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7월호

세계적 패션모델이자 인권운동가 와리스 디리

여성할례를 고백해 세상을 바꾼 사막의 꽃 “운명에 맞서지 않으면 운명은 언제나 당신을 나락으로 잡아끈다”

  • 허문명│동아일보 국제부 차장 angelhuh@donga.com│

    입력2010-07-06 14:47: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소말리아 유목민 소녀에서 세계적 패션모델이 됐다는 점에서 현대판 신데렐라인 와리스 디리.
    • 그러나 그녀의 미덕은 극적인 신분상승을 일궈낸 인생역전의 주인공이라는 점이 아니라 여성할례라는 비극적 경험을 세상에 고백해 할례문제를 세계적 인권이슈로 만들어냈다는 데 있다.
    공병호씨는 최근 펴낸 ‘대한민국 성장통’이란 책에서 지금 이 시대 대한민국 사람들이 느끼는 고통과 불편함의 근원이 ‘당연히 이 정도는 (월급을) 받아야 한다’거나 ‘당연히 이 정도 생활수준은 유지해야 한다’는 기대수준에 있다고 꼽는다. 그는 “한국 사람들은 평균적으로 과거보다 아주 잘살게 되었는데 이런 소리를 하면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화를 내는 사람이 있다”면서 구체적으로 객관적인 수치를 들이댄다.

    알다시피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2만달러 안팎이다. 글로벌리서치리스트라는 웹 사이트를 이용해 계산해보면 이 소득수준은 전세계 부유층 인구의 상위 11%, 다시 말해 약 60억 지구촌 인구 중 6억6964만2941명 안에 든다. 또 우리 사회에서 매달 200만원을 버는 사람은 연봉 수준이 매우 낮다고 생각하겠지만 중국만 해도 대도시 대졸자 초임이 우리 돈으로 34만원, 대학원졸업자는 51만원에 불과하다.

    좀 더 극단적인 사례로 들어가 보면 세계은행은 2004년 기준으로 세계 인구 중 하루 1.25달러(1500원) 이하로 생활하는 절대 빈곤층이 무려 9억6800만명이라고 밝혔다. 하루 수입이 그보다 적은 사람을 포함하면 14억명이나 된다. 물론 사회적 격차는 벌어지고 있지만 시선을 우리 안이 아니라 바깥으로 돌리면 한국인의 삶이 그리 나쁜 상황이 아니라는 것, 오히려 꽤 괜찮은 상황이라고 공씨는 말한다.

    물론 최악의 경우와 비교해 현재 상황이 낫다고 말하는 것에는 어폐가 있지만 공씨의 말대로 눈을 돌려 세계를 보면 아직도 문명과 물질의 혜택에서 소외된 지구촌 사람이 수도 없이 많다.

    아프리카 소말리아에서 태어나 일약 세계적인 모델로 성공한 와리스 디리의 삶을 보면 연민과 함께 정말 우리는 행복한 나라에 태어났구나 하는 안도감이 든다.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와리스 디리는 소말리아의 유목민 소녀에서 세계적 패션모델이 되었다는 점에서 현대판 신데렐라다. 그러나 그녀의 미덕은 단순히 극적인 신분상승을 일궈낸 인생역전의 주인공이라는 점이 아니라 비극적인 경험을 솔직하게 세상에 털어놓아 다른 사람을 구해내고자 하는 의지에 있다. 다름 아닌 할례(여성 성기 절제)라는 참혹한 자신의 비밀을 세상에 고백해 할례문제를 세계적인 인권 이슈로 만들어내고 유엔 인권 특별대사로까지 임명되었다는 점이다.

    여기서 잠깐 소말리아가 어떤 나라인지 보자. 아프리카 동부 인구 800만명의 이 나라는 1991년 1월 시아드 바레 독재정권이 무너진 이후 지금까지 끊임없는 내전 상태에 있다. 유엔은 6월4일 수도 모가디슈 병원 세 곳에 최근 몇 주 동안 적어도 1400명의 내전 부상자가 입원했다고 밝힌 바 있다. 이 중 4분의 1 정도는 아이들이었다고 덧붙였다.

