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보, 외교, 경제, 사회, 사정 등 국정운영의 핵심 사안과 관련된 청와대 시스템에 빨간불이 켜졌다. 청와대는 ‘시스템적’으로 국정을 운영하겠다고 밝혔지만 바로 그 시스템에 문제는 없는지 점검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텐의원은 “한국 경제권이 대륙으로 확장되는 데도 도움이 되는 아이디어”라고 자평했다. 다소 ‘국내 지향적’인 한국의 동북아경제중심 프로젝트에 비하면 좀더 ‘동북아적’인 부분들이 많이 들어 있었다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보고서를 전달할 정도로 러시아는 노대통령의 동북아경제중심 프로젝트에 대한 기대가 매우 컸다.
그러나 보고서를 전한 지 4개월이 지난 6월 현재까지 텐의원은 청와대로부터 어떠한 연락도 받지 못했다. 텐의원 측은 “적어도 ‘검토해 보겠다’는 의례적 답변은 있어야 되는 것 아니냐”며 불쾌한 반응을 보였다. 이르쿠츠크가 지역구인 고려인 출신 텐의원은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측근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가운데 청와대는 동북아 프로젝트의 구체적 비전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노대통령은 “대선 과정에서 만들었는데 사실은 껍데기였다”고 말하기도 했다.
러시아정부는 조순형 특사, 라종일 대통령 국가안보보좌관 등에게 노대통령의 러시아 방문을 요청했다. 한-러 의원친선협의회 러시아측 관계자는 “그러나 한국측이 3번씩이나 보류의사를 밝힌 것으로 러시아 정부는 느끼고 있다. 그래서 분위기가 상당히 가라앉은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2003년 5월말~6월초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열린 45개국 정상회담에서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는 교차 정상회담을 통해 북핵 문제를 논의했다. 정작 북핵 문제의 당사자인 한국은 이 자리에 없었다. 한국은 러시아로부터 초청받지 못했다. 외교통상부 관계자는 “러시아측이 정한 국가원수 초청 기준에 해당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기준에 해당되지 않는 인도는 초청받았다. 연초부터 러시아가 노무현 대통령의 방러에 상당히 적극적이었던 점을 감안할 때 미묘한 상황변화라는 시각이 있다. 청와대와 한국 외교당국이 러시아가 보낸 메시지와 정보를 뒤켠에 제쳐둔 것 아니냐는 해석도 나오고 있다.
‘노동’ ‘교육’ 명칭 없는 청와대 부서
문희상 대통령 비서실장 등은 청와대 시스템에 문제가 있는 것 아니냐는 언론의 지적에 대해 “이제까지는 ‘적응기’며 앞으로 청와대는 본 궤도에 오를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몇몇 전문가들은 조심스럽게 “100일이 막 지난 시점이지만 청와대 직제를 다시 바꾸고 인선을 새로 할 필요성도 있다”는 의견까지 내놓고 있다.
화물연대 파업사태 때 관련 부처 한 국장은 긴박했던 동향을 청와대에 보고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청와대 내 주무부서가 어디인지 알 수 없었다. 결국 청와대 내 16개 부서에 모두 보고를 했다고 한다.
이는 과거의 청와대 수석비서관제 시스템이 폐지되면서 새롭게 발생한 문제라는 지적이 있다. 예를 들어 김대중 대통령(DJ)의 청와대에선 정치, 경제, 사회(노동-교육-문화 등) 분야별로 수석비서관이 있어 업무분장이 명확했다. 화물연대 파업의 경우 DJ정부의 청와대였다면 경제수석과 노동담당 수석이 전면에 나섰을 것이다.
그러나 노무현 대통령의 청와대에선 경제수석이 없다. 노동담당도 청와대 내 어디인지 명확하지 않다. 대신 ‘국정업무 전반’에 ‘포괄적’으로 관여하는 부서가 많다.
