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람에게는 누구나 지울 수 없는 상처가 있지만, 어떤 이들의 기억은 다른 이들보다 끔찍하다. 1992년 탈북한 김소연씨에게는 1966년 늦여름 평양 인근 인민군 54사단 야전 군의소에서 겪었던 일이 그랬다. 마취도 없이 살아 있는 사람의 생체조직을 채취하고 주요 장기의 변화를 긴 시간 관찰했다는 평양의과대학 학부생 시절의 일. 한때 북한이 ‘노벨상을 받을 만한 위업’이라고 자랑했던 봉한학설을 입증하기 위해 감행된 일련의 생체실험은, 그러나 결국 연구 자체가 완전히 폐기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만든 ‘원죄’였다고 김씨는 증언하고 있다.
가느다란 신음이 들려온 것은 실험시작 7일째 되는 날 오후 2시쯤이었다. 마스크를 쓴 연구진의 눈빛으로 복잡한 신호가 오갔지만, 이내 피곤한 나머지 들리는 환청일 것이라고 애써 딴청을 피웠다. 그러나 다음 순간 들려온 소리는 분명 “배고파요… 밥, 밥, 밥 먹고…”였다. 단순한 신음이 아닌 사람의 말이었다. 인간의 원초적인 욕구가 만들어낸 그 한마디에 순간 하늘이 무너져내렸고, 그는 연구실 밖으로 뛰쳐나갔다. 마침 들어오던 선배들이 무슨 일이냐고 물었지만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생체실험을 진행하며 어느새 기계처럼 말라버린 감성이 갑자기 터져 나왔다. 그날 그는 두 번 다시 메스를 잡지 않겠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하며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 다짐은 지켜지지 못했다.
‘노벨상 받을 만한 위업’
1992년 북한을 탈출해 서울에 온 여의사 김소연씨.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6·25전쟁의 와중에 어머니 등에 업혀 북한으로 간 그는 혁명가 유가족에게 입양된 뒤 10대의 어린 나이에 평양의학대학에 입학했다. 제1외과학부에 배치된 그는 그 무렵 평생 지울 수 없는 만남을 갖는다. ‘봉한학설’로 전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북한의 의학자 김봉한 당시 평양의대 생물학교실 교수와의 만남이었다.
한국에서는 여전히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지만, 김봉한은 한때 북한에서 신화적인 존재였다. 1961년부터 5년여 동안 다섯 편의 논문을 발표하며 “동양의학의 핵심개념인 경락의 해부학적 실체를 확인했다”고 밝힌 그의 연구는 당시 북한 언론의 대대적인 조명을 받았고, 평양 당국은 이를 발전시키기 위해 대대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내각이 직접 결정문을 발표해 전자현미경이나 방사선 추적장치 등 첨단 연구장비를 투입하고 직속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경락연구원’을 창설한 것이 대표적이다. 또한 북한은 그의 논문을 영어, 러시아어, 중국어 등으로 번역해 각국에 배포하는 등 노벨상 수상을 위한 준비작업에 나섰을 정도였다. ‘사회주의 조국’의 영광을 세계적으로 떨치고 싶었던 1960년대 북한의 대표적인 국가주도형 과학연구였다.
동양의학의 대표적인 치료기법인 침과 뜸은, 분명히 효과가 있음에도 그 명확한 메커니즘이 서구의학적 관점에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다. 침과 뜸을 놓는 자리를 경혈(經穴), 그 자극을 온몸의 장기에 전달하는 통로를 경락(經絡)이라고 부르지만, 과연 경락이 실제로 존재하는지 혹은 단순한 신경계의 작용인지는 분명한 결론이 없어 한의학과 서구의학 사이에 논쟁이 계속되고 있는 것. 김봉한은 사람 몸속의 경락을 해부학적으로 찾아냈으며 이는 혈관계와 내분비계 외에 이제까지 미처 발견되지 못했던 제3의 순환계가 사람의 몸속에 그물처럼 퍼져 있다고 주장했다. ‘봉한관’으로 명명한 이 순환계가 다름 아닌 경락의 실체라는 것이다.
