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중국 등 일본 침략전쟁의 피해국들은 일본 총리의 야스쿠니신사 참배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일본을 맹비난했다. 참배 중단을 요구하는 반일데모도 끊이지 않아 국가 간 긴장이 고조됐다. 야스쿠니신사엔 일본의 침략전쟁에 동원됐다 희생된 수만명의 조선인도 합사(合祀)돼 있어 논란을 키웠다.
- 유족들은 오랫동안 합사취소를 요구했지만 일본 정부와 신사 측은 “이미 신이 된 인간들…”이란 이유를 들어 번번이 거부했다.
- A급 전범들을 분사(分祀)해 달라는 요구에 대해서도 신사 측은 “물항아리에 들어가 합쳐진 물 가운데 14인분(A급 전범)의 물만을 따로 들어내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이른바 ‘물항아리의 물’ 이론을 내세우는데….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일본 도쿄에서 열린 극동국제군사재판.
해마다 ‘종전기념일’엔 천황 부처와 총리 등이 참석한 가운데 도쿄(東京)황궁 옆의 일본무도관(武道館) 건물에서 전국전몰자추도식이 열리고, 무도관 바로 건너편에 있는 야스쿠니(靖國)신사엔 일본의 침략전쟁에서 숨진 군인, 군속(약 310만명) 등의 유족과 옛 일본군 군인들이 대거 참배한다. 근래 들어 참배객은 점차 줄어 20만명 안팍이라고 한다.
올해 8월15일은 일본이 패전한 지 정확히 65년이 되는 날이다. 이날 야스쿠니신사엔 예년과 마찬가지로 많은 옛 일본군 군인이 참배했다. 이들 대부분은 80대 중반을 넘긴 노인이기 때문에 그 수는 매년 줄어들고 있다.
참배객 중엔 옛 군복을 차려입고 나온 사람들도 있고, 과거 부대원들끼리 모여 부대 깃발이나 일장기를 들고 기념사진을 찍는 모습도 여기저기 눈에 띈다. 새벽부터 몰려든 보도진이 신사의 본전으로 통하는 배전(拜殿) 앞에 진을 치고 각료들 중 누가 참배하는지를 취재한다.
배전 입구 게시판엔 태평양전쟁 말기 경전투기를 몰고 미군함정 등에 자폭공격을 가했던 가미카제(神風)특공대원들이 출격 전 고향의 부모, 친지에게 보낸 편지가 게시돼 있다. 참배객들은 “천황폐하를 위한 성전에 기꺼이 목숨을 바치기 위해 내일 출격합니다.… 부디 오래오래 건강하게 사시길 기원합니다”라는, 죽음을 앞둔 젊은이의 마지막 편지를 읽어본다. 편지를 읽은 일본인들은 “가와이소(불쌍하다)”라며 혀를 찬다.
전국에 8만여 개 신사
일본은 고대 이래 스스로를 신의 나라, 즉 신국(神國)이라 불렀고 일본인은 신도(神道)가 자연스럽게 일상생활 속에 배어있는 생활을 영위해왔다.
메이지(明治)유신(1868년) 이후 일본 정부는 “신국 일본은 신의 자손인 만세일계의 천황이 통치하는,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국체를 가지고 있다”는 국체 이데올로기에 근거해 천황에 대한 충성심을 강화시키고 침략전쟁에 국민을 동원하기 위한 국가신도체제를 만들었다.
현재 전국에 약 8만개의 신사가 있는 일본에서 가장 중요한 신사는 일본 황실의 선조를 모신다는 이세(伊勢)신궁(미에현 이세시 소재)으로 총리 등이 매년 참배한다. 그러나 외국에 가장 널리 알려진 신사는 단연 야스쿠니신사다.(신사 가운데 격과 비중이 가장 높은 것이 신궁으로 이세신궁, 메이지신궁 등 14개의 신궁이 있다. 일제강점기엔 서울 남산에 조선신궁이 건립됐다가 광복 후 철거됐다.)
