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사검사와 피의자’ 악연에서 화해로
한쪽은 다급, 한쪽은 명예 회복 갈구
이준석 신당에 균열하는 보수 결집
“尹, 박정희 전 대통령 이미지 차용”
텃밭 다지다 자칫 중도층 이탈할라
윤석열 대통령이 11월 7일 대구 달성군 박근혜 전 대통령의 사저를 방문해 박 전 대통령과 산책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대통령실]
윤 대통령은 서울 강서구청장 보궐선거 참패 이후 위기 탈출을 위해 박 전 대통령에게 손을 내밀었다. 지지율 하락에 보수 텃밭인 대구·경북(TK)에서마저 비상등이 켜졌기 때문이다. 수도권 공략은 고사하고 전통 지지층마저 흔들리는 최악의 위기 상황이었다. 2021년 12월 특별사면 이후 사저에 칩거하면서 정중동 행보를 이어온 박 전 대통령도 흔쾌히 손을 맞잡았다. 국정농단과 탄핵 사태의 여파로 만신창이가 됐지만 무엇보다 정치적 명예 회복이 절실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효과다. 전·현직 대통령의 전략적 연대는 윈-윈 효과 아니면 역풍이다. 전망은 엇갈린다. 표면적으로 보이는 그림은 나쁘지 않다는 게 대체적 평가다. 여권에서는 수도권 민심 이반에 따른 불투명한 총선 전망이 나온다. 이에 더해 이준석 전 대표 주도의 신당 창당 현실화에 따른 보수 분열 가능성도 커지고 있다. 지지율 회복이 시급한 윤 대통령과 정치적 영향력 복원이 필요한 박 전 대통령의 이해관계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 셈이다.
반론도 적잖다. 총선을 겨냥한 보수 결집용이라는 일반적 해석과 달리 오히려 역효과가 우려된다는 것이다. 윤 대통령의 지지율 하락 및 정체는 보수의 이탈이 아닌 수도권 중도층의 이탈이라는 점을 더욱 세심하게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내년 4월 22대 총선을 앞두고 여야의 정치 지형이 급변하는 가운데 오랜 악연을 끊어낸 윤 대통령과 박 전 대통령의 전략적 연대의 이면을 파헤쳤다.
악연 끊고 보수 지지층 결집 기지개
10월 27일자 국내 주요 일간지 1면에 윤석열 대통령과 박근혜 전 대통령의 사진이 실렸다. 두 사람이 전날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열린 박정희 전 대통령 서거 제44주기 추도식에서 악수하고 나란히 걷는 모습이었다. 윤 대통령은 사우디아라비아·카타르 국빈방문을 마치고 10월 26일 새벽 귀국한 이후 곧바로 추도식을 찾으면서 박 전 대통령과 자연스럽게 조우했다.과거 악연을 돌이켜 볼 때 꽤나 인상적인 장면이다. “정치에는 영원한 동지도, 적도 없다”는 속설 그대로다. 국정원 댓글사건 수사 과정에서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넜고, 국정농단 게이트 당시에는 특검 수사팀장과 피의자의 관계였다. 그런 두 사람이 극적으로 손을 잡았다. 윤 대통령은 과거 악연에 대해 “공직자로서 직분에 의한 일이었다 하더라도 정치적·정서적으로 대단히 미안한 마음을 인간적으로 갖고 있다. 굉장히 죄송하다”며 관계 회복에 공을 들여왔다. 이런 점에서 이번 추도식 참석은 그야말로 화룡점정이었다.
