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년째 이어진 태국의 격렬한 정치파동이 출구를 찾지 못하고 있다. 2006년 탁신 친나왓 당시 총리의 부패를 문제 삼으며 발생한 쿠데타로 시작된 혼란은, 2007년 말 총선에서 다시 탁신계 정부가 수립되자 이를 거부하는 반(反)탁신 시위대(일명 옐로 셔츠)가 방콕 공항을 점령하는 사태로 이어졌다. 이후 이들 반 탁신 세력에 대항해 빈민계층을 주축으로 하는 친(親)탁신 세력(일명 레드 셔츠)이 조직화되면서 유혈 시위가 이어졌고, 결국 지난봄 레드 셔츠 시위대의 격렬한 도심 점거 시위에서 무수한 사망자를 내며 정점을 찍었다. 시위 자체는 상당 부분 가라앉았지만 태국 정국의 대립과 반목은 여전히 폭발 직전의 긴장을 유지하고 있다. 공화파로 알려진 탁신 전 총리 세력과 태국의 전통적인 정신적 지주였던 푸미폰 아둔야뎃 국왕 지지파의 대립으로 알려진 태국의 극단적인 정치 혼돈은, 그러나 속내를 들여다보면 농촌지역 빈민 계층과 도시 엘리트 계층 사이의 갈등이 더 큰 뿌리로 자리하고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지난 5월 방콕을 뒤덮었던 레드 셔츠 시위대는 과도한 폭력행위로 자신들의 정치적 기반이던 빈민층의 지지를 얻는 데 실패함으로써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는 것. 난마처럼 얽힌 태국 정국의 주요 쟁점에 대해 영문 계간지 ‘글로벌아시아’ 여름호에 실린 호주 아시아 전문가의 분석을 번역, 게재한다. |
5월19일 수요일 오후, 방콕 시내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수주간 시위를 이어오던 반정부 시위대 지도부 대다수는 결국 태국 정부군에 순순히 투항했다. 이날 가까스로 체포망을 벗어난 지도부의 일원 아리스만 퐁루암롱은 자취를 감추기 직전까지 마하트마 간디의 모습이 새겨진 티셔츠를 입고 있었지만, 정작 시위대의 행동방식은 이와는 사뭇 모순된 것이었다. 태국 정부처럼 고착화된 정부를 몰아내기 위한 민중 봉기는 두 가지 요건을 충족해야 했다. 우선 다수 대중의 지지를 이끌어내야 한다는 것, 또한 비폭력을 표방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방콕의 시위대는 이 가운데 어느 것도 충족시키지 못했다.
레드 셔츠는 왜 실패했나
총을 든 정부군 병사 옆에 널브러진 한 시위대원의 주검이 참혹하다. 태국 방콕 반정부 시위가 시작 68일 만인 5월19일(현지 시간) 군경의 강제진압으로 마무리된 직후의 거리 광경. 태국 정부는 이날 장갑차 40여 대와 군경 수천 명을 투입해 시위대가 점거해온 랏차쁘라송 일대를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이날 진압과정에서 6명이 숨지는 등 3월12일부터 이날까지 최소한 74명이 희생됐다.
이후 이어져온 방콕의 반정부 시위는 약화일로를 걸었다. 지난봄 반정부 시위대의 지도부는 방콕 거리에 100만명의 시위자가 모일 것이라고 공언했지만 실제로 모인 사람의 숫자는 턱없이 적었다. 숫자가 줄어들자 폭력의 수위는 오히려 높아졌다. 태국 정부의 강경진압 방침에 마주한 시위대가 경찰과 군대를 설득해 명령에 불복종하게 만드는 것만이 시위가 성공해 정부를 무너뜨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이전에 시위에 참가하지 않았던 일반 국민의 지지를 광범위하게 확보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지만, 시위대의 과격한 폭력행사는 이를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비폭력에 대한 의지가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시위가 계속될수록 방콕 시민들의 삶에는 불편함과 혼란만이 가중됐다. 대중교통과 공공서비스는 마비상태에 빠졌고 이는 반정부 시위대의 주요 지지세력이 될 수 있었던 빈민층 노동자들의 생계에 타격을 가했다. 필자가 방콕에 머물렀던 5월의 3주 동안 시위대를 향한 시민들의 반감은 눈에 띄게 커졌다. 특히 도로변의 음식 노점상의 반응이 가장 차가웠다. 당초 이들은 방콕 시내 곳곳으로 진입하던 시위대의 차량행렬에 박수를 보냈지만 그 열광이 그리 오래가지 못했던 것이다.
