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1월호

문정인 교수가 진단하는 북한 권력승계와 급변사태 가능성

“후계자 접촉해 비밀회동 만드는 ‘상상력’, 우리는 왜 못하나”

  • 황일도│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hamora@donga.com│

    입력2010-11-02 09:5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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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이 ‘북한 후계 위기 가능성’ 토론에 참여한 까닭
    • 김정일 1~2년 내 죽으면 권력투쟁, 5년 넘기면 안정적 승계
    • 평양의 측근-당-군 ‘3중 후견서클’ 구축, 장기간 준비된 것
    • 2004년 ‘개념계획 5029’ 논의 당시 럼스펠드의 요구사항
    • 김정일 유고(有故), 평양 비행장에 파키스탄 비행기가 내린다면?
    • 북한 급변사태, 최상의 대응법은 유엔 통한 인도주의적 개입
    • 카다피 아들 설득해 리비아 핵 포기 유도한 MI6의 비밀공작
    어느 때보다 숨가쁜 한 달. 9월28일 북한 노동당 대표자회를 전후해 전 세계 언론은 평양을 주목했다. 예상을 뛰어넘는 전격적인 방식으로 김정은을 공개한 북한은 다양한 형태로 ‘후계자 홍보’에 나섰고, 사상 최초로 대규모 외신기자단을 평양으로 불러들여 10월10일 당 창건일 행사를 생중계했다. 미 국무부가 ‘최고의 TV 리얼리티 쇼’라고 평가한 3대 권력세습이 냉소와 불안이 엇갈리는 묘한 반응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세계의 관심은 북한의 전례 없는 ‘압축형 후계체제 구축’이 과연 성공할 수 있을지 여부에 집중돼 있다. 승계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엘리트그룹 사이의 갈등이 내란이나 급변사태 같은 예기치 못한 상황으로 발전하게 될지가 그 주요 포인트 가운데 하나다. 국방부와 합참이 급변사태 시나리오를 검토했고, 한미 국방장관 회담인 연례안보협의회(SCM)에서 이에 대비한 ‘개념계획 5029’ 문제가 논의됐다는 소식이 숨가쁘게 꼬리를 문다.

    눈여겨봐야 할 또 하나의 포인트는 중국의 움직임. 북한에 대해 사실상 유일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중국이 권력승계 과정에서 벌어질 수 있는 크고 작은 쟁점들에 어떻게 대응해나갈지는 향후 한반도는 물론 동북아 전체, 나아가 떠오르는 미·중 ‘G2 시대’의 얼개를 결정할 주요 변수다. 만에 하나 북한에 급변 사태가 벌어진다면 중국은 어떤 식으로 이에 개입하려 할까. 이때 중국의 행보는 한반도의 미래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까.

    한눈에 읽기 쉽지 않은 이 복잡다단한 국제정치 방정식을 풀이해줄 인물로 문정인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를 떠올린 것은 최근 그가 펴낸 책 때문이었다. 지난해 베이징대 국제관계학원에 머물며 중국의 대표적인 국제정치 전문가 21명을 인터뷰한 문 교수는 8월 이를 묶어 ‘중국의 내일을 묻다’(삼성경제연구소)를 펴냈다. 한반도 문제에 대한 중국의 입장과 미래 구상, 대외전략 등을 포괄해 다룬 다양한 인터뷰는 오늘날 중국의 핵심 지식인들이 동북아 질서의 미래를 어떻게 그리고 있는지 가늠케 해준다.

    민감한 주제, 중국의 변화



    안보 분야의 다양한 이슈에 관심을 가져온 문 교수는 노무현 정부 시절 대통령자문 동북아시대위원회 위원장으로 일하며 현실 국제정치에 참여했고, 1,2차 남북 정상회담 동행 등으로 북한을 수차 방문해 평양의 주요 인사들을 접촉한 경험도 갖고 있다. 매년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리는 세계경제포럼(WEF·일명 다보스포럼)에 참석해온 그는 9월13일 중국 톈진에서 열린 하계 다보스포럼에서 ‘북한 후계승계에서의 위기 가능성’을 주제로 열린 특별세션에 참석하기도 했다.