야스쿠니신사는 한국의 TV화면에서도 자주 볼 수 있는 배전과 본전 건물 외에 약 2만8000평(9만2000여㎡)의 경내에 여러 건물이 들어서 있는 규모가 아주 큰 신사다. 지하철 구단시타(九段下)역에서 내려 신사 정문 쪽으로 들어가면 기둥 높이 25m, 기둥 위에 걸쳐놓은 횡목 34m, 무게 100t에 달하는 거대한 철제 도리이(鳥居)가 세워져 있다. 본전에 이르기까지 그 같은 도리이가 3개나 더 있어, 동네 곳곳에 있는 규모가 작은 보통 신사와는 다른 장중한 분위기를 풍긴다.
본전 옆엔 유취관(遊就館)이란 전쟁기념관 건물이 있고 전시실과 그 주변엔 태평양전쟁 때 구 일본군이 사용했던 전투기, 인간어뢰 등의 각종 무기와 태국과 버마 국경을 오가던 군용열차(영화 ‘콰이강의 다리’에서 일본군이 사용했던 열차 중 일부) 등이 진열돼 있다. 군마와 군견 위령탑도 세워져 있다. 야스쿠니신사는 일본군인뿐만 아니라 일본군을 위해 희생된 개와 말까지 그 영혼을 위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야스쿠니신사 경내는 ‘사쿠라’ 명소여서 도쿄의 사쿠라 개화를 알리는 표본목이 있고, 봄철엔 수많은 상춘객이 몰려든다.
A급 전범 14명 합사
야스쿠니신사의 전신인 도쿄 초혼사(招魂社)가 세워진 것은 메이지유신 이듬해인 1869년이다. 이 신사는 메이지 신정부 수립 후 구 막부군과의 내전에서 죽은 관군 등을 의미하는 국사순난자(國事殉難者)와 청일·러일전쟁 등 대외전쟁에서 죽은 전몰자의 영혼을 위로하는 시설로 세워졌다. 강화도사건(1875년)이나 임오군란(1882년) 당시 죽은 일본군 10여 명도 합사돼 있다.
이후 중일·태평양전쟁 등 일본의 침략전쟁으로 수많은 전사자가 발생해 야스쿠니신사가 제사 지내는 제신(祭神)은 현재 246만여 위에 달한다. ‘1사(一社) 1주신(一主神)’을 원칙으로 하는 일본 신도에선 극히 이례적인 경우로, 이 점이 야스쿠니신사의 특이성을 말해준다.
일본 패전 직후인 1945년 12월, 연합군총사령부(GHQ)의 신도지령(神道指令)에 따라 국가신도체제는 폐지됐다. 지령의 핵심은 정교분리 방침이었다. 이에 따라 전국에 11만여 개에 달했던 다른 신사와 함께 국유국영의 야스쿠니신사도 일개 종교법인으로 격하됐다.
연합국은 일본이 장기간에 걸쳐 침략전쟁을 계속해온 정신적 배경에 현인신(現人神·아라히토가미)으로 추앙됐던 천황의 신성성을 받드는 신앙과 신국의식이 깔려 있다고 보고 국가신도체제를 폐지한 것이다.
그러나 패전 후 쇼와(昭和)천황이 처음 야스쿠니를 참배(1951년)한 이래 역대 총리도 반드시 참배하는 등 야스쿠니신사는 전몰자에 대한 위령, 추도, 현창(顯彰)의 중심시설이란 위치가 그대로 유지돼왔다. 일본의 침략전쟁으로 숨진 한국, 중국인 및 동남아시아 제 국가의 희생자는 약 2000만명으로 추산되고 일본인 전사자는 약 310만명에 달한다. 이들 일본인 전사자의 유족만 해도 수천만명에 달해 선거를 의식해야 하는 정당들, 특히 보수·우익 성향으로 장기집권했던 자민당은 총리의 야스쿠니 참배가 유족 등의 지지를 얻는 중요한 요인 중의 하나였으므로 참배를 정치적으로 이용한 측면도 있다.
그러나 일본 패전 후 연합국 측의 극동국제군사재판(도쿄재판)에서 A급 전범으로 판결(1948년)받아 사형 또는 옥사한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전 총리 등 14명을 1978년 10월17일 야스쿠니신사에 비밀리에 합사함으로써 외교문제로 비화한다.
