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8월호

오(吳)·초(楚) 전쟁의 희비 쌍곡선

전략전술로 압승, ‘복수무정’에 자멸

  • 박동운 언론인

    입력2005-07-29 16:3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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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吳)·초(楚) 전쟁의 그늘진 교훈은 실패작으로 그친 오군의 점령 통치다. 복수심으로 불타던 오왕 합려와 오자서는 초나라에 대한 보복에 광분해 참된 승리를 얻지 못했다. 보복심리는 대국적인 건국이념과 국가이익의 차원에서는 결코 바람직한 발상의 기조가 될 수 없다.
    오(吳)·초(楚) 전쟁의 희비 쌍곡선
    복수를위해 쿠데타를 도운 오자서(伍子胥)는 합려왕이 집권하자곧바로 초나라를 칠 준비에 착수했다. 상대는 천하의 강대국이니 전쟁을 하려면 우선 인재들의 지혜를 모을 필요가 있었다.

    때마침 초나라에서 백비(伯?)라는 사람이 망명해왔다. 그는 자신이 귀족 출신이자 중신의 가문으로 부친이 간신 비무기의 참언으로 평왕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했다. 외국으로 탈출해 복수할 길을 모색하던 중 오나라에 오자서가 있음을 알고 의지하면서 협력하고자 찾아왔다고 했다. 오자서는 백비가 자신과 가문이나 복수 성향이 같을 뿐 아니라 정보통이라고 보고 적극적으로 천거했다. 합려왕은 백비를 대부(大夫)로 중용했다.

    그러나 오자서는 백비의 가문과 성향, 지식만 중시했지 근원적으로 중요한 ‘성격’을 도외시했다. 이는 큰 잘못이었다. 이 점을 걱정한, 오자서의 친구이자 벼슬이 대부인 피리(被離)라는 사람이 하루는 자기 집에 연회를 벌여 그를 초대해서는 다른 내객들이 돌아가자 목소리를 낮추어 말을 건넸다.

    피리 : “경은 백비와 퍽 친밀하게 교제하시는데, 무슨 특별한 사유라도 있으신지….”

    오자서 : “소생의 부형이 초나라 왕실에 의해 살해당했는데, 백비도 그 부친이 초나라 왕실에 살해당했습니다. 그러니 보복 성향이 동일하고, 다같이 망명해온 객신입니다.”



    피리 : “알겠습니다. 그러나 오 선생을 위해 감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소생의 눈에는 백비가 경계해야 할 인물로 비칩니다.”

    오자서 : “어떤 점을 경계해야 합니까?”

    피리 : “관상에 의하면, 백비는 사나운 매의 눈매를 가졌습니다. 애당초 의리나 인정, 충성이나 은덕과는 거리가 먼 자아본위, 수단불문의 잔인한 눈초리입니다. 게다가 걸음걸이를 보니 호랑이 걸음 치고도 보폭이 지나칩니다. 개인의 이익을 위해 뇌물이건 참언이건 서슴지 않고 무한대의 욕심을 추구하리라고 봅니다.”

    오자서 : “그렇습니까? 하지만 소생은 동의할 수 없습니다.”

    요컨대 오자서의 오류는 오직 성향과 가문과 능력에 치중하여 가장 중요한 요소인 성격, 즉 사람됨의 인격구조를 무시한 데 있었다. 후일 그러한 오류 때문에 오자서는 파멸을 자초하고 만다(吳越春秋, 闔閭內傳 第四).

    능력보다 사람됨이 먼저이거늘…

    이른바 ‘성향’이 같으면 그만이라고 하여 ‘개혁 성향’이니 ‘복수 성향’이니 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다가 나중엔 파벌 싸움과 숙청에 골몰한다. 그런가 하면 ‘가문’이 충성을 보장한다며, 소위 ‘가정 성분’이니 ‘계급 성분’을 스탈린식으로 따지는 사람들이 있다. 그 결과는 소련 붕괴나 세습독재 파탄일 뿐이다.

