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찰 꽉 쥐었다는 건 비공식적 표현일 것” 서열 파괴 인사 아니다
- 이적표현물 소지 처벌 말아야 여성이라서 검찰 중립화에 도움될 것
- 감찰 기능 법무부로 이관 검토
- 사생활 검증은 감수, 그러나 위장이혼 절대 아니다
법무부 장관은 검찰총장과 동기이거나 그보다 선배를 임명하는 관행이 오랫동안 지속됐다. 법원·검찰은 연공서열이 중시되는 보수적인 집단이다. 막강 검찰을 산하에 거느린 법무부 장관 자리에 46세 여성 변호사가 임명되자 법조계는 강한 충격을 받은 모습이다.
검사장은 흔히 군대의 장성에 비유된다. 강장관의 동기인 사법시험 23회 출신 검사들은 현재 검찰에서 지검 부장검사급이다. 군대 계급구조에 비유하면 중령쯤 된다고 할까. 신정치(申正治) 서울고등법원장이 “여군 중령을 참모총장시킨 거예요”라고 사석에서 던진 농담을 그대로 전해주었더니 강장관은 크게 웃었다.
검사 경험이 없는 판사출신 장관이지만 강장관이 살아온 이력을 살펴보면 그렇게 녹록하지 않다. 첫 여성 형사단독판사, 첫 여성 로펌대표,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의 첫 여성 부회장 등 남성 위주로 운영돼온 조직을 뚫고들어가 ‘첫’ 자를 상용하다가 건국 이후 첫 여성 법무부장관에 올랐으니 그 절정에 다다른 느낌이다.
말은 조용조용히 하지만 어조와 표정에서 강단(剛斷)과 결기가 드러난다. 인물탐구를 하는 의미에서 타임머신을 타고 1980년대 전두환 독재정권 치하의 어려웠던 시절로 돌아가보자.
1984년 서울대학교에서 학생 세 명이 시위를 하다가 경찰에 붙들려 즉결심판에 회부됐다. 그런데 놀랍게도 다음날 그 세 명이 학교에 말짱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당시 복학생이었던 유시민씨(개혁국민정당 전 대표)의 홈페이지(www.usimin.net)에 올라 있는 글을 그대로 옮겨본다.
선배 : 어떻게 나왔나.
후배 : 훈방됐어요. 새벽에 즉심판사가 와서 돌 던졌냐고 묻기에 안 던졌다고 했죠. 서류를 보더니 증거가 없으니 나가라고 하더군요.
선배 : 그 판사 이름이 뭐였냐.
후배 : 기억이 안 나요. 그런데 여자예요.
선배 : 혹시 생머리 길게 하고 예쁜 여자 아니었냐.
후배 : 맞아요.
선배 : 성이 강씨 아니더냐.
후배 : 맞아요. 강씨.
선배 : 강금실이지.
후배 : 맞아요 강금실.
선배 : 너네 운수 대통한 줄 알아라.
즉심에 넘어가 구류를 기다리던 서울대생 세 명은 운수가 대통해 ‘울랄랄라∼’를 했지만 1년차 초임판사는 법원에 돌아오자마자 호된 시련을 겪었다. 즉결 법정에 나와 있던 보안사와 안기부 직원들이 직방으로 보고해 법원이 발칵 뒤집혔던 것. 강판사는 얼마 안있다가 시국사건이 없는 가정법원으로 전출돼 이혼 사건 재판을 전담하게 된다.
노무현 대통령은 강장관을 ‘철의 여인’이라고 추켜세운 적이 있다. ‘철의 여인’은 영국 언론이 마거릿 대처 전 총리에게 붙여준 별명이다. 대통령의 말 속에는 검찰 조직을 향해 40대 중반의 여성 장관이라고 간단하게 보지말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강장관은 철의 여인답게 일부 검사들의 반란을 잠재우고 과감한 발탁과 좌천으로 특징되는 인사를 마무리짓는 데 성공했다. 물론 노대통령이 직접 나서 엄호사격을 한 것이 결정적인 도움이 됐지만.
강장관의 인사안에 반발하는 검사들의 항명사태는 수면 아래로 일단 잠복했으나 ‘총탄을 맞고 물러나는’ 검찰 간부들은 퇴임의 변에서 ‘기수(期數)를 파괴한 밀실인사’ ‘불공정하고 불투명한 인선’이라고 비판했다. 법무부 검찰국장에서 서울고검 차장으로 좌천되자 퇴임한 장윤석(張倫碩) 검사장은 “후배들이 나의 전사(戰死)를 용퇴로 오해하지 말기 바란다”며 분루를 삼켰다.
―어떤 기준과 원칙에 의해 발탁을 하고 좌천을 시켰습니까.
“나는 서열파괴 인사라는 평가에 동의 안 하거든요. 송광수(宋光洙) 검찰총장 내정자가 사시 13회이고 바로 아래 사시 14회 중에서 신망이 두터운 김종빈(金鍾彬) 대검차장을 발탁했습니다. 15, 16회까지 고검장으로 승진시킨 인사가 큰 무리는 아니었다고 봅니다. 그래도 검찰에 있는 사람들은 이전에 비하면 파격적이라고 말하더군요.
노대통령이 검찰인사에 앞서 ‘개혁 추진’이라는 대원칙을 내려주었습니다. 이에 따라 개혁성을 고려하면서도 가능하면 검찰 내부의 조직 안정을 위해 서열을 존중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승진에서 누락되거나 좌천된 검사장이 많았던 것은 어쨌거나 지금 검찰이 국민으로부터 신뢰를 잃었기 때문입니다. 여러 게이트가 검찰의 신뢰를 결정적으로 손상시켰습니다. 이번 인사를 통해 지휘 감독하는 입장에 있었던 지도부를 문책하는 의미가 있었습니다.
인맥보다는 성실한 수사능력과 업무수행 태도에 의해 평가받는 인사기준을 만들려고 합니다. 이번에도 그러한 노력을 했지만 충분했다고 할 수는 없겠지요. 지난 정부에서 수사와 관련돼 다소 정당하지 않은 인사에 의해 좌천됐던 사람들을 복귀시켰습니다. 이런 인사 원칙을 지켜나갈 생각입니다.”
부장검사 인사 때 위원회 열 것
―노대통령과의 토론에서 평검사들이 ‘밀실인사’라는 주장을 하자 강장관이 수십명에게 자문을 했다고 답변하더군요. 자문한 사람들이 누구인지 밝힐 수 있습니까.