이에 앞서 1966년 구 육군성, 해군성의 업무를 이어받은 당시 후생성이 A급 전범들의 이름, 소속부대, 계급, 사망연월일, 장소, 사망원인 등을 기재한 ‘제신명표(祭神名票)’를 신사 측에 전달했다. 신사 측은 정부로부터 이 제신명표, 즉 전몰자명부가 송부되지 않는 한 영령으로 합사하지 않는다. A급 전범 합사 분위기를 살피던 신사 측은 1978년, 전쟁이 끝난 뒤 30여 년이 지난 만큼 일본사회도 합사를 용인할 것으로 판단하고 슬그머니 합사했다. 유족들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이 사실은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으나 다음해 교도통신의 특종보도(4월19일)로 일본 매스컴에 일제히 보도돼 세상에 알려졌다.
일본이 벌인 침략전쟁 당시 일본군의 통수권자이자 대원수로 전쟁 책임이 있는 쇼와천황(재위 1926~89년)은 1975년 11월을 마지막으로 야스쿠니 참배를 중단했다. 그 이유는 신사 측의 A급 전범 합사 움직임을 불쾌하게 생각했기 때문(2006년 공개된 쇼와천황 보좌 궁내청장관의 메모에서)이라고 알려져 있다. 현 헤이세이(平成)천황도 참배하지 않고 있다. 현재 야스쿠니신사에는 A급 전범 외에 B~C급 전범 등 총 1005명의 전범이 합사돼 있는데 신사 측은 ‘전범’은 연합국 측의 주장에 불과하다며 이들을 ‘쇼와순난자(昭和殉難者)’라고 한다.
공식참배 강행한 고이즈미 전 총리
1985년 8월15일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총리는 ‘전후 정치의 총결산’을 주창하며 일본 총리로선 사상 처음 야스쿠니신사를 공식 참배했다. 이전까지의 총리들은 의식적으로 8월15일을 피했다. 8월15일 사상 처음 참배(1975년)한 미키 다케오(三木武夫) 총리는 어디까지나 ‘사적 참배’라고 강조했다. 나카소네의 공식참배에 대해 한국과 중국이 침략전쟁을 미화하는 행위라며 맹비난하자 그는 이듬해 참배를 중단했다.
나카소네는 이에 앞서 A급 전범 분사(分祀)안을 도조 등의 유족과 신사 측에 타진했으나 양측은 모두 거절했다. 도조의 장남(미쓰비시자동차 전 사장)은 A급 전범 분사안에 대해 “도쿄재판의 전승국 측 이론을 인정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며 반대했다. 나카소네는 유족과 신사 측이 모두 반대하는 A급 분사안을 더 이상 추진할 수 없었다.
2001년 4월, 자민당 총재선거에 나선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후보가 “총리에 취임하면 어떤 비판이 있더라도 8월15일에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할 것”이라고 공언, 총리에 취임한 해인 2001년 8월13일 참배한 뒤 퇴임(2006년 9월)할 때까지 매년 이곳을 찾아 모두 여섯 차례 참배했다. (2002년 4월, 2003년과 2004년은 1월, 2005년 10월, 2006년 8월15일)
고이즈미 총리의 야스쿠니 참배에 대해 한국과 중국은 “전쟁 책임을 부인하는 군국주의의 부활”이라고 거세게 비판하며 참배 중단을 촉구했다. 고이즈미가 한국과 중국의 참배중단 요구를 무시한 채 “다시는 전쟁을 일으키지 않겠다는, 부전(不戰)의 결의를 다짐하기 위해 참배하는 것”이라며 매년 참배를 하자 특히 중국 각지에선 격렬한 반일데모가 일어나기도 했다. 고이즈미의 야스쿠니신사 참배로 한일, 중일 관계는 양국 간 수뇌회담이 일절 단절되는 등 일본과 한중 양국 간 외교적인 긴장관계가 계속됐다.
본래‘靖國(정국)’은 중국 고전 ‘좌씨춘추전(左氏春秋傳)’에 나오는 말로 ‘나라를 안정케 한다’는 의미다. 그러나 야스쿠니는 나라를 평안케 하기는커녕, 일본의 국론을 분열시킬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전체의 평화와 안정을 위협하는 화근이 되고 있는 셈이다.
