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9월호

북미관계 발전 딜레마에 빠진 한국 외교

북미 뉴욕회담 그 후

  • 백승주│한국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장 bsj@mnd.go.kr

    입력2011-08-19 11:3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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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웬디 셔먼 차관 지명은 오바마의 새로운 승부수
    • 북미관계 조율할 김계관은 승진
    • 美, 남북관계 진전과 별개로 북한과 직접대화 시도
    • 북미관계 발전에 찬성도 반대도 못하는 한국
    • 새로운 각도에서 ‘교차승인 완성’ 시도…단계별 시나리오 준비해야
    북미관계 발전 딜레마에 빠진 한국 외교

    김계관 북한 외무성 제1부상(왼쪽)과 웬디 셔먼 미 국무부 정무담당 차관.

    2011년7월1일 미국 오바마 행정부는 2기 클린턴 정부의 대북정책조정관을 지낸 웬디 셔먼을 국무부의 3인자인 정무담당 차관으로 지명했다. 셔먼 차관은 1997년 7월부터 2001년까지 당시 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의 특별보좌관(special advisor) 겸 대북정책조정관(North Korea Policy Coordinator)을 지낸 인물. 따라서 한국과 미국 언론들은 그의 기용을 미국의 대북정책 변화의 신호탄으로 평가하며 한반도 정책 변화를 예의주시하고 있다.

    셔먼 차관이 대북정책조정관으로 일했던 시기에 진행된 한반도 정세와 미국의 해법을 조망해보면 이러한 분석이 일견 타당하다. 하지만 그를 발탁한 오바마 행정부의 대(對)한반도 외교에서의 새로운 승부수라는 점을 주목하는 이는 거의 없다. 시간을 10년 전으로 되돌려보자. 당시 북한과 미국, 남한과 북한은 긍정적 함수관계를 가지면서, 북미관계 정상화를 위한 중요한 이정표를 향해 나아갔다고 볼 수 있다. 그가 대북정책조정관에 취임한 1997년 7월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 사무소가 개설됐고, 9월에는 미국 국적 민항기가 최초로 북한에 착륙했다. 그해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목표로 한 4자회담 본회담이 제네바에서 시작됐다.

    하지만 이러한 미국의 조치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1998년 8월31일 함북 화대군 무수단리에서 장거리 미사일 광명성 1호를 발사하고, 헌법을 개정하면서 ‘강성 대국론’을 체제목표로 제시했다. 장거리 미사일 도발에도 미국은 북한과 미사일 협상, 북미 고위급회담을 진행시켰고 1999년 9월에는 북한에 대한 경제제재 완화조치를 발표했다. 경제제재 완화조치를 전후해 북한은 북미회담 기간에는 미사일을 발사하지 않겠다는 모라토리엄(미사일 발사 유예)을 천명했다.

    장거리 미사일 발사를 유보하겠다는 대미 유화조치를 발표한 북한은 1999년 6월15일 서해에서 한국 함대를 공격하는 군사도발을 감행했다. 서해도발이라는 도전에도, 남북은 2000년 6월 1차 정상회담을 평양에서 개최했고, 2000년 6월19일 대북한 경제제재 완화조치를 발효시켰다. 같은 해 9월27일 뉴욕에서는 북미 차관급회담이 열렸고, 북한의 조명록은 2000년 10월9일부터 12일까지 김정일 국방위원장 겸 인민군 최고사령관 특사 자격으로 미국을 방문해 ‘북미공동코뮤니케’를 발표하기에 이른다.

    이 기간 중 미국의 정보기관들은 북한이 핵무기 개발 노력을 포기하지 않고 있으며, ‘파키스탄의 핵 아버지’로 불리는 압둘 카디르 칸 박사로부터 농축우라늄을 이용한 핵기술을 도입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있었다.



    1997년 1월부터 2001년 1월까지 진행된 북미관계의 총지휘는 당연히 클린턴 대통령-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이었다. 대사급이던 셔먼의 역할은 제한적이었을 수 있다. 그러나 민주당에 대한 셔먼의 기여와 신뢰, 워런 크리스토퍼 국무장관의 법률담당차관보로 근무한 경력을 고려할 때, 북미공동코뮤니케 내용과 방향에 주요한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웬디 셔먼이 북미관계를 조율할 당시 북한에서는 김계관이 그의 카운터파트였다.