    북중 관계를 감안할 때 민감하기 짝이 없는 주제를 다룬 이 토론에는 중국 외교부 한반도문제담당국장을 지낸 양시유 국제문제연구소 선임연구원과 옌쉐퉁 칭화대 교수 등 중국 측 전문가들이 참석해 눈길을 끌었다. 이는 분명 이전에는 쉽게 상상할 수 없었던 변화. 10월8일 저녁 문 교수와 마주한 자리에서 첫 질문으로 이에 관한 궁금증을 고른 이유다.

    ▼ 포럼에서 후계 위기 문제가 논의됐다는 소식을 접하고 맨 먼저 든 생각은, ‘중국 정부가 왜 이런 주제를 허락했을까’였습니다. 중국은 그간 자국에서 열리는 국제회의 의제를 꼼꼼히 챙겨왔고 특히 하계 다보스포럼은 원자바오 총리도 참여하는 행사 아닌가요.

    “다들 그 부분을 궁금해하더군요. (웃음) 사실 다롄에서 열린 지난해 포럼에서도 이 주제를 논의하려 했지만 그때는 중국 정부가 난색을 표했죠. 태도가 변화한 배경은 토론에 참석한 중국 측 인사들의 발언을 보면 유추할 수 있습니다. 양시유 선임연구원이나 옌쉐퉁 교수 모두 ‘권력승계가 진행되겠지만 그 과정에서 위기가 발생할 가능성은 매우 낮다’는 입장을 견지했습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였고, 함께 참석했던 남성욱 국가안보전략연구소장도 향후 1~2년 안에는 위기 가능성이 낮다고 말했죠.

    중국 측 패널의 견해는 분명 정부 입장과 긴밀한 관계가 있습니다. 특히 외교부 관료였던 양 선임연구원의 말은 중국이 후계체제를 승인하기로 결정했음을 시사한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후계는 중국이 간섭할 사항은 아니지만 위기나 급변은 없을 것이며, 중국은 이후에도 북한과 우호관계를 유지해나갈 것임을 내비치는 정치적 제스처라 할 수 있습니다.”

    문정인 교수가 진단하는 북한 권력승계와 급변사태 가능성

    9월13일 중국 톈진에서 열린 하계 다보스포럼 ‘북한 후계승계에서의 위기 가능성’ 세션에서 토론하고 있는 양시유 국제문제연구소 선임연구원(오른쪽)과 문정인 교수.

    ▼ 반면 토론의 중국 측 참석자들도 김정은이 이렇듯 전면적인 방식으로 등장할 것이라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포럼이 8월 김정일 위원장의 방중 이후에 열렸음을 감안하면 사뭇 의외인데요, 중국이 북한의 후계 동향을 충분히 파악하지 못한 걸까요.

    “유교적 전통이 강한 북한 정치체제 특성을 볼 때 인민을 위해 공헌한 바가 전혀 없는 인물에게 갑작스레 후계자 지위를 부여할 수 있을지 의구심이 제기됐죠. 당 대표자회를 통해 노출은 되겠지만 요직 임명은 쉽지 않다는 게 중국 측 패널이나 제 생각이었죠. 결과적으로 이는 우리가 잘못 판단한 것이었습니다. 포럼에서의 언급만 놓고 보면 중국도 미처 예상 못했던 방식임은 분명합니다.”

    ▼ 그렇다면 평양이 이렇듯 전격적인 방식을 택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현재로서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건강문제가 심각해졌기 때문 아니냐는 관측이 지배적인데요.

