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에서 노인장기요양제도가 시행된 지 꼭 2년이 지났다. 전국 곳곳에 수많은 요양시설이 생겨났고, 요양보호사 자격을 취득한 이도 50만명을 넘어섰다. 양적인 면에서 보면 노인장기요양제도가 빠르게 정착한 모양이다. 이제는 질적인 측면에서 서비스 수준을 높여야 하는 과제가 남아 있다. 한국보다 앞서 장기요양제도를 시행한 독일은 ‘노인들의 천국’이라는 수식어가 아깝지 않을 만큼 잘 갖춰진 시스템과 품질 높은 서비스를 자랑한다. 독일의 노인요양시설 평가에서 최고점수를 받은 요양원 몇 곳을 직접 돌아봤다. 시설에 입소한 노인들의 생활습관에 맞춰 서비스를 제공하고, 무엇보다 모든 일을 스스로 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을 운영의 원칙으로 삼고 있었다. 침상에 마냥 누워 죽을 날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하루하루 새로운 삶을 영위하도록 도우려는 독일의 장인정신이 인상적이었다.
HIER DARF ICH?S SEIN.
(여기 나는 인간이고,
여기서 나는 인간답게 산다.)
- GOETHE -
독일 남서부 바덴뷔르템베르크(Baden Wu˙˙rttemberg)주 고핑엔(Goeppingen)시 근교 바트 위버킹엔(Bad U˙˙berkingen)에 위치한 플레게하임 암 뮐바흐(Pflegeheim am Mu˙˙hlbach) 현관에는 괴테의 글귀가 적혀 있다. 노인요양시설에 대한 독일 정부의 MDK(Medizinischer Dienst der Krankenversicherung·건강보험 의료서비스 단체) 평가에서 최고점수를 받은 이 요양원은 ‘입소한 환자 누구나가 인간의 존엄을 지키며 생활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최고의 목표로 삼고 있다.
요양원 원장 우테 그뢰너(Ute Gro˙˙ner)는 “비록 몸은 요양원에 와 있지만 집에서 생활하는 것처럼 느낄 수 있도록 취미와 경력, 생활습관 등을 감안해 최적의 서비스를 제공받을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고 했다.
그의 얘기는 요양원을 둘러보는 동안 충분히 실감할 수 있었다. 점심식사 시간이 한참 지난 시간에도 층마다 마련된 간이취사장에서는 늦은 점심식사를 하는 노인을 마주할 수 있었고, 몸이 불편한 노인을 위해 침실로 음식을 배달하는 모습도 심심치 않게 눈에 띄었다. 식사를 마친 노인 가운데에는 요양원 주변을 산책하거나, 휴게공간에 삼삼오오 모여앉아 담소를 나누는 모습도 눈에 들어왔다. 몸이 불편하고 기력이 쇠했을 뿐 저마다 자신의 관심사에 따라 다양한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노인들의 모습이 평화로워 보였다.
‘집처럼 편안하게’라는 슬로건은 노인들이 기거하는 생활공간에서부터 철저히 지켜졌다. 품질관리 담당자(Qualita˙˙ts Management) 다그마르 융블루트 라슬(Dagmar Jungblut-Rassl)은 “장기요양하는 노인을 위해 요양원 차원에서 옷장과 책상 등 생활비품을 구비해놓는데, 원한다면 집에서 쓰던 것을 가져와 사용할 수 있다”고 했다. 손때 묻은 옷장이며 책상 등 눈에 익은 물건들을 생활공간에 두도록 함으로써 낯선 환경으로 옮겨왔다는 불안감을 떨쳐내고 노인들이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도록 하겠다는 요양원의 배려였다.
뮐바트 요양원 안내 팜플릿.
젊은 나이에는 머리로는 짐작하면서도 실감하지 못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노년의 삶이다. 힘과 체력이 뒷받침돼 의지대로 몸을 움직여 생활을 영위할 수 있을 때에는 ‘설마’하는 생각에 별 걱정 안하고 지내지만, 막상 몸이 맘처럼 움직이지 않게 됐을 때 찾아오는 상실감과 좌절감은 말로 형용하기 어려울 정도다. 더군다나 치매 등으로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고 원활한 의사소통마저 어렵게 되면, 본인은 물론 가족 등 주위 사람들까지 어려움에 빠지는 경우가 많다.