    김정일의 북미관계 승부수, 김계관

    2010년 9월 김계관은 북한 외무성 제1부상으로 승진했다. 시기적으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대목은 북한체제가 김정은을 후계자로 대내외에 공표한 시기에 승진했다는 점이다. 김계관은 2009년 8월 북한을 방문한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을 공항에서 영접한 뒤 김정일 국방위원장 주최 만찬에 참석했으며, 클린턴 전 대통령을 평양공항에서 전송한 인물이다. 김계관은 향후 김정일-김정은 과도체제 하에서 북미관계를 조율할 연출자 역할을 할 것이다.

    2011년 7월 김계관은 중국 베이징(北京)을 거쳐 28일과 29일 열린 뉴욕회담에 참가했다. 그는 분명하게 “뉴욕회담에 만족하고, 앞으로도 대화를 계속할 것이며, 다자회담 전에 쌍무적 만남이 계속 있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북한 외무성도 8월1일 문답형식을 거쳐 “북미 고위급회담에서 북미관계 개선과 한반도 정세 안정, 6자회담 재개와 관련한 문제들이 진지하고 건설적인 분위기 속에서 논의됐다”고 평가했다. 아울러 북측은 북미회담의 주요 의제로 △북미관계 개선 △평화적 방법에 의한 한반도 비핵화 △전제조건 없는 6자회담 재개 △동시행동의 원칙 하 9·19 공동성명이었다고 밝혔다.

    북한의 공식적 입장을 종합하면 북한은 이번 뉴욕회담을 북미 간 ‘고위급회담’으로 규정하고, 핵심의제는 ‘북미관계 발전’에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북측 외무성이 밝힌 의제의 우선순위에 뉴욕회담에 임하는 북측의 입장이 분명히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북한 당국은 북미회담의 중심의제로 북미관계를 상정하고 있다. 사실, 북한이 6자회담 재개에 나서는 이유가 북핵문제 해결이 아니라 북미관계 개선에 있다는 것은 더 이상 뉴스 가치가 없는 통설이다. 이미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2차 핵실험 이후 기회 있을 때마다 “북미관계를 주시하며 6자회담에 나가겠다”고 밝힌 바 있으며, 북한은 전술적 표현만 달리했지 일관되게 북미관계 정상화에 집착해왔다고 볼 수 있다.

    북미관계 정상화를 위해 북한이 미국을 압박할 외교적 문건이 바로 2000년 10월12일의 ‘북미공동코뮤니케’라 할 수 있다. 2000년 10월9일부터 12일까지 군복을 입은 채 미국을 방문한 조명록 일행은 클린턴 대통령, 올브라이트 국무장관, 윌리엄 코언 국방장관 등 미국 행정부의 고위관리를 두루 만난 이후 공동코뮤니케를 발표했다. 공동코뮤니케 중 북한이 미국을 압박할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쌍방은 미국과 북한 관계를 전면적으로 개선시킬 새로운 기회들이 조성되었다고 판단하고…양국 사이의 쌍무관계를 근본적으로 개선하는 조치를 취하기로 결정하고…1953년의 정전(停戰)협정을 공고한 평화보장 체계로 바꾸어 한국전쟁을 공식적으로 종결시키는 여러 가지 방도를 추진한다.”

    셔먼 차관이 대북정책조정관으로 일하던 시기에 김계관은 북측의 4자회담 수석대표로 활동했고, 1998년 9월에 외무성 부상이 되었다. 그는 금창리 핵의혹 관련 북미회담 및 북미회담 수석대표를 지냈으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의 평양 방문시 각종 회의에 참석한 경력을 갖고 있어 누구보다 미국 민주당 출신의 외교관 및 전문가들을 잘 안다고 할 수 있다. 김계관을 앞세워 북한은 미국과 노골적으로 관계정상화를 추진하고 있는 것이다. 마침 웬디 셔먼도 재등장했다.

    오바마 ‘전략적 인내’ 해법은 북미대화?

