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권력승계 이후 북한의 경제정책을 한마디로 규정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한때는 적극적으로 시장을 확대하고 개방을 추진하려는 듯 했지만, 최근에는 다시 강력한 국가통제체제를 확립하려는 의지가 곳곳에서 확인된다. 단순한 정책분석 차원에서는 해석하기 어려운 이 같은 급변의 이면을 권력 핵심의 파워게임 차원에서 해부한 글을 소개한다. 1990년대 내각의 개혁정책을 통해 외화를 빨아들이기 시작한 군부의 이해관계와, 2005년 이후 강력한 통제정책으로의 복귀를 추진하고 있는 당내 보수파와 공안기관 연합세력의 이해관계가 충돌하고 있다는 흥미로운 분석이다.
- <편집자>
북한 화폐개혁 실패의 책임을 지고 총살됐다는 소문이 돌고 있는 박남기 전노동당 계획재정부장(사진 뒷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이 2009년 3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김일성종합대 수영장 현지지도를 수행하고 있다.
경제정책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김 위원장은 1995년 이후 군부에 힘을 실어주면서 이른바 ‘선군(先軍)정치’를 펼쳤다. 그러다가 2005년부터는 노동당 중앙당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군부와 중앙당은 김 위원장의 지지를 활용해 자신의 세력권을 확장하고 경제적 이권을 챙기는 방향으로 정책을 펴왔다. 따라서 어느 한쪽이 주도권을 잡으면 다른 한쪽은 상대적으로 소외되는 구조가 발생했다. 이처럼 군부와 중앙당은 각기 거대한 관료체로서 주도권과 이권을 놓고 갈등할 수밖에 없었고, 김 위원장은 이를 적절히 활용해 자신의 절대 권력을 영속화해왔다.
이 글은 김 위원장의 집권 이후를 크게 두 시기로 나누어 고찰한다. 우선은 1995 ~2004년의 군부 득세 시기이고, 다음은 2005년 이후 중앙당 중심의 보수공안파 득세 시기다. 두 시기에 나타난 정치적 특징과 정책방향을 비교하고 이들이 왜 바뀌어왔는지를 분석해보면 북한 내부에 존재하는 다양한 갈등과 분파의 경계선들이 나타난다. 즉 당과 군의 권력정치적 알력과 타협, 당내에서도 각 기관 사이의 주도권 다툼, 중앙당과 내각의 알력, 중앙과 지방의 알력, 시장의 확대와 억제에 대한 태도의 차이, 대외·대남정책에서 강경과 온건의 충돌, 대외무역 및 외자유치에서 주도권 다툼 등등이 그것이다.
#1995~2004년
군부의 대두, 비서국의 약화, 그리고 장마당 경제의 확산
1995년부터 2004년까지는 군부가 국정 주역으로 대두하고 중앙당 비서국이 현저히 약화되는 시기였다. 이 시기는 다시 세 단계로 세분할 수 있다. 첫 시기는 1995~97년으로, ‘선군정치’가 출범하면서 군부 주도가 시작되고 중앙당 비서국의 정책기능이 눈에 띄게 약화된 시기다.
두 번째는 1998~2000년이다. 이 무렵 김정일은 1998년 헌법개정을 통해 국방위원회를 강화하고 위원장으로 취임했다. 국방위원회는 주요 기간산업에 현역군인을 전권대표로 파견해 주요 경제지표 관리와 주요 국책사업을 담당케 함으로써 북한 경제 전반을 사실상 직접 관리했다. 그러는 동안 군부는 군부 일반의 ‘기관본위주의’ 차원에서 경제적 기득권을 확장했다. 1997~99년에는 중앙당 비서국과 지방당의 비서 및 간부진에 대한 대량숙청이 단행됐다. 이른바 ‘용성사건’과 ‘심화조 사건’을 통해 벌어진 이 대대적인 숙청 바람 속에서 주로 김일성 주석 시대의 인물들이 사라져갔다.
