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제4회 충무로국제영화제 포스터. 광화문에 설치되는 한자 현판.
서울충무로국제영화제(이하 충무로영화제)는 개막일(9월2일)을 한 달도 남겨두지 않은 상황에서 총체적 난국이라고 한다. 이 영화제는 사단법인인 조직위가 대회준비를 맡고 있지만 예산은 서울시와 중구청이 지원하는 구조다. 지난해 3회 대회 땐 60억원이 확보됐지만 올해 4회 대회의 경우 중구의회는 7억원만 승인했다. 그나마 “내년부턴 영화제를 안 하는 조건”(정 감독)이라고 한다. 서울시 예산은 받을 수 있을지 불투명한 상황이 되어 영화제 조직위 측은 기자회견 예정시간 30분 전 회견을 취소하기도 했다. 일부 서울시의원은 “올해부터 당장 그만두라”는 완강한 태도라고 한다.
서울의 ‘문화주체성’ 위기
게다가 영화제 조직위원장인 박형상 중구청장은 선거법위반 혐의로 구속되어 있는 상태. 김수영 집행위원장(영화감독), 도동환 이사장도 사의를 표명했다고 한다. 영화 ‘몽정기’로 알려진 정 감독이 부집행위원장으로서 대신 이끌어나가야 할 처지인데 그는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충무로영화제는 몰락하고 있다”며 연신 담배를 꺼내 문다. “지난해의 3분의 1 수준으로 줄여 4개 스크린에 70편만 상영하고 마무리하려고 해도 현재로선 그럴 여력조차 부족하다”는 거다.
충무로영화제는 한국영화의 메카 ‘충무로’라는 최고의 상징성, 국가규모 재정능력을 가진 서울시의 풍족한 지원, 인구 2000만의 수도권 영화시장이라는 좋은 여건을 갖고 출발했다. 지방의 여타 영화제에 비해 언론으로부터 더 많은 스포트라이트도 받았다. 이 때문에 규모나 인지도 면에서 부산국제영화제와 함께 국내 양대 영화제로 급성장했다. 이런 영화제가 어쩌다가 ‘품위 있는 사망’조차 쉽게 허용되지 않는 망신스러운 지경에까지 몰린 것일까. 일각에선 다소 직설적인 표현이지만 서울의 영화인, 시 당국, 정치인의 자질 부족 때문으로 본다.
한 영화인은 “지난해 제3회 영화제의 집행부가 ‘방만 경영’ 비판을 받은 것은 사실”이라고 했다. 흥행이 저조한 영화를 비싸게 들여오고 홍보비를 과다집행하고 대행사 선정에 잡음을 일으키고 측근을 직원으로 채용해 논란이 일었다고 한다.(내일신문 2009년 9월30일자 보도) 급기야 중구의회는 충무로영화제 조사특위를 만들더니 3회 영화제 사무국을 지난 4월 검찰에 고발했다. 이런 잡음이 예산삭감의 중요 원인이 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영화제의 ‘철학의 빈곤’도 도마에 오른다. 초기엔 고전 명화를 주로 상영하는 것으로 정체성을 잡아나갔지만 회를 거듭하면서 그 성격이 모호해졌다고 한다. 유명 스타들을 영화제에 초청해 대중의 이목을 끌어보려 했지만 지난해의 경우 영화제 개막일에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하고 폐막일에 배우 장진영씨가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이마저 여의치 않았다. “쏟아 부은 예산에 비해 볼륨감, 볼거리가 없다”는 이야기가 터져 나왔다. 한 영화제 전문가는 “부산국제영화제가 충무로영화제와 다른 부분은 ‘아시아 영화의 중심’이라는 확실한 콘셉트로 관객을 끌어들이는 점”이라고 했다.
통치자의 ‘철학의 빈곤’
가설 덧집이 제거된 광화문이 위용을 드러내고 있다.
▼ 서울시의회가 영화제 지원에 부정적이라는데….
“민주당 소속 시의원이 강하게 반대하는 것으로 안다. 잘못한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만 벌주면 되지 왜 느닷없이 영화제를 초토화하나. 문화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것으로 본다. 문사철(文史哲)을 없애고 국사를 선택과목으로 돌리고 서울의 대표영화제도 쉽게 없애려는 환경에서 우리 시각으로 세계의 문화를 논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서울시 입장은?