    “저는 조금 생각이 다릅니다. 당 대표자회를 전후해 이뤄진 조치들을 보면 상당히 오랜 기간 착실히 준비한 결과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우선 당의 제도적 기반을 확고히 한 것만 봐도 그렇습니다. 북한은 김일성 주석이 사망한 1994년 이후 ‘고난의 행군’과 선군정치를 거치는 동안 당 정치국 상무위원이나 중앙군사위원회 등 핵심멤버들이 사망해도 일일이 보충하지 않고 그냥 넘어왔습니다. 선군주의를 표방하면서 당이나 내각이 기형화된 상태였다는 거죠.

    이번에 그렇게 비어 있던 당 요직을 모두 채워 군과 균형을 맞추려는 의지를 내비쳤습니다. 김경희와 장성택을 중심으로 하는 제1서클, 당을 중심으로 하는 제2서클, 군이라는 제3서클로 3중의 후견서클을 만들어 후계체제를 지탱하겠다는 계산을 읽을 수 있습니다. 내각 총리를 당 정치국 상무위원에 임명한 것은 당과 군과 내각이 삼위일체로 김정일과 김정은을 지킨다는 구도를 시사하고요.

    지난 6월 장성택과 그 측근들이 전면에 부상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습니다. 국방위 부위원장과 당 중앙군사위원, 정치국 후보위원에 치안감찰기관을 총괄하는 당 행정부장까지 겸임하는 장성택은 이 구조를 유지하는 가장 중요한 연결고리입니다. 이런 정밀한 설계는 하루아침에 이뤄질 수 없죠. 물론 김 위원장이 본인의 건강을 확신할 수 없다보니 아들이 하루라도 빨리 권력을 확고히 할 수 있도록 승계절차를 서둘렀다고 볼 수는 있겠지만, 그러나 엄밀히 말해 지금도 총비서 김정일의 시대이지 아직 김정은 시대는 아닙니다. 갈 길이 멀죠.”

    문제는 밥이다

    ▼ 그런 의미에서 6월 장성택의 전면부상 직후에는 ‘장성택 과도체제’라는 표현도 나왔는데요. 한국의 재벌기업이 경영권 승계과정에서 활용했던 전문경영인 시스템과 비교하기도 하고요. 그러나 추후 후계자가 자기 사람들을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하면 관리체제의 구성원들이 이를 받아들일 수 있을지 의심스럽습니다. 자신들이 지금 누리는 입지나 권력이 순식간에 사라질 수도 있을 텐데요.

    “‘과도체제’라는 표현이 재미있긴 하지만 지금의 북한에 딱 맞아떨어지는 설명은 아니라고 봅니다. 물론 아시아의 가족주의적 승계문화, 특히 재벌구조를 보면 후계자의 나이가 어릴 경우 대리인이나 그 주변인물들이 독자 권력을 구축하고 싶어하는 경우가 있죠. 그러나 이는 선대가 죽었는데 후계자는 아직 경험이 일천할 때의 얘깁니다. 특히 후계자의 정통성이 흔들리는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그런 균열이 생기곤 합니다.

    반면 앞서 말했듯 아직은 김정일 체제이고, 장성택과 김경희는 그 믿을 만한 관리자라고 보는 게 옳습니다. 선대가 아직 서슬 퍼렇게 살아 있으니 과도체제라고 말하기 어렵고 특히 대리인이 다른 생각을 하기란 쉽지 않을 겁니다. 장성택 부부의 역할은 오히려 승계과정에서 김 위원장의 뜻을 관철해내는, 재벌그룹 가신(家臣)들과 비교하는 게 맞지 않을까요.”

    ▼ 뒤집어 얘기하면 김정일이 조기에 사망하는 경우 얼마든지 상황이 바뀔 수 있겠죠.

    “시기에 따라 다를 겁니다. 너무 이른 시간, 향후 1~2년 내에 김 위원장이 죽으면 분명 세력이 갈릴 테니까요. 어떻든 김정은 중심으로 가자는 이들과 후계자가 아직 준비되지 않았으므로 장성택과 김경희가 중심이 돼야 한다는 이들로 갈려 분쟁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권력승계와 관련해 평양에서 갈등이 첨예화할 수 있는 사실상 유일한 시나리오일 듯합니다.

