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눈의 한국혼 헐버트’<br>김동진 지음/ 참좋은친구/ 464쪽/ 1만8800원
평소에 이렇게 말하며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하다 한강변 마포나루 양화진 묘지에 묻힌 서양인은 누구일까. 격동기인 구한말에 한국에 와 개화, 계몽 활동에 앞장선 호머 헐버트(1863~1949) 박사다. 그가 작고한 지도 60년, 한 갑자(甲子)가 지났다.
헐버트 박사의 애틋한 ‘애한(愛韓)’ 정신이 한국인들의 기억에서도 거의 사라져가고 있다. 안타까운 일이다. 이를 좌시할 수 없어 벌떡 일어선 의인(義人)이 있다. 그는 헐버트의 생애를 재조명하기 위해 수십 년 동안 열정을 바쳤다. 한국인을 위해 평생을 헌신하다 이 땅에서 숨진 헐버트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 의리라 여겼기 때문이다.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 김동진 회장이 주인공이다. 금융인으로 일하며 틈틈이 헐버트의 삶을 연구한 김 회장은 최근 오랜 집념의 산물인 ‘파란눈의 한국혼 헐버트’를 출간했다. 안정적인 일상을 보내던 금융인 김동진은 무엇 때문에 헐버트에 몰두하게 되었을까.
청년 시절, 김동진은 우연히 헐버트의 저서 ‘대한제국멸망사’를 읽고 가슴이 쿵쾅거렸다. 벽안(碧眼)의 서양인이 그렇게 방대하고 치밀한 한국 역사를 기술했다는 점에서 놀랐고 또 그에 대해 존경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애정이 없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김동진은 헐버트의 업적을 정리하는 것이 자신의 운명적인 사명임을 직감했다. 그때부터 주경야독의 생활이 시작됐다. 직장 일을 마치고 나면 헐버트와 관련된 자료를 모으고, 읽고, 정리했다. 헐버트의 모교인 미국 다트머스 대학, 컬럼비아 대학 등을 방문해 도서관에서 자료를 찾느라 며칠을 보내기도 했고 ‘뉴욕타임스’ 등 신문과 잡지의 100년 전 기사들을 뒤지느라 밤을 새우기 일쑤였다. 한국에서는 서울대의 한국교육사고(史庫), 독립기념관, 고서점가 등을 훑었다. 적잖은 사재가 들었다.
1989년 케미컬은행의 미국 뉴욕 본사에 근무하던 김 회장은 헐버트의 맏손자를 극적으로 만났다. 맏손자로부터 헐버트의 생애와 관련한 귀중한 자료를 얻고 증언을 들었다. 연구하면 할수록 헐버트는 귀감이 될 만한 인물이었다. 1999년 김동진은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를 만들어 박사의 업적을 알리고 후손들을 한국에 초청하는 등의 사업을 전개했다.
고종, 몸소 영어 문제 낭독
이 책은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헐버트 박사님 영전에 이 책을 바칩니다’라는 헌사(獻辭)로 시작한다. 헐버트의 삶의 궤적을 살펴보자.
1863년 미국 버몬트 주 뉴헤이번의 명문가에서 태어난 헐버트는 다트머스 대학을 졸업하고 유니언 신학대학을 2년간 다녔다. 한국 최초의 근대식 관립학교인 육영공원 교사로 부임하러 1886년 7월4일에 한국 땅에 발을 디뎠다.그때 서울에는 콜레라가 창궐해 도성 안팎에서 매일 2000여 구의 시체가 치워졌다. 콜레라 공포, 장마와 불볕더위 속에서 개교를 서둘렀다. 미국에서 온 교사는 헐버트, 벙커, 길모어 등 3명이었다. 고종의 관심 속에서 훗날 ‘매국노’의 대표 인물이 되는 이완용 등 학생들이 입학했다.
