문 보선에서 김상현이 임흥순(2·3대 의원)과 싸울 때 엄창록을 참모장으로 ‘임대’해 줄 정도로 형제가 됐다.
1965년에는 김옥두가 가세한다. 한양대 공대를 졸업하고 병역을 마친 뒤 형 김원식(역시 동교동 초창기의 일원이다)의 소개로 입문한 것. 장흥 출신 김원식은 동향의 박석교라는 정치인을 도와 선거를 치르다 박석교와 같은 민주당 소속의 김대중을 알게 되고 동생 김옥두까지 데리고 동교동 식구가 된 것이다. 김옥두는 처음 광화문에 있는 DJ의 내외문제연구회 사무실에 1년 가까이 나가다 신임을 얻어 동교동으로 ‘발령’ 받았다.
이때쯤 먼 훗날 경기 성남에서 국회의원이 된 이윤수도 동교동에 발을 들여놓는다. 그 무렵 하의도 이웃마을의 이수동(나중에 아태재단 이사) 같은 동향 출신만이 주변에 모여든 것은 아니었다. 국회의원 김대중은 벌써 전국적인 지명도를 쌓고 있었다. 1964년 4월21일 김준연 의원 구속을 막기 위해 의사진행 발언을 무려 5시간19분이나 하는 기록을 세움으로써 유명해진 김대중은 민주당 선전부장, 대변인 등으로 지명도를 더욱 높였다.
1967년 총선에 즈음해 서울대 외교학과를 나와 직장에 나가던 한화갑이 합류한다. 하의도와 인접한 섬 도초 출신인 한화갑의 입문으로 권노갑 김옥두 한화갑, 동교동 3인방의 틀이 잡힌다. 세 사람은 숱하게 명멸해간 동교동 사람들 가운데 가장 오래 살아남아 가장 크게 빛을 보게 된다. 이들은 비교적 젊었고, ‘상대적’으로 우수했으며, 누구보다도 끈끈한 동지애와 의리를 보여주며, 위기와 좌절 속에도 몸 사려 달아나지 않고 김대중을 지키고 보필했다.
1969년의 3선 개헌과 1970년의 야당 대통령후보 경선은 동교동을 확실한 세력으로 승격시키는 계기가 됐다. 김영삼 이철승과 후보 경쟁을 하게 된 김대중은 전당대회 1차 투표에서 1위를 한 주류 김영삼(실제로 당권을 장악한 유진산은 김영삼을 밀었다)을 제치기 위해 이철승과 손잡고 대역전극을 시도했다. 결과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대통령후보 김대중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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