레드 셔츠 시위대의 지도부는 자신들의 행동이 방콕 빈민들의 경제생활에 어떠한 혼란과 어려움을 야기했는지 별다른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이렇게 대중의 지지를 잃어버린 시위대는 2008년 벌어졌던 기득권층 시위대 ‘옐로 셔츠’의 이기적인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당시의 시위로 방콕의 공항들이 폐쇄되면서 발생한 혼란은 국제적으로 널리 알려진 바와 같다.
문제는 이렇듯 수많은 부작용을 야기한 옐로 셔츠 시위대는 법원 판결에 힘입어 자신들이 비판했던 친 탁신 계열의 정부를 해산시키는 데 성공했다는 점이다. 그들과 정치적으로 대척점에 서 있는 레드 셔츠 시위대가 같은 전술을 택한 것은 어찌 보면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레드 셔츠 시위대의 이러한 전략은 상상 이상의 혼돈을 일으켰고, 그 오만함 또한 옐로 셔츠에 뒤지지 않았다. 게다가 더욱 폭력적이라는 게 가장 큰 약점이었다.
시위대의 정체
태국 반정부 시위를 주도하다 저격을 받은 뒤 5월17일 오전에 숨진 카띠야 사와스디폰 소장의 시신이 지지자들이 운집한 가운데 병원에서 방콕의 한 사원으로 옮겨지고 있다. 이날 반정부 시위대는 군경과 대치 중에 카띠야 소장의 사망을 애도하는 시간을 가졌다.
시위가 막바지에 이르렀을 무렵 등장한 검은 옷을 입은 일군의 무리, 일명 ‘블랙 셔츠’들은 가장 미심쩍다. 이들은 대부분 중무장한데다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전직 군인이나 경찰 출신으로 추정된다.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계층에 속하는 이들은 사실 시위할 이유가 없다. 이들이 다른 목적을 가진 사람들에게 사실상 고용되어 시위대에 섞여든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게 하는 대목이다. 이들은 주로 군인과 경찰을 전문적으로 살상해 폭력사태를 확산시킴으로써 현 정부를 불안정하게 만드는 것을 목표로 삼은 듯하다. 온갖 소문이 무성하지만 여전히 이들의 정체나 누가 이들을 고용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결국 레드 셔츠 시위 지도부의 가장 큰 실패는, 간디의 가르침과는 반대로 시위대의 테두리 안에 이 세 부류를 공존하도록 놔둔 것이었다. 특히 폭력 성향이 강한 블랙 셔츠 시위대와 공존하다보니 정부와 시위대는 맞설 수밖에 없었고, 이는 무고한 생명이 희생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다시 말해 이는 시민들의 지지를 잃게 만들었고, 군인과 경찰이 정부의 명령에 불복종하게 유도함으로써 정부의 해산을 달성한다는 사실상 유일한 기회를 놓치게 된 결정적인 패착이었다.
방콕의 빈곤층과 저소득층 대다수는 태국 북부나 북동부의 오지로부터 유입해 들어온 이주민 1세대 혹은 2세대다. 레드 셔츠 시위대의 대부분이 이러한 사람들로 구성돼 있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 끝이 보이지 않는 시위가 이어지고 또 폭력화하면서 애초에 방콕의 빈민층이 이들에게 보냈던 지지는 불만과 우려로 바뀌었다. 2008년 옐로 셔츠 시위대에게 쓰였던 ‘mob(폭도)’이라는 영어단어가 레드 셔츠 시위대를 가리키는 말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그러한 민심변화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일이었다. 방콕의 시민들이 레드 셔츠 시위대를 옐로 셔츠 시위대 못지않게 경멸하게 된 것이다. 5월19일 밤 방화와 기물 파손이 잇달아 일어나면서 이 같은 두려움은 사실로 드러났다.
시위대 진압 명령을 받은 상당수 경찰과 군인 또한 북부와 북동부 출신이다. 시위 초반만 해도 이들을 설득해 시위대 편에 서게 만들 기회가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시위대가 군경에 대해 무장폭력을 행사하고 다시 이들이 시위대를 향해 발포한 4월10일을 기점으로 그러한 기회는 영영 사라졌다. 비폭력 시위는 성공할 수도 있고 실패할 수도 있지만, 폭력을 행사하면 아예 가능성이 없어지는 것이다.