더구나 현직 대통령의 박정희 전 대통령 추도식 참석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왜일까. 이유는 간단했다. 윤 대통령의 사정이 너무 다급했다. 10월 중순 서울 강서구청장 보궐선거 참패 이후 불투명한 내년 총선 전망 속에서 보수 분열의 소용돌이까지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윤 대통령은 추도사에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윤 대통령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하면 된다’는 기치로 국민을 하나로 모아 한강의 기적이라는 세계사적 위업을 이루어냈다”며 “취임 후 전 세계 92개국 정상을 만나 경제협력을 논의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이룬 압축성장을 모두 부러워하고, 위대한 지도자 결단에 경의를 표했다”고 밝혔다. 박근혜 전 대통령도 “지금 우리 앞에 여러 어려움이 놓여 있다고 한다. 하지만 저는 우리 정부와 국민께서 잘 극복해 나갈 것으로 믿는다”고 화답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윤 대통령은 11월 7일 박 전 대통령의 대구 사저를 찾았다. 이준석 전 대표가 주도하는 TK신당 견제용이라는 해석까지 나올 정도였다. 윤 대통령은 “박정희 대통령 시절 당시 국정 운영을 되돌아보면서 배울 점은 지금 국정에도 반영하고 있다”면서 “온고지신이라고 과거의 경험을 배워야 한다”고 밝혔다. 특히 대구 사저 현관 진열대에 놓인 추도식 사진을 보며 “누가 (우리 두 사람이) 누나와 남동생 같다고 얘기하더라”고 농을 건넬 정도로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홍형식 한길리서치 소장은 이와 관련, “양쪽이 그만큼 절박하다”며 “윤 대통령은 피가 마르고 있다. 친윤 차원의 독자적 총선 승리가 어렵기 때문이다. 박 전 대통령 역시 정치적 명예 회복이 절실하다. 또 가장 어려울 때 의리를 지킨, 언론에 노출되지 않은 측근들도 챙겨야 했다”고 분석했다. 신율 명지대 정외과 교수는 윤 대통령과 박 전 대통령의 연대와 관련, “이준석 신당론으로 흔들리는 보수층을 결집하고 단속하는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다급한 尹 “텃밭 붕괴 막아라”
윤 대통령은 다급하다. 내년 총선을 앞두고 텃밭인 TK마저 이상기류가 흘러나오고 있다. 외연 확대도 쉽지 않은 가운데 보수마저 흔들리면 내년 총선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 차재원 부산가톨릭대 특임교수는 “보수의 뿌리는 이승만·박정희 전 대통령이다. 윤 대통령은 보수 핵심 지지층에 대한 호소가 필수적인 상황”이라면서 “박 전 대통령과의 연대보다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이미지를 차용한 것이다. ‘박정희 신화’를 끌어안으면서 확실히 보수라는 점을 지지층에 각인하기 위한 것”이라고 분석했다.지표는 암울하다. 윤 대통령의 지지율은 여전히 30%대 초중반 박스권이다. 10월 11일 서울 강서구청장 보궐선거 참패 전후로 지지율 변화는 드라마틱하다. 더 심각한 것은 과반에 못 미치는 텃밭 TK 지지율이다. 한국갤럽의 10월 2주 정기조사(표본오차 95% 신뢰수준에 ±3.1%포인트,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 홈페이지 참조)에서 긍정 58% vs 부정 34% → 10월 3주 정기조사 45% vs 48% → 10월 4주 정기조사 긍정 49% vs 부정 43% → 11월 1주 정기조사 48% vs 41%.
전국 지지율 추이도 마찬가지다. 선거 패배 이후 국정 기조를 이념에서 민생으로 전환하고 이슈몰이에도 성공하면서 지지율이 소폭 반등했지만, 10월 3주 정기조사에서 30% 턱걸이를 기록했다. 이는 민주당이 대승을 거둔 21대 총선 직전 문재인 전 대통령의 지지율(한국갤럽 2020년 4월 3주 정기조사, 긍정 평가는 59%, 부정 평가는 33%)이 60%에 육박했던 것과 대비된다. 21대 총선을 6개월 앞둔 2019년 10월 3주 정기조사 당시 문 전 대통령은 ‘조국 사태’로 최악의 위기에 내몰렸지만 지지율은 39%였다. 같은 기간 호남 지지율은 67%에 이르렀다.
윤 대통령 처지에서 내년 총선은 ‘대선 연장전’이다. 20대 대선에서 0.73%포인트 차이의 신승 이후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까지 이겼지만 취임 이후 권력 기반은 불안하기만 했다. △이준석 전 대표와 유승민 전 의원으로 상징되는 비윤의 반발과 신당 창당 움직임 △절대 과반 의석을 보유한 민주당의 초강력 반대 △정치 초보 대통령으로서의 크고 작은 시행착오 △ 이태원 참사, 오송 지하차도 참사 논란 등등. 내년 총선 수도권 민심의 가늠자였던 서울 강서구청장 보궐선거에서도 대패했다. 대통령 지지율이 35% 미만이면 선거 승리가 어렵다는 정치권의 속설이 맞아떨어진 것이다.
