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찌합니까. 어떻게 할까요?” 임재범이 부른 노래 ‘고해’의 도입부다. 지금 부산국제영화제는 내홍과 외홍을 동시에 겪으며 이 노랫말처럼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다. ‘고해’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난다. “벌하신다면 저, 받을게요. 허나 그녀만은, 제게 그녀 하나만 허락해 주소서” 영화제가 겪는 이중의 위기를 보는 나의 심정이 그러하다. “우리에게 영화(제)만 허락해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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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니스는 첫 회, 경쟁 체제가 아니었기에 관객 투표로 감독상과 최우수 작품상을 시상했다. 그 이후에는 콩쿠르 형식으로 바뀌면서 공식 심사단의 합의로 작품상을 결정했는데 특이하게 이탈리아 국내와 국외로 나눠 시상하고 현재의 명칭인 ‘황금사자상’ 대신 ‘무솔리니 컵(Mussolini Cup)’을 증정했다. 이 행사는 1943년 무솔리니가 실각한 이후 개최되지 못하다가 종전 이후인 1946년 재개됐다.
누구도 규정한 적 없는 세계 3대 영화제
칸국제영화제는 어쩌면 베니스영화제가 개최되지 않았다면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탈리아는 1940년 동맹관계이던 독일의 제안을 받아들여 영화제의 명칭을 ‘이탈리아-독일 영화제(Manifestazione Cinematografica Italo-Germanica)’로 변경했고 이는 1942년까지 3년간 지속됐다. 이탈리아와 독일 같은 전체주의 정권의 주도하에 이뤄진 ‘영화 축제’에 대항할 필요가 부각되면서 이에 동조한 영국을 위시한 영연방과 미국의 지원 아래 1939년 칸국제영화제가 시작됐다.‘영화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루이 뤼미에르’를 초대 위원장으로 발탁한 칸은 그해 9월 1일부터 근 한 달 일정으로 영화제 개최에 필요한 모든 준비를 마쳤다. 하지만 개막식 날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고, 9월 3일 프랑스와 영국이 독일에 선전포고하면서 영화제가 무산됐다. 칸국제영화제는 종전 후인 1946년 첫출발을 재선포했다. 칸국제영화제에서는 실질적 개최 연도인 이해를 영화제의 출범일로 공식 지정했으며 마켓을 키워 지금의 금자탑을 쌓았다.
20세기 초반 프랑스, 이탈리아, 영국 심지어 러시아와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도 영화를 활발히 제작하면서 일찍이 산업적 면모를 갖춰나갔다. 하지만 독일 영화산업은 제1차 세계대전 전까지 그다지 시선을 끌지 못했다. 그런데 전쟁에 참여한 각국이 외국영화 수입을 금지하자 독일 영화계는 뜻밖에 전기를 맞이한다. 전쟁 전만 하더라도 자국 영화의 상영 비율이 15%를 넘지 못하던 독일 영화산업은 금수조치 이래 영화관을 채우던 외국영화를 대신할 콘텐츠를 스스로 제작하면서 급격한 발전을 이룬다. 표현주의 영화로 대변되는 독일 영화는 잘 갖춰진 스튜디오와 뛰어난 제작자들의 창작 의지가 결합돼,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에는 할리우드와 유일하게 어깨를 견줄 수 있는 위치까지 올라섰다.
그러나 히틀러의 제3제국 시기인 1933년부터 1945년까지 1000편이 넘는 영화가 제작됐음에도 뉴스 릴, 프로파간다, 저질 코미디 영화가 득세하면서 독일 영화의 암흑기로 접어든다. 전후 독일이 동·서로 분단된 상황 속에서 서독의 문화행정가들은 영화제를 출범해 옛 영광을 재현하길 바랐다. 동·서 화합과 독일 통일에 대한 염원을 담아 1951년 닻을 올린 베를린국제영화제는 당연하게도 이념적 성향이 강한 영화를 우대하는 정책을 펴면서 앞선 두 영화제와 차별화를 시도했다.
우리는 오늘날 칸국제영화제와 베니스국제영화제, 베를린국제영화제를 세계 3대 영화제로 부른다. 누가 딱히 ‘3대 영화제’를 정의하지는 않았지만, 이는 마치 수학의 공리처럼 암묵적으로 통용된다. 전후 우후죽순처럼 탄생한 영화제 가운데 베니스국제영화제가 아시아 영화에 호감을 표하면서 가장 먼저 주도권을 잡았다.