    현재 소말리아 정부는 5300명의 아프리카 연합 평화유지군에 힘입어 수도 일부 지역만을 겨우 통치하고 있다. 국제 뉴스를 접하다보면 먹을 것을 찾아 쓰레기를 뒤지는 시민들의 모습이라든지 반군과 정부군 사이의 충돌과정에서 숨진 사람들이 거리에 늘어져 있는 모습이 담긴 사진들을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소말리아가 최근 들어 유명해진 것은 해적 때문. 소말리아 해적은 알카에다의 빈 라덴에 버금가는 지구촌의 골칫거리다. 이 나라 앞바다의 해적행위는 2008년 이후 폭증했다. 2004년만 해도 10건에 불과했던 민간 선박 피랍은 2008년 111건, 2009년 217건에 달했다. 인도양과 수에즈 운하를 낀 홍해를 잇는 이 지역은 연 3만척 이상의 선박이 지나며 세계 원유의 25% 정도가 움직인다. 3000㎞에 달하는 긴 해안선은 해적이 서식하는 데 더없이 좋은 조건이다.

    해적들은 처음에는 고무보트를 타고 소총과 기관총만 사용하는 ‘생계형’이었으나 날이 갈수록 규모와 세력이 커졌다. 이들은 화물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선원을 인질로 잡아 석방대금을 현금으로 챙기는 것으로 유명하다. 지난해 인질 몸값으로 1억5000만달러를 벌어들인 것으로 추산된다. 이렇다보니 소말리아에서 해적행위는 국민 70%가 지지하는 가장 큰 사업이자 일종의 지역공동체운동으로까지 간주되고 있다.

    실제로 해적단은 모두 군벌과 연계돼 있으며 인질 몸값은 군벌들에게 넘어가 마약사업 같은 곳에 투자된다고 한다. 군벌들은 그 수익으로 조직을 운영하고 무기를 구입한다.

    소말리아의 가난은 국민들을 반군으로 몰아가고 있다. 미국의 일간지 ‘크리스천 사이언스 모니터’는 지난 4월15일 소말리아에서 세력을 넓히는 이슬람 반군 알사바드의 전사 모집 실태를 소개한 적이 있다. 취재 결과 소말리아 청년들이 반군에 지원하는 이유는 신념보다는 돈 때문이었다.

    와리스의 생애

    와리스 디리의 어릴 적 삶은 일반적인 소말리아 어린이들의 삶과 다르지 않다.

    ‘내겐 다른 나라 사람들이 그토록 중요하게 여기는 역사의식이란 게 없다. 소말리아 글은 1973년에 생겼으므로 읽기 쓰기도 배우지 않았다. 지식은 노래나 이야기를 통해 입으로 전해졌으며 그보다 중요한 생존에 필요한 기술은 부모로부터 배웠다. 엄마는 마른풀을 이용해 우유를 담을 만큼 촘촘한 그릇을 엮는 법을, 아버지는 가축들을 돌보고 건강하게 관리하는 법을 가르쳐줬다. 과거에 대해 이야기하며 보내는 시간은 많지 않았다. 그럴 시간이 없었다. 중요한 건 오늘이었다. 오늘 무엇을 할 것인가? 아이들은 다 집으로 돌아왔는가? 가축들은 다 안전한가? 무얼 먹을 것인가? 어디서 물을 찾을 것인가?’(‘사막의 꽃’중에서)

    소말리아 사람들은 지금도 수천년 전 조상들이 살던 대로 살고 있다. 유목민들은 전기도 전화도 자동차도 없고 컴퓨터나 텔레비전은 꿈도 못 꾼다. 지금 40대 중반인 와리스 디리는 자신의 정확한 나이를 알지 못한다고 하면서 이렇게 고백한다.

    ‘나는 내가 몇 살인지 모른다. 추측할 뿐이다. 소말리아에서 태어난 아기는 1년 후 살아 있으리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에 생일을 따지는 건 중요하지 않다. 내가 어렸을 때는 시간표나 시계, 달력과 같이 인위적으로 시간을 나누는 체계가 없었다. 대신 계절에 따라, 뜨고 지는 태양에 따라 살았다. 비의 양에 따라 이동하고 낮의 길이에 따라 하루 계획을 짰다. 우리는 태양을 보고 시간을 알았다. 내 그림자가 서쪽에 있으면 아침이었고 바로 밑에 있으면 정오였다. 그림자가 반대편으로 이동하면 오후였다. 해질녘이 가까워질수록 그림자가 길어졌는데 그걸 보고 해 지기 전 집으로 돌아갈 때를 정했다.’

