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해 한용운이 머물렀으며, 전직 대통령 내외가 은신해 더 유명해진 백담사. 백담사와 더불어 영시암과 오세암, 봉정암을 품고 있는 내설악은 그 같은 유명세와 무관하게 아름답고 평화로운 계곡과 숲으로 한결같이 중생을 감싸왔다. 불심이 다소 부족해도, 부와 권력이 없어도 한번 걸어볼 용기와 적멸보궁을 확인할 의지만 있으면, 수백 년 묵은 아름드리 나무와 맑은 물, 미소가 온화한 동행자들이 당신을 격려하고 이끌어줄 것이다.
용대리에서 백담사에 이르는 계곡의 풍광.
“처사님 삼보일배의 여정은 어디까지입니까?”
“백담사에서 봉정암까지 할 참입니다.”
“시간이 많이 걸릴 텐데요?”
“시간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우문현답이 좀 더 이어졌지만, 더는 대화를 원치 않는 수행자에게 무례를 무릅쓰고 마지막으로 어리석은 질문을 하나 더 던졌다. “왜 삼보일배를 하십니까?” 뻔한 걸 왜 묻느냐는 듯 안타까운 침묵이 잠시 흐른 뒤에, “나 자신에 대한 성찰의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란 짧은 답이 돌아왔다.
삼보일배는 ‘불보(佛寶)·법보(法寶)·승보(僧寶)의 삼보(三寶)에 귀의한다는 뜻을 담고 있으며, 흔히 첫걸음에 이기심과 탐욕을 멸하고, 두 번째 걸음에 속세에 더럽혀진 진심(塵心)을 멸하고, 세 번째 걸음에 치심(恥心·어리석음)을 멸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고 한다. ‘세 걸음 걷고 한 번 절하면서 자신이 지은 모든 나쁜 업을 뉘우치고, 깨달음을 얻어 모든 생명을 돕겠다’는 서원을 하고 있는 이에게 삼보일배를 하는 이유를 물었으니 나의 무지가 지금도 부끄러울 뿐이다.
백담사에서 봉정암에 이르는 숲길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원시림 안으로 난 숲길이다. 삼보일배를 하는 처사처럼, 불자에게는 생애 한 번은 꼭 다녀와야 할 순례자의 숲길이라 할 수 있다.
세월이 가져온 내설악의 변화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이 있을까? 백담사와 영시암과 오세암과 봉정암을 품고 있는 내설악도 예외는 아니다. 접근 방법과 이용 제도와 찾는 사람도 수많은 변화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30~40년 전에는 상봉 시외버스터미널에서 속초행 첫 버스를 타고 덜컹거리는 비포장도로를 4~5시간 달려 인제와 원통을 지나 용대리에서 내리면 설악산 대청봉을 향한 결연한 의지를 시험할 수 있는 20여 ㎞의 긴 여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텐트와 취사도구, 이틀이나 사흘치 식량이 들어 있는 배낭이 크고 무거웠지만, 산꾼들에게는 당연한 차림이었다.
그러나 세월이 많은 것을 변화시켰다. 새로 생긴 서울-춘천-동홍천 고속도로와 확장된 국도 덕분에 서울에서 용대리에 이르는 데 걸리는 시간은 불과 2시간 반으로 줄어들었다. 절집에 이르는 변화는 또 있었다. 용대리에서 백담사에 이르는 8㎞의 계곡 길도 20여분 만에 주파할 수 있는 교통편이 생긴 것이다. 용대리 주민들이 운행하는 버스 편이 없던 시절엔, 그 계곡 길을 지프나 겨우 다닐 수 있었고, 대부분은 두발로 걸어야 했다.