    북한의 2차 핵실험과 연속적인 대남 군사도발 과정에서 한국은 원칙을 강조하며 제재를 주도하고 북한을 압박했다. 그러한 과정에서 한미동맹 기조 속에 미국은 한국 정부를 적극 지원했다. 그러면서 오바마 정부는 ‘전략적 인내’를 강조했다. 오바마 행정부가 강조한 전략적 인내의 대상은 북한이었다. 북한이 핵무장과 대남도발 유혹을 스스로 후회하고, 평화적 해결과정에 동참하기를 기다리는 외교적·전략적 태도를 ‘전략적 인내’라는 말에 담아왔다.

    그러나 최근 일부 미국 고위 정책결정자들은 한국의 대북정책에 대한 문제점을 제기하면서, 미국이 한국에 대해서도 인내하고 변화를 바라고 있었던 것을 감추지 않고 있다. 2011년 6월27~28일 미 국방성 후원으로 하와이에서 열린 한미 전략대화에서도 이러한 분위기는 잘 나타났다. 마이클 시퍼 국방성 동아태 부차관보 등 미국 측 정부 및 학계인사 20명과 한국 측 정부 및 학계인사 20명이 참가한 전략대화에서 미국의 일부 고위관리는 북미대화의 불가피성을 제기했다.

    “남북대화가 필요하고, 남북대화와 비핵화회담이 동시에 진행되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미국은 다양한 양자·다자협의를 중요시할 것”이라고 밝힌 것이다. 이 발언 직후 북미 뉴욕회담 계획이 발표됐다. 남북대화, 남북관계 진전과 병행해서 북한과 직접대화를 하겠다는 방침을 무작정 끌고 갈 수 없다는 점을 드러낸 것이다.

    사실 북미 직접대화는 오바마 대통령의 선거공약이었다. 오바마 대통령은 북한을 포함한 모든 국가와 직접대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공약했다. 그러나 북한의 연속적 도발로 인해 고통 받은 한국 정부의 대북정책을 지원하는 입장을 유지했다. 그러나 북핵문제, 남북관계, 북한문제가 진전되지 않은 가운데 오바마는 북한과 직접대화를 시도하기로 결심한 것으로 보인다.

    북미 직접대화에 대한 미국의 메시지는 지난 4월 하순 방북한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을 통해 북한 측에 전달된 것으로 보인다. 국내외 언론은 카터 전 대통령의 방문 일정과 의미에 대해 과소평가했지만, 카터 전 대통령은 미국 민주당 노(老)정객으로 북미회담을 주선한 것으로 보인다. 카터 방북 이후 북한은 2010년 11월부터 엄중한 범죄혐의로 북한에 억류 중이던 한국계 미국인 전용수씨를 5월 하순에 석방함으로써 카터 방북에 대한 긍정 메시지를 미국에 보냈다. 평양 방문을 마치고 귀국하기 위해 공항으로 가는 도중 그에게 북측 지도자의 메시지를 전해준 이용호 북한외무성 부상을 북측 6자회담 대표에 임명했고, 발리 남북 간 핵회담을 하도록 했다.

    중국, 北 개방 조건으로 북미관계 지원

    캠프 데이비드 협상을 이끌어 노벨평화상을 수상했고, 1994년 미국과 북한 간 기본합의서 체결의 계기를 마련했던 카터는 2011년 북미 직접회담에 일정한 역할을 한 것으로 분석된다. 북미 직접대화가 재개된 이후 카터 전 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할 때 밝힌 단체인 ‘세계정치원로그룹(The Elders)’은 북미대화를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대화 재개에 대한 자신들의 역할, 기여도에 자부심을 담은 성명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김계관은 북미회담을 마치고 귀국하는 길에 베이징에 머물면서 중국 외교부를 찾았다. 8월3일 밤 중국 외교부 청사를 찾아 장즈쥔(張志軍) 외교부 상무 부부장을 만나 북미회담 결과를 설명하고, 6자회담 재개에 대해 의견을 교환했다. 아울러 중국 측 6자회담 수석대표인 우다웨이(武大偉)도 만났다. 김계관이 비교적 정중하게 중국 외교부와 협의하는 모습은 북미대화 성사 과정에 중국이 일정한 역할을 했음을 의미한다.