    반면 미국에선 구두닦이 소년이던 존슨이 대통령이 됐다. 영국에선 보수당과 자유당을 왔다갔다해서 ‘변절 시비’에 휘말렸던 처칠이 수상이 되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렇듯 근본적인 문제는 애국심이 굳건한 성격과 능력에 달려 있다. 결코 피상적 성향이나 가문 따위에 구애해선 안 된다. 더구나 현대의 가문 타령은 무능한 자의 우대 요구에 불과하다. 애당초 상대할 바가 아니다.

    성격은 행동을 결정한다. 그 결정의 본질은 선택이다. 인생행로의 기로에는 여러 가지 선택지가 아른거린다. 학과의 선택, 직업의 선택, 직장의 선택, 배우자의 선택, 나아가 공격과 방어, 퇴각의 선택 등에 즈음하여 어느 하나의 선택지를 골라잡아야 한다. 그래서 영국의 케인스는 “성격이 운명을 좌우한다”고 가르쳤다. 고대 그리스의 헤라클레이토스는 숫제 “성격이 운명이다”고 갈파했다.

    그럼에도 오자서가 가문과 성향을 강조해 백비와 같은 간신배를 천거한 것은 중대한 과오였다. 물론 군사 분야에서 ‘노력하는 천재’ 손무(孫武)를 발견해 천거한 것은 특기할 만한 성공작이다.

    손무는 성격과 능력 양면에서 걸출한 군사가였으며, 이미 훌륭한 저서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의 ‘손자병법’은 오늘날에도 세계적인 명저로 손꼽힌다. 폭넓고 깊이 있는 전례(戰例) 연구에 입각해 인간 심리와 투쟁의 논리를 집약적으로 일깨워주기 때문이다. 그 스스로 드높은 수양의 경지에 도달해 지저분한 야망에 좌우되지 않았으며 진퇴가 깨끗했다. 합려왕의 대초(對楚) 전쟁 준비와 실전에 걸쳐 오자서와 더불어 공헌한 바가 자못 컸다.

    오자서와 손무의 협력

    오왕 합려는 즉위하자마자 전쟁 준비에 들어가 장비와 보급은 오자서에게 맡기고 전략·전술은 손무에게 위임하다시피 했다. 합려왕 자신은 국력 배양에 힘쓰면서 훌륭한 인재를 등용해 그 능력을 최대한 발휘케 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이 자신의 경청 능력임을 헤아리고 있었다.

    오자서의 장비 개선과 보급 창달 노력에서 높이 평가할 것은 수전(水戰) 중시와 함선 개량이다. 우선 그가 설계한 선체(船體)는 재래식과 달리 폭이 좁은 대신 앞뒤가 길고, 뱃머리와 선미가 높았다. 적의 화살 공격과 화전 공세에 의한 피해를 극소화하고 속도를 높이기 위한 것이었다. 특히 선상의 돛대와 키(舵)를 없앴다. 획기적인 착상이었다.

    대신 선체를 상하 2개 층으로 나누고, 하층에는 좌우 두 갈래로 노를 젓는 사공을 배치했다. 상층에는 전투병력만 포진했는데, 모든 병사로 하여금 단검을 차게 했다. 사병의 무기 가운데 활과 세모창이 돋보였다. 세모창은 길이가 사람 키의 두 배 이상이었다. 아래층에는 전체 승원의 3분의 2(약 50명)가 배치됐고, 위층에는 전투요원 32명이 대기했다. 각기 맡은 임무가 명백해 거리낌없이 본분을 다할 수 있었다. 기타 육전병력도 혼란 없이 수용하여 신속히 전선으로 수송할 수 있었다(楊泓·李力 文武之道, 315쪽, 伍子胥 水戰兵法, 香港, 1991).