이 땅의 여느 국립공원처럼, 내설악을 찾는 이들에게도 제약이 많다. 국립공원 제도가 정착되지 않았던 시절엔 누구나 할 수 있었던 많은 일이, 오늘날은 하면 안 되는 일, 또는 할 수 없는 일이 되어버린 것 또한 세월이 만든 변화라 할 수 있다. 계곡에서 수영을 할 수 없음은 물론이고, 아무 곳에서나 취사를 해서도 안 되고, 함부로 야영할 수 없고, 정해진 등산로가 아닌 등산로를 이용할 수 없는 규제들이 바로 설악산을 찾는 이들이 자연스럽게 수용해야 할 변화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큰 변화는 내설악을 찾는 탐방객들의 성격이다. 등산을 즐기는 산악인들 못지않게 봉정암의 적멸보궁을 찾는 순례자가 급격하게 늘어난 점을 간과할 수 없다. 절정기엔 봉정암을 순례하는 불자의 숫자가 하루에 3000명에 달한다고 하니, 등산객보다 순례자의 숫자가 더 많다는 주장에 귀를 열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내설악을 찾는 사람들의 행색도 단출해졌다. 순례자 대부분이 간식과 우의와 여벌옷을 넣을 수 있는 작은 배낭 하나만 달랑 메고 산을 찾기 때문이다.
용대리에서 백담사에 이르는 ‘느림의 숲길’
백담사를 자주 드나드는 불자나 설악산을 계절마다 찾는 산악인에게, 용대리에서 백담사에 이르는 계곡 길은 결코 멀거나 지루하지 않다. 굽이를 돌 때마다 새로운 풍광이 펼쳐지고, 아름다운 숲, 깊이와 폭이 제각각인 계곡이 순간순간 나타나며, 물빛의 푸른 정도가 수시로 바뀌는 담(潭)이 어우러진 계곡 길은 절집이나 산을 찾는 사람들만을 위한 하늘의 축복이었다. 어느 곳에서도 쉬 찾을 수 없는 긴 들머리 숲길은 계절에 따라 각기 다른 풍광을 선사했기에 그 길이 지루하기보다는 오히려 걷는 사람만이 특권을 누리는 것 같아 즐거웠다. 특히 활엽수들로 이루어진 계곡 길의 신록과 단풍은 걸음품이 전혀 아깝지 않을 만큼 아름다웠다.
교통편이 없던 시절에 계곡 길의 마지막 모퉁이쯤에 있었던 백담사로 넘어가는 고갯마루 샛길도 잊을 수 없다. 오늘날과 달리, 계곡을 건너지 않고 산모퉁이 능선을 넘어 무금선원이 자리 잡은 곳으로 바로 내려서는 샛길은 환상적이었다. 지금처럼 당우(堂宇)가 많지 않고, 고갯마루 능선에서 내려다보면 아름드리 전나무들이 수호신장 모양으로 고졸한 백담사를 감싸고 선 모습이 신비스러움과 함께 고고한 기상을 뿜어냈다.
옛 추억을 더듬어 백담사를 찾은 지난 몇 년 동안, 아직도 기억 속에 생생하게 살아 있는 그 샛길을 가늠해보고자 몇 번이나 눈길을 보냈지만, 샛길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백담사와 용대리를 왕복하는 교통편이 생기고, 절집 동편에 선원 건물이 앉혀지고, 또 이곳에 머물렀던 전직 대통령의 신변보호를 위해 샛길을 사용하지 않게 되었을 것으로 추측은 되지만, 옛길에 대한 추억은 더 강한 그리움으로 변했다.
최근 몇 년 동안 내설악을 드나들면서, 눈으로 직접 확인한 사실은 꽤 많은 이가 백담사와 용대리를 이어주는 버스 편을 이용하지 않고, 즐겁게 걷는다는 점이다. 버스가 운행을 시작하기 전인 이른 아침시간이나 운행을 마친 뒤인 오후 6시 이후에 특히 가족 단위 방문객이나 동호인들이 계곡과 숲을 느긋하게 걷는 모습이 부러웠다. 하루하루 속도전에 내몰리고 있는 우리네 삶에서 자신의 능력에 맞게 자신의 운행속도로 자연을 관조하며 그 미묘한 변화까지 느끼면서 걷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기에 더욱 그랬다.