    후진타오(胡錦濤) 중국 국가주석은 2011년 1월 미국을 방문해 정상회담을 열고 41개항에 합의했는데, 한반도 정세와 관련해 △한반도 비핵화 △남북관계 개선 △실질적인 남북대화의 필요성 △북한의 추가도발 억제 등에 대해 합의했다고 밝혔다. 중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북한은 한국 정부에 대해 대화공세를 전개했다. 2011년 초 북한의 대화공세 입장을 북미정상회담 의제와 연결해 볼 때, 북한은 중국이 정상회담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남북대화 재개와 관련해 북측 입장을 중국을 통해 미국에 전달한 것으로 추측해볼 수 있다. 필자가 만난 한 중국 전문가의 전언에 의하면, 중국은 연평도 도발 직후 긴장된 국면에서 북한이 상황을 악화하지 않을 경우 북미관계 개선을 주선할 수 있다는 입장을 북한에 전달했다고 한다.

    중국은 현재 북한에 대한 새로운 경제협력을 추진하고 있다. 황금평, 나진선봉지역, 청진지역 등에 산업인프라를 건설하는 협력을 구상하고 추진하고 있다. 중국 측 설명에 따르면 “중국은 북한 경제에 대해 수혈(輸血)하는 지원보다, 조혈(造血)기능을 회복시키는 경제지원 정책”을 적극 고려 중이라고 한다. 아울러 북한 경제의 조혈기능을 회복시키기 위해서는 북미관계 정상화가 필요하다는 주장을 조심스럽게 내놓고 있다. 1980년대 초 중국이 개혁·개방을 할 수 있었던 역사적 조건의 하나는 ‘중미관계 정상화’였다는 경험을 상기시키고 있는 것이다.

    ‘교차승인 완성’으로 가는 길목

    한반도문제, 북핵문제 해결을 위해 수많은 양자대화, 다자대화를 지켜봐온 입장에서 ‘오바마 행정부’와 ‘북한 과도체제’ 간의 일회적 직접대화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2011년에 진행되는 북한, 미국, 중국의 외교적 동향들은 북미관계 발전에 대한 북한요구를 수용하면서, 북핵문제를 해결하는 목표를 달성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 과정에서 북한은 ‘북미공동코뮤니케’를 내세워 오바마 민주당 정부를 압박하면서 미국이 전제조건으로 요구하는 남북대화에 대한 관심, 6자회담 재개에 긍정적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오바마 정부는 9·19합의 이행을 전제조건으로 제시하면서도, 북미관계 발전에 경험이 풍부한 셔먼을 정무담당 차관으로 임명했고, 2기 클린턴 행정부의 대북정책 복원을 만지작거리고 있다. 웬디 셔먼과 김계관의 전면 등장도 의미심장하다. 중국은 북한의 도발의지를 억제하고, 개혁·개방을 촉진하는 정치적 조건으로 북미관계 정상화에 대한 긍정적 태도를 취하고 있다.

    필자는 이러한 관련국들의 동향과 흐름을 지켜보면서 교차승인을 완성하기 위한 행마(行馬)가 새로운 각도에서 시도되고 있다고 판단한다. 한반도문제 해결을 위한 교차승인이란 ‘냉전시대 미수교국이었던 한국이 중국, 러시아와 수교하고, 북한이 미국, 일본과 수교하는 문제해결방식’을 말한다. 물론 처음 시도되는 것은 아니다. 이미 6자회담의 9·19합의과정에서 논의됐던 방식이다.

    한국은 두 차례 핵실험을 한 북한이 미국과의 관계를 발전시키는 것이 한반도 정세, 북핵문제 해결, 남북관계 발전에 독이 될지, 약이 될지를 판단해야 할 중대한 국면에 놓여 있다. 1990년대 이후 한국 정부는 북미관계 발전을 공개적으로 반대한 적이 없다. 그러나 핵을 보유한 북한이 남북관계 발전, 북핵문제를 우회해서 미국과의 관계를 발전시키는 태도를 지지할 수도 없다. 한국 외교는 단기적으로 딜레마에 빠질 수 있다. 북미관계 발전 속도와 내용에 대한 시나리오별 대응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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