고이즈미 정권 기간 중 별도의 국립추도시설을 세우자는 방안이 관방장관 산하에 민간인들로 구성된 야스쿠니 문제 사적 간담회의 의견으로 제시됐다. 그러나 자민당과 정부는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고, 여론의 지지도 받지 못해 흐지부지됐다. 당시 한국과 중국에서는 외국인도 참배할 수 있는 별도의 국립추도시설 건립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이 많았고, 민주당 정권(2009년 9월)이 들어선 이후도 양국은 여전히 이 방안을 선호하는 분위기다. 민주당은 야당시절 이래 국가추도시설 건립안을 지지해왔으나 제1야당이 된 자민당과 유족회가 강력 반대하고 있어, 구체적인 움직임이 보이지 않는 상태다. 고이즈미 퇴임 후엔 ‘시끄러운 야스쿠니’가 어느 정도 ‘조용한 야스쿠니’가 돼 있는 셈이다.
한국, 타이완인 5만명도 합사
야스쿠니엔 일본인뿐 아니라 구 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과 타이완(臺灣) 사람들도 합사돼 있다. 일본의 침략전쟁에 군인, 군속으로 끌려가 전사한 조선인, 타이완인은 1945년 8월까지는 ‘일본국민’으로서 합사됐고, 패전 직후의 혼란기를 지난 1959년경부터 구 후생성이 다시 조선인 등의 이름, 사망일시 등을 적은 제신명표를 야스쿠니신사에 전달해 합사돼 있다.
신사에 합사된 조선인은 2만1181명, 타이완인은 2만7863명으로 합치면 약 5만명 이다. 이 가운데에는 B급 전범으로 처형된 49명도 포함돼 있다.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된 조선인 등의 유족들에겐 아무런 통보가 없었고, 전사했다는 통보조차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조선인 등의 합사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1977년 일본신문에 보도되면서였다. 이때부터 한국과 타이완의 유족들로부터 합사취소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1979년 당시 야스쿠니신사의 책임자인 궁사(宮司)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전사한 시점엔 일본인이었기 때문에 죽고 난 뒤 일본인이 아니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또 일본의 병사로서 죽으면 야스쿠니에 묻혀 제사 지내질 것이란 기분으로 싸우다 죽은 것이므로 유족의 요구로 취소될 이유는 없다. 내지인(일본인)과 마찬가지로 전쟁에 협력해달라는요청에, 일본인으로서 전쟁에 참가해준 이상 야스쿠니에서 제사 지내는 것은 당연하다. 타이완에서도 대부분의 유족은 합사에 감사하고 있다.” (1979년 4월16일자, 아사히신문)
이 같은 궁사의 주장은 전쟁이 끝난 뒤 30여 년이 지난 시점인데도 식민지시대와 다름없는 인식을 보여준다. 이런 인식은 그 후 30여 년이 지난 현재에 이르기까지 변함이 없고, 고이즈미 전 총리를 비롯한 자민당 등 일본의 보수, 우익인사들의 인식도 비슷하다고 하겠다.
조선인 유족들의 합사취소 요구
2006년 8월15일 서울 중학동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8·15 통일대축전-일본 군국주의 우경화 규탄 공동행동’에 참석한 시민사회단체 회원들이 신사참배를 강행한 고이즈미 일본 총리를 규탄하며 야스쿠니신사 참배 사진을 불태우고 있다.
학도병으로 오키나와에 특공대원으로 출격 전 일본인 지인들 앞에서 아리랑을 불렀다는 대위 탁경현(卓庚鉉·일본명 光山文博)은 1973년 합사됐다. 타이완 전 총통 리덩후이(李登輝)의 형은 일본해군 상등병으로 1945년 마닐라에서 전사한 뒤 1969년 야스쿠니에 합사됐다. 리덩후이는 방일할 때면 참배한다.