헐버트는 5대양 6대주 지도를 보여주며 학생들에게 넓은 세계를 설명했다. 영어 발음을 제대로 익히게 하는 데 주력했으나 일부 학생은 엉터리 발음을 도저히 고치지 못했다. 하루에 외워야 하는 문장을 나눠주고 암송을 마치지 못하면 집에 보내주지 않았다. 영어로 일기를 쓰는 연습도 시켰다.
고종은 육영공원 수업을 참관하기도 했으며 경복궁에 학생들을 불러 영어시험을 치르도록 하기도 했다. 고종이 영어 문제를 직접 읽어 학생들이 답안을 작성하는 일도 있었다. 고종은 영어 문장을 읽을 줄은 몰랐으나 한글로 표기된 문제를 낭독했다는 것이다. 헐버트는 이때 영어 발음을 표기하는 한글의 우수성을 깨닫고 한글을 본격적으로 연구한다.
헐버트는 1888년 9월 결혼을 하려고 미국에 잠시 갔다가 신부와 함께 한국으로 곧 돌아온다. 헐버트는 안정된 생활을 누리게 되자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체계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한다. 그는 매우 학구적인 인물이었다. 한국의 역사, 지리를 공부하는 한편 학생들에게 가르칠 교과서를 한글로 집필했다. 1889년에 탄생한 ‘사민필지(士民必知)’라는 교과서가 그것인데 ‘선비와 백성 모두가 반드시 알아야 할 지식’이라는 뜻이다. 세계 지리, 천체, 각국 정부 형태, 풍습, 산업 등 다양한 분야를 망라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순 한글 교과서다. 이 교과서를 대중용으로 손질해 1891년 초판 2000부를 인쇄했는데 이는 당시로는 엄청난 부수였다.
삼문출판사 맡아 양서 발간
헐버트는 1891년 말 육영공원 교사 고용계약이 끝나자 미국으로 돌아가 오하이오 주에 있는 풋남군사학교 교장에 취임했다. 몸은 미국에 있지만 오매불망 조선을 그리워하다 1893년 감리교 선교사 자격으로 다시 조선에 왔다. 이때 신시내티에서 구입한 신식 인쇄기를 갖고 왔다. 감리교에서 세운 삼문출판사의 대표를 맡으면서 이 인쇄기로 양서(良書)와 잡지들을 출간했다.
헐버트는 1892년 1월 우리나라 최초의 영문 월간지 ‘한국소식(The Korean Repository)’을 창간하면서 ‘한글(The Korean Alphabet)’이란 9쪽짜리 논문을 발표했다. 이 논문은 세종대왕의 창의성, 애민정신 등을 소개하고 한글의 우수성을 높이 평가했다. 그는 여러 국제 학술지와 미국 신문, 잡지 등에도 한글이 매우 과학적인 문자라는 사실을 알리는 글을 실었다.
‘한국소식’ 2호에서는 민요 아리랑에 서양 음계를 붙인 악보를 우리나라 최초로 선보였다. 헐버트 자신이 아리랑 음계를 채보(採譜)해 정리한 것이다. 그는 “아리랑은 한국인에게 주식인 쌀과 같은 존재”라면서 “한국인은 즉흥곡의 명수”라고 말했다. 이와 함께 시조 ‘청산아’와 경기민요 ‘군밤타령’도 음계를 붙여 소개했다.
헐버트는 미국에서 의사 자격증을 따고 귀국한 갑신정변의 주역 서재필(1864 ~1951)과 1896년 초 만나 의기투합한다. 둘은 나이가 비슷하고 영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해 막역한 사이가 됐다. 서재필이 신문 창간을 준비한다는 말을 듣고 헐버트는 삼문출판사 시설과 편집 노하우를 이용하도록 했다. 서재필이 단기간에 한글판, 영문판 ‘독립신문’을 창간한 것은 헐버트의 도움에 크게 힘입었다. 영문판 독립신문은 헐버트가 사실상의 편집인 역할을 했다. 헐버트의 동생인 아처 헐버트도 1897년 한국에 와 1년간 머물며 독립신문 발행을 도왔다. 동생은 1902년 미국에서 ‘제주도의 여왕(The Queen of Quel-parte)’라는 한국 소재 소설을 썼고 한국에 관해 여러 차례 강연을 했다.
