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제의 공출로 좋은 쌀이 바닥난 시절. 싸라기로 만든, 뜨물처럼 멀건 탁배기도 귀하던 그 시절에 찹쌀로 빚은 김포약주는 그냥 술이 아니었다. 그래서 ‘특주’라는 특별한 이름을 달았다. 이후 격동과 시련의 세월 속에 쇠락의 길을 걸은 김포특주를 가업으로 다시 살려내려는 노력이 시도되고 있다.
김포탁주 양조장 앞에 선 권종옥씨와 권이준씨 부자(큰 사진). 1972년 김포탁주합동 양조장을 설립했을 때의 계약문건.
“어디 가서 막걸리 얘기를 들을 데도 없고, 함께 얘기할 데도 없어서 왔습니다.”
막걸리를 마시는 사람은 보통 막걸리를 마시며 인생사나 일 이야기를 하지 막걸리 자체에 대해서 얘기하지는 않는다. 막걸리 만드는 사람들도 막걸리 제조 비법이 흘러나갈까봐서인지 막걸리 얘기를 되도록 아낀다. 그러다보니 막걸리라는 술 자체에 대해 논하고 까부는 자리란 사실 만나기 어렵다.
이근왕씨가 궁금했던 것은 막걸리 자체이기도 했지만, 막걸리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의 면면이었을 것이다. 생산자와 소비자가 편하게 친구가 되어, 막걸리가 왜 좋은데? 뭐가 부족한데? 어떻게 하면 더 좋은 막걸리가 될까? 하고 말을 섞을 수 있는 자리로 그는 막걸리학교의 문을 두드린 것 같다.
“대를 이을 수 있다면 하십시오”
양조업자나 양조장 가족들은 이와 비슷한 이유로 막걸리학교를 꽤 찾아온다. 막걸리학교는 5기에 이르기까지 모두 200명이 수료했는데, 그중 양조장에 관련된 사람이 15명쯤 된다. 양조장 손자도 있고, 예비 며느리도 있었다.
그중 중대한 출발점에 선 인물이 있다. 김포금쌀 양조장을 운영하는 권이준씨다. 그이는 3기 수강생으로 막걸리학교를 들어오던 당시 막걸리 양조장을 짓는 중이라고 했다. 그 규모를 몰라 “양조장 짓는 데 돈이 얼마나 들어갑니까?” 물었더니 10억이 조금 넘는단다. 10억 넘는 돈을 들여 막걸리 공장을 짓고 있는 분이 수강료가 40만원이 안 되는 막걸리학교 강좌를 찾아와 뭘 들으려 할까, 좀 걸맞지 않은 것도 같았다.
처음 막걸리학교를 열던 내 마음은 좀 재미나고 흥겹게, 문화의 한 가지로서 우리의 술 이야기를 나눠보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막상 찾아오는 사람들 중에는 권이준씨처럼 인생의 중요한 출발점이나 전환점에 선 분이 많았다. 강의를 하는 내 처지에서는 조심스럽고 어깨가 무겁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막걸리학교 수강생뿐 아니라 더러 양조장을 하겠다고 내게 자문하러 오는 이들이 있다. 그럴 때 내가 하는 첫 번째 말은 이것이다.
김포금쌀 막걸리는 쌀을 주원료로 해서 술빛이 희디희다.
하지만 권이준씨에게는 굳이 이 말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는 이미 나름대로 파란 많은 세월의 힘을 견뎌온 술도가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권씨는 8년 전 아버지에게서 김포탁주합동을 물려받았다. 그러나 4년 전 그 양조장을 폐업하면서 막걸리 양조업을 중단했다. 폐업 당시 김포탁주합동은 매달 100만원씩 적자를 보는 형편이었다. 5명의 주주가 매달 20만원씩을 보태야 양조장이 운영될 수 있었다. 권씨는 적자를 볼 거라면 자신에게 2년 동안 경영권을 맡겨달라고 다른 주주들에게 요청했다. 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양조장은 매각 결정이 났고 지분을 나눠 갖는 방식으로 해체되고 말았다.
그날 이후로 권씨는 어떻게 하면 다시 막걸리 양조장을 할까 고심을 거듭했다. 그러던 차에 막걸리 바람이 불면서, 양조장을 다시 시작하려던 그의 각오가 실행에 옮겨지게 됐다. 그는 막걸리 양조를 다시 시작하면서 좀 더 차별화된 막걸리를 만들기로 했다. 그리하여 브랜드화한 김포금쌀을 가지고 막걸리를 빚기로 하고, 술도가 이름도 ‘김포금쌀탁주’라고 짓게 됐다.