문제는 경제다
이어지는 태국 정국의 위기상황은 일차적으로는 단기적인 정치적 이해관계가 주요 동인이다. 그러나 수십 년에 걸쳐 누적돼온 경제적 요인 역시 무시할 수 없다. 우선 태국의 평균소득은 최근 수십 년간 급속도로 증가했지만 동시에 경제적 불평등도 극도로 심화됐다. 최근 태국 정부 통계에 따르면 소득분배 불균형 수치를 나타내는 지니계수는 1970년대 초 0.43에서 0.53으로 증가해 세계에서 가장 불평등한 국가 중 하나로 기록되게 됐다. 게다가 이 수치마저 실제의 불평등 증가치를 축소한 조작치라고 생각하는 이도 적지 않다.
물론 빈곤층도 경제성장으로 혜택을 보긴 했겠지만 부유층은 훨씬 많은 혜택을 받았다. 같은 기간 비숙련 노동자의 임금은 평균 국민소득에 비해 크게 감소했다. 특히 농업 부문이 국민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감소하고 있지만 전체 고용인력 가운데 농업종사자가 차지하는 비율의 감소세는 훨씬 더디다. 태국의 이러한 모순 때문에 농촌지역의 소득은 평균소득에 비해 오히려 줄어들었다.
최근에 나타난 문제는 더욱 눈여겨 살펴볼 필요가 있다. 현재 과도한 수출의존형인 태국 경제는 2008년 시작된 글로벌 금융위기로 인해 태국 수출품에 대한 전 세계 수요가 25% 줄어들면서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가장 심각하게 피해를 본 분야는 태국 북부와 북동부 지역 출신의 미숙련·준숙련 노동자를 고용하고 있던 노동집약 산업이었다. 금융위기로 이들 가운데 많은 이가 해고됐다. 아피싯 총리는 글로벌 금융위기로 태국 경제가 몸살을 앓게 된 시점에 집권한 것이다. 태국 국내의 선동가들은 이러한 경제적 어려움을 총리 책임으로 돌리고 이를 2001~06년 탁신 총리 집권 시기의 호황기와 대비해가며 세력을 확장해가기 시작했다.
농촌지역 출신 노동자들이 태국 경제 발전의 성과를 분배받는 과정에서 소외되면서 이들의 경제적 지위는 특히 최근 수년 사이 급속도로 악화됐다. 이러한 상황을 이용해 포퓰리스트 성향의 선동정치가들이 “도시 엘리트들이 농촌 대중을 희생양 삼아 자신들의 배를 불렸다”고 선동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탁신의 정치적인 성과는 바로 이 같은 민심을 정확히 포착해 이를 기회로 만든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또한 스스로를 파멸로 몰고 간 원인으로 작동하기도 한다.
주지하다시피 탁신 정권이 몰락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2006년 9월 발생한 군사쿠데타였다. 쿠데타의 주동자들은 탁신 총리의 부패로 인해 군부가 개입할 수밖에 없었다고 밝혔다. 탁신은 이미 억만장자였음에도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남용해 자신과 친족들의 배를 불리는 유혹을 이겨내지 못했고, 태국의 엘리트 계층은 이러한 위법행위가 용인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섰다고 판단했다.
결국 탁신은 방콕의 전통적 엘리트 계층의 손이 닿지 않는 태국 북부와 북동부 지역에 독립적인 권력기반을 수립함으로써 오랫동안 유지되어온 정치적 힘의 균형을 뒤집고자 시도했다. 더욱이 암묵적으로 빈곤층의 수호자로 신성시돼왔던 국왕의 지위에 도전하는 것으로 보이기까지 했다. 이후 이어진 두 번의 친(親)탁신 정부는 미심쩍은 부분이 있는 것으로 비쳐진 법원의 판결 때문에 무너졌고, 북부와 북동부 출신 노동자를 주축으로 하는 레드 셔츠 시위대는 자신들의 참정권이 박탈당했다며 분노했다.
탁신은 간디가 아니다
간디는 저항운동 내에 폭력적인 세력을 용인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간파하고 있었다. 1921년 한 지역 경찰서가 자신의 지지자들에 의해 전소돼 경찰관 23명이 사망하자, 간디는 이들의 잘못된 행동을 즉각 규탄하고 그 책임을 통감하는 의미의 단식에 들어갔다. 이미 확고하게 자리 잡은 정부를 뒤집으려면 비폭력을 통해 대중의 전폭적인 지지를 확보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간디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레드 셔츠 시위를 이끈 지도자들 가운데 간디의 이러한 비전이나 도덕성을 갖춘 이는 없었다. 탁신이나 그가 이끈 타이락타이(TRT) 당, 이후 등장한 정치적 후계자들 모두가 그러하다.