    세계적 패션모델이자 인권운동가 와리스 디리

    와리스 디리의 자서전을 영화화한 2009년작 ‘데저트 플라워’의 한 장면.

    와리스는 훗날 도시생활을 경험하면서 시간에 대한 관념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알고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뉴욕 사람들은 종종 수첩을 꺼내서 묻는다. 14일에 점심을 할까요? 15일은 어때요? 그러면 나는 그냥 만나기 전날 전화하라고 한다. 아무리 약속을 기록해놓아도 적응이 되질 않는다. 처음 런던에 갔을 때 왜 사람들이 팔목을 노려보다가 “빨리 가봐야 돼”라고 말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늘 서둘렀고 모든 일을 정해진 시간 안에 이뤄야만 하는 것 같아 보였다. 아프리카에서는 서두를 필요도 없고 스트레스도 없다. 아프리카 시간은 아주 아주 느리고 매우 차분하다. 내일 정오쯤 보자고 말하면 네 시나 다섯 시에 보자는 말이다. 나는 지금도 시계를 차지 않는다.’

    와리스는 자신이 처음 서구에 갔을 때 가장 놀란 것이 사람들이 “두통 때문에 일을 못 하겠다”는 식의 불평을 늘어놓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와리스는 속으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정말 힘든 일이 뭔지 보여줄까요. 그러면 다시는 이 일이 힘들다고 불평하지 않을 텐데.”

    기계 문명을 접할 수 없었던 그의 아프리카 생활에서 언뜻 낭만적인 분위기도 느낄 수 있겠지만 속사정은 그렇지 않다. 와리스의 회고다.

    ‘엄마가 임신했을 때가 기억난다. 엄마는 갑자기 사라져 며칠간 나타나지 않곤 했다. 그러다가 작은 아기를 품에 안고 다시 나타났다. 엄마는 아이를 낳기 위해 홀로 사막 한가운데로 간 것이다. 탯줄을 자를 날카로운 도구를 가지고 말이다. 한번은 엄마가 사라졌는데 우리는 물을 찾아 이동을 해야 했다. 이동하는 우리를 다시 찾는 데 엄마는 나흘이 걸렸다. 엄마는 갓난아기를 품에 안고 사막을 가로질러 걸었던 것이다.’

    할례

    그러나 어린 소녀 와리스의 삶을 비참하게 만든 것은 가난도, 물질문명으로부터의 소외도, 어릴 적 아버지의 친구로부터 당한 성폭행도 아니었다. ‘할례’(여성 성기 절제)였다.

    소말리아 속담에 “여자는 악마가 놓은 덫이다”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여성의 다리 사이에는 나쁜 기운이 있고 성기 역시 불결하고 음탕하니 할례로 악한 기운이 들어갈 가능성을 사전에 봉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할례는 또 결혼 전 순결한 몸으로 시집갈 준비를 하는 일종의 절차였다. 남편이 할례를 받은 소녀들의 몸을 열게 함으로써 숫처녀에게 장가를 들었다는 징표로 삼는다는 것이다.

    처음엔 와리스도 할례를 받고 싶어했다. 하루 빨리 어른들 세계로 들어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할례를 시술하는 사람들이 마을의 늙은 노파들인데 이들은 마취제도 없이 위험하고 비위생적으로 여성의 가장 연약한 부위에 상처를 낸다. 면도칼, 칼, 가위, 유리조각, 날카로운 돌 같은 것으로 성기를 절제해 성냥개비가 들어갈 만큼의 작은 구멍만 남겨놓는 것이다. 이러다보니 과다출혈, 쇼크, 파상풍, 패혈증 등의 각종 후유증으로 많은 소녀가 목숨을 잃고 살아남는다고 해도 장기적으로는 불임, 생리통, (성적) 불감증, 우울증을 앓는 경우가 흔하다.

    와리스의 자서전에는 자신이 경험한 할례의식이 끔찍할 정도로 자세하게 묘사되어있다. 그녀 나이 대여섯 살 됐을 때의 기억이라고 한다.