    그러나 김정일이 5년 이상 산다면 권력은 자연히 ‘김일성 왕조’의 혈통을 잇는 김정은 중심으로 가게 될 겁니다. 다만 지켜봐야 할 것은 김정은이 인민에게 어떤 성과를 보여주느냐의 문제입니다. 아시다시피 북한은 2012년에 강성대국의 문을 열겠다고 선언한 상태인데, 그 가운데 강(强)은 지난해 2차 핵실험을 통해 달성됐다고 선전할 수 있겠지만 이는 김정일의 업적이지 김정은 작품이 아닙니다. 다음 임무인 성(盛), 즉 융성한 국가를 만드는 게 김정은의 임무일 수밖에 없는 거죠. 인민들 사이에서도 초미의 관심사일 테고요.

    그러나 이 문제는 까딱하면 진퇴양난에 빠질 수 있습니다. 부(富)를 만들려면 개혁·개방을 해야 하고, 외자를 도입해야 하고, 국제사회의 경제적 지원을 받아야 하는데, 이는 핵 문제가 해결되기 전엔 어렵거든요. 이 딜레마 위에서 어떻게 균형을 잡아가느냐가 후계자에게 주어진 제일 어려운 과제일 겁니다. 이번에 평양이 강석주를 부총리에 임명하면서 정치국원 자리를 주는 등 기존의 대미(對美) 외교라인을 일제히 승진시킨 것도 개인적으로는 미국과의 핵 협상에 힘을 실어주겠다는 시그널이라고 생각합니다.”

    ▼ 김정은이 자신의 업적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반대급부를 얻기 위해 핵무기를 포기할 수 있을 거라는 뜻인가요.

    “김정은 리더십의 리트머스 시험지는 핵 문제를 어떤 식으로든 풀어나가는 과정에서 최소한 배후에서라도 역할을 하고 이를 국제사회의 지원과 경제발전으로 연결시킬 수 있느냐가 될 거라고 봅니다. 여기서 실패하면 후계구도 자체에 금이 갈 수 있습니다. 김정은이 선군정치를 이어받아 더 강경한 정책을 취할 것이라고 보는 분들도 있지만, 저는 생각이 다릅니다. 그걸로는 당면한 요구인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거든요. 거꾸로 외부에서 그러한 암시를 적극적으로 던져서 김정은이나 북한 권력엘리트들이 현실을 직시하게 유도할 필요도 있다고 봅니다.”

    ‘입헌군주제’ 발언의 의미

    후계문제와 관련해 문 교수의 책에서 눈에 띄는 대목 가운데 하나는 장롄구이 중앙당교 국제전략연구소 교수가 인터뷰에서 남긴 말이다. 매들린 올브라이트 전미 국무장관의 회고록을 인용해 2000년 말 김정일 위원장이 “태국이나 영국 같은 입헌군주제가 가장 좋다고 본다”고 했다는 기록이다. 자신도 북한에서 입헌군주제를 시행해 직접 국왕이 될 것이라는 설명도 덧붙였다고 한다. 장 교수는 이를 북한의 후계문제가 이미 10여 년 전에 또 한번의 부자세습으로 정해져 있었음을 시사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 이 발언이 흥미로운 또 하나의 이유는 현재의 북한 체제가 입헌군주제와는 전혀 다르다는 점입니다. 김 위원장이 다음 대에서는 훨씬 약화된 수령제, 다시 말해 유럽 국가들처럼 ‘군림하되 통치하지는 않는(reigning but not ruling)’ 체제를 염두에 두고 있는 것 아니냐고 해석할 수도 있으니까요.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형식적으로 따지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프롤레타리아 공화정입니다. 다만 그 바탕에 수령제가 있고, 수령은 김씨만 하는 것이죠. 공산혁명으로 시작해 모든 것이 인민의 것이라고 주장했던 국가가 어느덧 김씨 가문의 것이 됐다, 이러려면 논리적 설명이 필요합니다. 그럴 명분이 없다 보니 강력한 권력을 유지하지 않으면 흔들릴 수밖에 없는 거죠. 통치하지 못하면 군림할 수도 없는 것이고, 앞으로도 입헌군주제 같은 방식을 택해 현재의 통제력을 내려놓지는 못할 겁니다.”