총선 패배는 상상조차하기 싫은 악몽이다. 여소야대를 극복하지 못하면 임기 중후반도 야당에 끌려다닐 수밖에 없다. 윤 대통령으로서는 임기 종료 때까지 손발이 묶이는 셈이다. 한마디로 식물 정권이다. 윤 대통령은 임기 초반 민주당의 거센 견제에 시달렸다. △박진 외교부 장관 해임건의안 통과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 탄핵소추안 통과 △한덕수 국무총리 해임건의안 위협 △이균용 대법원장 후보자 국회 인준안 부결까지. 최근에도 한동훈 법무부 장관과 이동관 방송통신위원장에 대한 민주당의 탄핵 위협이 지속되고 있다. 여소야대 극복 없이는 유사 사례가 반복될 수밖에 없다.
야권의 반발만이 아니다. 총선에서 지면 여권의 권력 지형도 급변한다. 윤 대통령의 리더십이 흔들리면서 권력 공백이 발생할 경우 차기 대권 레이스가 조기에 점화할 수 있다. 현재 권력인 대통령과 미래 권력인 차기 주자의 함수관계는 반비례에 가깝다. 유력 차기 주자가 집중 조명을 받으면 대통령의 레임덕이 불가피하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사례가 상징적이다. 노 전 대통령은 17대 총선 과반 승리에도 불구하고 2006년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대참패 이후 남은 임기 내내 극심한 레임덕에 시달렸다. 차기 대권 경쟁의 가시화로 식물 대통령으로 전락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 역시 임기 중반 치러진 2016년 20대 총선 패배로 몰락했다. 총선 전만 하더라도 야권의 유력 차기 주자인 문재인 vs 안철수의 분열로 ‘새누리당 180석 대망론’이 퍼질 만큼 상황이 좋았다. 정작 ‘진박 감별’ 논란과 옥쇄 파동으로 불린 공천 내홍으로 제1당의 자리를 민주당에 내줬다. 이후 국정농단·탄핵사태로 불명예 퇴진했다.
탄핵 불명예 朴, 무엇을 노리나
2020년 3월 4일 서울 여의도 국회 정론관에서 유영하 변호사가 당시 수감 중인 박근혜 전 대통령의 옥중 서신을 공개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박 전 대통령은 21대 총선을 앞두고 보수 진영의 대단결을 호소하는 옥중편지를 공개했지만 결과는 썩 만족스럽지 못했다. 박 전 대통령의 호소는 먹혀들지 않았다. 보수 진영은 민주당에 180석을 헌납하며 자멸했다. 지난해 대선 이후 치러진 지방선거를 앞두고 박 전 대통령은 “흔들림 없이 묵묵히 저의 곁에서 힘든 시간을 함께 참아냈다”며 대구시장 후보로 나선 유영하 변호사에 대한 공개 지지를 호소했지만 실패했다.
물론 반대 시각도 있다. 퇴임 이후 김대중 전 대통령의 호남 영향력처럼 박근혜 전 대통령 또한 영남, 특히 TK 지역에서는 영향력이 여전하다는 것이다. 실제 박 전 대통령은 전직 대통령으로서 조심스럽게 보폭을 늘려왔다. 문재인 정부 임기 말인 2021년 12월 특별사면 이후 대구 사저에서 건강 회복에 주력했지만 올해 들어서는 공개 행보도 적극적이었다. 구미 생가 방문, 팔공산 동화사 방문, 추석 전통시장 방문 등 하나같이 TK 지역이라는 게 의미심장하다.
특히 ‘중앙일보’에 연재 중인 회고록은 박 전 대통령의 정치적 명예 회복을 위한 사전 정지 작업이라는 해석마저 나왔다. 재임 시절 가장 민감했던 현안에 대한 솔직한 회고는 정가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박 전 대통령은 특히 박근혜 정부 실패론과 관련, “제가 임기를 마치지 못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실패한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받아들인다”면서도 △통합진보당 해산 △공무원 연금개혁 △개성공단 폐쇄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 등을 거론하면서 정책 성과를 강조했다.