세 번째 시기인 2000~04년에는 내각이 전면에 나서서 개혁정책을 추진했다. 중앙당 비서국으로서는 다소간 굴욕적일 수밖에 없는 시기였다. 내각이 정책과 인사에 관한 중앙당의 권한을 침식했고, 중앙당 비서국의 기구와 인원은 크게 축소됐다. 노동당의 핵심이었던 장성택 당시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과 추종자들이 한꺼번에 실각한 것이 2004년 초의 일이었다. 같은 시기 내각은 분권적이고 시장친화적인 개혁정책을 추진했는데, 그 최대수혜자는 대대적으로 외화벌이에 나섰던 군부였다.
여기서 잠시 북한 군부의 외화벌이에 대해 자세히 언급할 필요가 있다. 군부 외화벌이가 확대되기 시작한 것은 1995년 무렵의 일이었다. 국가가 예산을 대줄 수 없으니 각급 부대가 운영자금을 스스로 마련하라는 취지였다. 이후 군부의 각급 부대와 기관은 무역회사를 설립하고 전국에 지사와 기지를 운영하면서 상업활동에 깊숙이 참여했다. 청년노동력의 70%를 장악하는 군부는 운송수단과 ‘군사활동’이라는 치외법권적 권리까지 한 손에 틀어쥐고 있다는 점에서 확실한 비교우위를 갖고 있었다.
이러한 군부 일반의 조직적이고 광범한 외화벌이 활동은 2000년대 초반 북한에서 장마당 경제가 팽창할 수 있었던 동맥 기능을 하게 된다. 장마당 경제의 확산을 통해 외화벌이를 활성화할 수 있었던 군부의 이해관계가 바로 2000~04년 내각이 추진했던 개혁정책을 정치적으로 뒷받침한 버팀목이었다. 2002년 9월에는 ‘국방공업 우선주의’가 주창되기도 했다. 이는 군부 일반의 외화벌이와는 분리된 군수공업부문의 이해관계를 보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2005년~현재
중앙당과 공안세력의 반격, 그리고 후계체제 수립 추진
2006년 12월 북한 평안북도 신의주시의 압록강 강둑에서 북한 군인들이 운반돼온 식량을 옮기고 있다. 중국과의 식량 무역은 북한의 쌀, 옥수수 가격 등에 큰 영향을 주는 요인이다.
이 시기 역시 셋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 번째 시기는 2005년 초부터다. 이 무렵 김정일 위원장은 개혁정책에 등을 돌리는 발언을 쏟아내기 시작했고, 중앙당을 중심으로 반개혁 공세가 거세졌다. 2004년까지 실시됐던 각종 경제정책과 조치들을 살펴보면 중앙당이 크게 반발할 만한 이유가 뚜렷이 보인다. 이후 내각의 위상은 도로 격하되기 시작했고, 개혁적 성향의 관료들이 줄줄이 실각했으며, 그 동안 진행돼온 개혁정책은 취소됐다. 이 시기 보수파 인물의 등용이 두드러졌다. 2005년 7월 중앙당 비서국에 계획재정부가 신설되면서 박남기가 부장에 취임했다. 같은 7월에는 중앙당 국제부장이던 김양건이 국방위원회 (대외담당) 참사로 임명된다. 장성택이 수도건설 제1부부장으로 복귀한 것 역시 그해 12월의 일이었다.
두 번째 시기는 2007년 5월부터 2008년 10월에 이르는 시기다. 보수공안파의 위상이 확고해진 가운데 더욱 공세적인 개혁 청산조치가 취해졌다. 그해 4월에는 내각의 수장으로 각종 개혁조치를 주도했던 박봉주가 최종적으로 실각했고, 이후 5월부터 ‘비사회주의적 요소 척결’을 모토로 하는 검열이 강도 높게 진행됐다. 김정일은 ‘시장은 비사회주의의 서식장’이라는 이른바 8·26방침을 하달했다.