    ▼ 이른바 ‘정상국가’가 되기는 어렵다는 이야기로 들립니다.

    “서구식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시민사회를 구성할 중산층이 필수적이지만, 중산층은 시장 없이 형성되기 어렵습니다. 북한에 본격적으로 시장이 만들어지려면 개혁·개방이 선행돼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먼저 국제 안보환경이 달라져야죠. 이를 선순환 사이클로 바꿀 수 있다면, 그래서 중산층과 시민사회가 형성된다면 김정은이 민주적 선거에 의해 다시 정통성을 부여받는 지도자가 될 수도 있겠죠. 스위스에서 살면서 공립학교에 다녔다는 경력을 보면 이러한 서구식 시스템에 대해 최소한의 이해는 갖고 있을 거라고 봅니다.”

    ▼ 그렇지만 현재의 권력체계를 위협할 수 있다는 점에서 김정은이나 권력엘리트들이 개혁·개방을 선택하기란 어려운 것 아닐까요.

    “결국은 선택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자꾸 그게 위협이 될 거라고 말하면 북한 권력자들도 그렇게 인식하게 됩니다. 군이나 당에서 정보분석을 담당하는 강경파들이 외부의 그러한 평가를 자신들의 내부정치에 이용하는 구조죠, ‘열면 위험하답니다, 서서히 해야 합니다’라고 보고하는 식으로. 이른바 ‘거울효과(mirror image)’가 만드는 상호작용의 악순환입니다. 이걸 염두에 두고 새로운 그림이 만들어낼 수 있는 긍정적인 결과를 외부에서 자꾸 얘기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북한과 중국이 가까워진 이유

    ▼ 후계 공식화 이후 중국의 반응도 흥미롭습니다. 최고위관계자들이 줄줄이 북한 새 지도부와의 관계 강화를 천명하거나 대를 이은 우호를 말하는 것이 대표적일 텐데요.

    “우선 전제할 것은, 그간 중국이 북한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워왔음에도 내정간섭 불가라는 원칙 때문에 밖에 얘기하지 않은 측면이 있었다는 점입니다. 다만 이명박 정부의 외교정책이 미국에 초점을 맞추면서 북중 관계가 가까워진 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이전에는 북한이나 중국 당국자들이 사석에서 상대방을 비판하는 이야기도 쉽게 들을 수 있었지만 근래에는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죠.

    중국 측 전문가들의 설명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이 미국에 모두 베팅하고 신(新)냉전 구도로 가고 있는데 중국이라고 북한 카드를 버릴 수 있겠느냔 겁니다. 한국의 안보정책 결정자들이 ‘민주화되지 않은 중국은 잠재적인 적’이라는 인식하에 이를 견제할 수단으로 동맹 강화에 매진하다보니 중국에서는 북한과의 관계 강화를 생각하는 겁니다.”

    ▼ 그렇지만 천안함 이후의 상황을 보면 중국이 국제적 규범에 미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준 것은 사실 아닙니까. 그에 대한 중국 측 전문가들의 인식이 궁금한데요.

    “간단합니다. 자기들 입장에서 보면 한국도 국제적인 규범을 지키지 못한 것은 마찬가지라는 거죠. 이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공교롭게도 천안함 논란이 한창이던 5월말 터키 인권단체 회원들이 탑승한 민간선박이 가자 지구에 구호물품을 싣고 가다가 이스라엘 해군의 공격을 받은 일이 있습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이 사건에 대한 조사기구 파견문제가 상정됐는데, 이스라엘의 맹방인 미국은 반대했고 한국은 기권했죠. 완화된 표현의 의장성명만이 채택됐고요. 한국도 동맹 문제 때문에 국제규범을 지키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 아니냐, 북한이 천안함 공격을 부인하는 상황에서 그 동맹인 중국에 북한 규탄에 동참하라고 목소리를 높이는 게 말이 되느냐는 겁니다. 미국식 이중잣대라는 거죠.”