“나는 취임하자마자 지체돼 있던 검사장급 인사를 해야 했습니다. 법무부 장관이 검사장급 인사를 직접 하던 종전 방식대로 인사를 하겠다고 천명했습니다. 김각영(金珏泳) 전 검찰총장과 인선에 관해 의논하는 과정에서 일부 승진 대상 내정자가 알려지자 검사들이 밀실인사라고 들고 일어섰습니다.
대검차장 등 승진 대상자를 정하는 데 내 의견이 충분히 반영됐던 것은 사실이죠. 그러나 그것을 밀실 인사라고 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습니다. 이전에도 인사위원회가 있었지만 검사장급 인사 때는 위원회를 열지 않았습니다. 인사위원회의 구성원들이 대부분 검사장이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검사장급 인사에서 인사위원회를 거치지 않았다는 발언은 적절한 지적이 아닙니다. 부장검사 인사에서는 인사위원회를 열 생각입니다.
검사들을 가장 잘 아는 것은 검사들이므로 내부 의견을 존종해 인사를 하겠습니다. 검사장급 인선을 하면서 많은 분들을 만났지만 지금 그 내용을 공표하기는 어렵습니다.”
―노대통령이 강장관을 파격적으로 임명한 이유를 설명하면서 “법무부를 검찰청에서 독립시키려고 한다. 지금까지는 검찰이 법무부를 장악해 검찰 소속의 법무부였다” 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합니까. 노대통령으로부터 이에 관해 구체적인 설명을 들은 일이 있는가요.
“법무부의 인사 라인을 통해 바깥에서 간섭이 있었다고 많은 분들이 지적하고 있습니다. 법무부 장관이 검찰 인사에서 외부의 부당한 영향력을 차단하라는 뜻입니다. 검사들이 소신껏 수사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겠다는 뜻입니다.
노대통령의 말은 수사의 독립을 보장하겠다는 의미이지 검찰청을 법무부에서 떼어 독립시키겠다는 뜻은 아닙니다. 개혁은 과거에 가던 방향이 잘못됐으니 반대 방향으로 가자는 것이 아닙니다. 법에 보장된 제도를 되살려놓자는 뜻입니다. 과거에 정치권의 외압이 있었으므로 정치권을 완전히 배제하자는 것도 아닙니다.
법무부와 검찰청의 관계, 대통령의 인사권 등은 모두 법에 정해져 있으니 이제 법대로 한번 해보자는 취지입니다. 소속기관인 검찰청의 검사들이 상급기관인 법무부에 들어와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잘못된 관행입니다. 법무부와 검찰의 구성은 상급기관과 하급기관으로 분리돼야 합니다. 법무부는 그 대신 검찰청법에 의해 검사들이 공익의 대표자로서 소신껏 수사할 수 있도록 보장해줘야 합니다. 검찰 인사도 법무부 장관이 제청하고 대통령이 임명하되 검찰 내부의 의견을 존중해야 합니다.”
제도대로 검찰인사를 하자고 강조한 강금실 법무장관.왼쪽은 황호택 논설위원장관
현재 인사위원회는 두 명의 외부 인사를 빼면 전부 검사장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인사 기준에 대해서만 의견을 말하는 정도였지 실질적인 기능을 못했습니다. 인사위원회의 심의기구화에 대해서는 검찰 내외부의 의견이 일치된 상황입니다. 검사의 직급에 따라 인사위원회가 두세 개 정도 필요합니다.
인사위원회에 앞서 기본 데이터를 제대로 작성하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공정한 평가자료가 갖춰져야 공정한 인사가 가능합니다. 인사위원회의 전 단계로 검찰총장은 물론 검사들의 의견을 수렴해야 합니다. 본인의 희망과 주변의 평가가 반영되는 제도를 만들어야 합니다.
근본적으로 검찰 인사는 검사들이 짤 수밖에 없어요. 외부 인사가 참여하더라도 검찰 내부 인사에 누구를 어디로 보내야 한다는 말을 하기는 어렵잖아요. 인사위원회는 인사안에 대해 어떤 원칙을 제시하거나, 이 인사는 곤란하지 않느냐는 식의 검증을 하는 기구가 돼야 합니다. 법무부 중심으로 검찰 내부 여론을 수렴해 만들 것이기 때문에 인사위원회가 어떤 모양이 될 지에 대해 지금으로서는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TV 토론에서 평검사들은 현재 법무부장관이 갖고 있는 인사제청권을 검찰총장에게 넘겨달라고 요구하더군요.
“검사들의 뜻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과거의 부정적인 현상을 고치기 위해 반대로 가자는 것이지요. 장관 라인을 통해 인사가 잘못됐다는 믿음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인사제청권을 총장에게 넘기라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법무부가 감독기관으로서 인사제청권을 행사하지 않으면 무슨 수단으로 감독할 수 있을까요. 정부조직법과 검찰청법에 법무부 장관이 수사의 최고 지휘 감독자로서 책임을 지게 돼 있어요. 검찰에서 수사를 못하면 최종 책임은 장관인 내가 지는 겁니다.
장관 보고 인사권 행사를 하지 말라는 주장은 합리적이지 않습니다. 세계적으로 검찰 스스로 인사권을 갖고 있는 나라는 없어요. 미국은 선거를 통해 검사를 임명하고요. 프랑스는 법원에, 독일 일본은 법무부에 인사권이 있거든요.”
―과거 독재정권은 물론이고 문민정부와 국민의 정부도 인사를 통해 검찰을 장악했습니다. 참여정부의 인적 청산이라는 것도 본질적으로 역대 정권의 검찰 장악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아닐까요.
“노대통령은 여러 차례 절대로 검찰을 이용하지 않겠다고 천명했습니다. 국민에 대한 약속입니다. 나는 노대통령이 반드시 이 약속을 지킬 것이라고 믿습니다. 법무부가 하려는 인사 개혁은 법무부를 통한 사건 개입을 차단하려는 노력입니다. 검찰총장이 인사권을 갖게 되면 오히려 권력의 개입이 더 쉬워질 수 있죠. 대통령이 검찰총장을 임명하거든요. 거기에 대한 보완장치가 없습니다. 법무부가 공정하게 인사권을 행사하고 총장이 수사를 책임지는 제도가 좋다고 생각합니다.