한편 이 무렵 보수공안파는 남북정상회담을 적극 추진했다. 2007년 3월 김양건은 통일전선부 부장에 취임했다. 그의 실무책임하에 남북정상회담이 2007년 6월부터 7월 초 사이에 전격적으로 합의됐고, 8월 중순 열릴 예정이었다. 정상회담은 평양의 폭우 피해를 이유로 연기됐다. 우연찮게도 9월부터는 남북경협에 종사해온 인물들에 대한 조사와 숙청이 중앙당 주도로 시작됐다. 2차 남북정상회담이 열린 10월에는 장성택이 행정부장으로 승진했고, 시장에 대한 통제가 현저히 강화됐다. 이후 남북경협은 갖가지 우여곡절을 거쳐 2008년 말에 이르러 내각 관할에서 사실상 통전부 관할로 바뀐다. 2008년부터는 각종 무역회사에 대한 검열도 강력하게 진행됐다. 특히 중소단위의 군부 무역회사가 그 대상이었다. 3월부터 장성택 행정부장의 주도로 신의주를 포함한 북중 접경지역 일대의 군부 무역기관이 ‘지극히 가혹한’ 중앙의 집중검열에 시달려야만 했다.
세 번째 시기는 김 위원장이 뇌경색으로부터 회복한 2008년 10월부터 현재에 이르는 시기를 포괄한다. 사태 전환의 계기는 2008년 8월경이었다. 이 무렵 북한은 사실상 국가전략의 위기상황에 직면했다. 보수공안파의 국가전략은 다음과 같았을 것으로 보인다. 우선 군사적으로는 한국의 ‘자주적’ 대외안보정책을 방패막이로 미국의 비핵화 압박을 제어하고, 협상을 장기화하여 사실상 핵무기 보유를 묵인하도록 유도하는 한편 북한식 평화체제를 수립한다. 경제 및 대내 관계에서는 내부적으로 보수적 경제정책을 추진하되, 그 때문에 초래되는 경제부진을 남측의 지원으로 보충하면서 공안통치 강화를 통해 내부정치 안정과 정권 존속을 유지한다.
이러한 전략의 추진구도는 2008년 8월 전체적으로 벽에 부딪히기에 이른다. 이 시기 남측은 지원성 경협을 중단했고 외교안보정책에서 미국과의 공조를 강화했다. 2008년 8월경에는 미국과의 비핵화 협상이 난관에 부딪혔고 김정일의 건강까지 위태로워졌다.
된서리 맞은 군부 외화벌이
이러한 전략적 위기상황에 대응하기 위해 북한은 2008년 10월부터 2009년 4월까지 대내외 정책방향과 지도부 진용을 개편했다. 목표는 세 가지였다. 첫째, 대외 강공으로 협상입지를 현저히 개선한다. 둘째, 외부지원 중단이 초래한 정권의 재정수입 감소를 내부 수탈 강화를 통해 보충한다. 셋째, 대내적으로 정권 저항 요소를 제압하면서 후계체제를 출범시켜 내부정치 안정을 꾀한다.
국방위원회와 군부는 대내외 강경정책 수행에 적합하게 재편됐다. 2월경 군 지도부가 개편됐고, 같은 시기 김격식 총참모장이 서해를 담당하는 4군단장으로 보임됐다. 4월에는 중앙당 35호실과 작전부가 인민무력부의 정찰국에 통합되어 ‘정찰총국’으로 확대 개편됐다. 2009년 4월 헌법 개정을 통해 국방위원회의 권능과 구성도 재편됐다. 보수공안파와 군부 출신의 국방위원회 위원이 각각 2명씩 증가했다. 이후 국방위원회는 명실상부 대내외 핵심정책 결정의 공표자 및 하달자로 전면에 등장했다.