백담사(百潭寺)는 자장율사가 647년(진덕여왕 1년)에 설악산 한계리에 창건한 한계사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한계사로 창건된 후, 1000년의 세월을 거치면서 운흥사, 심원사, 선구사, 영취사라 불리다가 1772년(영조 51년)에 이르러 오늘날의 위치에 자리 잡았다. 백담사 사적기에는 1783년(정조 7년) 최봉과 운담이 백담사로 개칭했음을 밝히고 있다. 근대에 이르러 만해 한용운이 이곳에 머물러 ‘불교유신론’ ‘십현담주해’ ‘님의 침묵’을 집필하면서부터 백담사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6·25전쟁 때 소실됐다가 1957년부터 법당, 법화실, 화엄실, 나한전, 관음전, 산신각 등이 재건되었고, 근래에 이르러 만해와 관련된 기념관, 교육관, 연구관, 수련원, 도서관과 함께 기초선원인 무금선원이 건립되었다. 백담사에는 국가 지정 문화재인 보물 제1182호 목조아미타불좌상이 있다. 절 이름(寺名)과 관련해 설악산 대청봉에서 절집까지 크고 작은 담(潭)이 100개째 있는 곳에 절을 세운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백담사에서 영시암에 이르는 ‘미소의 숲길’
백담사에서 영시암(永矢庵)까지 3.5㎞는 봉정암에 이르는 11㎞의 여정 중에 가장 편한 구간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수렴동계곡을 괄괄거리면서 흘러내려오는 물소리에 귀가 먹먹해지기도 하지만, 계곡 옆으로 난 목책로를 따라 주변의 풍광을 감상하면서 걷는 즐거움은 다른 절집에서는 쉬 경험할 수 없다. 울창한 숲길 사이로 난 평지와 다름없는 길을 느긋한 마음으로 음미하듯 걸으면, ‘가장 아름다운 미소’를 만나는 즐거움을 덤으로 얻을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주저 없이 이 길을 ‘미소의 숲길’이라고 명명했다.
지난해 7월에 봉정암을 오르면서 경험하고, 얼마 전인 5월 하순에 이 길을 다시 찾았을 때 또 한번 경험한 아름다운 미소를 잊을 수 없다. 봉정암에서 새벽기도를 마친 불자들이 6시쯤, 미역국에 담긴 밥 한 덩이와 서너 조각의 오이김치로 아침 공양을 마친 후, 주먹밥을 배급받아 11㎞의 하산 길을 나서는 것이 적멸보궁을 찾는 순례자들의 일반적인 일정이다. 그래서 영시암 부근은 기도를 마치고 하산 중인 순례자들과, 기도를 위해 봉정암으로 오르는 불자들을 만나는 장소가 되기 쉽다. 오르든 내리든 방향에 관계없이, 모든 순례자의 얼굴에는 도시에서는 보기 힘든 미소가 가득했다. 특히 하산 길의 순례자들 얼굴에 가득 번진 미소가 인상적이었다. 간밤의 철야기도가 만족스러웠던 것인지, 왕복 20여 ㎞의 순례 길을 무사히 마쳤다는 안도감 때문인지는 몰라도, 하산 길의 불자들에게서 확인한 미소는 순수하고 자연스러운 미소였다.
복원 공사가 진행 중인 영시암.
영시암은 6·25전쟁으로 소실된 터에 지금도 불사가 계속되고 있다. 백담사 주지로 있던 설봉 스님이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의 후손인 일중(一中) 김충현(金忠顯)과 여초(如初) 김응현(金膺顯) 서예가 형제의 도움을 받아 1992년부터 복원 사업을 시작해, 옛 명맥을 이어가고자 당우를 건립하는 작업이 계속되고 있다. 영시암의 복원에 얽힌 사연을 조사하면서 영시암의 옛 주인이 삼연 김창흡이며, 삼연이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과 함께 설악산의 아름다움을 누구보다 먼저 세상에 널리 알린 인물이라는 사실을 새롭게 알았다.
삼연과 영시암, 또 삼연과 설악산의 관계를 알기 위해서는 그의 가계(家系)부터 살펴봐야 한다. 삼연의 증조부는 김상헌(金尙憲)이다. 지난 3월호에 통도사 들머리 숲길의 바위에 새겨진 인물들을 소개하면서, 김상헌과 그의 형 김상용(金尙容)에 대한 설명을 덧붙인 바 있다. 형 김상용은 병자호란 당시 비빈(妃嬪)을 호종(護從)하다가 강화도가 함락되자 자결한 충신이고, 아우 김상헌은 병자호란 때 척화를 주장하다 심양으로 끌려가면서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 시조를 남긴 충신이다. 삼연의 형제들 역시 증조부나 아버지 못지않게 일세에 이름을 떨쳤다. 장남 김창집(金昌集)은 숙종 때 영의정을 지냈고, 둘째 김창협(金昌協)은 대제학을, 그리고 삼남인 삼연 김창흡과 넷째 김창업(金昌業)은 당대에 학문으로 이름을 떨쳤다. 우리 역사에서 부자 양대(兩代)가 영의정을 지냈으며, 양대가 사사(賜死)된 가문은 이들이 유일하다.