공정한 평가 자료를 만들어 의견을 수렴하고 외부 인사들이 참여하는 인사위원회를 만들면 사실상 장관의 인사권은 없는 거나 다름없습니다. 심의기구에서 지적한 인사에 대해 장관이 마음대로 하기는 매우 어렵죠. 엄청난 반발을 살테니까. 장관도 아니고 총장도 아니고 제도로 가자는 것이 인사위원회입니다. 그렇게 되면 누구도 간섭하기가 어려워지죠.”
강장관은 사법부의 남성 판사들도 주저하는 일에 앞장선 일화가 많다. 모두에서 즉결심판 일화를 소개했지만 1991년 서울지법 북부지원에 있을 때 데모 학생의 영장을 기각해버렸다. 그러자 검찰은 새로운 혐의를 추가해 같은 법원의 다른 판사로부터 영장을 발부받았다.
“나는 판사로 있을 때 특별히 시국사건을 많이 맡지는 않았어요. 1983년 남부지원에서 6개월 당직판사를 했고 북부지원에서는 영장 담당을 하다가 한두 번 그런 일이 있었지요. 주요 사건 재판을 맡았던 적은 없습니다.
전두환 정부 시절에는 학생데모가 아주 많았지요. 화염병 시위는 일반화된 현상이었습니다. 판사들 사이에 양형(量刑) 기준을 놓고 고민이 많았죠. 시위에서 돌을 던져도 얼마나 던졌냐, 앞에 있었냐 뒤에 있었냐, 단순 가담이냐, 이런 것을 판단해서 양형을 했습니다. 화염병 투척은 나쁘지만 몇 백명, 몇 천명이 화염병을 던지니까 모조리 구속시킬 수도 없었지요. 그러니 지휘부냐, 화염병을 몇 개나 던졌냐, 사람이 다쳤냐, 이런 정황을 고려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일부러 풀어주거나 무조건 풀어준 것은 아닙니다.”
―가정법원으로 쫓겨간 이야기가 흥미진진할 것 같아요.
“그때는 멋 모르고 한 일입니다. 구류를 꼭 살려야 한다는 지침이 있는 것도 잘 몰랐죠. 원래 당시에 초임들이 사고를 잘 쳤어요. (웃음)
장관이 돼 인터뷰를 하면서 이런 이야기까지 해야 할지 모르지만 사법부에 부끄러운 역사가 있었습니다. 즉결 재판소에서 서울대 학생 세 명을 풀어주고 돌아오는 사이에 안기부·보안사 쪽에서 법원에 벌써 연락을 했더군요. 서울지방법원장이 남부지원장에게 ‘왜 풀어줬는지 알아보라’는 지시를 내려보냈습니다. 대법원에서도 조사를 나왔어요.
공안부 검사들이 우루루 법원에 몰려와 항의했습니다. 당장 장흥지원으로 좌천시키라는 말까지 나왔던 것으로 압니다. 남부지원장이 초임 여성판사라고 감싸 가정법원으로 보내줬습니다. 가정법원 발령날 때까지 6개월 동안 내가 즉결을 못 맡게끔 제도를 바꾸었어요.
그 일 이후 법원장이 판사들에게 데모 학생은 최소한 구류 10일 이상 살게 하라고 공개적으로 요구했습니다. 부끄러운 시대였습니다. 지금은 상상도 못 할 일이지만….”
5공화국의 사법부에서는 시국사건의 경우 각 법원의 형사 수석부장판사들이 검찰·안기부와 협의해 형량을 정해 판사들에게 통보했다. 이른바 ‘정찰제 판결’이었다. 학생들이 법정에서 ‘꼭두각시 판사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치는 법정소란이 그치지 않았다. 암울한 시대의 법정 풍경이었다.
강장관은 인터뷰를 하면서 “서울가정법원 판사로 있을 때 김용준(金容俊) 가정법원장(나중에 헌법재판소장을 지냄) 방에서 황위원과 처음 인사를 나눈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필자는 잊고 있었는데 비상한 기억력이다. 무척 바쁜 시기에 인터뷰에 응해준 강장관의 세심한 마음씨가 고맙다. 옛날 판사 시절에 법원장 방에서 스친 인연이 인터뷰를 성사시켰는지도 모르겠다.
강장관은 1993년 김영삼 정부 때 서울민사지법 단독판사 40여 명과 함께 평판사회의를 만들어 당시 김덕주(金德柱) 대법원장에게 사법개혁에 관한 건의서를 올렸다.
“법원에서 단독판사들도 뭔가 법원 개혁 문제에 대해 의견을 모아보라는 말이 있었죠. 평판사들은 어쨌거나 과거 사법부가 잘못한 것이 있다면 반성하고 용서를 빌자는 취지의 건의서를 만들었습니다. 사법시험 23기들이 대거 참여해 평판사회의체로 나가니까 법원에서 우려를 했죠.”
검찰은 스스로 독립하라
―노대통령과 평검사 토론회가 국민적인 화제가 됐는데요, 텔레비전으로 보니까 강장관이 텔러제닉(telegenic)하더군요. 우리말로 옮기자면 텔레비전발이 잘 받는다고 할까요.(웃음) 노대통령은 역시 토론 경험이 풍부한 토론의 달인이더군요. 그러나 일각에서는 대통령이 주요 사안마다 이번처럼 현장에 나와 토론을 해서는 곤란하지 않느냐는 의견이 있습니다. 주요 사안마다 대통령과 담판하려 하면 장관은 허수아비가 되지 않겠습니까.
“대통령이 인사권을 갖고 있는 공무원은 모든 부처에 다 있습니다. 인사권자로서 검사들을 직접 만나 토론하는 것은 검찰에 대한 또 다른 특혜라는 시각이 있었습니다. 법무부장관으로서 그런 우려를 하면서도 검찰과 법무부의 개혁이 국민적 관심사이기 때문에 특별하게 이루어진 조치였습니다.
대통령이 현장에 나타나는 모든 문제를 토론을 통해 풀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나라의 중대사이고 상당한 의견차가 나타나는 상황이어서 특별한 방법으로 접근한 것이죠. 그 점에 관해서는 양해해달라는 부탁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평검사와의 토론에서 노대통령이 “나도 검사들에 의해 기소돼 재판을 받았고 언론인들도 검사들 손에 의해 기소돼 감옥에 가며 싸워 언론 자유를 쟁취했다. 그러한 과거가 오늘을 잉태했다”는 요지의 말을 해 미묘한 뉘앙스를 풍기더군요.