영화 ‘씨받이’ 포스터(왼쪽). 영화 ‘피에타’ 포스터. [(주)신한영화, (주)NEW]
영화 ‘책상 서랍 속의 동화’(왼쪽)와 국내엔 ‘색, 계’라는 이름으로 개봉한 ‘욕망, 신중’의 한 장면. 소니 픽처스 모션 픽처 그룹, [(주)엔케이컨텐츠]
이에 비해 칸과 베를린은 훨씬 탄탄한 조직 체계를 가지고 있기에 외압에 시달리거나 이슈에 함몰되는 경우가 거의 발생하지 않는다. 영화제를 비롯한 문화예술 행사는 “지원은 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는 모토가 유지될 때라야 비로소 경쟁력을 갖출 수 있다. 그 명제는 베니스 위상 하락을 통해 증명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 문화행정가들도 이를 금과옥조로 삼아야 할 것이다.
영화제 공화국, 대한민국
인구 34만의 경남 양산은 울산과 부산 사이에 자리 잡은 도농복합지구의 성격이 강한 지역이다. 양산에서는 ‘양산영화제’ ‘양산여성영화제’ ‘양산인도영화제’가 열린다. 양산영화제는 양산 지역에서 촬영한 영화를 주로 상영하고, 양산인도영화제는 주한인도대사관과 인도문화원이 주최하며, 우리나라 3대 사찰인 통도사와 인디아센터, 좋은양산포럼이 공동 주관한다. 양산인도영화제는 통도사가 양산에 소재하기에 지자체와 순조로운 협의를 위해 인도영화제라는 타이틀 앞에 ‘양산’을 붙였다.2023년 현재, 11회라는 이력이 붙은 양산여성영화제는 “여성, 행복한 공존을 꿈꾸다”라는 슬로건을 앞세운다. 양산은 꽤 오랜 기간 여성과 청소년이 야간에도 안심하고 귀가할 수 있도록 지자체 차원에서 다양한 노력을 기울여왔다. 밤길을 밝히는 가로등의 조도를 높이고 긴급 호출용 비상벨을 누르면 곳곳에 설치된 CCTV로 위급한 상황이 바로 전송돼 블랙박스에 저장된다. 양산시는 이런 노력을 집대성해 2016년 ‘골목길 안전지키미 서비스’라는 사업명으로 국비 공모 사업에 선정되기도 했다. 그러니 양산이 여성을 주제로 영화제를 개최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인구 30만 남짓한 양산에서 영화제가 3개나 존재한다는 사실은 놀랍기도 하다.
논리학에서는 인구를 ‘집합’이 아닌 ‘전체’라는 용어로 표현한다. 집합은 닫힌 체계기에 구성원의 특성에 따라 ‘분할’이 가능하다. 하지만 전체는 특성상 언제나 열려 있기에 ‘분할’이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우리나라 전체 인구를 정확히 재는 것은 불가능한 일에 속한다. 왜냐하면 지금도 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태어나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현재 대한민국의 영화제 역시 ‘집합’보다 ‘전체’에 가깝다.
지금도 영화제는 대한민국 어디선가 생겨나고 있으며 어디선가는 더는 개최되지 않는다. 영화 전문가들도 새로운 영화제의 존재를 제대로 파악하기 어렵다. 지난해까지 존재한 영화제의 사멸에 대해서도 금시초문인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한국의 영화제는 지역 축제로서 지자체를 홍보하는 가장 강력한 수단으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지역 축제를 개최하면, 으레 트로트 가수가 흥을 돋우고 전국 축제를 돌아다니는 21세기 보부상들이 먹거리를 책임진다. 대한민국의 영화제도 어디선가는 멋진 배우들이 레드 카펫을 밟으며 성대한 막을 올릴 것이다.
90년 전 시작된 새로운 형태의 축제는 이렇게 전 세계적으로 퍼져나갔다. 한편 우후죽순으로 태어난 영화제는 오히려 영화제에 많은 부작용을 낳기도 한다. 그래서 국제제작자협회(FIAPF)는 ‘구별 짓기’를 통해 영화제를 공인한다. 이는 국제원자력기구(IAEA)에서 핵보유국을 공인하는 것과 비슷하다. IAEA는 유엔(UN) 상임 이사국인 미국·영국·프랑스·중국·러시아만 공식적으로 핵 보유를 인정하고, 인도·파키스탄·이스라엘·북한의 핵 보유 사실은 인정하지 않는다. FIAPF 역시 관객 수, 연혁, 영향력 등을 고려해 ‘공인 영화제’라는 타이틀을 부여한다.