화물연대 파업의 경우 노대통령의 청와대에선 비서실장(장관급), 비서실장 산하 국정상황실장, 정무수석비서관, 정무수석비서관 산하 시민사회담당 비서관, 민정수석비서관, 민정수석비서관 산하 민정2비서관, 정책실장(장관급), 정책수석비서관, 정책수석비서관 산하 정책상황실장이 담당 부서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이들 부서의 명칭에서 짐작되듯 딱히 주무부서가 어디인지 명확하지 않다.
화물연대 파업사태 때 관련 장관들이 대통령의 질타를 받았지만 청와대도 우왕좌왕했다. “미리 예방할 수 있었던 파업인데 정부의 늑장 대응으로 장기화됐다”는 언론의 비판이 거셌다. 그러자 청와대 문재인 민정수석비서관이 파업사태 해결의 전면에 나섰다. 이는 “파업사태에 민정수석이 왜?”라는 또 다른 의문을 낳았다.
교육행정정보화시스템(NEIS) 갈등의 경우 DJ의 청와대에선 이론의 여지없이 교육문화수석 해당업무사안이며 교육문화수석을 통해 교육부와 대통령간 의견조율이 이뤄졌을 것이다.
그러나 노무현 대통령의 청와대에선 NEIS 문제 또한 소관 부서가 명확하지 않았다. 청와대 부서 어디에도 ‘교육’이라는 명칭이 붙은 곳이 없다. 다시 문재인 민정수석이 나섰다. 그러자 언론은 문수석에게 “왕수석”이라는 타이틀을 붙여버렸다.
정치권 인사들과 행정학 전문가들은 문수석이 “억울하다”고 밝힌 심정을 이해한다. 이들은 “청와대 내 모든 부서가 나서지 않을 때 문수석이 나름대로 책임감 있게 업무를 한 것이다. 문수석이 왕수석이 된 것은 그의 개인적 문제가 아니라 업무분장과 책임소재가 명확하지 않은 청와대 시스템의 문제로 접근해야 한다”고 말한다.
다음은 민주당 한 의원의 말이다. “국정현안에 비서관급이 나설 수는 없는 것이다. 청와대 수석비서관급 인사들은 책임과 권한이 명확하지 않고 외부 전문가 출신이 많아 ‘내가 해결해 보겠다’고 나서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문재인 민정수석은 부산인맥과 386운동권 출신 등 노대통령의 양대 측근 그룹 중 유일하게 수석비서관급이면서, 파업이나 교육 문제와도 업무적 연관이 전혀 없지는 않은 자리였으므로 나섰던 것으로 보인다.”
비서관의 막강 파워…초유의 현상
현 청와대의 또 다른 특징은 청와대내 부서의 ‘수평적 의사결정 구조’에 있다. DJ정권 당시 청와대 고위 관계자였던 A씨의 관찰에 따르면 이 부분에서도 부작용이 감지되고 있다.
DJ의 청와대는 수석비서관들간 이견이 발생했을 때 이를 ‘정책기획수석비서관’이 1차 조율하는 시스템이었다. 대부분의 이견은 여기서 해소됐다. 그래도 안 되면 비서실장이 나섰다. 이에 따라 청와대 비서진이 대통령에게 보고하거나 내각과 협의하는 단계에선 청와대 비서진 내부의 이견은 없어진다. 국정운영의 일관성, 통일성이 어느 정도 보장되는 시스템이었다는 것이다.
노대통령의 청와대에선 정책기획수석비서관이 없다. 정책기획수석이 맡던 1차 조정기능도 제도적으로 보장되어 있지 않다. A씨는 “청와대 상층의 지휘체계가 모호해졌다”고 표현했다. A씨는 “자체 의견 조율기능과 일관성이 사라지면 청와대는 더 이상 청와대가 아니라 ‘국책자문기관’쯤으로 전락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역대 정권의 청와대에서 특정 수석비서관이 비서실장보다 더 실세라는 얘기는 있었다. 그러나 적어도 ‘비서관’이 ‘수석비서관’보다 더 실권이 있다는 얘기는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요즘은 이런 얘기도 심심찮게 나온다.