“검찰의 독립은 스스로 지켜야 한다는 원칙을 말한 것이라고 해석됩니다. 예컨대 어떤 사람이 어떤 자리에 있는데 누가 와서 막 밀어낸단 말이에요. 그러면 ‘너 왜 나 밀어내냐’고 하기 전에 내 자리를 지켰어야 된다는 의미겠지요. 자꾸 정치적 외압에 의해 검찰권이 왜곡됐다는 데 초점이 맞춰지다 보니까 반대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아요. 노대통령께서는 검사들도 외압을 물리치지 못한 데 대해서는 반성해야 한다는 취지로 말했을 것 입니다.”
노대통령은 비서실에서 써준 원고나 ‘말씀자료’를 읽는 대신에 즉흥적인 현장연설을 좋아한다. 감성에 호소하는 현장 화법에 능하고 다변에다 원고를 보지 않고 말하니 활자로 대치해 놓으면 꼬투리 잡힐 일이 자주 생긴다.
검찰의 정치적 중립이 자리잡기 위해서는 권력의 핵심부가 검찰을 놓아줘야 한다. 그러나 노대통령은 한나라당 간부들과 오찬 자리에서 “이번에 검찰을 꽉 쥐었다”고 말했다.
―검찰을 꽉 쥐었다는 말을 놓고 볼 때 인사를 통해 검찰을 장악한 것을 시인했다고 봐야겠지요.
“꽉 쥐었다는 표현은 비공식인 표현이었을 것입니다. 노대통령은 취임 전부터 국민이 원하는 검찰 개혁을 완수하려는 뜻을 갖고 있었습니다. 선거를 통해 그러한 권한을 위임받았습니다. 노대통령이 나를 법무부장관으로 보낸 것은 검찰을 개혁하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검찰을 정치적으로 좌우하려는 것이 아니라 검찰을 개혁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표현입니다. 장악 운운의 지적은 적절치 않다고 봅니다.
내가 장관으로 올 때도 과연 검찰 조직을 장악할 수 있겠느냐는 걱정을 많이 들었는데, ‘조직 장악’은 부정적 표현입니다. 정치 권력자가 자기 마음대로 검찰을 흔드는 것을 장악이라고 합니다. 검찰을 제대로 일하게 하면서 인사권자가 공정하게 권한을 행사하는 일이 어떻게 장악이 될 수 있습니까.”
충격적인 인사의 여파로 검사들이 집단 반발을 하는 통에 주목받지 못했지만, 이번 인사를 지역 컬러로 분석해보면 호남 검사들의 몰락과 PK 검사들의 부상이 눈에 띈다. 송광수 총장내정자는 청와대에서 돌아오면서 “호남 검사들이 울분을 느낄 것 같다”는 말을 했다. 승진자 13명 중에 PK 출신이 6명이고 호남은 2명이다. 좌천자 10명 중 호남 출신이 5명이다.
―숫자에서 확연히 나타나는 것처럼 특정 지역 출신이 불이익을 받은 현상이 두드러졌는데요.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아까 말한 것처럼 지휘감독의 자리에 있던 사람들한테는 어느 정도 문책성 인사가 불가피했습니다. 주요 사건의 수사 잘못과 관련한 문책에서는 전혀 지역을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강장관은 여기서 배석한 이춘성 공보관에게 “유창종(柳昌宗) 검사장의 출신지역이 어디냐”고 물었다. 배석한 이공보관이 ‘충청’이라고 말했다. 유검사장은 이번에 ‘검찰의 꽃’이라는 서울지검장에서 대검 마약부장으로 좌천 인사를 당해 사법시험 한 기수 아래인 대검차장 밑에서 일하게 됐다. 대검 중수부장 시절 이용호 게이트를 부실수사한 데 대한 문책성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우연의 일치일 수는 있지만 호남 배제 인사는 아니었습니다. 승진 인사에서는 최대한 지역 안배를 하려고 노력했어요. 사건 별로 고려하다보니까 그렇게 보이는 면이 있는 것 같아요. 우리 사회 실정상 지역을 고려하지 않을 수가 없지요. 대검차장이나 고검장 인사에서 그 점을 충분히 고려했습니다. 지검장급은 후속 인사가 남아 있으니 끝까지 지켜 보고 나서 평가해주기 바랍니다.”
김대중 정부 5년 동안 고위직에 오른 호남 출신 검사들이 각종 게이트에 연루된 사람이 많다. 검찰을 잘 아는 법조인들은 우호적인 정권의 덕으로 능력에 넘치는 자리를 받았던 사람이 있었다고 지적한다. 이번 인사에서 호남 검사들의 몰락을, 지난 정권에서 생긴 불균형을 시정하는 과정에 나타난 일시적 현상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요직에 기용된 일부 호남 출신 검사들이 김대중 정부를 망쳐놨다는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민주당 쪽에도 있습니다.
“나는 그런 데 별 관심이 없어요.(웃음) 잘못돼 왔던 것을 지역에 연관시키고 싶은 의도가 없습니다. 객관적인 기준에 의해 사건 수사를 잘했느냐 못했느냐만 평가했습니다. 이 사람이 호남이냐 아니냐, 대통령과 어떤 관계였느냐, 망쳐놓았느냐, 이런 것은 관심 밖입니다. 나는 원칙만 고수하려고 합니다. 과거에 호남 출신 검사들이 득세했기 때문에 지금에 와서 상대적으로 많이 좌천당하지 않았느냐 하는 상실감이 있다면, 그런 것은 곧 치유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그런 것을 고려하지 않고 인사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승진 발탁 인사에서 지역 안배는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인맥을 고려하지는 않습니다. 어떻게 보면 내가 너무 정치적이지 못합니다.”
법무부로 감찰 기능 이관 검토
부패방지위원회에서 부처별로 부패지수를 평가했는데 검찰이 가장 높게 나왔다고 한다. 그러나 이 시기에 발표하면 ‘검찰 죽이기’라는 음모론이 제기될까봐 발표를 주저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민주화 이후 권부의 기관들이 검찰 견제 기능을 상실하면서 검찰을 사정할 수 있는 기관이 사라진 것과 관련이 있다는 해석이 있다. 검찰총장 부인의 옷로비 스캔들이나 검찰총장 동생이 사건과 관련해 금품을 수수한 것은 빙산의 일각이 드러난 것일 뿐이라는 시각이 있다.