    ▼ 최근 들어 북중 관계가 더 긴밀해지고 있다고 보면, 만에 하나 북한에 급변사태가 발생할 경우 중국이 이에 개입할 가능성은 오히려 커졌다고 봐야 할까요.

    “미국이나 한국이 움직이지 않는데 중국이 먼저 독자적으로 개입할 가능성은 없다는 게 일관된 설명입니다. 다만 한미가 이른바 ‘개념계획 5029’에 따라 북한 지역을 안정화 혹은 점령하려고 나선다면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는 거죠. 오해하기 쉬운 것 한 가지는, 북한에 혼돈이 발생한다고 해서 한국이 북한에 진주할 국제법적 근거나 명분이 없다는 겁니다. 합법적 개입은 유엔의 인도주의적 개입뿐이죠. 한국 혹은 한미연합군이 북한을 점령하면 우리가 뭐라고 주장하든 국제적으로는 미국의 이라크전 비슷한 패권전쟁으로 인식될 가능성이 큽니다. 북한의 동맹인 중국은 당연히 가만히 있을 수 없다는 것이고, 아마 러시아도 개입하려 할 겁니다.”

    개념계획 5029의 뿌리

    문정인 교수가 진단하는 북한 권력승계와 급변사태 가능성

    2007년 2월22일 리비아 국가경제위원회 개청식에서 연설하고 있는 카다피의 둘째아들 세이프 알 이슬람.

    ▼ 궁금한 것은, 개념계획 5029는 원래 대량살상무기 통제권 확보가 핵심목적 아니었던가요. 북한의 안정화나 지상군 점령을 통한 민사작전 수행 등은 당초에는 포함되지 않았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최근 논의를 보면 이 부분이 혼용되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5029의 작전계획화가 한창 논의되던 2004년 무렵 도널드 럼스펠드 당시 국방장관을 비롯한 미국 측 인사들의 인식은 분명 대량살상무기에 초점을 두고 있었죠. 예를 들어 김정일 유고(有故)가 발생했는데, 평양 순안공항에 파키스탄항공 비행기가 한 대 착륙해 있고, 인민군이 보관 중이던 플루토늄의 행방을 알 수가 없다, 그런 상황을 가정한 것이었죠. 미국 측이 원한 것은 이 때 특수전 병력을 투입해 핵 물질의 해외 유출을 차단하고 통제권을 확보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작전에서 지상군은 한국이 투입하고 미국은 해·공군과 정보지원을 맡는다는 그림이었습니다.

    그러나 최근 수년 사이 5029의 내용은 상당부분 북한의 내부 급변사태를 안정화하는 방향으로 초점이 옮겨간 것으로 듣고 있습니다. 대량살상무기의 유출을 막기 위해 필요한 다양한 조치를 고민하는 논의가 한국 측의 요청에 따라 안정화까지 포괄하는 방식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거죠. 여전히 의구심이 남는 것은 북한의 대량살상무기가 해외로 유출되는 상황이 과연 실제로 벌어질 가능성이 있느냐는 겁니다. 당시에도 미국 측 참석자들 사이에서 꼭 군사적 수단 동원을 계획할 필요가 있는지 반대의견이 있었습니다. 중국을 통한 압력 등 외교적인 혹은 예방적인 방법이 있는데 말입니다.”

    ▼ 그러나 대량살상무기 확산방지에 대한 미국의 노이로제에 가까운 집념을 생각하면 그에 대비하는 계획 자체를 포기할 가능성은 매우 낮을 것으로 보이는데요. 예방적 조치들이 실패할 경우에 대해 계획을 세우고 싶어하는 게 미국의 특성이기도 하고요.