삼연은 1689년(숙종 15년)에 부친 김수항이 장희빈 소생의 세자 책봉을 반대(己巳禍變)해 죽임을 당하자 1705년 백담사로 들어온 후, 4년 뒤에 내설악 깊은 곳에 정사(精舍)를 세우고 은거한다. 그는 은거지의 이름을 처음에는 삼연정사라 부르다가, 뒤에 영시암으로 명명했다고 한다. 1711년 어느 날 선생의 식비(食婢)가 영시암 뒤에 있는 골짜기에서 범에게 물려 죽는 변을 당하자 이곳을 떠나 지금의 화천군으로 거처를 옮겼다고 한다. 삼연이 남긴 시 ‘영시암’은 부친의 죽음 뒤에 설악산에 입산하게 된 연유와 당시의 심경을 전하고 있다.
영시암(永矢庵)
내 삶은 괴로워 즐거움이 없고/ 세상 모든 일이 견디기 어려워라
늙어 설악 산중에 들어와/ 여기 영시암을 지었네.
노산 이은상이 1933년에 쓴 기행문 ‘설악행각’에는 영시암에서 삼연의 유적비를 읽고 그 소회를 밝히는 대목이 있다. 하지만 6·25전쟁 통에 그 유적비는 사라졌다. 삼연을 매월당과 함께 설악을 세상에 알린 인물로 꼽는 것은 그의 학덕을 숭상한 많은 선비가 영시암에 머물고 있는 그를 찾아 설악을 들락거리면서 설악의 비경을 시문으로 지어 세상에 널리 알렸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내용은 ‘영시암기(永矢庵記)’에 기록된 ‘혹 휴양하려는 사람이 먼 곳에서 다투어 몰려왔고, 혹 기를 기르려는 선비들이 사방에서 구름처럼 모여들었다(或息心之人萬里爭趨 或養氣之士六合雲會)’라는 구절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매월당과 삼연으로 인해 설악산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음을 나타내는 흔적은 조선시대 여러 사대부가 남긴 시문에서도 확인된다. 조선 후기 문신 김종후가 남긴 시는 삼연과 매월당의 영향력을 보여준다.
영시암에서 자고 오세암을 찾아
동봉(김시습)의 마음은 곧 선비 같고/ 삼연의 자취는 부처님일세.
훌륭하다. 이 산속에/ 천년을 한집에서 함께하세.
우뚝 솟아 엄숙하며 존엄한 천개의 봉우리요/ 요란한 소리로 달리고 격렬하게 흐르는 만 갈래 물일레/ 살 곳을 가려 여기 머물면/ 어찌 그 덕을 본받지 않으리오.
산수가 여운을 간직하듯/ 내가 지내왔던 일 어제와 같네.
판자 감상은 허술하게 만들었어도/ 기와 처마 아래 비석은 읽을 수 있네.
가까운 것을 사랑하고 먼 것을 잊으라니/ 누가 이 의문을 해설해주려나.
영시암에서 오세암에 이르는 ‘사색의 숲길’
오세암 가는 길에 만날 수 있는 전나무 노거수.
이 길은 마등령으로 이어져 신흥사로 넘어가지만, 다른 한편으론 봉정암으로 오르는 길로 갈라진다. 오세암까지는 완만한 경사길이 계속되는데, 수백 년 묵은 아름드리 전나무와 신갈나무, 단풍나무들이 우거져 있다. 노거수(老巨樹)를 만나면 나무 앞에서 거친 숨을 가라앉히고, 고개를 들어 하늘로 솟아 있는 거대한 덩치를 가늠해본 다음, 사방을 덮고 있는 잎들을 둘러보면 즐겁다.