특히 이런 얘기는 경제분야에서 많이 나오는데, 청와대의 경제 분야 관련 부서는 정책실장, 정책수석비서관, 정책수석비서관 산하 정책상황실장, 각 부문별 태스크포스팀 등이다. 이정우 정책실장과 태스크포스팀장들은 주로 거시적 국정 어젠더 중심의 역할을 맡는데 실제로 이실장 수하에 있는 직원은 수 명에 불과하다. 이는 권오규 정책수석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정만호 정책상황실장(비서관급) 수하엔 청와대 부서 내에서 두 번째로 많은 인원이 배치되어 있으며 자연히 정책상황실로 주요 경제관련 정보가 몰린다고 한다. 정실장은 노대통령의 386 핵심측근이기도 해 비서관인 정실장에게 힘이 쏠리는 것 아니냐는 얘기도 나온다.
비슷한 소문이 또 있다. 청와대 내에서 현재 가장 많은 인원을 갖고 있는 부서 역시 비서관급이 관장하는 비서실장 산하 ‘국정상황실’이다. 다음은 청와대에 근무하는 노대통령의 386측근의 말이다. “당선된 뒤 청와대 조직 개편 구상을 할 때 노무현 당선자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국정상황실에 인원을 많이 두되 일은 많이 주지 말라. 대신 귀를 세우고 있으라고 하라. 그래서 정말 국정에 필요한 것들을 수집, 보고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는 취지의 말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이 청와대 수석비서관·보좌관 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수석-실장-보좌관들이 완전 수평적 구조가 되어 ‘토론’은 활성화됐지만 ‘내부 조정기능’은 약화됐다는 우려, 비서관급이 상전인 수석비서관보다 더 많은 정보, 인력, 실권을 갖고 있다는 소문은 청와대의 어두운 면이 되고 있다. 일부 교수들은 “청와대는 시스템 개선에 나서야 한다”고 지적했다. 대통령학을 전공한 고려대 함성득 교수는 “내각의 부처와 청와대가 1대1로 대응하도록 한 과거의 수석비서관제로 다시 돌아가라”는 이색적 주장을 폈다.
다음은 함교수와의 일문일답이다.
-과거의 수석비서관제는 ‘제왕적 청와대’의 근간이라는 비판을 받지 않았나.
“그 제도는 청와대가 내각과 조율해 가면서 국정현안에 신속하고, 효율적으로 대응하는 데 적합한 것으로 검증된 제도다. 수석을 뒤에서 조종하는 ‘2인자’ ‘정권실세’라는 존재만 없다면 제왕적으로 흐르는 폐단을 크게 줄일 수 있다.”
-현 청와대 시스템에 문제가 있다고 보는가.
“현 청와대 인원은 498명 정도로 역대 청와대 중 가장 규모가 크다. DJ정권의 청와대도 403명이었다. 청와대가 비대해졌으니 할 일이 많아졌고 그래서 내각중심 국정운영이 잘 안 되는 것이다. 그런데 막상 특정 국정현안이 발생했을 때 청와대는 내부의 업무관할이 분명치 않아 효과적 대응을 못하고 있다. 이렇게 청와대와 내각이 제대로 안 움직이니 대통령이 현안마다 나서야 되는 것이다.”
-현 청와대 시스템 중 가장 시급해 개선해야 될 부분은 무엇인가.
“국정 현안 중 특히 경제 문제가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경제부총리, 경제관련 장관들, 금감위원장, 공정거래위원장 등 경제 부처들과 대통령간 의사조율을 담당할 청와대 내 경제 관련 조직들의 권한이 명확하지 않다. 그래서 경제문제에 대해 내각과 청와대간 조율에 문제점이 나타나고 있다. 대통령이 삼계탕 회식에서 재벌총수들에게 협력을 요청한 다음날 공정거래위원장이 재벌 조사에 나서겠다고 한 것은 엇박자로 보인다.
청와대와 정부가 정책일관성-신뢰도 유지에 실패하면 경제에 큰 타격을 주게 된다. ‘경제수석비서관’을 부활시켜 경제부처와의 정책 조율권한을 확실하게 부여해 주어야 한다.”