한편 김정은의 권력기반 마련을 위한 작업도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2010년 4월20일 ‘연합뉴스’의 보도에 따르면 김정일은 김정은의 독자 권력기반 구축과 관련한 기본지침을 준 것으로 전해진다. 즉 “나(김정일)는 군을 중심으로 하는 선군정치를 해왔지만 김 대장(김정은)은 보위부를 중심으로 정보정치를 해야 할 것”이라는 지침이다. 실제로 김정은은 2009년 3월부터 국가안전보위부의 수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2009년 12월31일 ‘자유아시아방송’은 전했다. 그가 정찰총국을 관장한다는 설도 있다. 이 밖에도 2010년 4월 인민보안성은 인민보안부로 승격됐다. 2010년 4월14일 단행된 100여 명의 장성급 승진에서도 국가보위부와 호위사령부 같은 통제 감시기관 책임자가 우대됐다. 이와 같은 진용 재편은 각종 강경정책 추진으로 이어졌다.
이런 분위기는 대내 경제정책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 목적은 한국의 지원 감소와 반(反)개혁조치에 따른 대내 경제침체가 정권의 재정을 더욱 어렵게 하자 이를 대내 수탈 강화와 해외 자본 유치를 통해 극복한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흥미로운 지점이 발견된다. 첫째, 반개혁적인 화폐개혁과 대외 개방성 조치가 2009년 말과 2010년 초에 거의 동시에 진행됐다. 다시 말해 ‘반개혁을 위한 개방조치’가 시도되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 중앙당이나 그와 관련한 인물들의 활동이 눈에 띄게 두드러졌다. 특히 장성택 계열의 인물들이 주요기관의 책임자로 부상하고 있다. 현재 추진되는 대내 경제정책은 이들 정책 주도그룹이 경제적 기반을 확장하려고 시도하는 것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셋째, 이러한 경제정책은 국가(또는 정권의) 재정 강화라는 명분을 갖고 있긴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이전 시기 시장활동에 깊은 연관을 축적해온 군부의 이익을 심각하게 침해하는 단계에 이른다. 군부가 중심이 되어 운영해온 외화벌이 무역기관이 단속의 된서리를 맞고 있는 것이 그 대표적인 징후다.
2009년 11월30일 실시된 화폐개혁은 정권의 재정을 강화하기 위해 벌인 사실상 전 사회적인 강탈 조치라고 할 수 있다. 이 조치는 중앙당 계획재정부가 실무를 맡았을 것이고 그 책임자인 박남기 부장이 지휘했을 것으로 보인다. 화폐개혁의 구체적인 추진과정에서는 당 보수파가 공안기관과 공동으로 기획하고 협력하는 양상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화폐개혁을 전후해 경제관련 법 11개가 무더기로 통과되기도 했다. ‘열린북한방송’에 따르면, 박남기를 비롯한 당 재정일꾼들은 “선군정치 이전과 마찬가지로 당이 무역과 외화관련 업무를 독점하기 위하여 노동당으로 국가재정과 무역을 단일화해야 한다”는 제의서를 2009년 11월 김정일 위원장에게 제출했다고 한다.
2008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외화벌이 무역기관에 대한 단속은 2009년을 거쳐 2010년에도 강도 높게 진행됐다. 화폐개혁의 주요 의도 가운데 하나는 이렇듯 강력한 처방을 통해 무역기관의 외화벌이를 재편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동안 각종 무역회사를 통해 외화벌이에 앞장섰던 군부는 이를 자신의 경제이권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 정면으로 저항했던 것으로 보인다. 박남기 부장은 이렇듯 화폐개혁과 무역기관 단속을 둘러싸고 빚어진 당과 군부 사이의 갈등으로 인해 해임된 것으로 보인다.
해외투자 유치 나선 중앙당
2010년 1월에 들어서자 해외에서 투자자금을 유치하기 위한 각종 개방 조치가 갑자기 활발하게 시행됐다. 대표적인 것이 1월 라선특별시 지정과 조선대풍그룹 이사회 개최, 2월 국가개발은행 설립과 평건투자개발그룹 활동개시, 김영일 국제부장의 랴오닝성과 지린성 방문이다. 3월 들어서는 국방위원회에 룡악산 지도총국이 설립됐고 평양, 남포, 신의주, 원산, 함흥, 김책, 라선, 청진 8개 도시를 경제특구로 개방하려고 준비 중이라는 설이 유포됐다.
