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루한 현실에 폭발한 유럽 청년들, 극우 정당에 매료
유럽 극우 정당, 트럼프類 포퓰리즘 정치와 일맥상통
민생 외면하고 이념 투쟁에 매몰된 한국의 보수정당
소외된 사람들의 분노 이해하는 데서 출발해야
경기 김포시 운양동 아파트단지 모습. [뉴스1]
프랑스 정치를 양분해 온 사회당과 공화당은 하루아침에 무너진 게 아니다. 그 징조는 2015년에도 이미 뚜렷이 드러났다. 그해 12월 실시된 광역 지방선거에서 당시 여당인 사회당은 13개 광역자치단체(레종·region) 중 5곳을, 제1야당이던 공화당은 7곳을 차지했다. 나머지 1곳은 나폴레옹의 고향이기도 한 코르시카 지역당 차지였다. 표면적 결과만 놓고 보면 ‘거대 양당이 지방선거를 양분했다’는 흔하디흔한 레퍼토리지만 내막은 그렇지 않다.
12월 6일 실시된 1차 투표에서 국민전선은 약 28%의 득표율을 얻어 1위를 차지했다. 공화당을 비롯한 우파 연합은 약 27%를 득표해 2위, 사회당은 23%로 3위였다. 국민전선은 13개 광역 중 무려 6곳에서 1위를 차지했는데 그 중 마린 르펜과 그의 조카딸 마레샬 르펜의 득표율은 40%를 넘기도 했다. 극우 정당의 예상치 못한 돌풍에 다급해진 기성정치권은 연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국민전선이 일으킨 바람은 사회당이 입후보를 철회하고, 2등인 우파 연합을 지원함으로써 겨우 제지됐다. 국민전선은 단 한 군데 지역도 차지하지 못했지만 전국적 승리를 거뒀다고 자평했다.
2022년 프랑스 대선 때 극우 정당 국민연합(RN) 후보로 나선 마린 르펜 후보. [뉴시스]
극우·포퓰리즘 정치가 유럽 휩쓴 이유
2015년 11월 파리 시내에서 연쇄 다발적으로 일어난 테러가 당시 국민전선의 선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이 2010년대 이후 크고 작은 선거에서 약진해 왔던 것도 사실이다. 특히 젊은 층에서 성장세가 가팔랐다. 앞서 언급한 2015년 광역 지방선거도 1차 투표 당시 투표에 참여한 18~34세 유권자 중 35%가 국민전선을 선택했다. 사회당(21%)과 우파 연합(20%)은 거기에 미치지 못했다. 같은 해 오스트리아 빈 지역 주의회 선거에서는 극우 정당인 오스트리아 자유당(FPO)이 30세 미만 유권자 사이에서 24%를 득표했다. 그뿐만 아니라 네덜란드, 폴란드, 덴마크 등 유럽 각지에서도 청년들이 극우 정당에 열렬한 지지를 보냈다.당시 유럽의 극우 정당들은 유럽연합(EU) 구성원으로서 자국의 정체성에 의문을 제기하며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유럽연합 일원이기 위해 우리가 굳이 수많은 난민과 고통스러운 실업을 떠안아야 하느냐는 물음이었다. 2008년 미국에서 시작된 글로벌 금융위기는 이내 유럽으로 번져나갔다. 포르투갈·이탈리아·그리스·스페인(PIGS) 등 남부유럽 국가들은 심각한 재정위기에 직면했고 이는 곧 유로존 전체로 확대됐다. 단일통화로 묶인 유럽 국가들은 환율 변동에 따른 무역수지 조정 효과를 도모할 수 없었다. 거듭되는 적자로 곳간이 빈 나라의 국민들은 물론 흑자를 냈지만 EU 구성원으로서 그 책임을 다해야 하는 나라의 국민들도 불만이 쌓여갔다. 21세기 들어 가속화된 세계적 분업은 노동시장에 새로 진입하는 청년이나 저숙련 노동자들의 일자리를 앗아갔다. 때마침 중동과 북아프리카에서 ‘아랍의 봄’ 바람이 불며 해당 지역 정세가 요동치면서 난민이 급증했다. 반복되는 경제위기와 고질적인 실업 속에 제러미 리프킨이 주장한 ‘유러피언 드림’ 같은 건 없었다. 미국과의 격차는 점점 더 확대됐다.