이 숲길은 과거 설악산을 찾았던 옛 선인들과 대면할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멀리 신라의 자장율사는 물론이고, 매월당 김시습(1435~1493)이 거닐던 숲길임을 인식하면, 2.5㎞의 짧은 숲길이 예사롭지 않게 다가온다. 노산이 설악산을 답파하면서 남긴 기행문 ‘설악행각’에 실린 글에는 “매월당 김시습(金時習)의 유상(遺像) 이본(二本) 앞에 마음의 고개를 몇 번이나 조아립니다”라는 구절이 있다. 1930년대만 해도 암자에 매월당의 초상화가 소장되어 있었음을 미루어볼 때, 오세암과 매월당의 인연이 얼마나 각별했는지 상상할 수 있다.
오세암은 643년 자장율사가 창건한 관음암(觀音庵)에서 유래됐다. 오세암이란 암자의 명칭은 관음설화를 담고 있어 흥미롭다. 관음암을 중건(1643)한 설정(雪淨)스님은 고아가 된, 형님의 아들을 키우고 있었다. 어느 해 가을, 겨울 양식을 구하러 양양에 다녀와야만 했다. 길을 떠나기 전에 며칠 동안 먹을 밥을 지어놓고 4세 된 조카에게 관세음보살을 찾으면 보살펴줄 것이라 이른 후 길을 떠났다. 그러나 장을 보고 신흥사에 도착했을 때 밤새 내린 폭설로 마등령을 넘어올 수 없었다. 눈이 녹은 이듬해 3월에 돌아오니 죽었을 것으로 생각했던 조카가 목탁을 치며 관세음보살을 부르고 있었다고 한다. 해가 바뀌어 다섯 살이 된 동자가 관음의 신력(神力)으로 살아난 것을 기리고자 그때부터 오세암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노산은 ‘설악행각’에서 “오세(암)의 일컬음이 혹은 오세신동의 견성한 곳이라 해서 오세라고 일컬은 것이라고도 하는데, 여러 절 조사(祖師) 스님들의 기록을 보면 과연 ‘오세조사’란 이가 있기는 했으나 혹시 사실일 수도 있겠고, 또 혹은 말하되 매월당 선생이 이곳에서 도를 닦았는데 일찍이 그를 일러 ‘오세신동’이라고 일컬어왔던 것이므로 이곳을 ‘오세’라고 했다는 것인바 두 가지 말이 모두 문헌에는 없는 것인즉 어느 것이 옳은지 자세치 않다”고 서술하고 있다. 이런 이야기는 오세암과 매월당의 깊은 인연을 다시 한 번 확인해 주는 내용이라 할 수 있다. 매월당이 남긴 시는 500년 전의 설악과 오세암의 옛 모습을 전하고 있다.
저물 무렵(晩意)
천 봉우리 만 골짜기 그 너머로(萬壑千峰外)
한 조각 구름 밑 새가 돌아오누나(孤雲獨鳥還)
올해는 이 절에서 지낸다지만(此年居是寺)
다음해는 어느 산 향해 떠나갈거나(來歲向何山)
바람 차니 솔 그림자 창에 어리고(風息松窓靜)
향 스러져 스님의 방 하도 고요해(香銷禪室閑)
진작에 이 세상 다 끊어버리니(此生吾己斷)
내 발자취 물과 구름 사이 남아있으리(樓迹水雲間)
오세암에서 봉정암에 이르는 ‘재충전의 숲길’
봉정암의 적멸보궁을 찾고자 백담사와 영시암과 오세암을 오른 순례자들에게 남은 마지막 구간은 오세암에서 봉정암으로 오르는 가장 힘든 4㎞의 숲길이다. 거리는 그리 멀지 않지만, 이 길은 오르막과 내리막이 3~4번 계속되는 길이라 힘이 들고, 지치기 쉽다. 그러나 첫 산마루로 올라서면, 저 멀리 대청봉의 부드러운 능선이 눈앞에 나타나고, 두 번째 마루로 올라서면 용아장성(龍牙長城)의 암봉들이 병풍처럼 눈앞에 펼쳐지는 장관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서둘 필요 없이 산마루에 올라설 때마다 주저앉아 눈앞에 펼쳐지는 풍광을 차분히 감상하면 체력을 보충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이 길을 ‘재충전의 숲길’이라 명명했다.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다고, 이 길은 서너 번의 계곡을 가로질러 건너는 기회도 있다. 첫 계곡은 가야동계곡의 상류로, 아기자기한 물길을 건넌다. 두 번째 계곡의 규모가 좀 크지만 그래도 수렴동계곡이나 구곡담계곡에 비하면 그리 크지 않다. 이 숲길의 최고 미덕은 지친 다리와 발을 쉬게 할 수 있는 계곡물로 접근하기가 좋다는 점이다. 등산화를 벗고, 졸졸 흐르는 계곡물에 발을 담그면 산행의 속도를 조금 늦추고 쉴 수 있다.