이 가운데 가장 주목을 받았던 대풍그룹의 이사장은 아태평화위원회 위원장인 김양건 통전부장이다. 대풍그룹은 라선개발, 경제특구 개설, 국가개발은행 등에 관여하고 있다. 장성택 부장도 대풍그룹 이사 가운데 하나이며 김양건 역시 장성택계 인물로 알려져 있다. 국가개발은행 이사장은 39호실장을 맡았던 전일춘이다. 아태평화위원회는 대풍그룹과 함께 국가개발은행에도 관여하고 있다. 2009년 말에는 과거 무역상을 지낸 바 있는 리광근이 아태평화위원회의 부부장으로 임명됐는데, 리광근 역시 2004년 장성택의 실각 당시 함께 사라진 적이 있어 그의 측근으로 분류할 수 있다.
평건투자개발 또한 평양 건설의 책임을 맡고 있는 장성택 부장이 주관하는 것으로 보인다. 룡악산 지도총국은 산하의 령봉경제련합회를 통해 신의주 개발을 책임지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전하는데, 장성택은 이 조직에도 관여하고 있다거나 군수공업부 제1부부장인 주규창 휘하에 있다는 설이 나온다. 정리하자면, 최근 벌어지고 있는 각종 해외투자 유치 작업에는 각종 특수기관이 부각될 뿐 내각의 움직임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일련의 조치가 내각이 아니라 당과 특수기관에서 나온 것임을 유추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권과 저항의 관계
3월10일 북한이 대외 자금유치를 위해 설립한 국가개발은행이 공식 출범했다. 이사장에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통치자금 관리 책임자인 전일춘 노동당 39호 실장(왼쪽)이 선임됐다.
현재 보수공안파는 후계체제 구축과정에서 주역을 담당하는 것으로 보이며 국내치안, 대외무역, 대내경제를 모두 관장하고 있다. 경제와 관련해 군부가 갖고 있는 영향력을 줄이고자 하는 정책도 지속되고 있다. 한편에서는 보수공안파와 해당 기관들이 각자 자신의 경제적 이익기반을 적극적으로 확장하는 양상도 나타난다.
중앙당을 중심으로 하는 보수공안파의 이러한 정책방향에 대해 군부가 만족할 수 없는 것은 불문가지다. 경제적 이유와 권력정치적 이유에서 모두 그렇다. 우선 보수공안파가 정국을 주도한 이후로 장마당 경제와 군부의 외화벌이에 대한 억압, 화폐개혁 같은 경제정책이 추진됐다. 이들 정책은 분명 군부 전체의 상업적 경제활동에 심각한 타격을 주고 있다. 물론 국가경제 전체 견지에서 볼 때 군이 상업적인 활동에 관여하는 것은 분명히 잘못된 것으로 그 폐해가 크다. 문제는 현장의 각급 부대들이 직면해 있는 재정난을 어떻게 해결하는가이다. 군부의 외화벌이가 과도한 타격을 받는다면 이는 곧바로 군대의 운영에 타격을 줄 수밖에 없다. 인민군의 수뇌부와 지도자들이 이를 완전히 묵과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다음으로 권력정치적 측면을 보자. 2009년 1월 후계체제 구축작업이 본격적으로 전개되면서 군부에서도 후계구도에 충성스러운 인물이 분위기를 주도할 수 있도록 재편하려는 시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장령(장성) 승진 인사에서 국가보위부와 호위사령부 계통의 인물들이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것은 분명 보수공안파에 유리하다. 나아가 김영춘이나 오극렬 같은 군의 원로를 인민무력부장이나 국방위원으로 대우하면서 실질적인 권한 행사 일선에서는 물러나게 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
최선과 최악
최근 북한의 대외정책은 강경과 유화의 양쪽 측면을 모두 보여주고 있다. 강경과 유화가 각자 추진하는 목표는 서로 갈등을 일으키지만 북한 입장에서 볼 때 그 어느 쪽도 희생하기 어렵다는 게 상황을 더욱 난해하게 만든다. 강경책은 핵무기 보유를 국제적으로 인정받고 군사적·정치적인 ‘반공화국 책동’에 대응하면서 상황의 주도권을 쥐기 위해 구사된다. 천안함 공격 같은 군사도발은 그 가장 중요한 수단이다. 반면 유화책은 대내경제에서 반개혁 정책을 수행함으로써 발생하는 경제침체와 물자부족을 메우는 데 필요한 외부의 지원을 얻어내는 것이 주요 목적이다. 외교적으로는 6자회담 개최에 타협하고 남북정상회담 개최를 추진함으로써 해외투자를 유치하고 개방정책이 성공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내야 한다.