    “문제는 그런 가정에 몰입하면 대화를 통한 해결에는 역점을 두지 못하게 된다는 겁니다. 거꾸로 그러한 분위기가 북한에 위협으로 인식되어 부정적인 결과를 낳을 우려도 있고요. 안정화라는 개념만 해도 그렇습니다. 김정일 유고가 발생해 군부세력 사이에 내란이 벌어졌을 때 한국이나 미국이 개입하고 나면 다음 단계는 안정화일 수밖에 없다는 판단에서 나온 듯한데, 사실 안정화라는 개념 자체가 오만한 것일 수 있습니다. 더욱이 미국이 타국에 대한 안정화 작전에서 성공한 사례가 없어요.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이 대표적인 경우 아닙니까.”

    ▼ 그렇지만 정말 급변이 벌어지고 북한이 무정부 상태에 빠져 참혹한 상황에 이르면 이를 내버려둘 수도 없는 노릇 아닙니까.

    “유엔을 중심으로 인도주의적 개입을 하면 됩니다. 그게 유엔의 목적이고, 민감한 상황이 분쟁으로 발전하는 것을 막는 길이니까요. 실제로 그런 상황이 벌어지면 중국은 분명 유엔을 통해 논의하자고 주장할 것이고 미국 역시 반대하거나 독자적으로 행동하기 어려울 겁니다. 오히려 지금은 한국만 북한의 급변을 흡수통일의 기회로 보고 준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문제는 국제정치적으로 현실성이 거의 없다는 거죠.

    개념계획 5029의 작계화 논의에 참여했던 미 육군 대령이 최근 ‘김정일 체제가 붕괴해 미국과 한국이 그에 대한 안정화 작전을 전개할 경우 600~700만 규모의 정규군·비정규군 저항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북한 내부의 폭동이 이라크나 아프가니스탄보다 훨씬 더 강력한 형태로 벌어질 수 있다는 거죠. 북한은 수십 년간 매우 강력한 통제력을 자랑해온 체제입니다. 후세인만 제거하면 이라크 주민들이 환영할 거라고 믿었던 미국의 판단이 착각이었듯, 북한에서도 마찬가지 일이 벌어질 수 있습니다.”

    “급변? 미국은 중국과 상의한다”

    민감한 주제이니만큼 북한 급변사태 가능성에 관한 이야기가 이어졌다. 문 교수가 전하는 중국 측 전문가들의 견해 중 흥미로운 부분 하나는, “아무리 한미관계가 긴밀해진다 해도 정작 북한에서 큰일이 벌어질 경우 백악관이 이를 상의할 첫 번째 상대는 서울이 아닌 베이징이 될 것”이라는 말이었다. 흔히 미국과 중국이 이를 두고 무력충돌을 불사하며 대립하는 시나리오를 그리지만 오히려 두 나라는 서로 긴밀히 협조해가며 상황을 관리하려 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 책에 실린 인터뷰에서 정비젠 전 중국공산당 중앙당교 상무부교장은 ‘북한의 급변에 중국이 개입한다면 미국의 요청에 따른 것일 가능성이 크다’고 언급한 바 있습니다.

    “북한의 급변뿐 아니라 한반도에서 일어날 수 있는 중요 안보이슈가 미국과 중국의 협의 혹은 합의를 거치지 않고 결정될 가능성은 당장은 물론 앞으로 10~20년 후까지도 별로 없다고 봅니다. 이들이 1953년 정전협정의 당사자이기 때문입니다. 현상유지를 하든 평화협정을 맺든 새로운 안보체제를 만들든 미중 간에 합의가 있어야 가능한 게 동북아 국제정치의 현실입니다.