    한편 손무는 전쟁이란 홀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며 동맹외교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했다. 때마침 박식한 손무에게 솔깃한 정보가 입수됐다. 당시 당(唐)나라와 채(蔡)나라가 표면상으론 초나라의 속국이나 속으로는 초나라 수뇌부에 대한 적개심에 불타고 있다는 정보였다. 두 나라 군주들은 소국답게 대국을 섬긴다며 초나라를 예방하면서 왕에게 예물을 바친 바 있었다. 그런데 왕족 출신의 대장군 자상(子常)이라는 교양 없는 욕심꾸러기가 귀한 가문의 자신에게도 왕과 똑같은 예물을 바치라고 강요한 것이다. 이외에도 무례한 협박이 많았다고 한다.

    손무는 오왕에게 두 나라에 대한 비밀포섭 공작을 벌이자고 건의했다. 합려왕은 동의했고, 물밑 동맹외교는 마침내 성공했다.

    손무가 노린 것은 대초 전쟁의 개시에 앞선 군사전략적 포석이었다. 즉 현대 용어로 ‘전략적 기습(strategic surprise attack)’이다. 적이 대비하지 않는 의외의 지점과 방향에서 아군 주력이 진격을 개시함으로써 압승을 거두는 것이다.

    이는 독일군이 두 차례의 세계대전에서 프랑스로 진격할 때 독·불 국경선이 아니라 중립국인 벨기에의 영토 통과했던 경우를 방불케 한다. 유사시에 오나라 군대 주력은 비밀 동맹국인 당나라와 채나라의 영토를 통과하는 전략적 우회를 강행하려는 것이었다. 즉 오자서가 준비한 수로를 이용한 함선 수송으로 대군을 투입하려 했다.

    오자서와 손무는 나아가 오·초?결전에 앞서 ‘후고(後顧)의 염려’를 없애자고 건의했다. 즉 초나라의 속국이며 오나라에 적대적인 이웃 월(越)나라에 대한 예방적 일격이 필요하다고 본 것이다. 이에 동의한 합려왕이 출병하여 월왕 윤상(允常)에게 통격(痛擊)을 가했다. 비록 월나라를 정복하지는 못했으나 최소한 오·초?전쟁을 수행하는 동안 뒤에서 장난질을 하지 못할 정도로 그 전력을 파괴한다는 목적은 달성한 셈이었다.

    이에 더하여 오군은 오·초 접경지대에서 소규모의 무력충돌을 자주 일으켰다. 물론 초군을 피폐시키려는 기도가 깔려 있었다. 나아가 초군 수뇌부의 주의를 오·초 접경지대로 이끌어 이를 고착화함으로써 앞으로 실시할 전략적 우회의 기습 효과를 한층 높이려 한 것이다.

    한편, 아무리 부패했다 해도 초군 수뇌부가 무위도식만 일삼은 것은 아니었다. 그들도 오자서와 백비 등이 잇따라 탈출해 오나라로 가서 복수전을 획책한다는 정보를 접하고는 그 원인을 나름대로 분석했다.

    결국 원인이 간신 비무기의 참언과 군신(君臣) 이간의 부정적 작용에 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래서 군부의 요청에 따라 비무기와 그 가족 연루자들을 일망타진하고 숙청했다. 또 오자서를 따라 오나라로 망명했던 옛 태자 건의 아들 승(勝)을 비밀리에 설득해 다시 초나라로 귀환케 했다. 그러나 전쟁 준비 차원에서는 그다지 의미 있는 조치가 되지 못했다.

    백거(柏擧)의 결전

    드디어 기원전 506년 겨울, 결전을 위한 대진군이 개시됐다. 오군을 주력으로 당나라와 채나라 군대가 합세한 연합군은 오왕 합려의 호령에 일사분란하게 따랐다. 목표는 초나라 서울인 영(텽).