    ‘할례의식을 치르는 데 드는 돈은 가정에서 지출하는 돈 중 가장 많은 편에 속하지만 아깝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의식을 치르지 않으면 딸들 혼삿길이 막히기 때문이다. 성기가 (할례를 하지 않은) 그대로이면 결혼을 할 수 없다. 음탕한 매춘부로 여겨져 누구도 아내로 맞고 싶어하지 않기 때문이다. … 나는 (할례를 하기 위해 온 집시) 여인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여인이 가방에서 꺼낸 것은 작은 면주머니였다. 여인은 긴 손가락을 뻗어 면주머니 안에 넣더니 부러진 면도날을 꺼냈다. 그리고 면도날을 뒤집으며 양면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태양이 막 떠오른 후라 색깔은 보였지만 자세한 것은 구별하기 어려웠다. 들쭉날쭉한 면도날에는 피가 말라붙어 있는 것이 보였다. 여인은 면도날에 침을 뱉더니 옷에 닦았다. 여인이 면도날을 닦는 동안 엄마는 스카프로 내 눈을 가렸다. …내 살이, 내 성기가 잘려나가는 것을 느꼈다. 허벅지 살이나 팔을 자르는 듯한 느낌과 비슷하다. 가시로 살에 구멍을 여러 개 뚫은 다음 그 구멍을 희고 질긴 실로 엮어 꿰맸다. 다리에는 느낌이 없었다. 다리 사이의 고통은 죽고 싶을 정도로 심했다. 내 기억은 그 순간까지다. 기절했기 때문이다. 내가 다시 눈을 떴을 때 집시여인은 가고 없었다. 여인과 엄마가 나를 옮겨놓은 것 같았다.’

    살점을 도려낸 상처는 몇 달 넘게 핏자국과 고름이 범벅된 채 낫지 않았다. 어린 소녀 와리스는 소변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한 달 넘도록 자리에 누워 지냈다. 이미 친언니와 사촌언니 둘은 이 참혹한 수술 후유증으로 세상을 뜬 뒤였다.

    도망치다

    열네 살이 된 와리스는 낙타 다섯 마리와 바뀌어 육십 먹은 영감의 신부로 팔려간다는 소식을 아버지로부터 듣고 가출을 하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여러 날 모래바람을 맞으며 사막을 가로질러 수도 모가디슈에 있는 언니 집으로 도망쳤다. 돈 한 푼 없는 그녀가 사막을 건너 지도도 없이 모가디슈로 가는 여정은 그야말로 파란만장하다. 사자 밥이 될 뻔한 적도 있고 히치하이킹을 한 트럭운전사에게 성폭행까지 당할 뻔했다. 우여곡절 끝에 언니 집에 도착하지만 가난한 언니는 그를 도울 처지가 못 됐다. 온갖 눈칫밥을 얻어먹으며 4년을 지낸 뒤 와리스는 다시 인근 숙모네 집으로 향한다.

    하지만 결국 똑같은 식모살이였다. 버릇없는 세 아이를 하루 종일 돌봐야 했다. 결국 아이를 때린 것이 걸려 집을 나와 이번에는 이모 집으로 간다. 그곳에서는 공사장에서 험한 일을 하기도 했다. 어렵게 번 돈을 고향에 부치지만 이모가 가로채는 바람에 허사로 돌아가기도 한다.

    그러던 그녀에게 기회가 왔다. 또 다른 이모의 남편, 즉 이모부가 영국대사로 가면서 가정부가 필요하다는 소식을 듣게 된 것이다. 그녀는 이모를 졸라 런던행을 허락받았고 마침내 선진 문명사회에 발을 내딛게 된다.

    생전 처음 비행기를 타본 그녀의 에피소드가 재미있다. 화장실에 가고 싶은데 어디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는 것. 자세히 관찰했더니 주변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어떤 문 있는 곳으로 가더란다. ‘바로 저기다’라고 결론을 내리고 와리스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문으로 갔다.

    겨우 화장실에 들어간 그녀는 이번에는 도대체 어디에 어떻게 소변을 해결해야 할지 몰랐다. 세면대는 아닌 것 같고 이윽고 변기를 살피고 킁킁 냄새를 맡았다. 일을 보는 장소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아챈 그녀는 자리에 앉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편안한 마음으로 일어서는 순간, 문제가 또 생겼다.

    변기 안에 소변이 그대로 있는 것 아닌가. 다른 사람이 들어오면 볼까봐 그대로 놔둘 수가 없었다. 영어도 전혀 읽을 수 없었기 때문에 Flush(물을 내리세요)라는 글자도 그녀에게는 소용이 없었다.