이처럼 혼자서 생활하기 어려운 노인들의 생활을 도와 가정에 과도한 짐이 되는 것을 사회가 흡수하기 위해 시행한 제도가 바로 ‘노인장기요양제도’다. 우리나라에서는 몇 차례 시범사업을 거쳐 2008년 7월1일부터 본격적으로 시행되고 있다. 독일은 우리보다 앞서 1995년부터 이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우리가 걸음마를 막 뗀 단계라면, 독일은 이제 성숙기에 접어든 셈이다.
플레게하임 암 뮐바흐의 시설과 운영 노하우는 노인요양시설의 존재 의의가 무엇인지를 새삼 일깨워줄 만큼 모범적이었다. 1970년대 호텔 영업을 목적으로 세워진 건물을 개조해 1980년대부터 요양원으로 운영해왔다는 뮐바흐 요양원은 독일 만하임(Mannheim)에 본사를 둔 아벤디(avendi Senioren Service GmbH)사에서 2001년 인수해 운영해오고 있다. 아벤디는 독일 14개 지역에 요양시설을 운영하고 있는 독일의 대표적인 노인요양 전문회사다.
뮐바흐 요양원에서는 장기요양과 단기, 일일요양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는데 장기요양 수용 가능인원이 99명이다. 싱글룸이 39개, 더블룸이 30개로 구성돼 있다. 단기, 일일요양은 6명 정도가 출퇴근하며 이용하고 있다.
노인들이 과거를 회상하며 기억을 더듬어볼 수 있도록 마련된 바이오그라피(Biographie)룸.
잘 갖춰진 시설도 훌륭했지만 무엇보다 노인 개개인의 생활습관에 초점을 맞춰 서비스를 제공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사회복지사 시몬 쉬퇴러(Simon Sto‥hrer)씨는 “노인분이 요양원에 입원할 때에는 먼저 그분이 살아온 과거 이력에 대해 본인과 가족들로부터 상세히 청취한다”고 했다. 그간 살아온 삶을 고려해 요양 서비스를 설계하기 위해서라는 것. 예를 들어 제과나 요리 분야에 종사해왔던 노인은 여러 요양 훈련 프로그램 가운데 비슷한 일을 경험한 노인들과 함께 그룹을 이뤄 훈련을 받도록 한다. 그렇게 되면 좀 더 편안하게 요양 프로그램에 임하게 된다고 한다. 쉬퇴러씨는 “거동이 불편하다고 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도록 하고, 무조건 편하게 해주는 것이 노인을 위하는 길이 아니다”며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조금이라도 더 할 수 있도록 돕는 데 요양의 목적을 두고 있다”고 말했다.
뮐바흐의 자랑, 바이오그라피룸
이 때문에 뮐바흐 요양원에 근무하는 요양사들은 노인들이 스스로 옷을 입거나, 세수를 하도록 옆에서 거들고, 식사도 혼자 힘으로 할 수 있도록 보조 역할을 하는 데 그친다. 전혀 거동하지 못하는 노인들에게는 이 모든 서비스를 제공하지만, 조금이라도 할 수 있겠다 싶으면 인내심을 갖고 곁에서 지켜보며 필요할 때 거든다고 한다.
요양원 곳곳에는 노인들이 지각과 감각 능력을 되살리고 훈련할 수 있도록 여러 장치를 해두었다. 요양원 복도 한켠에는 수세미, 빗자루, 먼지떨이, 구둣솔 등을 걸어둬 지나다니는 노인들이 직접 만져보고 촉감을 느낄 수 있도록 했고, 맞은편에는 여러 가지 조화를 걸어둬 꽃에 대한 기억도 더듬고 색감도 경험할 수 있도록 했다.
융블루트 라슬씨는 “여러 자극을 경험해 감각을 되살릴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요양원 곳곳에 노인들이 평소 생활하면서 자주 접했던 익숙한 물건들을 설치해뒀다”고 소개했다.
노인들의 생활공간으로 통하는 복도 정면에는 같은 층에서 생활하고 있는 노인들의 사진을 걸어뒀다. 한결같이 밝게 웃는 모습이었다. 사회복지사 쉬토러씨는 “사진은 요양원에 기거하는 노인을 만나러 온 가족들을 위한 것”이라며 “밝고 즐거운 모습으로 함께 생활했던 기억을 떠올릴 수 있도록 밝은 사진을 걸어두고 있다”고 했다.