    그러나 동원 가능한 총병력 면에서 초나라가 우세했다. 이에 대해 오나라는 탁월한 전략·전술과 병력의 질적 우세로 맞서 이기려 했다. 우선 오군 주력은 ‘전략적 대(大)우회’를 감행, 동맹 약소국 영토를 통과하여 수로를 타고 대별산(大別山)을 돌아 초나라가 예기치 못한 측배(側背)에 갑자기 출현했다. 남부전선에 전면 포진한 초군의 주력부대를 무용지물로 만들고 주동적으로 새 북부전선을 형성한 것이다.

    구체적으로 오군의 주력은 함선으로 회하(淮河)를 서진하다 그 흐름이 크게 물굽이를 이루는 곳, 즉 회예(淮汭)에 집결한 다음 하선하여 강을 따라 행군, 한수(漢水)의 기슭에 도달했다.

    초군 수뇌부는 깜짝 놀라 대책회의를 열었다. 수도 방위를 위해 오군 격퇴가 급선무였다. 총사령관은 부패하고 무능한 영윤(令尹)인 자상(子常)이었으나 부사령관은 군사를 아는 똑똑한 좌사마(左司馬) 심윤술(沈尹戌)이었다.

    심윤술의 정세판단에 따르면 당시 초군의 약점은 병력 분산이고 오군의 약점은 전략적 우회에 따른 길고 방만한 보급선이었다. 그러므로 초군은 분진합격(分進合擊) 방식으로 병력을 집중해야 하며 이를 위해 우선 심윤술 자신이 북방을 돌아 그곳 병력을 모아서 오군 함선이 집결해 있는 회예를 화공으로 소각하겠다. 한편 본대는 한수 우안에 포진해 수도를 방어하면서 당분간 단독 출격을 삼가고 자기의 화공 성공을 협공 개시의 신호로 삼아 오군을 합격, 섬멸하자고 제의했다.

    뛰어난 작전 구상이다. 총사령관 자상도 처음에는 그 건의에 동의해 심윤술이 북쪽으로 출발했다. 그러나 대기 중 사황(史皇)이란 심복 부하가 자상의 귀에 속삭거렸다.

    “심윤술의 작전을 따르면 이기더라도 큰 공은 심윤술의 차지가 될 것입니다. 우리의 병력도 적지 않으니 화공을 기다릴 것 없이 강을 건너 적군을 칩시다.”

    결국 자상은 사황의 유혹에 넘어갔다. 완전한 승리를 위한 조건 형성을 기다리지 않고, 단독 출격을 결심한 것이다. 한수를 건너 진을 쳤다가 소별산과 대별산 사이에서 세 차례나 공격해봤으나 이기지 못했다. 일진일퇴를 거듭하면서 시일이 갈수록 초군은 밀리고 말았다. 11월19일에는 백자산(柏子山)과 거수(擧手) 사이의 평야에서 대진하게 됐다. 이것이 백거의 결전이다.

    수도를 점령하다

    아침에 왕제인 부개(夫槪)가 합려왕을 찾아와서 말했다.

    “적의 대장군 자상은 비겁하고 탐욕스러운 놈이어서 도대체 장병 사이에 위신이 서지 않습니다. 사기가 엉망입니다. 그러니 제가 선봉에 서서 자상의 본군으로 뚫고 들어가겠습니다. 그러면 먼저 보병이 도망칠 것이고 따라서 전군이 동요할 것입니다. 그때 국왕께서 전군을 들어 공격하세요. 적군 궤멸은 틀림없습니다. 오늘은 제가 선봉에 서겠으니 하명해주십시오.”

    그러나 합려왕은 혈기가 지나친 모험이라고 보아 허가하지 않았다. 한편 왕제 부개는 이상야릇한 용기에 들떠서 직속 장병에게 외쳤다. “오늘 내가 목숨을 내놓고 분전하면 반드시 적을 격멸하고 초의 서울을 점령하게 될 것이다. 틀림없다. 장병 여러분도 내게 목숨을 바치고 대공을 세우라.”