    와리스는 화장실 안에 있는 온갖 손잡이와 단추 나사못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무엇을 건드려야 할지 고민했다. 단추를 누르면 비행기가 폭발하는 것은 아닌지 두려웠다. 밖에선 사람들이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와리스는 궁리 끝에 아이디어를 냈다. 종이컵을 찾아들고 변기를 수돗물로 채우기 시작한 것이다. 소변을 충분히 희석시키면 다른 사람은 변기에 물만 가득하다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물이 변기 뚜껑 바로 아래까지 차오르자 그제서야 화장실 문을 열었다. 그리고 고개를 숙인 채 바깥에 모인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나갔다. 큰일을 보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기적이 일어나다

    와리스는 영국대사였던 이모부 집에서 4년 동안 1년 365일 똑같은 일상을 되풀이하며 살았다. 시간 개념 없이 살다가 여섯시에 일어나 여섯시 반에 이모부 아침식사, 일곱시에 이모에게 커피를, 여덟시에 아이들에게 아침식사를 주고 부엌을 청소했다. 4년 동안 단 하루도 쉰 적 없이 짬이 날 때마다 아무 거나 집어먹고 자정쯤 되어서 잠잘 때까지 계속 일만했다. 사촌오빠로부터 성폭행을 당할 뻔한 적도 있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그녀는 조카의 구박을 받아가며 글을 익힌다.

    어느덧 이모부의 임기가 끝나 소말리아로 돌아가야 할 시간. 하지만 와리스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일단 발을 디딘 문명사회에서 어떻게든 버텨보고 싶었다. 그래서 불법 체류자 신분으로 남아 맥도널드에서 청소와 주방보조를 시작했다. 저녁이 되면 온몸은 온통 기름투성이가 되었지만 일이 있다는 것에 감사해했다.

    그러던 어느 날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난다. 그녀의 출퇴근길을 눈여겨보던 사진작가 테렌드 도노반의 눈에 띄어 패션잡지 표지모델이 된 것이다. 그녀는 이후 파리와 밀라노의 패션쇼에 출연하고 이어 레블론과 로레알의 화장품 모델로도 얼굴이 알려지게 된다. 화려한 인생역전이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내면의 상처는 치유되지 못했다.

    ‘모델은 재미있는 직업이다. 매력적이고 화려하며 아름다운 직업임을 솔직히 인정한다. 그러나 여성에게는, 특히 자신감 없는 어린 여성에게는 치유하기 어려운 상처를 입힐 수도 있는 잔인한 면이 있는 직업이다. 하룻밤 사이에 스타가 되었지만 내면은 여전히 불행했다. 더 이상 사람들이 입혀주는 옷을 입는 인형이 되고 싶지 않았다. 셔터를 누를 때마다 미소를 지어야만 하는 것도 싫었다.’

    모델 일을 처음 시작했을 때 와리스는 자신을 보고 경탄하는 소리들,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인정해주는 것에 흥분했다. 하지만 이내 그 세계가 가식적이란 것을 깨닫고 희망은 산산조각난다. 와리스는 출세한 많은 사람이 실패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을 수없이 보면서 인생에서 정말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고민한다.

    그러면서 의존한 게 술이었다. 어느 날 알코올 중독으로 쓰러진 그녀는 몸과 마음을 추슬러 치유를 시작한다. 하지만 그녀는 어린 시절의 어두운 기억들이 괴롭힐 때, 생리통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울 때, 자신이 하나의 상품이나 브랜드처럼 사람들 앞에 전시된다고 느껴질 때 다시 술에 손을 댔다.

    나를 드러내다

    문제는 그녀의 정신을 할퀴고 지나간 할례였다. 할례는 육체적으로뿐 아니라 정신적으로 그녀를 망가뜨렸다. 남들로부터 박수를 받아도, 아무리 화려한 자태를 뽐내도 만족스럽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상처와 정면으로 맞부딪치기로 한다. 모델로서의 삶이 절정에 이른 1997년 패션지 ‘마리 끌레르’와의 인터뷰를 통해 자신이 할례를 받았음을 고백한 것이다. 물론 그 과정은 쉽지 않았다.

    ‘기자와 인터뷰한 다음날 나는 내 자신이 벌여놓은 일이 너무 놀랍고 부끄럽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온 세상이 나에 대해 알게 될 터였다. 나만의 비밀을 알게 될 터였다. 내 아주 가까운 친구들조차 내가 어렸을 때 어떤 일을 당했는지 모르고 있었다. 소말리아의 폐쇄적인 문화에 길든 나로서는 쉽게 꺼낼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러나 곧 얼굴도 모르는 수백만의 사람이 내 이야기를 듣게 될 터였다. 나는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마음을 비우자, 자존심을 버려야 한다면 그렇게 하자, 그래서 그렇게 했다. 나는 옷을 벗듯 자존심을 벗어 던졌다.’