일본이 침략전쟁에 조선인을 동원한 것은 총력전체제를 구축한 중일전쟁(1937년) 이후 본격화됐다. ‘천황의 군대 일원’으로 전쟁에 동원된 조선인은 일본의 조사통계로만도 군속 12만6047명, 징병 11만여 명 등 24만여 명에 달한다.
고이즈미 전 총리가 야스쿠니신사에 참배한다고 공언한 2001년 6월29일, 일본의 침략전쟁에 동원돼 전사한 한국인의 유족 267명은 도쿄지방재판소에 합사취소소송을 제기했다. 한국인이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돼 있는 것은 일본헌법의 정교분리원칙 위반이란 것이 그 이유다. “분하다. 아버지가 일본의 전쟁에 동원돼 전사해, 일본 신사의 신이 돼 있다니…그것도 일본 멋대로…분하고 억울하다.”(이희자·원고 중 한 사람으로 한국 거주)
일본인 합사자 유족 가운데도 야스쿠니 신사가 유족의 동의 없이 무단으로 합사하는 것은 신교의 자유를 보장한 헌법 위반이라며 합사취소와 손해배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벌인 사례가 여러 번 있었다. 그러나 신사 측은 한국이나 일본인 유족들의 합사취소 요구에 “이미 신이 되어있는 인간을 합사취소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A급 전범 분사를 인정할 수 없다는 것과 같은 논리다.
2009년 10월29일, 한국인 유족들의 합사취소소송을 심리한 도쿄지방고등재판소는 “합사를 결정한 것은 야스쿠니신사로 국가가 신사와 일체가 돼 행했다고는 인정할 수 없다”며 원고의 청구를 기각한 도쿄지방재판소의 판결을 지지, 항소를 기각했다.
판결은 합사를 가능케 했던 구 후생성의 전몰자명부 통지에 대해서는 “합사를 상당히 지원한 의도가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는 행위”라고 지적하면서도 “같은 정보제공이 유족회 등에도 있었던 것을 감안할 때 특별히 야스쿠니신사에만 상당한 지원을 했다고는 단정하기 어렵다”고 지적, 종교활동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견해를 밝혔다.
일본법원은 신사에 전몰자명부를 전달하는데 정부(구 후생성)가 조직적으로 명명백백히 관여하고 있는데도 이 같은 판결을 내려, 유족들의 합사취소 요구가 받아들여지는 것은 요원한 실정이다.
‘물항아리의 물’ 이론
그렇다면 왜 야스쿠니신사는 A급 전범을 분사하거나, 한국인 등의 합사를 취소할 수 없다는 것일까?
야스쿠니신사 측은 앞서 언급했듯이 ‘분사 또는 합사취소는 신도(神道)의 신앙상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논리를 내세우고 있다. 야스쿠니신사는 B~C급 전범(사형 판결 984명)은 물론 A급 전범, 구 식민지 출신 및 일본인 전몰자까지 일절 합사를취소할 수 없는 것은 나라를 위해 전사했다고 국가가 인정한 영령에 대해서는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영원히 제사 지내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야스쿠니신사는 유족을 위한 신사라기보다는 국가를 위한 신사로 창건됐다는 점을 앞세우고 있다. 이 같은 논리에서 정치적인 이유, 외교적인 이유에서 A급 전범이나 구 식민지 출신자의 합사를 한 건이라도 취소할 경우, 다른 이유로 취소를 요구해도 응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일절 응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에 따라 신사 측은 A급 분사안에 대해 “전 유족이 찬성한다 해도 분사는 있을 수 없다”(2004년 4월, 야스쿠니신사의 공식견해), “분사는 신도의 본의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2005년 6월, 신사들의 연합조직인 신사본청의 견해)는 등 요지부동이다. 야스쿠니 측이 주장하는 분사불가론을 알기 쉽게 설명하는 비유로는 ‘물항아리의 물’설이 가장 설득력이 있다고 한다. 즉, “물항아리에 들어가 합쳐진 물 가운데 14인분(A급 전범)의 물만을 따로 들어내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분사를 하려고 한다면 ‘궁사의 결심에 따라 5분이면 된다’(나카소네 전 총리)고 하지만, 현재 단순한 일개 종교법인에 불과한 야스쿠니신사의 책임자인 궁사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상부기관이나 인물도 없다.