인적 드문 깊은 산속에서 찬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세상을 관조하는 탁족(濯足)은 누구나 즐길 수 있는 도락이 아니다. 자연을 즐기고, 자연의 가치를 아는 이들만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이다. 흐르는 물속에 발을 담근 시간에 비례해 몸이 상쾌해지고, 기분이 깨끗해지는 쇄락(灑落)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어느 순간 도시의 온갖 욕망과 스트레스는 사라지고, 마음의 평화와 고요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불자 여부를 떠나 순례자로 변한 여러분 자신을 만날 수 있다면, 여러분의 순례는 대성공이다.
이제는 마지막 오르막길만 남았다. 이 오르막만 넘으면, 순례자의 최종 목적지인 봉정암이다. 바로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불뇌사리보탑이 서 있는 봉우리에 직접 올라서는 여정만 남았다.
봉정암 찾아 나선 순례자들
“노(老) 보살님, 뭐 하러 이렇게 힘든 길을 나섰습니까?” “부처님께서 소원을 다 들어주신답디까?” 영시암을 막 지나 인근의 전나무 숲을 관통하는 가파른 오르막길에 잠시 걸음을 멈추고 땀을 훔치고 있던 고령의 보살은 나의 시답잖은 질문에 그저 얼굴 가득 미소로 답을 대신했다. 가슴에는 ‘대구 허 보살’이라는 작은 명찰이 붙어 있었다. 편치 않은 다리로 험한 산길을 힘들게 걷는 노인에게 봉정암 가는 길은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사실 궁금했다. 이처럼 많은 보살이 힘든 여정을 감수하면서 봉정암을 찾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나의 궁금증은 봉정암 요사채의 지혜전 103호실에서도 이어졌다. 맨 먼저 방을 배정받은 덕분에 마치 주인처럼 뒤에 오는 처사들과 수인사를 나눈 후, 대화의 다음 순서는 자연스럽게 어떻게, 또 왜 왔느냐로 이어졌다. 하룻밤을 함께 묵게 된 열두 처사의 여정은 제각각이었다. 백담사에서 영시암과 수렴동대피소를 거쳐서 구곡담계곡 길을 타고 봉정암에 온 이가 있는가 하면, 구곡담계곡 길 대신에 영시암에서 오세암을 거쳐 봉정암에 이른 일행도 있었다. 홀로 오색약수터에서 대청봉을 올라 봉정암에 온, 군 입대를 앞둔 대학생도 있었다. 봉정암에 온 사연은 제각각이었지만, 적어도 하룻밤을 절집에서 묵는 이들의 목적은 한결같이 적멸보궁 참배였다.
불뇌사리보탑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주고, 한 중년 부부에게서 들은 답변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왜 오셨느냐”는 나의 엉뚱한 질문에 “우선 이처럼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시간을 보내니 속세의 때를 씻어내고 정신이 맑아져서 좋고, 꽤 먼 거리를 직접 걸어야만 하니 건강에 자신이 생겨 좋고, 그리고 5대 적멸보궁의 한 곳을 참배할 수 있으니 좋을 수밖에 없지 않은가”라고 답한 것이다. 이 부부는 봉정암을 제외한 다른 적멸보궁은 이미 참배했지만, 지리적 여건 때문에 미루고 있던 봉정암을 마침내 오르니 밀린 숙제를 마친 것 같은 기분이라 행복하다고 했다.