300여 건의 실험
1 2004년 국내 연구진이 흰쥐 혈관 내부에서 발견해 공개한 새로운 조직의 사진. 봉한관으로 추정되는 이 조직 안쪽에 막대모양의 핵이 길게 늘어서 있는 모습이 관찰된다. 기존의 해부학 지식으로는 혈관 내부에 둥근 핵만 존재할 뿐 막대모양의 핵은 없다고 알려져 있다. 2 김봉한 당시 평양의학대학 교수. 북한이 해마다 발행하는 ‘조선중앙년감’ 1964년판(版)에 실린 사진이다.
기자는 이른바 ‘황우석 파동’이 한창이던 4년여 전 김봉한의 연구에 관한 기사를 쓴 적이 있다(‘신동아’ 2006년 2월호 ‘북한판 황우석 김봉한의 영광과 몰락’ 기사 참조). 당시 봉한학설을 재확인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경주하고 있던 국내 연구팀으로부터 김봉한의 연구에 참여했던 여의사가 탈북해 서울에 머무른 적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지만, 2003년 미국으로 건너가 학업을 진행 중이던 김씨와는 끝내 연락이 닿지 않았다. 시간이 한참 흐른 뒤인 지난 4월 그는 오랜 미국생활을 마치고 귀국했고, 기자는 이제야 40여 년 전의 기억에 관해 미뤄둔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 올해 나이가 63세라고 알고 있습니다. 1966년 당시에는 대학교 신입생이었을 텐데 어떻게 국가가 주도하는 연구사업에 참여할 수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우선은 김 박사와 제 모친 사이의 개인적인 인연 때문이었습니다. 두 분이 모두 서울 출신이었고, 평양에서 이뤄진 서울내기들의 사적인 모임에서 알고 지내신 사이였거든요.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 두 분이 비슷한 연배에 독신이었던 것도 영향이 있지 않았나 싶어요. 거기에 제가 손재주가 좋은 편이라 외과해부에 나름 재능이 있었던 것도 한몫했겠지요. 한때는 그러한 인연을 저주하기도 했지만, 결국 모든 것은 운명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김씨의 설명에 따르면 당시 김봉한 연구팀은 봉한관의 해부학적 실체를 확인하기 위해 생체실험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했다고 한다. 봉한관을 타고 흐르는 액체 속의 ‘산알’이라는 미세한 조직이 인체의 손상된 세포에 다다라 이를 치유 또는 재생시키는 과정을 눈으로 직접 관찰하는 게 실험의 목표였다는 것이다. 산알이 자라서 세포가 되고 다시 산알로 변한다는 이러한 주장은 기존의 세포분열이론을 완전히 뒤집는 것으로 김봉한의 연구 가운데서도 서양의학과 가장 괴리가 큰 도발적인 주장이다.
“애초에 김봉한 교수가 봉한학설을 창안하게 된 계기도 봉한관을 직접 눈으로 봤기 때문이었어요. 6·25전쟁의 와중에 부상자를 수술하다가 혈관도 아니고 신경계도 아닌 봉합실 비슷한 물질을 확인했던 거죠. 이걸 채취해 생리식염수에 담가놓았더니 육안으로도 생체조직인 게 확인되고,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니 그 안에 미세한 점들이 활발히 움직이는 것을 알 수 있었다는 거죠. 그게 봉한관과 산알의 첫 발견이었던 셈입니다.
문제는 이론 정립 초기단계다 보니 봉한관의 실체와 그 속에 담겨 있는 산알의 움직임을 건강하게 살아 있는 인체조직에서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는 거예요. 그 메커니즘을 규명하자니 살아 있는 사람의 신체를 해부해 들여다보고 싶었던 거죠. 봉한관이 많은 근육에서 조직을 떼어내 관찰하기도 했지만 주요 장기나 기관에서 벌어지는 움직임의 특징을 잡아내려면 생체실험을 하는 것밖에는 도리가 없었던 겁니다. 당과 국가가 나서서 전폭적으로 홍보하는 연구가 되다보니 어떻게든 성과를 내지 못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압박감도 엄청났겠지요. 결국 김 교수는 인체해부 집도를 통한 실험연구 계획안을 작성해 상부의 검토를 거쳐 승인을 받았습니다.”