“의향을 잘 모르겠다. 오세훈 시장의 ‘디자인 서울’은 무슨 어불성설이냐고 이야기할 수 있다. 한강에 플로팅아일랜드 둥둥 띄울 돈은 있으면서 영화제는 왜 없어져야 하는지 모르겠다.”
▼영화제가 아니라도 서울시민은 외국영화 많이 본다는 시각도 있는데….
“영화계 내에서도 그런 말을 한다. 그런데 서울에서 개봉되는 거의 모든 외국영화는 미국의 거대 영화자본이 제작한 할리우드영화다. 서울시민이 할리우드영화 외엔 볼 게 없는 현실에서 영화제는 할리우드영화가 아닌 외국영화를 한군데 모아놓아 새로운 체험을 하도록 돕는다. 시 당국이나 시의회가 영화제의 이런 문화적 가치를 인식하고 있다면 이렇게 안 할 것이다.”
▼중구 출신 나경원 한나라당 의원(최고위원)은?
“한나라당과 민주당 측이 동시에 영화제와 거리를 두기로 한다면 그것이 나경원 의원과 관계없는 일도 아닐 것이다. 영화제 한 관계자에 따르면 나 의원은 ‘걱정하지 말라, 계속 밀어주겠다’고 말한다는데 실제로는 밀어주지 않는다.”
영화평론가 이동진씨는 ‘게릴라의 시각/영화’라는 글에서 “할리우드가 전세계 영화계의 한 축을 쥐고 흔드는 중요한 동력이라면 국제영화제는 다른 축을 지탱하는 작동 원리”라고 했다. 그에 따르면 국제영화제는, 비판받는 일이 없지는 않지만, 가려진 걸작을 발견하고 대중의 의식에 자리매김해주는 장이다.
한 도시의 국제영화제는 미국 자본주의의 표상인 할리우드영화에서 독립해 다양한 세계관을 제시하는 문화주체성의 표현이기도 하다. 칸영화제, 베를린영화제, 베니스영화제, 몬트리올영화제 등 성공한 국제영화제는 그 도시를 세계 문화의 주변에서 중심으로 이동시킨다. 이런 점 때문에 프랑스 정부는 올해로 63회째인 칸영화제에 매년 300억원을 지원한다. 도쿄시는 여러 시행착오에도 불구하고 도쿄영화제를 띄우기 위해 노력한다. 서울의 단견이 두드러져 보이는 대목이다.
충무로국제영화제의 허무한 추락과 더불어 광화문 한자(漢字) 현판 걸기도 서울의 문화주체성에 적지 않은 혼란을 안겨주는 것으로 비친다. 조선 고종의 광화문 중건 당시 훈령대장 겸 영건도감제조 임태영의 글씨체로 된 광화문 한자 현판이 8월8일 걸렸다. 1968년 콘크리트 구조로 복원된 광화문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친필로 된 한글 현판을 달고 있었는데 2005년 문화재청이 한자 현판으로의 교체를 추진해 마침내 ‘결실(?)’을 본 것이다.
유홍준 당시 문화재청장은 광화문 한자 현판의 당위성을 주장하는 2005년 기고문에서 “광화문을 ‘대표적인 중심대로의 현판’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저와의 시각 차이는 여기서 생긴 것 같습니다. 광화문은 정확히 말해서 조선왕조의 정궁인 경복궁의 정문입니다. 결코 대로변의 현판이 아닙니다. 즉 경복궁의 얼굴입니다”라고 했다.
국가상징거리의 뒤죽박죽 콘셉트
‘광화문이 경복궁의 정문일 뿐이므로 한자 현판이 무방하다’는 정부 당국자의 이런 논리는 상식과 괴리되어 있다. 그의 억견과 달리 광화문은 대표적인 중심대로가 맞다. 지난 6월24일 서울시 발표에 따르면 서울시는 세종로~태평로를 ‘국가상징거리 조성구간’으로 명시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세종로의 시작점에 위치한 광화문은 경복궁의 정문 차원을 넘어 ‘국가상징거리의 대표적 조형물’이다. 실제로도 많은 한국인과 외국인 관광객은 한국이나 서울 하면 ‘광화문과 그 주변의 전통과 현대가 조화된 풍경’을 가장 먼저 떠올린다. 그런 곳의 문패에 한글을 내거느냐 한자를 내거느냐는 ‘국가정체성’과 관련되는 일이 분명하다.
