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7년 11월29일 광주시민들이 민정당 노태우 대통령후보 유세 연단을 향해 돌을 던지면서 유세장이 아수라장이 됐다.
호남과 한나라당을 엮는 하나의 사건은 광주민주항쟁이다. 그 그림자는 지금도 한나라당에 짙게 드리워져 있고, 호남 사람들은 여전히 한나라당을 5·18이라는 프리즘으로 걸러서 바라본다.
한나라당과 호남의 파국 시점은 정확하게 언제부터였을까. 1980년대 초반으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한나라당에는, 호남 출신이면서도 1980년대 집권여당인 민주정의당 사무처 공채 직원으로 들어와 지금까지 20여 년간 한나라당과 그 전신 정당을 위해 일해온 이른바 ‘호남 민정 기수’들이 많다. 그 중 한 명인 A씨의 얘기다.
1980년대 중반까진 사이 좋았다?
“1984년 공채로 들어왔다. 광주민중항쟁 이후 몇 년이 지난 시점이었지만 그때까지 호남에선 민정당에 대한 공분(公憤)이 있지 않았다. ‘그런 사건이 있었다’는 정도였다.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다. 정부의 선전술에 묻혔던 측면도 있다.”
지금의 상식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많은 사람은 ‘1980년 5월 광주에서 전두환 정권이 많은 광주시민을 죽인 직후부터 반독재, 반민정당 정서가 호남을 뒤덮기 시작했다’고 생각한다. 같은 호남 출신 민정당 공채 기수 B씨의 얘기다.
“내 동기가 70여 명 됐는데 순수 호남 출신이 5명이었다. 당시에도 호남 사람들은 민정당에 좋은 이미지를 갖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호남 사람들이 반민정당 정서를 직접적으로 표출하는 정도는 아니었다. 개인적으로 정치에 입문하는 길로 민정당 공채를 선택했지만 주위에선 ‘왜 하필 거기냐’는 정도였지, 대놓고 반대하거나 이상하다는 눈길로 쳐다보지는 않았다.”
1980년대에 치러진 각종 선거 결과는 이런 사정을 반영한다. 1981년 3월25일 치러진 11대 총선 결과를 보자. 당시 민주정의당은 전남에서 유효투표 159만1229표 중 49만3757표를 얻어 1위를 기록했고 의원 10명을 배출했다. 물론 중선거구제 선거였던 데다 명목상의 야당만이 있던 시절임을 감안해도 지금의 상식으로는 상상하기 어려운 결과다. 당시 민정당에 대한 호남 민심이 아주 싸늘하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신민당 돌풍이 몰아친 1985년 12대 총선 결과도 궤를 벗어나지는 않는다. 민정당은 전남(유효투표수 178만2729)에서 63만7292표를, 전북(108만6294)에서 39만9758표를 얻어 각각 11명, 7명의 국회의원을 배출했다.
이런 분위기가 급변한 것은 1987년과 88년을 지나면서였다. 6월 항쟁과 6·29선언을 지나 치러진 1987년 대선을 보자. 전남에서 당시 민정당 노태우 후보는 유효투표수 149만8755표 가운데 7.95%인 11만9229표를 얻는 데 그쳤다. 평민당 김대중 후보가 얻은 표는 무려 87.9%인 131만7990표였다. 노 후보는 전북에선 13.7%, 광주에선 4.7%의 득표에 그쳤다. 지역분할 구도의 시작이었고, 호남이 민정당과 본격적으로 벽을 쌓기 시작한 시점은 1980년 광주민주화항쟁 때가 아닌, 1987년 대선 때였다.
1988년 치러진 13대 총선 결과는 민정당에 더 비참했다. 민정당은 호남지역 37개 선거구에서 단 한 석도 건지지 못하는 참패를 당했다. 소선거구제로 바뀐 상황이었다 해도 이전과는 분위기가 영판 달랐다. 호남인들은 민정당에 대한 시각 자체를 근본적으로 바꾸고 있었다. 당시는 광주민주항쟁에 대한 진상규명이 추진되고 각종 관련 이야기가 봇물 터지 듯 쏟아지던 시점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