비루한 현실과 불확실한 미래에 한숨짓는 청년들이 반유럽·반이민 기치를 내건 극우 정당에 매료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2010년대 중후반, 각국의 극우 정당들은 반이민 정서를 자극하며 곳곳에서 승전보를 올렸다. 3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총리에 오른 오스트리아의 제바스티안 쿠르츠가 대표적 인물이었다. 그러나 유럽의 극우 정당들이 반이민 정서만으로 인기를 얻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2022년 프랑스 대선 때 국민연합(RN) 후보로 나선 마린 르펜은 국민의 먹고사는 문제, 즉 ‘먹고사니즘’을 강조하며 현직 대통령 마크롱의 자리를 위협했다. 20%나 되는 에너지 부가가치세에 대한 감면 방안을 제시했고, 직원 임금을 인상하는 고용주에게는 연금·실업보험 기여금을 면제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2022년 대선에서 마크롱과 르펜의 득표율 격차는 17.08%(58.54% 대 41.46%)로 5년 전 32.2%보다 크게 줄었다.
최근 몇 년 사이 급격하게 몸집을 키운 유럽의 극우 정당들은 트럼프류 포퓰리즘 정치와 궤를 같이한다. 그들은 진보 진영이 인어공주를 흑인으로 만들고, 150년 전 소설에 ‘니거(Nigger)’라는 단어가 등장한다는 이유로 혐오 프레임을 씌우는 정체성 정치에 몰두해 있는 동안, 그러한 시대적 조류에서 밀려난 사람들의 소외감과 분노에 주목했다. 나라 경제는 성장했다고 하는데 왜 나의 임금은 오르지 않는가. 우리 기업이 해외에서 승승장구하는 게 나한테 무슨 도움을 주는가. 밀려오는 이민자들이 내 일자리를 위협하는 건 아닐까. 이렇게 집값이 계속 오르면 내가 누울 자리는 없어지지 않을까. 많은 나라의 국민이 극우 정당이나 포퓰리스트 정치인들로부터 이 질문들의 해답을 구했다. 국경에 장벽을 세우고, 해외로 나간 기업을 불러들이며, 인접국과의 연대를 끊자고 했다. 정녕 이게 완전한 해법이라고 생각했는지는 모르겠다. 확실한 건 학력이 낮고 직업이 번듯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기성 정치권이 제시해 온 고담준론은 해답이 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먹고사니즘’ 외면하고 이념 투쟁에 빠진 한국 보수
나와 내 이웃, 흔히 노동자와 서민이라고 불리는 평범한 사람들의 분노는 최근의 정치적 지형 변화를 추동하는 원동력이다. 시대적 전환에 손 놓고 있는 기성 정치권의 대응이 그 분노를 만들었다. 얼마 전 미국에서 진행된 전미자동차노조의 파업이 대표 사례다. 바야흐로 전기차 시대. 테슬라나 현대차 같은 기술기업들은 그 흐름에 올라타 떼돈을 벌겠지만, 내연기관차를 만드는 노동자들은 필연적으로 일자리를 잃게 된다. 2016년 대선 당시 도널드 트럼프에게 표를 준 러스트 벨트 일대 노동자들의 심리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2008년 미국 대선 과정에서 버락 오바마 후보에게 ‘아메리칸 드림’을 묻던 ‘배관공 조’ 새뮤얼 워젤바커가 더 잘살 수 있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게 하는 정치에 분노했다면, 지난여름 올리버 앤서니의 컨트리송 ‘리치먼드 북쪽의 부자들(Rich Men North of Richmond)’을 빌보드 HOT 100 1위에 올린 이들은 당장 내 밥그릇을 지켜주지도, 그럴 의지도 없는 정치에 분노하는 것이다.오늘날 한국이 직면한 상황은 세계적 흐름과 크게 다르지 않다. 저출산·고령화는 물론 지역 소멸, 자산 격차, 소득 격차 등 각종 지표에서 우리나라는 지난 몇 년간 악화일로를 걸었다. 나라 꼴이 이런데도 정부와 여당이 검찰개혁 같은 소리만 주야장천 늘어놓으니 민심 이반이 일어나는 건 당연한 결과였다. 5년 만의 정권교체는 반대로 말하면 “지금 집권 세력에 5년을 더 주기엔 이들이 만든 현재의 삶이 너무 고달프다”라는 신호였다.