시인 이동희씨는 광화문 한자 현판에 대해 “한국 일번지에, 한글을 능멸하는 일을 자행하다니 놀랍기만 하다. 한국 사람으로서 한국의 얼을 지닌 사람이 되고 싶다. 그 길은 ‘광화문’에 있지 ‘光化門’에 있지 않다”고 했다. 김형오 한나라당 의원은 2005년 기고문에서 “한글 광화문 현판을 내려야 하는지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그것이 박정희 전 대통령이 쓴 현판이든, 이승만 전 대통령이 쓴 현판이든 그 글씨가 누구의 것이든 30년 이상 서울의 문패 역할을 해왔다는 사실입니다”라고 했다.
서울시는 지난해 광화문광장에 세종대왕 동상을 설치하고 한글이야기관을 개관했다. ‘한글문화’를 세계에 자랑할 광화문 일대의 테마로 제시한 것이다. 정부가 바로 몇 발짝 뒤의 광화문에 한글 현판을 떼내고 한자 현판으로 교체하는 건 정반대로 가는 일이다. 중국을 대신해 ‘서울이 한자 문화권’임을 전세계인에게 광고해주는 꼴이다. 국가상징거리 광화문 일대의 문화 콘셉트는 뒤죽박죽이 되고 있다.
광화문 한자 현판을 둘러싼 찬반논란은 진보·보수의 이념지형과 무관해 보인다. 진보성향 노무현 정권은 ‘박정희 지우기’가 진짜 이유이고 그 명분으로 한자 현판을 들고 나온 측면이 있다.(하상복씨의 ‘광화문의 정치학’ 논문) 보수성향 이명박 정권은 이를 계승해 실행에 옮긴 셈이다. 보수진영은 국·한문 혼용에 상대적으로 관용적이다. 그러나 천안함 사태 이후 보수진영 일각은 중국을 한민족의 위협으로 인식하면서 “서울의 간판 얼굴에 중국 한자를 걸어두는 건 자존심이 상한다”는 태도를 보인다.
이런 정황상 8월15일 제막식 이후에도 광화문 한자 현판과 관련된 논란은 쉽게 해소되지 않을 것이다. 원본도 아니고 고종 당시 무명 관리의 글씨체를 컴퓨터로 복원한 광화문 한자 현판은 구한말과 비슷하게 재현한 가치만 있지 문화재적 가치는 전무하다.
광화문은 과거의 유산이면서 동시에 현재의 한국과 서울의 상징이다. 정부 당국은 전자에만 집착하는 교조주의에 빠져 있는 것으로 비친다. 정부 측 논리로는 중국 당국이 세계적 유산인 자금성에 마오쩌둥의 대형사진을 걸어두는 게 설명이 안 된다. 광화문의 현재적 가치와 국내외인의 정서에 미치는 상징성을 고려했을 때 세종 당시의 훈민정음체로 한글 현판을 만들어 거는 방안 등 대안이 고려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문화 창달’ 위해 뭘 했나
문화주체성은 도시의 통합과 발전에 꼭 필요한 일이다. 한글과 같은 고유의 가치, 영화제와 같은 독자적인 세계관·문화관은 존중받아야 한다. 그 도시가 한 나라의 수도라면 그 중요성은 더욱 크다. 그러나 서울의 충무로와 세종로에서 벌어지고 있는 두 사건은 원래 있던 것도 없애버리려는 문화주체성의 퇴보를 암시하고 있다. 여야가 오랜만에 합심해 그 길로 가고 있는 것 같다. 이명박 대통령과 오세훈 시장이 ‘문화 창달’을 위해 어떠한 노력을 기울여왔는지 살펴보더라도 잘 떠오르는 일화가 없다. 우리의 지도자들은 서울을 세계 속에서 빛낼 ‘상징적 자본’을 스스로 내던지고 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