우리나라에서 개최되는 영화제는 수백 개에 달한다. 그중에서 ‘국제’라는 타이틀을 지닌 영화제는 10개가 넘는다. 그러나 FIAPF가 인정하는 영화제는 ‘부산국제영화제(BIFF)’가 유일하다. 지구촌에서 개최되는 수천 개의 영화제 가운데 FIAPF가 공인한 영화제는 43개에 불과하다. 그중 경쟁 영화제(Competitive Feature Film Festivals)는 칸·베니스·베를린을 위시해 14개, 부분 경쟁 방식을 도입한 영화제(Competitive Specialized Feature Film Festivals)는 22개다. 부산국제영화제도 부분 경쟁 영화제 가운데 ‘공인’된 몇 안 되는 영화제에 속한다. 공인된 영화제는 완전 비경쟁(Non-Competitive Feature Film Festivals) 중에선 2개, 다큐멘터리와 단편영화제(Documentary and Short film Festivals) 중에선 5개뿐이다. 물론 IAEA와 달리, FIAPF는 좀 더 탄력적으로 운영되기 때문에, 공인 영화제 리스트가 약간씩 변한다.
부산국제영화제의 명과 암
영화제가 공인받기 위해서는 규정을 잘 숙지해야 하고 심각한 외압으로 인해 영화제가 파행적으로 운영돼선 안 된다. 어쨌든 이 명부에서 빠지게 되면 그날로 명성이 추락하는 것은 한순간이기에, 영화제 관계자는 FIAPF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다. 그런데 대한민국에서 개최되는 수많은 영화제의 맏형이자 유일한 ‘공인’ 영화제로 당당히 이름을 올린 BIFF가 지금 허우적대고 있다.여기까지 볼 때, 어쩌면 나를 영화제 비판론자라고 생각할 것이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우리의 헌법 제1조 1항을 제외하고, 어떤 단어가 ‘공화국’ 앞에 붙으면 부정적 뉘앙스를 풍긴다. ‘입시 공화국’ ‘의대 공화국’ ‘로또 공화국’…. 여기에 ‘영화제’를 덧붙였으니 당연히 ‘영화제’를 부정적 시선으로 본다고 생각했으리라.
하지만 나는 결코 내 삶의 기반인 영화를, 그리고 이 영화들을 선보이는 창구인 영화제를 부정적으로 여기지 않는다. 단지 걱정할 뿐이다. 앞서 언급한 양산의 영화제만 봐도, 양산에서 촬영한 작품으로 꾸린 영화제, 양산의 자랑 통도사와 불교의 발상지 인도를 연결하는 영화제, 가로등 불빛이 가장 밝아서 여성이 안심하고 살 수 있는 도시를 만들겠다는 취지를 반영한 영화제, 행사 기획자들의 노력이 눈에 선하다. 나는 영화제를 만들려는 사람들의 고뇌와 노고를 폄훼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하지만 지속가능성이 없고 목적을 잃은 영화제는 우후죽순 밤새 생겼다가 사라지면서 인력 낭비, 예산 낭비 등 득보다 실이 많다. 시스템도 갖추지 못한 채 급조된 영화제에서 과연 양질의 작품을 관객에게 선보일 수 있겠는가.
영화제의 존재론을 고민하다가 맏형 부산국제영화제가 최근 겪는 사태에 이르렀다. KTX를 자주 타는 사람은 열차 안에 설치된 모니터를 통해 부산시 홍보 영상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부산 8경 중 하나로 소개되는 부산국제영화제는 ‘다이내믹 부산’이라는 도시브랜드를 일군 일등 공신이다. 1990년대 이후 주변 도시로 산업 시설이 빠져나가면서 동력을 상실한 항만도시 부산을 오늘날의 문화도시로 탈바꿈시킨 주역이 바로 부산국제영화제이며, 이로 인해 부산은 유네스코 창의도시로 선정됐다. 우리나라에서 개최되는 수많은 영화제 중에 애정 어린 줄임말로 불리는 영화제는 팬들의 충성도가 높은 서독제(서울독립영화제)와 부국제(부산국제영화제) 외엔 없다. 그런 부산국제영화제가 5월 허문영 집행위원장의 사퇴로 내홍에 휘말리고 있다.
1996년 9월 13일 부산의 구도심 남포동 일대에서 뱃고동을 울린 부산국제영화제는 이용관·김지석·오석근·전양준 등의 노고가 아니었으면, 그리고 전 영화진흥공사 사장 김동호가 초대 집행위원장을 맡지 않았으면 이 세상에서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여기서 부산국제영화제의 역사를 논하지는 않을 것이다. 대신 2년 후면 30주년을 맞을 중견 영화제, 대한민국영화제의 시초인 부산국제영화제가 새로운 시대에 슬기롭게 대처해야 한다는 말로 위기에 내몰린 이 영화제를 격려하고 싶을 뿐이다.