“뭐라고 안할 테니 국정원장 직보 받아라”
함교수는 “국장급에 비해 과장급 직책이 청와대에 너무 많다”고 말했다. 과거 청와대가 제왕적이어서 문제였다면 지금의 청와대는 부처에 영이 잘 서지 않는 새로운 문제를 낳고 있다는 것이다. 다음은 이와 관련된 청와대 관계자의 경험담. “최근 지방 출장을 간 적이 있다. 지자체 고위 공무원들과 면담 약속 잡기도 힘들었다.”
외교, 안보와 관련 청와대에 정보를 제공해주는 역할은 국가정보원이 맡고 있다. 노 대통령은 국정원장의 주례 보고를 받지 않고 있다. 대통령직인수위 때도 국정원은 당선자가 아닌, 당선자 측근에게 매일 오전 7시30분 보고서를 보냈다. 현재도 국정원은 매일 오전 문서 형태의 보고서를 인편으로 청와대에 보내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청와대 비서진은 이들 보고를 일차적으로 검토한 뒤 일부는 대통령에게 보고한다고 한다.
한나라당 정형근 의원은 “야당이 뭐라고 안 할 테니 국정원장 보고를 대통령이 직접 받으라”고 말한다. 국가정보원 한 관계자는 ‘솔직한 심정’이라면서 이렇게 말했다. “고작 청와대 수석비서관에게 정보 보고하는 역할이라면 국정원은 지금의 10분의 1로 줄이는 게 차라리 낫다. 대통령에게 직보되지 않고 중간에 누군가에 의해 한두 번 걸러져서 대통령에게 보고되는 체제에선 정말 민감하고 중요한 정보를 보고하기가 어렵고 두렵다. 보안 문제도 훨씬 심각해진다.”
특기할 점은 현 청와대에 사정기관 보고가 역대 정권에 비해 줄었다는 점이다. 대검찰청 한 관계자에 따르면 김대중 정부의 임기 중반기까지는 대검이 자체 수집한 정보보고는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실로 보고가 됐다. 그러나 노무현 대통령 취임 후 검찰이 청와대에 보고하는 일은 없어졌다. 검찰은 자체 수집정보를 법무부에 보고하지만 종전 서울지검 등에서 법무보로 직보하던 관행을 폐지함으로써 청와대가 법무부를 통해 검찰 정보를 수집하는 기능도 상당부분 약화됐다는 평이다.
경찰도 대통령이 정치 정보보고 안 받는다고 발언한 이후 정보관련 부서(경찰청 정보국 정보2분실 등)를 축소 조정했다. 이와 관련해선 사정기관 중립성 확보 차원에서 바람직하다는 견해가 많다. 그러나 국가 운영에 참고가 될 만한 ‘공적 정보’의 절대량이 줄어든 것은 사실이다.
부처 내 ‘기관이기주의’ 득세
동시에 사정기관에 대한 청와대의 리더십이 약화되고 있다는 징조도 있다. 이를 단순히 사정기관의 정치적 중립성 문제로만 볼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사정기관에선 자기 조직의 이익 보호에 더 열성적인 움직임도 감지되고 있다. 예를 들어 검찰 감찰권을 검찰에서 법무부로 이관하려는 개혁은 추진이 잘 안 되고 있다. 검찰은 검찰 내부의 비리 정보를 바깥에 내보내지 않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듯하다.
한국의 안보-외교파트 기관의 해외 정보수집 능력 자체가 약화되고 있다는 우려도 있다. “미국은 한국정부와는 ‘코드’가 맞지 않아 한국과 정보협조를 하지 않으려는 경향”(민주당 함승희 의원 방미 보고서 등) 등의 이야기가 정치권에서 자주 나온다. 북한에 5자 회담 수용을 요구한 한-미-일 전략이 한국이 빠진 미국-일본-호주 차관급 회담에서 사전 결정된 것은 충격적인 일이었다. 청와대 NSC(국가안전보장회의)-국가정보원-외교통상부-국방부 등 안보·외교 당국간 정보전달체계, 해외 정보 수집력을 재점검해봐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청와대로선 거북한 일이겠지만, 노무현 대통령 취임 100일이 막 지난 상황에서 청와대 시스템은 ‘리모델링 요구’에 직면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