    앞서도 말했지만 5029는 최후의 수단이고, 그 한참 전부터 미국은 중국과 긴밀히 협의해나갈 겁니다. 김정일 유고가 발생할 경우 누가 대안세력이고 누구를 지지해야 빨리 혼란이 종결될 수 있는지 모색하는 과정을 거치겠죠. 이미 한미 양국은 중국에 북한 급변에 대해 논의하자고 제안하지 않았습니까. 다만 중국으로서는 한국과 미국이 5029를 통해 그리고 있는 군사적 개입이나 안정화를 용인한 것으로 비칠까봐 우려하는 것이죠.”

    ▼ 그러나 북한 급변사태 관리가 유엔이나 주변 강대국들의 주도하에 이뤄질 경우 통일의 가능성은 사라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주변국 입맛에 맞는 체제가 들어설 경우 우리와의 통합은 영원히 불가능해질 수도 있다는 거죠.

    “흡수통일만 생각하면 당장에는 어려울 수 있겠죠. 그렇지만 유엔의 개입으로 정권이 바뀌고 개혁·개방이 이뤄져 새로운 체제가 들어선다면 남과 북이 합의에 의해 통일을 이룰 수 있는 길은 얼마든지 열릴 수 있습니다. 얼마 전 미래기획위원회가 낸 통일비용에 관한 보고서를 보면 점진적인 통일보다 급변에 따른 흡수통일이 7배가량 많은 비용이 든다고 하더군요. 그렇다면 당연히 비용이 적게 드는 방향으로 가는 길을 고민해야 옳지, 많이 드는 길을 준비하자는 명분으로 세금을 걷는 건 비상식적이라고 봅니다.

    지금 우리 정부 급변정책의 가장 큰 문제는 아전인수식, 일방주의적 해석이라는 겁니다. 2500만 북한 주민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고려하는 역지사지(易地思之)가 없는 거죠. 어떻게 보면 이는 미국이 지금껏 실패해온 대외정책의 전철을 답습하는 것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틀을 깨야 지혜가 보인다

    인터뷰가 이어지는 동안 문 교수는 여러 차례 “현실성 있는 상황인식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북한의 권력승계가 실패해 급변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단정하거나, 이를 두고 주변 강대국들이 무력충돌을 불사하는 대립을 벌일 것이라는 예측은 상당부분 국제정치의 상식에서 벗어난 극단적인 해석이라는 뜻이었다.

    “기존의 극단적 사고방식을 벗어나 접근하면 길은 많이 있습니다. 이런 그림을 생각해 볼까요. 2003년 리비아가 핵 개발을 포기하는 과정에서는 카다피 원수의 둘째 아들이자 후계자로 유력했던 세이프 알 이슬람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토니 블레어 당시 영국 총리가 정보당국을 통해 런던에서 유학했던 알 이슬람을 접촉해서 ‘우리가 책임지고 미국의 경제제재 풀어주고 체제 보장해줄 테니 핵 개발을 포기하라’는 막후협상을 벌인 거죠. 영국 총리실과 백악관, 영국 MI6(해외정보국)와 미국 CIA(중앙정보국)만이 알고 있던, 말 그대로 비밀공작이었습니다. 우리는 왜 그런 식의 접근 방식을 생각하지 못하는 걸까요. 이를테면 은밀히 김정은과 백악관 사이의 최고위 비밀접촉을 주선하는 겁니다.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가져오기 위해 가장 중요한 덕목이 바로 이런 ‘틀을 뛰어넘는 상상력’입니다. 얼마 전 읽은 스티븐 홀의 ‘지혜(Wisdom)’라는 책에서는 지혜를 ‘자신을 둘러싼 스테레오타입,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새로운 발상을 하는 능력’이라고 정의하더군요. 오만과 아집, 편견, 근시안적인 판단과는 거리가 멀지요. 과연 지금 우리 정부와 당국자들에게 그런 지혜와 상상력이 있는지 솔직히 의심스럽습니다. 한미동맹 절대화와 대북 강경 원칙주의라는 틀을 깨고 나와야만 비로소 다른 길이 보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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