A급 전범을 합사할 당시의 궁사 마쓰다이라 나가요시(松平永芳)는 A급 전범 합사에 부정적인 쇼와천황의 의중도 무시한 채 결정했다. 나카소네 전 총리가 참배할 때도 마쓰다이라는 나카소네가 신도의 제식(祭式)에 따르지 않은 ‘비례(非禮)참배’를 했다고 화를 내며 현직 총리가 왔는데도 출영조차하지 않았다. 이 같은 사정을 감안할 때 신도의 교리를 앞세우며 분사 등에 반대하는 궁사를 설득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로 보인다.
그렇다면 야스쿠니신사가 합사할 때 유족들에게 동의를 얻지도 않고, 통보조차 하지 않은 것은 또 무슨 이유에서일까?
일본이 패전하기 전 야스쿠니신사에 합사하는 절차는 육군, 해군대신의 상주에 의해 천황이 재가, 관보에 실리면 신사가 합사제(合祀祭)를 올리는 방식이었다. 다시 말해 군주와 국가를 위한 전사자로 인정받은 영령에 대해 천황의 재가를 얻어 야스쿠니에 제사 지낸다는 종교적 시스템이다. 유족들에겐 별도로 통보할 필요가 없다는 논리가 나온 배경이다.
야스쿠니신사의 주요 간부는 1984년 일본인 유족들이 제기한 합사취소소송(‘이와테 야스쿠니 소송)에 증인으로 나와 “나라를 위해 돌아간 사람들을 제사 지내는 것이 야스쿠니신사 건립 이래의 전통이므로, 그 전통에 따라 유족에게 별도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합사하는 것”이라고 답변했다. 야스쿠니 측은 “예전엔 야스쿠니에 모셔진 것만 해도 다들 영광으로 생각하지 않았느냐”고 강조하기도 한다.
민주당 정권은 참배 안 해
2006년, 아사히신문이 국가가 추도하는 시설로서 가장 적합한 것을 묻는 여론조사를 했다. 그 결과 현재 그대로의 야스쿠니신사(37%)가 가장 높았고, A급 전범 제사를 중지하는 야스쿠니신사와 종교와 관계가 없는 새로운 국립추도시설이 각각 19%, 지도리가후치(千鳥ヶ淵)묘원(야스쿠니신사 인근에 있는 무명전몰자묘지)이 15%의 순이었다.
2009년 9월 집권한 민주당 정권은 하토야마 전 총리에 이어 간 나오토 총리도 “총리 재임 중엔 야스쿠니신사에 참배할 생각이 없다”(2010년 6월15일, 참의원 답변)고 말했고, 올 8월15일 참배하지 않았다. 총리 취임 이전엔 여러 차례 참배한 적이 있던 간 총리는 “A급 전범이 합사돼 있어 총리와 각료가 공식참배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이유를 밝혔다.
고이즈미 전 총리 퇴임 이후 역대 총리가 ‘8월15일 공식참배’를 자제하고 있어 야스쿠니 문제는 일단 소강상태에 들어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야스쿠니 문제의 근본적인 해법을 찾기는 어려워 보인다. 우선 야스쿠니신사 측이 종교상의 이유로 A급 전범 분사와 한국인 합사취소 요구를 완강히 반대하고 있고 이와 관련한 법원판결도 야스쿠니 측에 유리하게 기울고 있다. 거기에다 별도의 국립추도시설을 설립하는 방안도 추진주체의 강도가 낮고 여론의 지지도도 낮아 뾰족한 해결책이 없기 때문이다.
앞으로 자민당 등 보수, 우익정파가 다시 집권해 일본사회의 우경화 현상이 심화될 경우 고이즈미처럼 참배를 강행하는 형태가 재현되고, 그에 따라 일본과 한·중국 간의 마찰이 다시 불거질 가능성이 크다.
이처럼 일본인의 특이한 종교관, 국가관, 역사인식 등이 난마처럼 얽혀 있는 야스쿠니 문제는, 언제 동아시아 3국을 다시 분쟁 속으로 몰아넣을지 모르는 뇌관으로 잠복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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