―검찰의 부패를 막기 위해 어떤 방안을 생각하고 있습니까.
“대검에 설치된 감찰부가 감찰 기능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안팎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법무부로 감찰기능을 이관하는 방안을 개혁과제로 마련해놓고 있습니다. 상급 감독관청이자 인사권을 행사하는 장관으로서 당연히 그렇게 해야 될 것 같습니다. 감찰결과를 인사에 반영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검찰이 불신받는 것은 꼭 권력형 비리를 잘못 수사해서만은 아닙니다. 수사 과정이나 검찰의 민원업무 처리에서 검사들이 인권을 보호해주려고 애쓰는 느낌을 국민이 갖도록 해주어야 합니다. 부패지수가 왜 그렇게 나왔는지에 대해서는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대통령 친인척 혹은 권력형 비리, 고위 공무원에 대한 수사를 하기 위한 한시적 특검제에 대해서는 어떤 견해를 갖고 있습니까.
“검찰도 이미 동의한 사안이라서 지금 와서 의견을 바꾸기는 어렵지요. 한시적 특검제는 사건별 특검제가 아니고 수년 동안 특검을 설치할 수 있게끔 문을 열어놓자는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검찰이 빨리 신뢰를 회복하고 주요 사건을 공정하게 처리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활동시한이 짧아질 수도 있겠지요. 대형 비리 의혹사건이 없는 사회가 되면 더 좋구요.”
―대북송금 특검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어떤 의견을 갖고 있습니까.
“나는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가 맞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검찰에서 수사유보를 결정한 이유는 북한과 관련된 부분이 노출돼 수습하기 어려운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습니다. 개인적인 소견으로는 국회에서 진실조사위원회 같은 기구를 만들어 국회의원뿐만 아니라 각계 인사들이 참여해 진실을 조사하고 특검으로 해결해야 할 부분이 있으면 그 다음에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경제사건을 전담하는 서울지검 형사 9부에서 벌인 SK그룹 수사의 파장이 너무 커 금융시장이 동요하고 있다. 국가신인도에도 나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삼성·한화 등 다른 그룹으로 수사를 확대하려던 수사팀은 주춤하며 안팎의 따가운 눈총을 받고 있다.
서영제(徐永濟) 신임 서울지검장은 ‘검사는 수사와 기소를 할 때 사건과 관련된 모든 정황을 고려해 국가경쟁력과 경제발전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검찰권을 행사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마디로 국가를 망하게 하는 수사를 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이다.
노대통령도 수사의 속도조절론을 언급한 적이 있다. 경제를 걱정하는 이들은 “환부는 도려내야 하지만 환자의 건강상태를 살펴 집도해야 한다. 환자를 죽이는 수사를 해서는 안 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수사에서 경제상황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겠지만 그렇다고 재벌의 비리를 눈감아주자고 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닙니까.
“수사권은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권한입니다. 검찰청법에 검사는 공익의 대표자로서 수사를 하게 돼 있거든요. 국민의 전체 이익을 위해 수사권을 행사하라는 위임이죠. 검찰권 행사에서는 공익을 계속적으로 고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무조건 수사만 하면 된다고는 말할 수 없고 두루두루 고려해 수사하지 말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깊이 고민할 수밖에 없습니다. 대통령은 임명권자로서 공익을 고려해달라는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장관으로서 검찰총장과 어떤 방향이 옳은가에 대해 협의하겠습니다.
노대통령은 SK수사의 경우 사전에 알지 못했고 사후에 속도조절 문제를 말했습니다. 수사권 행사라는 공익도 중요하지만 다른 경제적인 공익과의 균형이 파괴될 정도로 불이익을 가져온 것은 아닌지에 대해 검토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경제상황이 많이 안 좋다는 이야기를 듣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수사하면 안 된다고 할 수도 없고…. 어려운 문제입니다.”
―항간에는 참여연대가 고발한 사건을 수사하면서 재벌개혁과 관련해 대통령직 인수위와 어떤 교감이 있지 않았나 하는 추측이 있었습니다.
“전혀 아닙니다. 형사부에서 소신껏 독자적으로 한 것으로 알고 있거든요.”
―법무부장관의 일반적 수사 지휘권이라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나라 경제에 영향을 미치는 사건에 대해서는 수사 지휘를 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최근에는 두산중공업 사태가 해결이 났잖아요. 검찰에 노사간 자율적인 해결을 존중하라는 지침이 내려가 있습니다.”
강장관이 입각한 데는 민변 쪽 천거가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옷로비 특검을 지휘했던 최병모 변호사가 장관 제의를 고사하고 강 변호사를 밀었고 여기에 문재인 민정수석비서관이 가세했다. 이에 노당선자가 강변호사를 만나 면접시험을 보고 사법개혁 의지를 확인한 뒤 일찌감치 움직일 수 없는 카드로 굳혔다. 강장관은 한 인터뷰에서 “인맥이나 신세진 곳에 대한 부담이 없어 자신감이 넘치는 모습을 보면서 신뢰가 갔다”고 면접관을 만난 소감을 털어놓았다.
―노대통령이 당선자 시절에 강금실 변호사를 법무부 장관시켜서는 안 된다는 전화를 각계에서 수십통 받았다고 공개한 일이 있습니다. 노대통령이 고집스럽게 강장관을 밀어붙인 이유는 뭘까요.
“판사 생활을 13년 해봤는데 조직 생활을 오래 하면 조직을 사랑하고 존경하게 돼요. 내가 와서 보니 검사들도 검찰 조직을 사랑하고 명예를 중요시하더군요. 검찰의 아픈 부분을 도려내야 하는 상황에서 검사들은 아픈 마음부터 앞서지 않겠습니까.
안에서 보는 검찰과 밖에서 보는 검찰의 간극이 커서 안에서 보는 검찰을 존중하되 밖의 시각으로 고쳐나가고자 합니다. 안에 있던 분은 그런 개혁이 어려울 겁니다. 밖에서 온 사람은 차라리 과감하게 할 수 있습니다. 나는 그런 취지에서 대통령이 상당한 위험 부담을 무릅쓰고 결단을 내렸다고 봅니다. 최상의 선택은 아니었습니다. 비검사 출신에서 찾다보니까 나한테 차례가 온 것 같습니다. 좋게 봐서 차선 정도입니다.”
―너무 겸손하게 말하네요.