현재까지의 흐름을 반추해보면 강경책은 군부가, 유화책은 중앙당 통전부와 그 산하의 아태평화위원회가 각각 맡는 역할분담을 하고 있다. 또한 외자유치에 관심이 많은, 다시 말해 정권의 재정확충에 관심이 많은 장성택 당 행정부장은 유화책을 후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국가 운영의 차원에서 가장 이상적인 시나리오는 김정일 위원장의 통일되고 일관성 있는 지휘 하에 각자의 역할분담을 지켜나가면서 강경과 온건의 강도, 배합 수준, 투입시기를 조절하는 것이다. 가장 나쁜 시나리오는 지휘자인 김 위원장의 조율이 아니라 각 기관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강경책과 유화책을 남발하게 되는 경우다.
물론 이때도 군부와 중앙당은 자기들의 입장을 방어하기 위해 김 위원장의 이름을 내걸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전개되면 강경파와 유화파는 상대방의 동기를 의심하게 될 것이고, 갈등과 반목은 비약적으로 증가할 수밖에 없다. 강경파 역할을 맡은 군부는 더욱 강경한 협박정책이 불가피하도록 상황을 조작함으로써 자신의 존재감을 과도하게 확인시키는 한편, 내부경제 및 권력관리와 관련한 자신의 경제적 이권이 그 존재감에 부합하는 수준에서 존중되기를 기대할 것이다. 유화파는 국책사업 추진과 재정난 완화를 빌미로 외자유치가 가능한 대외여건을 ‘굴욕적’으로 조성하고 각종 독점적 이권사업을 전개해 개별 기관이나 권력자 개인의 사적인 부를 축적하거나 기관의 세력확장에 활용하려고 시도할 수 있다.
상황을 종합하자면, 대내외 정책에서 보수공안파와 군부 사이에 있는 정책 및 이익의 갈등 자체를 피하기란 불가능해 보인다. 김정일 위원장에게는 압도적인 권위를 바탕으로 그러한 갈등을 조정해내야 하는 책무가 있다. 김일성 주석의 사망 이후 최근까지 이는 대체로 성공적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미 부분적으로 실패했거나 앞으로 심각한 정도로 실패할 가능성도 충분히 존재한다. 다음과 같은 경우에 그렇다.
첫째, 김 위원장의 건강이 악화되면서 갈등조정에서 허점이 노출되는 경우다. 둘째, 대내 및 대외정책에서 보수공안파와 군부가 상대방 행위의 순수성을 의심하면서 서로에 대한 반감을 극단적으로 키워나가는 경우다. 셋째, 악화되는 대내외 경제여건으로 인해 경제적 이권이 줄어듦에 따라, 혹은 후계체제 구축에 따른 권력 재편기의 갈등으로 인해, 양측이 권력이나 경제이권의 배분에서 만족할 만한 합의에 도달하지 못하는 경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