권씨가 다시 술을 빚게 된 것은 막걸리 바람 덕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가업인 막걸리 양조업을 잇겠다는 집념 때문이다. 그의 집안이 견뎌온 힘은 무엇일까. 김포탁주합동을 운영했던 권씨의 부친 권종옥(83)씨를 만났다. 권종옥씨를 통해 지금은 소문으로만 남은 김포특주의 옛 명성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싸라기 술도 귀하던 시절의 찹쌀 술
김포는 경북 선산과 더불어 일찍이 약주로 명성을 얻었던 동네다. 그런데 김포에서는 약주를 더 특화시켜 특주라고도 불렀다. 일제강점기에 누가 꼽았는지 확인하기 어렵지만, 팔도 명주로 김포특주, 안동 제비원소주, 한산 소곡주, 부산산성 약주, 경주법주, 마산과 목포의 정종, 개성소주, 해주 방문주, 동래 동동주가 꼽혔다. 이 중 김포특주가 곧 김포약주다.
권종옥씨의 부친인 권성규씨가 양조업을 시작한 것은 광복이 되던 1945년이다. 권성규씨는 당시 김포의 금성양조장에서 사무 일을 보다가 양조장을 인수하게 됐다. 금성양조장은 1925년에 설립됐는데, 원래 주인은 김춘원씨로 권성규씨의 처남이다. 권성규씨는 양조장을 인수하면서 양조장 이름을 하성양조장으로 바꾸고 본격적으로 양조업을 시작하게 됐다.
권종옥씨는 19세 때부터 아버지를 도와 양조장 일을 했다. 그는 1947년 누룩에 쓸 밀을 구매하러 개성 장에 갔던 적이 있다. 지금은 군사분계선이 지나가 김포 나루들을 이용할 수 없게 됐지만, 그 시절 그가 살던 김포군 하성면 일대에는 한강 하구의 이름난 포구가 있었고 주로 배를 타고 마포를 오갔다. 임진강과 만나는 애기봉 아래쪽 김포시 하성면 신리 마근포에서는 배를 타고 개풍군으로 건너갈 수 있었다. 그는 일꾼들과 함께 밀 50가마를 배에 싣고 와서 그해 누룩을 만들어 술을 빚었다.
하성양조장에서 만든 술은 탁배기인 막걸리, 합주, 김포특주 등이었다. 1957년에는 서울 마포의 조양양조장을 인수해 보리와 밀로 소주도 만들어봤고, 그 뒤에는 주정을 사다가 희석식 소주도 만들어봤다. 이 중 김포특주는 찹쌀로 빚은 고급 약주였다.
광복이 될 무렵에 김포의 양조장에선 막걸리는 주로 싸라기 쌀로 빚었다. 막걸리라는 표현보다도 탁배기라는 말을 더 많이 썼다. 일제 말기에 일본인들이 쌀을 공출해가는 바람에 좋은 쌀로는 탁배기를 빚을 수 없었다. 그때는 소작농이 많았고, 소작인이 수확량의 30%를, 지주가 70%를 가져가던 시절이었다. 그러니 쌀이 귀했고 쌀로 빚는 술도 귀했다. 그런데 비록 “뜨물같이 멀겋고 밍밍한” 맛이지만 싸라기로 빚은 탁배기를 사람들은 “좋다며 먹었다”고 권종옥씨는 회고한다. 싸라기로 빚은 탁배기마저 맛있게 먹던 시절 찹쌀로 빚은 김포특주는 보통 술이 아니었다. 가히 특주라는 이름을 달 만했다.
탁배기는 멀겋고 탁하고 걸쭉했다. 체로 거르기 때문에 술지게미도 별로 나오지 않았다. 알코올 도수는 6도 정도 됐다. 반면 약주는 자루에 담아서 두부 짜듯이 짜는데 도수 11도로 술빛이 아주 맑고 지게미도 많이 남았다. 약주 지게미는 양조장 이웃 사람들에게 그냥 나눠줬다. 끼니를 제대로 잇지 못하는 가난한 사람들은 이 지게미를 가져다가 끓여서 먹었다.
권종옥씨는 한때 합주(合酒)를 만들어 팔기도 했다. 합주는 20세기 초반에 경성지방의 상류층에서 마시던 술로 막걸리와 약주의 중간 형태 술이다. 1935년에 작성된 ‘조선주조사’는 이것이 막걸리보다 희고 신맛이 덜하고 단맛과 매운맛이 강하다고 평가한다. 권씨가 합주를 만들던 방식도 약주처럼 자루에 넣고 거르는 식이었는데, 물을 좀 더 타고 걸러 도수가 약주보다는 낮고 탁배기보다는 높았다. 술빛도 탁배기보다 더 맑게 짰다. 공식적으로 합주라는 상표를 달진 않았지만 합주라는 이름으로 유통됐다.