“여성인 내가 검찰의 중립화에 기여할 거라고 판단합니다. 장관은 정무직입니다. 검찰 내부의 위계 질서와는 관계 없는 여성이 장관을 맡았기 때문에 장관이 간섭하기가 불가능해졌지 않습니까. 과거에 검찰에서 있던 분들이 오면 (법무장관은) 대통령을 보좌해야 하는 동시에 검찰의 선배로 미묘한 자리가 되었습니다. 과거보다 더 낫지 않을까요. 어떻게 보세요.”
강장관 외에도 민변 출신으로 노무현 정부에 참여한 인사들이 많다. 문재인 민정수석, 박주현 국민참여수석, 이석태 공직기강비서관, 양인석 사정비서관, 최은순 국민제안비서관 등이다. 민변이 참여정부에 개혁 어젠더를 제공하고 결과적으로 인력 공급원이 됐다.
―노대통령은 언제 처음 만났습니까. 민변 활동을 하면서 가까워졌습니까.
“가까이 지낸 일이 없습니다. 내가 민변에 들어간 것은 1996년이고 노대통령은 민변에 소속돼 있었지만 정치인이라 바빠서…. 내가 1988년 부산지방법원에 근무할 때 판사실로 찾아 와서 한번 인사한 적이 있습니다. 노대통령은 기억 못하더라구요.”
―민변에서 법무부·검찰 개혁방안에 관한 견해를 많이 발표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법무부 장관이 됐으니 민변에서 부르짖었던 개혁 방안을 추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민변이 검찰 개혁 방안에 관해 올 2월에 워크숍을 했습니다. 검찰개혁에 관해 2년 전 것을 언급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은 수정됐습니다. 검찰 내부의 의견, 인수위에서 제기한 방안과 함께 민변의 의견도 참고자료가 되겠지요. 민변 소속 변호사였던 것과 장관으로서 직무 수행과는 별개 문제죠.”
―검찰 개혁은 어떤 방향으로 진행됩니까.
“대통령직인수위와 대검의 개혁안에 차이가 별로 없어요. 검사들의 신분보장 문제가 중요합니다. 인사를 공정하게 함으로써 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소신껏 일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줘야 합니다. 새로 임용한 검사들이 능력을 보완할 수 있는 교육이 좀더 강화될 필요가 있어요. 퇴직 후에도 명예롭게 일할 수 있는 여건이 만들어져야 합니다.”
강장관의 동기생인 사시23회는 지검부장검사급으로, 현재 55명이나 검찰에 몸담고 있다. 사시 22회나 24회보다 20∼30명이 많아 갈 수 있는 자리가 모자란다. 강장관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동기생인 서울지검 한상대(韓相大) 형사1부장과 차동민(車東旻) 특수2부장 등 동기대표 5명과 만나 의견을 들었다.
―동기생들을 어떻게 할 작정인가요.
“전문부장 제도를 검토하고 있습니다. 각 청별로 있는 특별한 업무를 부장검사가 단독으로 연구하고 수사 역량을 집중할 수 있겠지요. 밑에 부하 검사가 없는 부장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영장 전담 검사를 시킬 수도 있습니다. 법원에서는 부장판사들이 영장 전담 판사를 맡거든요. 전문화가 해결책입니다.”
―강장관은 취임할 때 소수자 인권보호에 관심을 두겠다고 말했는데요.
“미국에서 보통 전체의 20%가 안 되면 소수자로 분류합니다. 그런 의미로 볼 때 여성은 소수자입니다. 검찰청에 대한 제도 개혁과 검찰 인사가 끝나면 법무행정에 치중하고 싶어요. 법무부 예산의 절반을 차지하는 게 교도행정이에요.”
― 대한변협이 발간한 월간 ‘인권과 정의’ 1990년 10월호에 국가보안법 제7조 5항에 대한 헌법재판소 합헌 결정을 비판하는 논문을 썼더군요. 국가보안법 개폐논의에 대해서 어떤 견해를 갖고 있습니까.
“그 논문은 이적표현물 소지죄에 관한 내용이었습니다. 책 갖고 있다고 처벌하는 것 말입니다. 책을 읽는 행위를 처벌해서는 안 됩니다. (그 조항은) 아직도 살아 있잖아요. 국가보안법의 다른 조항에 대해 개인적으로 특별한 소견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남북관계가 이중적이잖아요. 한편으로는 협력자 관계로 정상회담도 하지만 법적으로는 휴전상태에 있습니다.”
검사들도 북한 가보았으면…
―교수 또는 연구원, 기자들이 연구 목적으로 갖고 있는 것은 괜찮다는 대법원 판례가 있지요.
“어떻게 보면 법적 차별입니다. 교수는 괜찮고 포장마차 하는 사람이 읽으면 이적이 됩니다. 차별적 처벌 우려가 있죠. 황위원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인터뷰를 하다가 인터뷰이로부터 질문을 당하는 사례는 흔하지 않다. 그렇다고 굳이 피해가야 할 만큼 복잡한 질문도 아니다.
―우리의 의식 수준이 서적에 대해서는 풀어줘도 별 문제가 없을 정도에 올라섰다고 봅니다. 나도 평양에 갔다 오면서 김일성 주석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를 사왔습니다. 김주석을 모르고 북한을 안다고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래도 인천공항에 내려 세관을 지날 때 찜찜하더군요. 연구목적이면 무죄라지만 신고하고 허가받아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
“아, 평양 다녀오셨어요. 검사들도 북한에 갈 일이 있으면 좋겠어요.”
강장관이 서적에 대해 이렇게 관심이 있는 것은 개인의 특별한 경험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강장관은 학창시절 자주 찾던 광화문 ‘민중문화사’ 서점 주인의 소개로 긴급조치 위반으로 구속과 제적을 겪은 서울대 철학과 출신 김태경씨를 만나 4년 열애 끝에 결혼했다.
필자도 학창시절에 민중문화사에 가본 적이 있는데 주로 금서를 파는 서점이었다. 한쪽 벽에는 남미의 좌익 혁명가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의 초상이 붙어 있었다. 지금 기준에서 보면 별것도 아닌 책들이 당시에는 금서로 묶여 있었다. 김태경씨는 강장관이 부산지법 판사로 있을 때 ‘이론과 실천’이라는 출판사를 경영하며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번역 출간했다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기소돼 재판을 받았다. 강장관은 옥살이를 하는 남편을 헌신적으로 뒷바라지했다.