취재진이 요양원 시설 곳곳을 둘러보는 동안에도 요양사들은 분주히 움직였다. 거동이 불편한 노인을 모시고 휴게공간으로 이동하는가 하면, 치료용 애완견 ‘배니’와 함께 노인을 찾아가는 요양사도 있었다. 아직 식사를 하지 않은 노인을 위해 별도의 식사를 준비해 방으로 배달하는 이도 있었다. 여러 사람이 함께 공동생활을 하는 모습 속에서 ‘소외’라는 단어는 들어설 자리가 없어 보였다.
요양원 3층 좌측 끝 전망 좋은 방에 들어서자 오래된 흑백영화에서나 봤음직한 장면이 펼쳐졌다. 낡은 테이블 위에 어딘지 모르게 촌스러워 보이는 문양의 식탁보. 수십 년 전에 독일 일반 가정에서 즐겨 사용했다는 주방가구들과 싱크대, 수납장, 거실장 그리고 구닥다리 TV와 라디오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이곳은 뭐하는 방입니까?”
생경한 풍경에 호기심이 일었다.
“이곳은 노인들이 과거를 회상하며 기억을 더듬어볼 수 있도록 마련된 바이오그라피(Biographie)룸입니다. 노인들이 젊었을 때 즐겨 썼던 물건들을 한데 모아놓은 곳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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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사방 벽지도 아주 오래전에 쓰였던 것들이었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1950년대나 60년대로 시간을 거슬러 온 느낌을 줬다.
바이오그라피룸은 독일에서도 뮐바흐 요양원에서 최초로 시도한 것으로, 특히 치매환자에게 큰 도움이 된다고 한다. 입원 이후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던 치매환자가 옛 물건들이 놓인 바이오그라피룸에 들어와 “이것은 무엇에 쓰던 물건이다. 저것은 어디에 쓴다”며 말문을 연 경우가 있다고 한다. 또 한번은 요양보호사가 되기 위해 인턴과정을 밟던 17세 된 소녀에게 치매를 앓던 노인이 오래된 전자제품의 기능을 설명해주며 대화를 나눠 친하게 된 일도 있다고 한다. 옛 물건들이 세대차를 뛰어넘어 함께 대화를 나누게 만드는 매개가 되고 있는 셈이다. 바이오그라피룸은 요양원을 거쳐간 환자들이 사후에 유품을 요양원에 남기고 떠나면서 아이디어를 얻게 됐다고 한다.
“요양원에 입원한 노인 가운데에는 자신이 썼던 손때 묻은 오래된 가구를 곁에 두고 싶어하는 노인이 많아요. 노인께서 돌아가시고 나면 유품이 요양원에 남는데, 어떻게 처리할까 궁리하다가 한데 모아보자고 아이디어를 낸 것이지요. 요양원에 기거하시는 노인 분들은 이 방을 특히 좋아하세요. 그렇지만 요양원을 운영하는 저희 입장에서는 노인들의 가족에게 충분히 설명해야 하는 문제가 있어요. 자칫 ‘이 요양원은 오래된 물건들만 쓰나? 시설이 왜 이래?’하는 생각을 하실 수도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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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오그라피룸에 대한 노인들의 반응이 뜨겁자, 요양원은 복도와 다른 층 휴게공간으로 확대할 계획을 갖고 있다. 요양원 현관에는 기자가 아주 어릴 적 어머니가 사용하시던 것과 비슷한 오래된 재봉틀이 놓여 있었다. 어릴 적 추억이 담긴 재봉틀을 발견한 기자는 참으로 반가웠다. 30년의 세월을 거슬러 과거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이제 막 40대에 들어선 기자도 그처럼 반가운 마음이 들었는데, 노인들이 수십 년 전 추억이 담긴 물건을 봤을 때 얼마나 기쁠지 충분히 짐작이 됐다.