김씨의 설명에 따르면 당시의 생체실험은 대략 300여 건에 달했다. 그 가운데 상당 부분은 팔과 다리에서 조직을 떼어내는 경미한 수준이었지만, 세포재생에 관여하는 주요 장기나 난소·고환 등의 생식기, 뇌와 척추처럼 특수한 부위의 경우에는 직접 살아 있는 신체를 해부한 뒤 현미경을 꽂아 봉한관을 찾아내고 산알의 움직임을 추적해 기록하는 작업이 진행됐다는 것이다. 그 가운데 마지막으로 참여한 작업이 서두에서 설명한 간에 대한 생체실험이었다고 김씨는 회고한다. 영양을 끊은 상태에서 더욱 명확해지는 봉한관과 산알의 움직임을 꾸준히 관찰해 시간대별로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를 관찰하는 것이 실험의 목적이었다고 한다.
‘우리는 731부대와 다르다’
▼ 실험 대상자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어떤 경로를 통해 실험대상이 된 건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을 텐데요.
“실험은 평양에서 가까운 평남 강동군 승호리의 54사단에서 이뤄졌는데, 대상은 사단 군의소에서 거의 아무런 제약 없이 공급해주었습니다. 그들의 이름이 뭔지, 신분은 무엇이었는지, 왜 여기까지 끌려와서 실험의 대상이 됐는지는 물을 수도 없었고 그럴 필요도 없었죠. 그런 걸 물을 분위기도 아니었고, 또 알게 되면 견딜 수 없으리라는 걸 암묵적으로 느끼고 있었던 것 같아요. 막연히 중범죄자나 반역자일 거라고 추측한 정도죠. 처음에는 생체실험이라는 작업이 끔찍하게 느껴지지만, 수도 없이 같은 일을 반복하다보면 만성이 되는 게 인간의 특징이니까요.
근육에서 조직을 떼어낸 경미한 실험의 대상자들은 대부분 생명에는 별다른 지장이 없었을 겁니다. 그렇지만 장기나 척추 등을 노출시켜 장시간 관찰했던 이들이 어떻게 됐는지는 알 수 없었어요. 연구가 끝나면 봉합해서 돌려보내긴 했지만 이후 제대로 관리가 이뤄졌는지 확인하지 않았으니까요. 간 실험 대상자의 경우에는 결국 연구진의 눈앞에서 생명이 끊어졌고요. ‘배고프다’는 신음은 단말마(斷末魔)의 산물이었던 셈입니다.“
특별관리대상으로 분류된 이 실험의 핵심 연구자는 김봉한 교수 본인을 비롯해 총 5명이었다고 김씨는 말한다. 현미경을 이용한 관찰 담당이 두 사람, 해부 집도를 맡은 사람이 세 사람이었다는 것. 실험자들은 ‘이건 일본 731부대가 저질렀다는 만행과는 다른 일이다, 살상을 위한 연구가 아니라 기초의학의 생물학적 근거를 제시하기 위한 연구’라며 끊임없이 자기최면을 걸었다고 김씨는 기억하고 있다. 위법이라거나 인간 존엄에 대한 모독이라는 명시적인 인식도 거의 없었다는 것. 그러나 그렇듯 길들면서도 마음 한구석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깃들였고, 희미한 죄책감을 떨쳐내기 위해 서로가 큰 소리로 연구의 성공을 다짐하고 격려하는 일이 잦았다는 회고다.
학생 신분으로 참여한 터라 정식 연구원으로 임명되기 위해 실험진행에 앞장섰던 김씨에게, 눈 앞에서 벌어진 간 실험 대상자의 죽음은 돌이킬 수 없는 충격으로 남았다. 한순간도 잘못이라거나 죄악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일들이 순식간에 끔찍하기 이를 데 없는 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는 것. 얼굴을 가린 채 실험대 위에 누워 있는 상대가 단순한 피실험물이 아니라 인간임을 깨닫고 나자 절대로 지워지지 않을 상처가 영혼에 깊이 남은 듯하다고 그는 말한다.
소련 연구진의 보고
승승장구하던 김봉한의 연구는 그러나 1966년에 이르러 갑작스레 위기에 봉착한다. ‘공산주의적 의학의 신기원’이라던 그의 연구에 대한 언급이 공식매체에서 일제히 사라진 것. 이어 김봉한이 지휘하던 경락연구원과 경락학회가 폐지되고 봉한학설을 주도적으로 지지하던 보건상과 의학연구원장이 자리에서 물러난다. 1967년이 되자 김봉한과 그의 팀은 과학계에서 아예 자취를 찾을 수 없도록 완벽하게 사라진다.