시위 기간에 탁신은 매우 모호한 입장을 견지했다. 정부는 탁신이 이번 시위를 재정적으로 뒷받침하면서 테러를 조장한 장본인이라고 주장했다. 5월 초 정부와 시위대는 협상을 통해 5개 조항의 평화 로드맵을 채택했고, 그 가운데 하나는 레드 셔츠 시위대가 방콕 중심부 점거를 중단하고 대신 11월에 조기 총선을 실시한다는 것이었다. 시위대는 처음에는 이를 받아들이는 듯했지만 나중에는 추가 요구사항을 내밀며 거부했다. 방콕 시민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로드맵을 뒤늦게 거부하며 평화적 해결을 향한 마지막 희망을 저버린 것은 바로 시위대였다. 당시 시위대가 거부 결정을 내리게 된 것은 탁신이 전화상으로 거부의사를 밝혔기 때문이라는 루머가 나돈 바 있다.
필자가 아는 한, 이번 시위 사태와 관련해 탁신이 발표한 공식성명이나 지지자들에게 보낸 영상 메시지 어디에도 시위대에 비폭력을 촉구하는 구체적인 목소리는 없었다. 탁신은 어딜 봐도 간디나 아웅산 수치, 달라이 라마 같은 인물은 아니다. 그의 집권기는 부정선거와 언론자유 탄압, 야권인사들에 대한 폭압으로 점철됐고, 그 가운데 상당 부분은 자신의 탐욕을 가리기 위한 수단이었다.
시위가 사그라지면서 눈앞의 위협은 사라졌지만, 거꾸로 지금이야말로 태국 정부가 확실하게 화해의 제스처를 취할 수 있는 가장 좋은 타이밍이다. 11월 혹은 그 이전에 총선을 치르겠다는 약속과 친(親)탁신 정당이 승리한다 해도 결과에 승복하겠다는 공약이 그 요체일 수 있을 것이다. 폭력에 근거한 벼랑 끝 전술 대신 레드 셔츠 시위대의 실질적인 불만을 해소할 수 있는 진정한 대화에 나서겠다는 의지가 확인돼야 태국 정국의 위기는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민주주의’의 차이
물론 아직까지는 넘어야 할 산이 훨씬 많아 보인다. 우선 민주주의의 의미에 대한 견해 차이가 있다. 민주주의는 옐로 셔츠 시위대의 공식명칭인 ‘국민민주주의연대(PAD)’와 레드 셔츠 시위대의 공식명칭인 ‘독재저항민주주의연합전선(UDD)’에 모두 들어 있는 단어다. 둘 중 어느 그룹도 내부적으로 민주주의 원칙을 따르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레드 셔츠 시위대는 자신들이 승리할 수 있다고 생각할 때만 민주주의를 찬양한다. 옐로 셔츠 시위대는 1인1표제 선거에서 엘리트 계층에 반하는 결과가 나오면 이를 뒤집는 것이 자신들의 권리이자 의무라고 믿는다. 교육을 받지 못한 대중은 어린아이 같아서 ‘부모’, 즉 군대를 도구로 이용하는 엘리트 계층과 국왕의 손길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이 같은 딜레마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가늠하기 어렵다. 현 태국 정부가 11월 선거를 시행한다 해도, 이 선거에서 하층 계급이 정권을 잡고 엘리트 계층이 그 정권을 다시 무너뜨린다면 현재의 악순환은 앞으로 계속 될 수밖에 없다. 고통 역시 더욱 깊어질 것이다.
필자가 이번 시위를 지켜보며 가장 놀란 것은, 태국 왕실이 이번 사태가 벌어지는 내내 침묵을 지켰다는 사실이다. 올해 83세인 푸미폰 아둔야뎃 국왕의 병세가 생각보다 심각해 개입할 수 없었다는 설도 있고, 왕실이 개입해봐야 지도부 일부가 공화정을 지지하는 것으로 알려진 레드 셔츠 시위대가 거부하리라고 봤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왕실 내부의 견해가 일치하지 못했다거나, 섣부른 사태 개입이 왕위 계승문제에서 예기치 않은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두려움이 작동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가장 합리적인 설명은 이미 5월19일에 이르러 반정부 시위대의 패색이 짙어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정부가 상황을 통제할 수 있다고 판단하자 왕실은 개입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는 것. 5월19일 밤의 예기치 않은 폭풍이 지난 뒤에는 이미 너무 늦어버린 것이다.
5월19일 레드 셔츠 시위대의 중도성향의 지도자 비라 무시카퐁이 체포됐다. 그는 체포되면서 “우리는 이제 분노를 삭여야 한다. 민주주의는 분노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필자는 그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문제는 지금 방콕에선 누구도 다른 이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