부산국제영화제 전성기를 이끈 김동호 전 집행위원장. [동아DB]
부산국제영화제뿐만 아니라 몇몇 영화제도 어느덧 출범 30년을 목전에 두고 있다. ‘한 세대’를 보낸 만큼 초창기 설립자들에겐 그들만의 노하우가 쌓였을 것이다. 우리나라 영화제의 ‘아버지’들이 ‘역사’를 시작할 때 40대였고, 지금 그들은 70대를 목전에 두고 있다. 아버지의 눈에 자식들이 아무리 불안해 보일지언정, 이제 자식 격인 후배들을 믿는 수밖에 없다. 내홍이 길어지면 팬들은 불안하다.
영화제 관계자들이 노심초사해야 할 사안은 ‘주도권 싸움’이 아닌 코로나 이후 격심해진 영화 생태계의 변화다. 넷플릭스를 위시한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 회사들이 제작한 작품을 대하는 칸과 베니스의 상반된 태도에 따른 결과는 아직 끝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새로운 플랫폼으로 무장한 변화의 바람은 영화가 아닌 영화관과 영화제를 위협한다는 사실이다. 문학, 무용, 연극, 음악(고전)이 클래식으로 ‘전락’한 원인은 당시 신흥 세력이던 영화 때문이었다. 언젠가는 홀로그램을 동원한 신기한 매체나 가상현실(VR) 혹은 게임에 주도권을 내주고 영화도 클래식이 되겠지만 그런 사태는 우리 시대에는 요원한 일이다. 아직 한 세기는 거뜬히 버틸 수 있는 영화가 새로운 플랫폼으로 옮겨가는 사태는 명약관화하다.
그렇다면 지금껏 목마른 관객에게 젖줄이 되던 영화제가 더는 과거의 영광과 기능에 만족해서는 안 된다. 영화제는 이 새로운 플랫폼과 서둘러 관계를 정립해야 한다. 영화산업이 무너지진 않겠지만, 영화제와 영화관은 분명 지금보다 축소될 것이다. 지금까지 영화제들은 언제나 “예년보다 더 많은 작품이 출품되고 더 많은 상영 횟수를 기록했다”는 말로 성과를 발표했다. 하지만 코로나 사태는 우리 일상에 큰 영향을 미쳤고, 그중 영화관은 가장 드라마틱한 변화를 겪었다. 이는 코로나19가 변화의 시간을 앞당겼을 뿐, 기술 발달로 인해 언제가 다가올 가까운 미래의 풍경이었다.
부산국제영화제는 2021년 제26회 때부터 OTT 작품을 ‘온 스크린’이라는 섹션으로 추가했다. 많은 부분을 고려해야 하겠지만, 대한민국 영화제의 맏형 부국제는 칸과 베니스라는 두 상반된 길에서 결국은 제 방향을 선택해야 할 것이다.
부산국제영화제는 지금 반년 가깝게 이어져온 내홍을 진화하기 위해 다각도로 노력하고 있다. 영화제를 이끌어온 두 축인 집행위원장과 이사장 간의 갈등으로 시작된 사태를 바라보는 영화인들의 시선은 ‘다이빙벨’로 촉발된 2014년 외홍을 바라보던 그때와는 사뭇 다르다. 당시에는 영화계가 모두 단결해 외압을 막아냈다. 그런데 지금은 두 패로 갈려 이전투구를 하고 있다. 이 문제의 핵심은 “영화제의 아버지들을 어찌해야 합니까?”라는 한마디로 응축된다. 나의 답은 간단하다.
척박한 토양에서 한 세대를 끌어오신 노고는 잊지 않겠습니다. 40대였던 그때의 아버지들이 30년 전 그러했듯 지금의 40대도 다음 한 세대를 잘 이끌 것입니다. 불안하시겠지만 지켜봐 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자식도 아버지들 못지않게 영화를 사랑한답니다.
* ‘김채희의 시네마 오디세이’는 중화권 영화 이야기와 문화계 현안을 번갈아가며 소개합니다.
김채희
● 1990년 출생
● 부산대 예술문화영상학과 졸업
● 부산대 대학원 박사
● 201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영화평론 등단
● 現 부산대 영화연구소 연구원 및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