봉정암 적멸보궁의 숨은 매력은 아마도 쉽게 다가갈 수 없는 지리적 여건이 더했을 것이다. 다른 적멸보궁과 달리 봉정암은 해발 1244m의 내설악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왕복 22㎞(동절기엔 용대리-백담사 구간을 운행하는 버스가 운행을 멈춰 약 40㎞)의 발품을 팔아야만 참배할 수 있다. 따라서 봉정암 가는 길은 결코 쉽지 않다. 안락하지 못한 이 길에 계절을 가리지 않고 불자들의 순례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순례자의 길은 기독교 3대 성지 중 하나로 일컬어지는 ‘카미노 데 산티아고(산티아고로 가는 길)’다. 프랑스의 국경도시 ‘생 장 피 드 포르’에서 시작해 피레네 산맥을 넘어 스페인으로 들어가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까지 가는 800㎞의 여정이다. 1993년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이 길은 오늘날 기독교도뿐만 아니라 전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순례자의 길로 이름을 얻고 있다.
불자들에게‘봉정암 가는 길’은 ‘카미노 데 산티아고’처럼 순례자의 길이다. 돌과 바위투성이의 험한 산길이지만, 빼어나게 아름다운데다, 무엇보다 순례자 누구에게나 공평하기 때문에 평화롭다. 이 길은 빈부를 가리지 않는다. 권세가 있고 없음을 따지지 않는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다. 문명의 이기라는 자동차가 끼어들 틈을 주지 않는다. 오직 자신의 힘으로 걸어야만 다가갈 수 있다. 다섯 곳의 적멸보궁 중에 이처럼 먼 거리를 땀 흘려 직접 걸어서 다가갈 수 있는 곳은 봉정암뿐이다. 바로 봉정암 가는 길이 ‘이 땅 최고의 순례자의 길’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이유다.
울창한 천연림 터널
‘봉정암 가는 길’은 ‘산티아고로 가는 길’만큼 길지는 않지만,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았다. 1300여 년 전 당나라에서 모셔온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해 봉정암을 창건했던 자장의 선견지명이 녹아 있고, 소실된 봉정암을 중건한 원효의 땀방울이 맺혀 있으며, 독립과 불교 진흥을 모색했던 만해의 고뇌가 녹아 있는 길이기에 장구한 역사를 간직한 순례자의 길이다. 오늘날 수많은 불자가 이 순례자의 길을 찾는 이유도 시공을 초월해 자장과 원효와 만해를 만나는 한편, 힘든 길을 걸으면서 자신을 만나고, 가족을 만나고, 중생을 만나고, 자연을 만나고, 마침내 부처님을 만나고자 함이 아닐까.
이 순례자의 길이 평화롭고 아름다운 이유는 또 있다. 봉정암에 이르는 모든 여정이 울창한 천연림으로 덮여 있는 숲길이기 때문이다. 용대리-백담사-영시암-오세암(또는 수렴동대피소)-봉정암에 이르는 이 순례자의 길은 단풍나무, 신갈나무, 굴참나무, 거제수나무, 함박나무, 벚나무, 개박달나무 등의 다양한 활엽수 천연림과 소나무, 잣나무, 전나무 천연림의 터널로 끊임없이 이어진다. 다른 곳의 숲길과 달리 이 순례자의 숲길이 더욱 각별한 이유는 문명의 편리함이나 안락함 대신에 부처님을 향한 신실한 믿음과 불자 상호간의 격려와 자신에게 던지는 용기가 충만하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다움을 나타내는 대표적 행위인 직립보행을 통해서 자연 그대로의 원시적 불편함을 극복하면서 부처님의 나라에 다가갈 수 있는 원초적 능력을 확인할 수 있는 숲길의 의미는 그래서 더욱 새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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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름 동안 독감을 앓다가 착 가라앉은 기분도 추스르고, 또 육체의 한계도 시험할 겸, 동해안에 200㎖의 비가 내린 다음날, 순례자의 길을 다시 나섰다. 20여 ㎞에 달하는 순례자의 길을 낮 시간에 거닐면서 고통도 많았지만, 그만큼 즐거움도 컸다. 미국의 심리학자 프레데릭 엠 허드슨 박사는 “노화(老化)란 육체는 쇠락해도 정신은 성장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던가. 나이 듦을 두려워하고 거부하기보다 자연에서 찾는 작은 즐거움에도 늘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긍정의 힘이 정신을 성장시킨다는 것을 새삼 확인했던 걸음이었다. 독자 여러분도 올여름 백담사에서 봉정암에 이르는 순례자의 행렬에 한번 동참해볼 의향은 없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