헐버트는 1901년 1월에는 ‘한국평론’이라는 월간지를 창간했다. 그가 편집장, 주필, 경영책임을 모두 맡았다. 이 잡지는 일본이 조선을 부당하게 간섭하는 사실을 통렬하게 비판했다. 헐버트는 ‘한국평론’과 ‘한국소식’을 통해 국제정세를 비롯해 한국의 역사와 문화에 관한 다양한 글을 발표했다.
헤이그 밀사, 헐버트
헐버트는 한국의 뿌리를 캐기 위해 한문 서적까지 탐독했으니 그의 열정이 얼마나 대단한가. 15년간 매달린 결실은 ‘한국사(The History of Korea)’와 ‘대한제국멸망사(The Passing of Korea)’라는 방대한 분량의 역사서적으로 나타났다.
김동진 회장은 “헐버트는 한민족의 역사를 총체적이고 체계적으로 기술하여 국제적으로 알린 최초의 인물”이라면서 “미국과 유럽의 한국사 연구는 헐버트로부터 시작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평가했다.
헐버트는 ‘대한제국멸망사’에서 자신의 눈으로 본 한민족의 특성을 여섯 가지로 요약했다. 첫째 이상과 실용이 알맞게 조화된 합리적 이상주의자. 둘째 적응성이 뛰어난 민족. 성냥이 부싯돌보다 편리함을 깨닫고 거의 전 국민이 순식간에 성냥을 쓰기 시작한 것이 사례다. 셋째 의로운 일에 과감히 돈을 쓸 줄 아는 인정 많은 민족. 넷째 굶어죽을지언정 구걸을 하지 않는 강한 자존심을 지녔다. 다섯째 필요에 따라 거짓말을 망설이지 않아 진실성이 의심된다. 여섯째 파벌 싸움의 폐해가 심각하다.
1907년 6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제2차 만국평화회의가 열릴 때였다. 고종은 일본과 맺은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국제사회에 호소하기 위해 이준, 이상설, 이위종 과 함께 헐버트를 특사로 보냈다. 헐버트는 고종의 친서와 특사증을 미국 선교사 부인의 가방에 숨기고 헤이그로 갔다. 일본 관헌이 헐버트의 가방도 수색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헤이그 특사 건은 실패로 끝나고 이준 열사는 분사(憤死)했지만 헐버트는 나름대로 국제사회에 일본의 횡포를 알리는 데 최선을 다했다. 헐버트는 일본에 눈엣가시 같은 인물로 부각됐다. 1907년에 추방당하다시피 한국을 떠났다. 그는 미국 주요 도시를 돌며 한국 독립을 촉구하는 강연을 했고 언론에도 활발하게 기고했다. 1919년 3·1운동 이후에는 서재필이 이끄는 미국의 한인 독립단체 ‘한국친우동맹’과 이승만이 결성한 ‘구미위원회’에서 중심 연사로 활동했다.
한국이 독립하고 정부를 수립한 이후인 1949년 7월29일 헐버트는 인천항에 도착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배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는 한 달가량의 여행은 86세의 노구(老軀)엔 무리였다. 헐버트는 그러나 이를 감행했다. 미국을 떠나면서 AP통신 기자에게 “나는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한국에 도착한 지 1주일 만인 1949년 8월5일 영원히 눈을 감았다.
힘없는 한민족을 위해 불꽃같은 일생을 보낸 헐버트 박사, 각박한 염량세태(炎凉世態)에 개인적인 영달과 무관한 일에 매달린 김동진. 이 두 의인에게 경의(敬意)를 품고 흥미진진하게, 감동적으로 이 책을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