    와리스가 할례를 고백한 것은 자기치유 목적이 컸다. 몸이 온전치 못한 불구자라는 생각에서 자유롭고 싶었다는 것이다.

    ‘할례는 어쩔 수 없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생각하면 할수록 이유는 찾지 못하고 분노만 더했다. 나는 평생 담아두고만 있던 나의 비밀을 말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내 주변엔 가족이 없었다. 엄마도 언니도 없었기에 슬픔을 나눌 사람도 없었다. 나는 ‘피해자’라는 말을 싫어한다. 너무 무력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마리 끌레르’에 ‘여성할례의 비극’이라는 제목의 인터뷰가 나가자 반응은 열렬했다. 이후 더 많은 인터뷰가 몰려들었다. 와리스는 학교나 지역사회뿐 아니라 여성할례문제를 알릴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가서 강의했다. 바바라 월터즈와 인터뷰하기도 했다.

    이제 와리스는 인권운동가로 변신했다. 유엔인구기금에서 주최하는 여성할례 반대운동에 동참했고 세계보건기구에서도 일했다. 유엔특별사절로도 활동했다. 그녀의 삶은 ‘뉴욕의 유목민’이란 이름 아래 영국 BBC 다큐멘터리로 제작됐으며 최근 ‘데저트 플라워’라는 영화로도 제작돼 개봉된 바 있다. 이 영화는 지난해 9월5일 이탈리아의 베니스 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됐고 같은 달 21일 스페인 산 세바스티안 국제영화제에서도 상영돼 호평을 받았다. 독일, 미국 햄튼 국제영화제, 오스트리아, 핀란드 등에서도 상영됐다.

    세상은 그녀에게 동지적인 애정으로 화답했다. 2004년 가톨릭 인권운동본부는 그녀에게 오스카 로메로상을 수여했다. 이 상은 1981년부터 제3세계 국가에서 정의 인권 발전을 위해 온힘을 다한 사람에게 매년 수여되는 상이다. 같은 해 독일 함부르크에서 열린 ‘세계 여성의 상’(The Wo-men′s World Award) 시상식에서 ‘세계 사회상’(World Social Award)을 받은 데 이어 2007년에는 프랑스 정부가 수여하는 ‘레종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당시 그녀의 수상소감에는 다부진 의지가 담겨 있다.

    “저는 아프리카에 살고 있는 많은 사람이 더 이상 스스로를 믿지 않고 자의식도 없으며 자신들이 영원한 패배자란 생각을 하도록 주입받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 세월이 흐르다보니 그들이 스스로 자신을 포기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자기의 운명을 개척하기보다는 남의 원조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수천년을 혹독한 사막에서 적응해왔고 가뭄과 모래폭풍 같은 힘겨운 환경에서 외부의 도움 없이 생존하는 법을 알고 있었습니다. 지금의 아프리카는 아프리카의 지혜와 생활을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단지 외부의 손길만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우리 대륙은 다시 일어설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아프리카 사람들과 아프리카의 운명을 고민하는 확신에 찬 젊은이들이 필요합니다. 우리 자신을 스스로 돕고 우리의 조직을 새롭게 만들어야 하며 세계는 우리를 이용의 대상이 아니라 하나의 대륙으로 인정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아프리카는 새로운 정신이 필요합니다.”

    지구촌 여성할례의 고통은 현재진행형이다. 세계보건기구에 따르면 여성할례는 아프리카와 중동의 28개국에서 행해지고 있다. 이들 지역에서 1억3000만명 이상의 여성이 할례를 받았으며 매년 시술을 받는 여성의 수는 200만~300만명이다. 케냐 등 여러 국가에서는 할례를 금지하고 있으나 하루에만 6000명 정도의 여자아이가 할례를 받다가 사망하는 등 상황은 여전히 심각하다. 이에 비례해 할례를 퇴치하기 위한 세계 각국의 노력도 활발하다. 여성 국민의 69%가 할례를 받고 있는 수단의 경우 2008년부터 이번 세대 안에 할례를 완전히 근절하기 위해 국가 차원에서 통합적인 전략을 세우고 실행에 착수했다.