또 하나 눈여겨볼 대목은 친박 정치인의 부활 여부다. 국정농단과 탄핵사태를 거치면서 친박계는 정치적으로 몰락했다.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친이계 의원들의 전성시대가 열린 것과는 대비된다. 물론 박 전 대통령은 “정치적으로 친박은 없다”고 언급해 왔지만 내년 총선 현실은 다르게 흘러가고 있다. 최경환 전 경제부총리(경북 경산), 우병우 전 대통령민정수석비서관(경북 영주), 유영하 변호사(대구)의 총선 출마가 유력하다.
박 전 대통령은 이와 관련, “저와 연관된 것이란 얘기는 하지 않았으면 한다. 과거 인연은 과거 인연으로 지나갔으면 좋겠다”고 선을 그었지만 여의도 정치권은 액면 그대로 해석하지 않고 있다. 최진 대통령리더십연구원장은 “박 전 대통령은 누구보다 권력의 생리를 잘 아는 사람이다. 윤 대통령 역시 TK가 필요하다”며 “구원(舊怨)을 생각하기에는 현재와 미래의 중요성이 더 크다”고 설명했다.
‘적과의 동침’ 연상케 하는 전략적 연대
윤석열 대통령과 박근혜 전 대통령이 10월 26일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 박정희 전 대통령 묘역에서 박 전 대통령 서거 제44주기 추도식 후 묘소 참배를 마치고 함께 걸으며 대화하고 있다. [대통령실]
문제는 총선에 미칠 파장이다. 윤 대통령과 박 전 대통령의 회동에 대한 의심 어린 시선도 상당하다. 윤 대통령의 지지율 정체가 보수 분열 때문만은 아니라는 지적이다. 일각에서는 박 전 대통령과의 관계 강화가 역으로 중도층 외연 확대의 걸림돌이 될지도 모른다는 전망도 있다. 이는 내년 총선의 최대 승부처가 수도권이라는 점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게다가 이준석 전 대표 주도의 신당 창당 움직임도 뇌관이다. 차재원 부산가톨릭대 특임교수는 “윤 대통령이 만나야 할 사람은 이준석 전 대표와 유승민 전 의원”이라면서 “내년 총선에서 이준석 신당이 뜬다면 성공 여부는 확언할 수 없지만 국민의힘이 불리해지는 건 어쩔 수 없다”고 지적했다. 물론 일각에서는 지난 대선과 마찬가지로 윤 대통령과 이 전 대표의 극적 화해가 가능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홍형식 소장은 이와 관련, “‘환자는 서울에 있다’는 이 전 대표의 워딩을 볼 때 윤 대통령이 손을 내밀기도 어렵고, 이 전 대표가 그 손을 잡을 리도 없다”면서도 “다만 신당 창당은 말처럼 쉽지 않다. 영리한 이 전 대표가 총선 이후 당의 주도권을 노릴 수 있다”고 예상했다.
전문가들의 전망도 엇갈린다. 보수 결집 효과를 꾀할 수 있으나 외연 확장에는 장애가 될 것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신율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박근혜 전 대통령은 현실 정치의 영향력은 상실했지만 박정희 전 대통령의 맏딸이라는 점과 마지막 지역 맹주로서의 상징성을 유지하고 있다”며 “현직 윤 대통령의 영향력과 전직 박 전 대통령의 상징성이 결합하면 어느 정도 시너지 효과를 낼 것”이라고 진단했다. 반면 최진 대통령리더십연구원장은 “윤 대통령의 전략은 보수 끌어안기다. 효과가 없다고 할 수 없지만 제한적”이라며 “TK에서 효과가 클수록 수도권이 떨어져 나갈 수 있다. 내년 총선의 핵심 포인트는 중도층의 움직임이다. 인사 혁신이나 민생 정책에서 나타날 성과가 더 위협적일 것”이라고 조언했다.
[신동아 12월호 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