    그러고는 직속부대 5000명을 거느리고 독단으로 돌격을 개시했다. 적군의 붕괴는 예견한 그대로였다. 먼저 적의 보병대가 흩어져 도주하더니 전차대도 방향을 돌렸다. 오왕 합려는 그 광경을 바라보다 승기의 도래를 확신, 전군에 총돌격을 명령했다.

    반면 초군은 군사조직이 아니라 오합지졸에서 도망꾼 집단으로 변모했다. 초의 사령관 자상은 퇴각에 도망을 거듭하며 멀리 정나라로 도주하고 말았다. 애당초 부패분자, 욕심꾸러기를 가문만 믿고 총사령관에 임명한 것부터 잘못된 처사였다. 초나라 소왕(昭王)은 장강으로 빠져나가 배를 얻어 타고는 우선 동정호 기슭의 갈대밭에 숨었다.

    왕제 부개가 독단적으로 돌격했음에도 합려왕이 승기를 포착해 전군 총돌격을 명령한 것은 전투의 원칙이자 군사의 상식에 부합한다. 본시 유럽의 강대국 군대와 구 일본군은 동일한 싸움터에 투입된 병력의 어떤 일부가 독단이건 우연한 상황에 의해서건 돌격을 이행하면 여타 부대도 함께 돌격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아왔다.

    한편 구 중국의 장제스(蔣介石) 군대는 인근의 어느 한 구분대가 독단에 의해서나 사전연락 없이 돌격을 시작하면 보고도 모른 체하고 합세하지 않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그러다 결국은 각개격파 끝에 총체적 패망을 자초했다. 장제스 군대의 속물 장교들은 2500년 전 합려왕의 상식에도 미달한 우매한 무리였던 셈이다.

    백거의 싸움에 대한 후일담이 남아 있다. 자상에게 그릇되게 건의했던 대부 사황은 패전을 확인하자 “심윤술의 현명한 계략을 방해하여 전군을 패퇴케 한 책임은 내게 있다”고 뉘우치면서 후미에 남아 싸우다 자상을 대신해 전사했다. 반성할 능력이 있는 사람의 훌륭한 최후였다. 심윤술 자신은 사태가 절망적으로 전개되자 중도에 회군하여 자살함으로써 전사의 길을 택했다.

    오군의 추격전은 순풍에 돛을 단 듯했다. 초나라 수도에 가까운 청발천(淸發川)에 이르자 적군이 강을 건널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선봉에 있던 왕제 부개가 추격을 중지시키면서 말했다.

    “건너가게 하라, 먼저 건너간 적군은 겨우 목숨을 건졌다고 방심한다. 뒤따른 적군은 자기들도 살고 싶다고 도주에 전념하고 싸울 마음이 없어진다. 그러니 적군이 절반쯤 건너갔을 때를 기다려 추격을 개시하면 아군은 최소 희생으로 최대 전과를 거둘 수 있다.”

    실패작에 그친 점령 통치

    부개는 ‘손자병법’을 읽었거나, 아니면 당시의 군사 상식인 경험적 교훈을 집약하면서 벌써 그 지보(至寶)에 이른 것 같다. 예나 지금이나 군사심리에 대한 통찰력을 갖춰야만 훌륭한 지휘관이 될 수 있는 법이다.

    마침내 오군은 백거의 결전에서 승리한 후 10일간의 추격 끝에 초나라 수도 영을 점령할 수 있었다.

    오왕 합려와 그의 군대, 그리고 동맹국의 무력은 초나라 수도를 점령하자 모든 것을 전리품처럼 취급했다. 애당초 점령 후 준비가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두드러진 것은 정복자의 자세와 보복의 만행뿐이었다.

    우선 숙사 분배에 눈독을 들였는데, 왕궁과 공족 및 관료의 저택을 몰수해 오국의 신분을 기준으로 삼고 군공(軍功)을 아울러 감안한다면서 모두 분배했다. 저간에 허영심과 군공 자랑으로 말미암은 불평불만, 심지어 노골적 내분도 적지 않았다. 이와 더불어 부녀자 분배에 광분했다는데, 특히 왕후를 비롯한 공족과 중신들의 처첩이 각종 보물과 함께 쟁탈 대상이 됐다.