―강장관이 남편을 재판하는 재판부에 장문의 의견서를 제출했다고 들었습니다.
“노태우 대통령 취임 후 민주화가 꽤 이행됐거든요. 책이 나오고 1년 넘은 무렵에 구속이 됐어요. 1년 동안 공개적으로 사고팔고 했거든요. 책 광고도 냈습니다. 1년 동안 몇 만명이 사봤는데 갑자기 이적표현물이 됐어요. ‘이 정도는 받아들이는 사회가 됐구나’ 하고 안심했는데 1년이 넘은 시점에 갑자기 그 책을 문제삼아 구속시키니까 구속이 적절하지 않다고 봤어요. 판사 남편이 도망을 하겠어요. 그렇지만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은 구속상태의 수사와 재판이 원칙이었어요. 피의자 가족의 입장에서 의견을 적어낸 것이지 판사로서의 활동이 아닙니다.”
제도대로 검찰인사를 하자고 강조한 강금실 법무장관.왼쪽은 황호택 논설위원장관
“사생활 검증은 감수하겠지만 위장이혼설은 뜻밖의 곤경이었어요. 위장이혼은 보통 부채가 많을 때 이를 모면하기 위해서 하잖아요. 내 경우는 남편 빚을 모면하기 위해서 이혼한 것이 아닙니다. 남편의 부채를 안고 갚아나가다 너무 힘들어진 것이 결정적인 이유였어요. 이혼을 한 후에도 나한테 넘어온 빚이 그냥 있거든요.”
“지난 7년, 정말 힘들었다”
강장관은 남편 회사가 부도난 후 5년을 버티다 각자 재기하기로 합의하고 헤어졌다. 1984년 결혼해 15년 만에 이혼하고 지금은 그냥 친구로 지낸다. 둘 사이에 자녀는 없다. 강장관은 지인들에게 “사랑을 끝까지 지키지 못해 가슴 아픈데 위장이혼설이 퍼져 전 남편의 명예를 해치는 것 같아 가슴 아프다”고 말했다.
―전 남편으로부터 넘어온 부채가 얼마나 됩니까.
“구체적인 것은 재산등록할 때 다 공개하겠습니다. 이혼 당시 8억원 정도 됐는데 지금은 한 3억원 갚고 5억원 정도 남았어요.”
―사생활에 관해서 묻자니 묻는 사람도 겸연쩍네요. 악의로 물어보는 것은 아니니까 거북하면 대답을 안해도 괜찮습니다. 강장관이 남편과 학창시절부터 ‘순애보 사랑’을 했다고 법조인들에게서 들었습니다. 희생도 엄청나게 했고…. 그런데 헤어졌으니 믿기지 않아서 위장이혼이라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아닐까요.
“엄청 힘들었어요. 전 남편도 고통을 많이 겪었지만 나도 1995년 전 남편의 사업(출판사)이 부도나고 지금까지 7년 동안 개인적으로 가장 힘든 시기였죠. 절망했던 시간도 있었습니다. 심지어 파산신청을 할까 생각도 했습니다. 그런 시간들이 나한테 도움이 됐던 것 같아요. 힘든 일을 겪으면서 철이 든 시기였습니다. 지금은 고맙게 생각하지요.”
인터뷰 한답시고 공연히 아픈 곳을 들쑤셔 울적하게 한 것 같아서 강장관이 기분 좋아할 이야기를 하나 꺼냈다. 각 언론사 별로 노무현 정부 1기 내각 검증팀을 만들어 가동했다. ‘동아일보’ 법조기자들이 강장관 뒤를 다 파봤는데 깨끗하게 살려고 노력한 흔적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한다.
―한총련에 대해서는 강령에 따라 기수별로 이적단체라는 대법원 판결이 내려져 있습니다. 민변에서는 한총련 합법화 주장을 편 것으로 아는데 법무부 장관으로서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까.
“이적단체로 인정받은 것들(강령)이 고쳐져야 합법화가 가능하지 않을까요. 기수별로 해마다 강령이 나오는데 이적단체로 인정된 기수도 있고 안된 기수도 있어요. 한총련이 종전 이적단체 주장을 담은 강령을 바꾼다면 다른 법적 판단이 가능해지겠지요. 지금 상태에서 합법화해줄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한총련은 국민들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믿을 만큼 모습을 바꿔야 합니다.”
―여성 판·검사 수가 급격하게 늘어나고 있는데요. 여성 판·검사들이 사법부와 검찰의 중견이 되면 법조계 모습이 지금과는 달라질 것으로 판단됩니다.
“국민이 공감하기 어려운 권위주의 또는 폐쇄성 때문에 법조계가 비판을 받기도 합니다. 법조 문화를 민주적·개방적으로 만들기 위해 여성들이 할 역할이 있습니다. 여성의 사회진출은 거역할 수 없는 시대의 흐름입니다. 이러한 현상을 막으려 해서는 안되고 어떻게 대처할 것이냐를 두고 고민해야죠.
일부 선진국에서는 여성 법조인이 전체 법조인의 50%가 넘는다고 하더군요. 그래도 큰 문제 없어요. 우리처럼 특검으로 넘겨야 하는 큰 사건들도 없어요.”
1980년대 초 조배숙(현 민주당 의원)·임숙경씨가 검사를 잠시 하다가 적성에 안맞아 판사로 전업한 일이 있다. 일반적으로 범법자를 다루는 수사는 여성에 잘 맞지 않는다는 시각도 있다. 언론계에서도 여기자가 정치부를 하기에는 핸디캡이 있다는 시각이 있다. 취재를 하려면 정치인들과 사우나에 같이 가야 할 때도 있다. 검사가 피의자들과 사우나를 할 필요는 없겠지만.
“지금은 여검사들이 강력부에서도 일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새로 임명한 검사들까지 여성검사가 87명이나 됩니다.”
독일 연수를 다녀온 이춘성 공보관은 “독일에는 여성 검사장이 흔하다”고 거들었다.
―동료 변호사와 함께 2001년 ‘호주제 폐지를 위한 법적 접근’이라는 논문을 발표한 적이 있는데….
“호주제는 위헌입니다. 법률적으로 위헌이 아니라는 의견을 내기가 어려워요. 현실적으로는 호주제 폐지에 반대하는 사람이 많지만 법리적으로 보면 명백한 위헌입니다.