윤석열 대통령과 국민의힘은 이런 민심을 조금도 읽지 못했다. 2021년 국민의힘에 입당할 때만 하더라도 중도보수 포지션을 취했던 윤 대통령은 올 여름 뜬금없이 “공산전체주의 세력”을 향한 경고를 쏟아내고, 이념의 중요성을 설파했다. 그건 곧 보수정당이 다시 암흑기로 들어가고 있다는 신호탄과도 같았다. 1987년 민주화 이래 보수정당 최악의 시기를 꼽으라면 두말할 것도 없이 자유한국당 시절이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 이후 갈피를 못 잡던 자유한국당은 종북 세력으로부터 “자유대한민국을 지키자”며 이념 정치에 박차를 가했다. 2018년 벽두에는 은행 탁상 달력에 실린 초등학생의 그림을 두고 “인공기가 은행 달력에 등장하는 시대를 더는 방치하지 않겠다(장제원 당시 수석대변인)”며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2020년 총선에서 대패한 이후에는 “선거 결과가 조작됐다”며 부정선거론을 꺼냈다. 이념 투쟁의 결과는 처참했다. 어느 때보다 이념을 강조했던 자유한국당의 지지율은 늘 지지부진했고, 선거는 매번 역대급 참패였다.
11월 1일 윤석열 대통령이 서울 마포구 한 카페에서 타운홀 미팅 방식으로 열린 제21차 비상경제민생회의에서 참여자들과 대화하고 있다. [대통령실]
도대체 민생은 무엇인가
미래통합당을 거쳐 국민의힘으로 당명을 변경한 이후, 보수정당은 2021년 재·보궐선거를 비롯해 세 번의 선거에서 연달아 승리를 거뒀다. 그 승리에 너무도 취한 까닭인지, 국민의힘은 과거로 회귀하려는 움직임을 제어하지 못했다. 홍범도 흉상 이전 논란은 그러한 움직임의 목적지가 아니라 출발점이었을 수 있다. 강서구청장 보궐선거로 직접적인 민심이 드러나지 않았다면 인터넷에서 우스갯소리로나 돌고 있는 ‘민주당 200석’은 현실이 됐을지 모른다. 유럽에서는 극우 정당조차 민생 문제를 파고들며 지지세를 확장하고 있을 때, 우리나라 보수정당은 강성 지지층만 관심 있을 이념 투쟁에 매몰된 채 얻어놓은 표마저 까먹고 있는 셈이다.강서구청장 보궐선거 결과에 놀란 대통령실과 국민의힘은 곧장 혁신위원회를 출범시켰다. 이준석·홍준표 등에 대한 ‘대 사면’ 논란에서도 나타났듯, 비윤 세력을 어떻게 포용할 것인가는 국민의힘 혁신위원회의 핵심 과제 중 하나였다. 유승민·이준석을 비롯해 중도확장성을 가진 인물들의 이탈은 곧 그들이 자유한국당 시절처럼 좁은 이념적 지형에 갇히게 됨을 의미했다. 하지만 혁신위는 비윤을 껴안기는커녕 친윤과의 관계 정립조차 제대로 하지 못해 조기 마감하게 되었다. 첫 번째 관문부터 통과하지 못하니 그 뒤에 놓인 더 중요한 과제들, 예컨대 국민의힘의 방향 설정과 같은 중차대한 일은 시작조차 할 수 없었다. 결국 그들이 말하는 혁신은 하나 마나 한 요식행위가 되었다.
현재 국민의힘 지도부 구성원들에게 “어떤 정치를 할 것인가?”를 묻는다면 다들 하나같이 “민생”을 말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민생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신혼부부들에게 출산축하금 몇 푼 쥐여주고, 나랏돈 쏟아부어 ‘영끌족’ 이자 부담 덜어주면 민생인가. 누구도 카르텔이라 생각하지 않는 대상들을 카르텔이라고 나무라며 전방위적 공격을 가하고, 김포를 서울에 갖다 붙이는 식의 작위적인 방법으로 민생이 해결되진 않는다. 우리의 평범한 이웃들이 일상에서 느끼는 분노, 그 지점들을 파고들지 않는다면 아무리 민생을 강조한다 한들 공허한 메아리일 뿐이다. 지원금 퍼주고 세금 깎아주는 식의 원시적인 민생 정책으로는 선진국에서 횡행하는 포퓰리즘 정치마저 요원하다.
정치권의 기존 담론에서 소외된 사람들의 분노를 이해하는 데서 그들이 말하는 민생이나 혁신은 시작될 것이다. 어렵게 생각할 것도 없다. 국민의힘은 ‘북한’과 ‘이재명’을, 더불어민주당은 ‘검찰’과 ‘독재’를 빼놓고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는지부터 풀어나가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