    2003년 7월, 아프리카연합 국가들의 정부 대표, 수반 등이 모잠비크의 마푸토에 모여 인권에 관해 의정서를 제정했다. 아프리카의 15개 국가는 여성할례 금지를 명시한 마푸토 의정서(Maputo Protocol)를 비준했고, 이 의정서는 2005년 11월에 국제법으로 효력을 발휘하게 되었다. 이 중 제5항에는 모든 형태의 여성할례를 법적으로 금하도록 되어 있다.

    유니세프는 매년 2월6일을 세계 여성할례 금지의 날로 정했다.

    용기와 극복의 삶

    치명적인 시련이나 고통은 사람을 무너뜨리기도 하지만 반대로 사람을 강하게 단련시킨다. 와리스 디리도 마찬가지다. 어릴 적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을 겪은 뒤 그녀가 택한 자유를 향한 여정에는 ‘이렇게 살 수는 없다’는 강한 자의식이 깔려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정한 꿈을 좇아 수천 년 동안 전해 내려오는 전통과 싸웠으니 이 시대 또 다른 전사라고 할 수 있다.

    ‘살아오는 동안 참 많은 일이 순전히 우연적으로 일어났다. 왜 그랬는지는 모른다. 사실 나는 순전한 우연이라는 게 있다고 믿지는 않는다. 우리 인생에는 그보다 더 큰 의미가 있는 것임에 틀림없어 보인다. 내가 집을 나와 사자와 맞닥뜨렸을 때 나를 구해준 알라신에게는 계획이 있는 듯했다. 날 살려둔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운명에 맞서지 않으면 운명은 언제나 당신을 나락으로 잡아끈다’는 게 그녀의 인생관이다. 그녀는 내면에서 일어나는 질문들에 솔직하게 자신을 맡겼다. 그리고 답을 찾기 위해 그 어떤 위험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것은 결국 그녀를 내면의 평화로 이끌었다. 분노로만 일그러졌던 소말리아에서의 삶도 긍정으로 껴안게 된다.

    ‘오늘도 나는 여전히 사소한 것들을 소중히 여긴다. 나는 호화로운 집을 한 채도 아니고 여러 채 가지고 있는 사람들, 차 보트 보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매일 만난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더 많은 걸 원한다. 다음 구입할 물품이 마침내 행복과 마음의 평온함을 가져다줄 듯이 말이다. 그러나 나는 다이아몬드 반지가 없어도 행복할 수 있다. 이제 사고 싶은 걸 다 살 수 있는 능력이 된다고 해서 하는 말이 아니다. 나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 인생의 가장 가치 있는 재산은 인생 그 자체이고 그 다음은 건강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온갖 하찮은 일에 안달하면서 귀중한 건강을 망친다. 나는 두 가지 삶의 방식, 소박한 삶과 바쁜 삶을 모두 경험해볼 수 있었다는 점에서 감사하다. 그러나 어린 시절을 아프리카에서 보내지 않았다면 소박한 삶의 방식을 즐기지 못했을 것 같다.’

    흔하면 그것의 소중함을 느끼지 못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현재 누리고 있는 것에 대해, 서구사회가 주는 풍요와 자유로움에 대해 누구보다 예민하게 느끼고 감사하게 생각한다.

    ‘1991년 반란군이 정부를 무너뜨린 이후 내 조국 소말리아에는 전투가 끊이지 않는다. 서로 정권을 잡기 위해 싸우느라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 아무도 모른다. 이탈리아 식민 정부가 지은 하얀 건물들로 가득했던 아름다운 모가디슈는 재가 되었다. 도시에는 더 이상 그 어떤 질서도 없다. 정부도 없고 경찰도 없고 학교도 없다. 서양에 살면서 느끼는 가장 큰 장점 중의 하나는 평화다. 사람들은 평화가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르는 것 같다. 범죄가 있기는 하지만 주변에서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 것과는 매우 다르다. 나는 이 나라의 보호 아래 안전한 환경에서 아이를 기를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한다.’

    할례로 찢긴 몸을 정상으로 되돌리는 수술을 받고 결혼해 아이도 가진 와리스 디리는 2002년 자신의 이름을 딴 ‘아리스 디리 재단’을 설립해 아프리카, 아시아 여성들의 인권 신장을 위해 활동하고 있다.



    ●‘사막의 꽃’

    ●‘엄마에게 보내는 편지’

    ●‘사막의 아이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