    하기야 오자서의 주요 관심은 복수였다. 부형의 원수로 지목했던 평왕(平王)의 묘소에서 시신을 끌어내어 채찍으로 300번 치고 갖가지 모독을 가했다는 기록이 있다. 소련군이 베를린 점령 후 히틀러의 소각된 시신을 다시 파내서 모독하던 보복 광경을 방불케 한다.

    오(吳)·초(楚) 전쟁의 희비 쌍곡선

    나폴레옹은 탁월한 군사가이자 현명한 정치가였다. 그러나 고대 중국의 오왕 합려는 군사에선 초나라를 이겼으나 정치엔 졌다.

    이러한 만행을 목격했거나 소문으로 들은 초나라의 민·관·군이 격분해 치를 떨면서 보복과 반항을 위해 결집하기 시작했다. 나아가 국제 여론도 좋을 까닭이 없었으니, 초나라에 대한 동정과 함께 부흥 원조의 방책이 모색되기 시작했다.

    오군의 점령 통치는 종국적으로 실패작이었다. 참 정복이 아니었던 것이다. 저항력이 소멸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참 승리도 아니었다. 심복을 가져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한 실패작과 대조되는 뚜렷한 성공작을 언급할 필요가 있겠다.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 후 일본에 적용한 점령정책이다.

    미국은 일본을 점령했지만, 말썽 많은 천황제에는 손대지 않았다. 그 대신 정치적으로 자유민주주의, 경제적으로 시장경제, 사회적으로 인권 옹호와 미국식 생활양식을 보급하고 미일 동맹을 맺어 군사적으로 일본을 보호하면서 평화와 번영을 묵묵히, 그러나 실감 있게 도입·육성했다.

    마침내 대다수 일본인으로 하여금 ‘져서 좋았다’는 친미의식을 가다듬게 했다. 나아가 미국은 최소한 100년에 걸쳐 ‘가장 믿을 수 있는 동맹국’을 확보한 것이다.

    초나라의 저항

    한마디로 보복심리란 대국적인 건국이념과 국가이익의 차원에서는 결코 바람직한 발상의 기조가 될 수 없다. 결국 합려왕의 오군도 초국 점령을 지속할 수 없는 중대 난국에 직면하여 부득이 철군하고 말았다. 초나라 저항세력의 재결집과 궐기, 이웃 진나라의 군사적 개입, 월나라의 배후 위협, 왕실의 무원칙한 권력 암투 등 내우외환이 격화된 때문이었다.

    하지만 보복은 개인생활과 사회윤리의 영역에선 그 상황이 달라질 수 있다. 예부터 정직하고 정의감이 강한 사람은 선악·시비의 가름이 명확했다. 부당한 피해를 당하면 반드시 보복해야 한다고 여겼던 것이다. 물론 국가질서가 정립된 나라에서는 국법의 집행이 사적 제재를 대행한다.

    그러나 사회통념에 의해 극악범죄라고 지탄받는 죄행이 상응한 공법상 처벌을 받지 않고 있다고 관찰되는 날에는 어떤 사태가 초래될 것인가.

    해당 범행은 늘어나고, 그에 대한 사적 제재 또한 사회통념에 의해 수긍되면서 증대하게 마련이다. 마침내 국법질서가 문란해져 망국의 나락을 향해 급진전하고 말 것이다. 사회통념이 납득하지 않는 형벌 완화론은 국법질서를 붕괴로 이끈다. 본시 인간의 유전적 요인은 매우 다양하다. 게다가 인격 형성에 작용하는 인간관계와 문화환경은 결코 한결같지 않다.