국내 연구진의 봉한학설 증명 연구 성과를 전하는 ‘동아일보’ 2004년 7월9일자.
이에 대해 김소연씨는 “봉한학설의 갑작스러운 폐기는 바로 생체실험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상상할 수 없는 과정을 거쳐 학설이 정립됐다는 사실이 국제사회에 공개될 위기에 처하자 아예 관련 연구자료를 폐기하고 인력을 숙청한 뒤 그런 학설은 존재한 적도 없었던 것처럼 만들어버렸다는 것. 문제가 생기면 아예 관계자들을 매장한 뒤 관련 사실을 부인하는 북한 체제의 기본적인 자기방어 메커니즘이 작동한 결과라는 게 김씨의 이야기다.
▼ 그렇지만 의문이 남습니다. 우선 애초에 북한 당국이 봉한학설 연구를 위해 생체실험을 허용했던 것 아닙니까. 그런데 생체실험의 윤리 문제 때문에 갑자기 이를 중단하고 완전히 폐기처분했다는 것은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데요.
“내부적으로는 분명 감수할 만하다고 생각해 승인한 것이겠지만, 문제는 봉한학설이 국제학계의 논쟁 주제로 떠오르기 시작했다는 것이었죠. 유명 해외저널과 학회에 ‘주체과학의 위업’을 홍보하고 소련과 동독에서 연구진을 불러오는 등 유례없이 적극적으로 나섰거든요. 그러니 이 문제는 더 이상 북한 국내에서 조용히 해결할 수가 없었겠죠.
결정적인 계기는 1966년 가을 평양 적십자병원에 교수로 와 있던 소련 측 연구진 때문에 벌어졌습니다. 심장의학 전문가들이던 이들이 김봉한 교수팀의 연구결과를 브리핑 받는 자리에서 생체실험을 했다는 사실을 우연히 확인하게 된 거죠. 저는 그 현장에 없었습니다만, 아마도 김 교수님이 실험과정을 설명하는 중에 지나치게 흥분해 실수로 이야기가 나온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혹은 소련 연구진과 그간 주고받았던 학문적 교류를 지나치게 신뢰했을 수도 있고, 생체실험이라는 행위의 의미를 과소평가했던 것일 수도 있겠죠.
여하튼 이를 알게 된 소련 연구진이 본국에 이 사실을 보고했다는 소식이 확인되고 나서 갑자기 당국이 그간의 실험자료를 폐기하고 흔적을 지워나가기 시작했다는 것은 제가 기억하는 한 분명한 사실입니다. 관련된 연구자들 역시 숙청해 지방으로 보내거나 전문분야도 아닌 기관으로 재배치했죠. 자료를 얼마나 철저히 파괴했는지, 제가 나중에 장수연구소 지하 문서보관소에 들어가 며칠을 찾아 헤맸는데도 관련된 글 하나 찾을 수가 없었을 정도였으니까요.”
김봉한 연구팀이 사라진 직후, 소련 의학계는 “경락에 대한 실체발견을 과학적으로 인정할 수 없다”고 공식 발표한 바 있다. 이 무렵 혁명 유가족이었던 데다 아직 어린 나이였던 까닭에 자신은 모욕적인 취조와 숙청을 피해 다른 연구소로 배치받을 수 있었다고 김씨는 말한다. 철저히 폐기된 연구결과를 마음속으로 되새기며 그래도 언젠가는 되살려 세상에 전할 날이 있을 것이라고 다짐했다는 것.
김봉한 교수의 경우도 당초에는 북한 당국이 목숨을 빼앗을 생각은 아니었던 것 같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훗날을 위해 공개되지 않은 장소에 조용히 유폐시켜놓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후에도 논란이 끊이지 않았고 특히 연구팀에 참가했던 몇몇 인사가 은밀히 재(再)연구 가능성을 타진하다 적발되면서 결국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는 것. 자살인지 타살인지 단언하기는 어렵지만 약물을 이용한 안락사에 가까운 죽음으로 들었다고 김씨는 전했다.