전쟁과 경쟁에 시들어간 명성
권종옥씨가 사는 김포시 하성면은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지점으로, 파주시의 오두산 통일전망대와 개풍군 정곳리와 서로 마주보고 있는 곳이다. 바닷물과 민물이 만나는 이 지점에서 장어가 많이 잡혔다. 한겨울에 가마니에 소똥을 집어넣어 강에 빠뜨려놓았다가 끌어올려보면, 가마니에 장어가 가득 들어 있었다. 그래서 장어를 잡다가 물에 빠져 죽는 사고도 많았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 사람들이 이 장어를 무척 좋아해 많이 찾았다. 광복 뒤에도 이 장어를 맛보러 서울 사람들이 마포에서 배를 타고 하성면을 많이 찾아왔다. 장어를 맛보러 오는 사람들이 술을 찾아 하성양조장의 술도 이때 많이 나갔다고 한다.
광복 뒤 권씨 집안은 하성면의 전류리 포구에서 마포까지 오가는 배를 직접 운영하기도 했다. 건국환과 한양환이라는 이름의 철선 2척으로, 이 배로 마포까지 술을 실어 나르기도 했다. 하지만 6·25전쟁 때 철선이 폭격을 맞고 말았다. 휴전선이 생기면서는 김포 전류리 포구는 간혹 간첩이 출몰했다는 소식, 간첩으로 오인받아 죽었다는 주민들 얘기만 떠도는 곳이 됐다.
김포약주인 김포특주가 인기를 끌면서, 김포의 양조장들이 다투어 약주를 만들어 서울로 내다 팔았다. 김포약주 경쟁이 치열해지자 가격을 낮추기 위해 질 낮은 약주도 나왔다. 그러던 1970년대 초반엔가 김포약주를 유통하는 중간업자가 약주의 양을 늘리기 위해 공업용 알코올을 섞으면서 술을 맛보다가 두 명이 함께 죽는 사건이 터졌다. 이 사건과 함께, 더 이상 쌀로 약주를 빚을 수 없는 곤혹스러운 상황이 지속되면서 김포약주의 인기도 시들해졌다.
농협마트 앞의 김포금쌀 시음장에서 권이준씨가 술맛을 보고 있다.
그 후 1972년에 정부 시책에 따라 김포시에 있던 다섯 개 양조장, 즉 하성양조장, 백로양조장, 통진양조장, 양곡양조장, 대곶양조장이 김포탁주통합으로 통폐합됐다. 그 뒤로 1990년 초반까지 막걸리 사업은 잘 운영됐으나 2000년대 들어 적자 신세가 되면서 문을 닫게 됐다.
1925년에 지어졌다던 80평(264m2) 규모의 금성양조장 목조건물은 6·25 때 불타버리고 없다. 인민군들이 근거지가 된다고 여겨 양조장을 포함한 주변 건물들이 모두 불태워졌다. 그 뒤 새로 지어진 하성양조장 건물도 도시계획으로 지금은 자취를 찾을 길이 없다. 1972년 김포시의 5개 양조장이 합쳐져 세워진 김포탁주통합 양조장은 새로 하성면 양택리에 자리 잡게 됐다. 그곳에 지금 김포금쌀탁조 양조장이 새 건물을 짓고 들어서 있다.
권이준씨는 할아버지 권성규씨와 아버지 권종옥씨가 하던 양조장을 가업으로 다시 살리려는 노력의 하나로 김포금쌀탁주 양조장 이름 뒤에 (구)김포탁주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권이준씨는 막걸리학교를 다니면서 두 가지에 대해서 좀 더 확고한 생각을 하게 됐다고 한다.
대기업 탁주와 맞서려면 지역 명품쌀로 빚어야
첫째는 막걸리의 차별성을 얻기 위해서 지역의 명품쌀로 막걸리를 빚어야 한다는 점이다. 서울탁주나 대기업 탁주 등과 경쟁해서 살아남는 길은 차별화인데, 그것을 위해 지역 명품쌀로 빚는 것부터 시작하기로 했단다. 물론 지금도 일반 쌀로 빚어 서울탁주나 대기업 막걸리와 가격경쟁을 벌여야 되지 않을까 하는 고민을 거듭하고 있기는 하다. 그렇지만 좋은 쌀로 빚은 명품 막걸리를 언젠가는 세상이 알아줄 것이라 믿고 있다.
둘째는 공장의 2층에 막걸리 빚기 체험장을 마련한 것이다. 건물 설계도에는 없었지만, 막걸리학교를 다니면서 막걸리학교 학생들이 찾아와 시음도 하고 실습도 하는 공간이 됐으면 하는 바람으로 이 부분을 보충했다고 한다.
권이준씨는 합동으로 하던 양조장을 폐업한 지 4년 만에 다시 김포 땅에 막걸리 양조장을 차려 술을 빚게 되면서, 아버지로부터 “술맛 좋다”는 칭찬을 들을 때 정말 가슴 뿌듯함을 느낀다고 했다. 김포금쌀 막걸리가 안정된 유통구조를 확보하면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빚던 김포특주와 합주도 되살려내고 싶다고 한다. 소문으로만 남았던 김포특주를 맛볼 날도 머지않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