    더구나 한국인의 ‘한(恨)’은 부당한 피해로 말미암은 오랜 원한이 적극적 행동으로 발산되지 못하고 내면에 눌려 사무치면서 전승·만연돼온 탄식 어린 음성적 공격 감정이다.

    몽테뉴는 갈파한다. “분노는 압살할 때 내공(內攻)한다”고. 이어서 설명한다. “감정이란 발산시켜 털어놓으면 풀어진다. 그 칼끝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 바깥을 겨냥해야 한다.”(Montaigne, Essais, 제2권 제31장)

    무릇 응어리진 내향적 잔인성은 본디 순박하며 밝고 깨끗하던 민족성을 좀먹는다. 발산되지 못한 ‘한’의 울적 형태가 세칭 ‘물귀신 근성’이니 ‘지저분한 당파 싸움’ 등으로 타락한다. 우리 겨레는 민족사의 불행을 넘어 슬기로운 새 화합의 길에서 ‘본바탕 되찾기’를 이뤄야 할 것이다(필자, 民性論, 서울, 1982, 샘터사, 제7장).

    나폴레옹의 지혜, ‘軍政합작’

    중국의 현대사 연구자들은 춘추시대의 백거 싸움에 보이는 ‘전략적 대우회’의 성공작을 거듭 높이 평가해 마지않는다. 사실 초군의 주의를 남부전선으로 유인·고착시켜 놓고, 약소 동맹국 영토를 통과해 적군의 북부 측배에 출현, 기습적 승리를 거둔 걸출한 전략은 병법가 손무의 위대한 공적이다.

    그러나 손무가 한 일은 거기까지가 한계였다. 적아(敵我) 쌍방에 걸친 정치공작과 심리작전을 포함한 점령정책은 오왕 합려의 몫이었다. 그리고 합려는 군사에 이겼으나 정치엔 졌다.

    중국의 연구자들은 손무가 구상한 전략적 우회 작전을, 그로부터 2000년 후 프랑스의 나폴레옹이 이탈리아 진출 때 구상한 알프스 산맥 통과에 비교하기를 즐긴다.

    나폴레옹은 1796년 5월 대담한 우회 전략을 채택, 알프스 산맥을 통과해 이탈리아의 밀라노에 도달함으로써 오스트리아군의 배후에 진출해 기습적 대승을 거두었다. 그러니 손무와 나폴레옹은 군사적 발상의 기조에서 시대의 현격한 차이를 넘어 난형난제 격인 근사성을 느끼게 한다(中國歷代軍事戰略, 北京, 2003, 제1편, 제3장).

    그러나 나폴레옹은 탁월한 군사가이자 현명한 정치가였다. 그는 승리 후 점령정책에서 정복자가 아닌 해방자의 자세를 취했다. 그가 1796년 5월 밀라노에서 프랑스의 이탈리아 전선군 장병에게 보낸 훈시문의 일부를 소개한다.



    “장병 여러분! 우리는 모든 나라 인민의 벗이고, 특히 지금은 브루투스나 스키피오를 비롯한 모범적 위인들의 후예인 이탈리아 인민의 벗이다. 일찍이 세계를 통일한 대로마제국의 유적에 우리는 서 있는 것이다. 앞으로 우리는 여러 세기에 걸친 압정 때문에 노예화됐던 이탈리아 인민의 마음속에 옛 로마인의 늠름한 기상을 일깨워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승리한 우리들이 맡아서 이룩할 사업이다. 그래야만 우리의 승리는 후세의 역사에 획기적으로 부각될 것이다.”

    뛰어난 군사가이자 정치가인 나폴레옹은 만인이 우러르는 사령관인 동시에 적국의 포로들마저 존경하며 따르는 따뜻한 인정가였다. 언어의 마술사이기도 했다.

    반면 고대 중국의 손무는 군사적 재능에 있어선 나폴레옹에 손색이 없었으나 정치적 발언권이 없었다. 게다가 합려왕은 스탈린에 가까웠고, 오자서는 복수의 집념자로 돋보였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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