가족의 구성과 조화를 위해 헌법 기본권 조항에 양성(兩性) 평등이 규정돼 있습니다. 그런데 호주제는 호주를 남자로만 하게 돼 있어요. 양성 평등 조항과 맞질 않아요. 남자 또는 여자 아무나 할 수 있게 하든지 부부 공동으로 할 수 있어야 정상인데 호주를 남자로 제한한 것은 헌법에 배치됩니다. 법률가로서는 호주제 위헌론에 반론을 표시하기 어렵습니다.”
장정일의 소설 ‘내게 거짓말을 해봐’는 여고생과 중년 기혼남성의 성행위를 다룬 소설이다. 묘사가 노골적이고 변태적인 성행위를 다룬 음란문서라는 사법적 결론이 내려졌다. 강장관은 당시 장정일 피고인의 변호인이었다.
―변호인으로서 당연히 무죄 주장을 폈겠지만 어떤 논리를 폈습니까.
“음란물 여부에 관한 판단 기준이 때로는 애매해요. 미국에서는 예술적 가치가 있는 작품은 음란물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독일 경우에는 사회적 가치에 의해 포르노에 해당되는지를 따집니다. 나는 독일 기준으로 장정일씨의 소설이 사회적 가치가 있다는 주장을 폈습니다. 독일에서는 포르노 소설도 음란물에서 배제합니다. 한국에서도 보수적인 풍토에 변화가 생겨 요즈음에는 무죄 판결도 나옵니다. 이 작품을 영화화한 ‘거짓말’은 검찰에서 불기소 처분했습니다.”
지금은 고전이 된 영국작가 D. H. 로렌스의 ‘채털리 부인의 사랑’도 나라와 시기에 따라 금서가 되기도 하고 안되기도 했다. ‘장정일 화두, 혹은 코드’(행복한 책 읽기)에는 강장관이 쓴 ‘장정일을 위한 변론’이 들어 있다.
‘마음이 음란해지는 것은 마음의 주인이 책임져야 할 일이지 장정일의 책임이 아니다.’
강장관은 예술을 좋아하고 예술인과의 교류를 즐긴다. 대학 다닐 때 서울대 학생회관 1층 고전음악 감상실에서 D.J.를 했다. 가면극 연구회에 들어가 강령탈춤을 멋지게 소화할 정도의 춤솜씨를 익히기도 했다.
―어느 계열의 음악을 좋아합니까.
“클래식을 많이 듣는데 우리 국악도 좋아해요. 특히 실내악을 좋아합니다. 국악 중에서는 서도민요를 좋아해요.”
―자주 어울리는 문화인들의 면면을 소개해줄 수 있나요.
“고종석 한국일보 논설위원, 김진석 인하대 철학과 교수, 황인숙 시인, 화가 이현이 가장 친한 친구예요.”
강장관은 경북 경주에서 태어났지만 제주도와 연고가 깊다. 부친이 제주농고 교감으로 재직하다가 4·3 사건의 갈등을 겪은 후 경주공고 교감으로 전근해 경주에서 강장관을 낳았다. 그러나 제주에 집안 친척이 많아 제주 언론은 강장관을 ‘제주의 딸’이라고 부른다.
정부는 2000년 ‘4·3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을 만들어 4·3 희생자들에게 명예회복의 길을 열어놓았다. 강장관의 부친은 그 혼란했던 시절에 우익 입장에 가까웠다고 한다.
로펌 대표 때부터 외모에 신경
강장관이 매스컴을 통해 뜨면서 ‘강 법무 패션’이 시중의 화제가 되고 있다. 여성 공직자들은 어두운 색상에 발목 가까이 내려오는 긴 치마를 입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강장관은 이런 틀을 깨고 밝은색 정장에 귀고리 등 액세서리를 과감히 착용한다. 평검사 토론회에서는 짧은 치마를 입은 장관 앞에 탁자를 갖추어놓지 않는 바람에 시종 다리를 꼬고 앉아 있는 모습이 눈길을 끌었다.
―‘강사모’ 사이트에 들어가봤습니까.
“인터넷에 들어갈 시간이 없어요. 밤늦게까지 움직여야 일정을 소화할 수 있어요. 검찰인사 준비하느라고 새벽에 나오고 밤늦게 들어갔습니다. 이번 주말에 한번 들어가 보려고 합니다. 저 개인에 대한 사랑이라기보다는 검찰이 바뀌기를 원하는 네티즌들의 마음이 그런 사이트를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예뻐서 그런 것 아닐까요. (웃음)
“내가 외모에 신경을 쓰게 된 것은 로펌 대표하면서부터입니다. 사무실 대표로 외부 인사들을 자주 만나야 하니 신경을 쓰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화장하는 데는 몇 분이나 걸립니까.
“한 10분 정도. 여성이 진짜 멋 부리려면 시간이 많이 걸려요. 그런데 옷 사러 갈 시간도 없어요.”
법무법인 ‘지평’은 변호사 수 24명으로 현재 업계 9위. 강장관은 정부에 참여하면서 ‘지평’ 대표직을 사임했다.
―전 대표가 장관이 됐으니 지평의 인기가 올라가지 않을까요.
“별로 그런 것 같지 않아요. 변호사들이 조심하기 때문에.”
―장관이라는 자리는 강한 체력을 요구하는 힘든 자리 아닙니까.
“2주 됐는데 몇 달 된 것 같아요. 힘들더라고요. 조찬이 있는 날은 새벽 6시에 나와 밤늦게 들어갑니다. 밤에 늦게 자는 습관을 고치지 않아 못해 잠자리에 들지 못합니다. 규칙적인 생활을 하며 건강 관리해야죠.”
―어떤 요리를 잘합니까.
“제가 집안일을 못 하고 살아서요. 하면 잘할 자신 있는데…. 잘하는 요리라고 내세울 만한 게 없어요. 라면 전골 같은 것은 잘해요. 밝히기가 창피하다, 이것은.”(웃음)
―그러면 어떤 요리를 좋아하나요.
“뭐든지 다 좋아해요.”
―특히 좋아하는 요리를 꼽자면….
“두부, 콩요리는 다 좋아해요.”
―장시간 인터뷰에 응해줘 고맙습니다. 이 얘기는 꼭 하고 싶었는데 빼놓은 것이 있는지 생각해보세요.
“너무 많이 물었어요. 묻고 대답한 지 두 시간이나 됐어요. 말을 무지무지 많이 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