▼ 봉한학설에 관해 전한 다른 탈북인사들이나 북한학 전문가들은 김봉한 연구팀의 후원자 노릇을 했던 박금철 당시 내각 부수상이 1967년 5월 숙청되는 바람에 함께 몰락했다고 평가하기도 했습니다.
“박금철 부수상이 봉한학설에 대해 관심이 깊었던 것은 사실이고, 전자현미경 등의 최신식 장비를 동독에서 도입해주는 등 많은 지원을 한 것은 맞습니다. 그렇지만 그건 당시에 그가 내각에서 보건성을 관장하는 지위에 있었기 때문이지 김봉한 교수님과 개인적인 인연 때문은 아니었다고 기억합니다. 한마디로 박금철의 실각과 김봉한 연구팀의 해체는 전혀 별개의 사건이었다는 거죠. 다만 당시 북한 당국이 생체실험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팀이 해체된 이유를 둘러대는 과정에서 그런 말이 나왔을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종파주의 혹은 공명주의 배격은 매우 강력한 구호여서, 일단 그렇게 정설이 만들어지면 누구도 캐물을 생각을 못했을 테니까요.”
집념이 선을 넘으면
40여 년 전에 북한에서 벌어진 일, 그것도 북한 당국이 관련기록의 은폐를 위해 전력을 다했다는 사건 관련 증언의 진위를 확실히 검증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다만 김씨가 봉한학설 연구에 관여했다는 부분은 탈북 이후 함께 작업했던 국내 전문가들을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확인되고, 그 초기 정립과정에서 인체를 이용한 실험의 필요성을 느꼈을 개연성 역시 충분하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1990년대 후반부터 연세대 원주의과대학 생화학교실과 서울대 한의학물리연구실, 동국대 한의대 등의 국내 연구진은 봉한학설을 재확인하거나 활용하는 연구를 진행했다. 흰쥐나 토끼 같은 동물의 조직에서 투과형 전자현미경이나 형광현미경을 통해 경락에 해당하는 ‘제3의 순환계’가 과연 실재하는지 확인하는 작업이었다. 이러한 연구는 2000년대 중반 일정부분 성과를 거뒀고 관련 논문이 해외 유명저널에 게재되기도 했다.
서울에 온 뒤 동국대 한의과대학원에서 수학한 바 있는 김씨는, 이들 연구의 기초작업 과정에서 북한에서의 연구경험을 바탕으로 조언한 바 있다. 그와 의견을 교환했던 국내 대학의 한 전문가는 “어린 나이였다보니 김봉한 연구팀의 핵심을 담당했다고 보기는 어렵겠지만, 전자현미경의 활용 등 경락연구소의 연구방식에 관해 세부적으로 알고 있는 걸로 봐서 연구에 일정부분 참여했던 것만은 분명했다”고 말했다. 또 다른 국내 연구자는 “동물실험에서 얻은 결과를 인체조직에서 다시 확인하고자 하는 욕구는 사실 자연스러운 일”이라며 “우리 시각으로는 상상하기도 어려운 일이지만, 인권의식이 희박한 데다 관찰기법 수준도 낮았던 1960년대의 북한에서라면 성과에 대한 집착으로 인해 인체실험의 필요성을 느꼈을 수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연구과정의 윤리 문제와는 별도로, 김씨는 봉한학설의 학문적 진실성에는 여전히 추호의 의심도 없다고 말하고 있다. 동양의학의 원리를 서양의학 기법을 통해 밝혀내는 김봉한의 연구가 통합의학의 기반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는 것. 특히 증상과 처방을 기계적으로 연결하는 서양의학의 사고방식을 뛰어넘어 근원적인 진단과 치료가 가능해지는 길을 여는 일에 남은 힘을 다하고 싶다고 그는 이야기했다.
“끔찍한 일을 굳이 왜 다시 꺼내는지 물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제 대답은 간단합니다. 다시는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고, 또 그래야 제 영혼에 남아 있는 죄책감을 눈곱만큼이라도 덜 수 있을 것 같다는 겁니다. 신기원을 개척해내겠다는 과학자들의 집념이 상식의 선을 넘는 경우를 우리는 이미 많이 보지 않았습니까. 분명한 건 그런 일들이 해당 연구자에게도 영원히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남긴다는 겁니다. 제 끔찍한 기억이 이를 다시 한번 경각시킬 수 있다면 그것으로도 의미가 있을 거라고 자위하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