“요즘은 옛날 가방을 수집하고 있어요. 다양한 재료로 제작된 옛 가방을 수집해서 바이오그라피룸 앞 통로에 걸어둘 생각이에요. 자극이 필요한 치매환자들에겐 촉감자극을 위한 치료도구로 사용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융블루트 라슬씨는 “바이오그라피룸은 뮐바흐 요양원을 대표하는 가장 특징적인 명소”라면서 “앞으로 독일은 물론 한국 등 다른 나라에 우리의 좋은 사례가 전파되길 바란다”며 활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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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매환자 체류공간 Bernstein
독일을 여행한 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가보는 곳이 바로 ‘낭만가도’다. 중세부터 이어져온 작은 소도시들이 길을 따라 이어져 있어, 여행자는 고풍스러운 멋을 한껏 느낄 수 있다. 낭만가도가 시작되는 뷔르츠부르크에서 낭만가도를 따라 1시간30분쯤 내려가다보면 도나우워드에 도착한다. 도나우워드에는 독일 바이에른주 적십자에서 운영하는 요양전문기관 BRK-Pflegezentrum am Mongoldfelsen가 있다. 1963년부터 요양업을 시작했다고 하니, 무려 47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셈이다. BRK는 현재 129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규모 건물로 이전해 운영되고 있다.
BRK는 장기요양은 물론, 단기, 일일요양과 재가서비스까지 제공하는 종합 노인요양시설이다. 특히 장기요양과 치매환자를 위한 별도의 체류공간을 둔 것이 특징적이다.
BRK-Pflegezentrum am Mongoldfelsen 전경(왼쪽). 원장 안젤리카 쉐퍼.(오른쪽)
이곳의 시설에 기거하는 노인을 위한 프로그램은 뮐바흐 요양원과 큰 차이가 나지 않았다. 다만 도나우워드 요양원에서는 ‘노인정신과’라는 이름의 치매환자 체류공간을 둔 것이 특이했다. 자신이 어디를 가는지도 모른 채 돌아다니기 십상인 치매환자를 위해 별도의 공간을 마련하고 특별한 자격을 갖춘 요양보호사를 배치해 운영하고 있었다.
“치매환자 보호지역 Bernstein은 중증 치매환자를 위한 노인정신과의 성격을 띱니다. 평균기대수명이 길어지는 요즘 추세를 보면 치매는 독일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글로벌한 문제라고 생각해요. 2008년 독일요양법 개혁안을 보더라도 치매에 대한 국가적 관심도가 매우 높아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죠. MDK가 주도하는 요양품질관리평가에도 치매환자를 위한 요양서비스 내용이 평가의 한 영역으로 구분되어 있을 정도입니다. 앞으로도 치매환자 수는 급속하게 늘어갈 전망입니다. 우리 요양원은 이런 추세에 대비해 중증치매환자를 위한 특별 요양서비스를 이미 1980년대 초반부터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쉐퍼 원장은 각 층에 구비돼 있는 환자전용 목욕실을 보여주며, 특히 치매환자 전용구간인 Bernstein의 독특한 목욕치료법에 대해 자세히 소개했다. 그는 “밝은 오렌지색과 노란색으로 꾸민 욕실에서 이뤄지는 치매환자 목욕은 단순한 신체관리 이상의 효과가 있다”며 “따뜻한 햇볕과 여름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게 만들어 삶에 대한 활력을 불어넣어준다”고 했다. 음악이나 아로마, 향료요법을 겸한 목욕치료법은 이곳에 머무는 치매환자들에게 웰니스(Wellness) 여행을 하는 것과 같다고 한다.
비어가르텐에서 맥주 한잔
요양원에서 장기요양 중인 노인들이 비어가르텐에서 맥주잔을 기울이고 있다.
구름 낀 우중충한 날이 잦은 독일에서는 모처럼 햇살이 비치는 날이면 일과를 마친 이들이 ‘비어가르텐(Biergarten)’에 모여 맥주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때마침 기자가 도나우워드 BRK를 방문한 7월22일은 날씨가 화창했다. 쉐퍼 원장과 함께 노인요양 시설 내부를 모두 둘러본 뒤 테라스 쪽으로 나오자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 널찍한 마당 한켠에는 일반적인 비어가르텐처럼 커다란 나무 아래로 테이블이 여럿 놓여 있었다. 테이블마다 20여 명의 노인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앉아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휠체어에 앉은 채 맥주잔을 기울이는 노인도 보였다.
“멋지다”는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건강한 일반인과 조금도 다를 바 없이(비록 요양사의 도움을 받아야 했지만) 함께 맥주잔을 기울이는 노인들의 모습 속에 ‘웰빙’이란 단어가 떠올랐다. 웰빙이 건강한 젊은이들만의 전유물은 아니지 않은가. 노인들의 평화로운 모습은 마치 ‘아름다운 삶은 오랫동안 쭉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을 웅변하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