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2월호

‘족보정치’ ‘정치투쟁’ ‘실리 추구’…86세대의 끈질긴 생명력

[특집 | 비상계엄 1년, 대한민국이 달라졌다] 12·3계엄 덕에 3차 전성기 맞이한 86세대

  • 이종훈 정치평론가

    입력2025-12-01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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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권 국회의원 100여 명이 86세대

    • 세도정치와 비슷한 86세대 ‘족보정치’

    • 프레임 씌우기→ 선전선동→ 상대 압박, 정치투쟁 능해

    • 대의명분 버리고 실리 쫓다 노욕 드러내

    • 세대교체 안 한 민주당, 장기적으론 악재 될 수도

    2004년 4월 15일 17대 총선에서 과반 의석을 확보한 열린우리당 당원과 지지자들이 선거상황실에서 환호하고 있다. 동아DB

    2004년 4월 15일 17대 총선에서 과반 의석을 확보한 열린우리당 당원과 지지자들이 선거상황실에서 환호하고 있다. 동아DB

    86세대(1980년대 학번, 1960년대생)가 다시 전성기를 맞았다. 3차 전성기다. 1차 전성기는 노무현 정부 때다. 친(親)노무현계는 2004년 17대 총선에서 DJ계(동교동계)와 결별 후 창당한 열린우리당을 통해 무려 108명의 초선 의원을 당선시켰다. 그 대부분이 86세대였다. 2차 전성기는 문재인 정부 때다. 안희정 전 충남지사를 비롯해 임종석 대통령비서실장 등 86세대 중에서도 리더 격에 해당하는 이들이 차기 대선주자로 거론되며 관심을 모았던 시기다. 

    3차 전성기는 12·3계엄 덕에 이재명 대통령이 집권에 성공한 올해부터다. 6·3대선 이후 이재명 정부에서 86세대는 요직을 차지했다. 김민석(61) 국무총리, 정청래(60) 더불어민주당 대표, 우상호(63) 대통령실 정무수석도 모두 86세대다. 민주당과 조국혁신당 국회의원 중 100여 명이 86세대로 분류된다. 중진급인 이들은 국회 상임위원장직을 수행 중이기도 하다. 동일 세대의 정치세력이 이처럼 전성기를 세 차례나 맞는 경우는 국내외를 통틀어 전무후무한 일이다.

    86세대 특징, 족보정치와 정치투쟁

    물론 전성기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노무현 정부 말기 레임덕이 가중되는 속에 열린우리당이 분당 사태를 겪고 대통합민주신당에 흡수 통합되면서 한때 폐족으로 몰리기도 했다. 문재인 정부 시절에는 미투 운동이 전개되는 속에 안희정 전 지사 등이 논란의 대상이 되면서 86세대가 기득권 세력으로 전락했다는 비판에 봉착하기도 했다. 2024년 총선 때에는 3선 이상 중진급을 대상으로 한 ‘86세대 청산론’이 제기되면서 대규모 공천 탈락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이 모든 고난기를 극복하고 86세대가 오뚝이처럼 다시 회생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첫 번째는 족보정치다. 이들은 절대 혼자 움직이지 않는다. 학생운동 시절 만들어진 상하 위계가 분명한 족보를 중심으로 서로 밀고 당기며 앞으로 나아간다. 조선시대 세도정치와 비슷한 이들의 족보정치는 폐쇄적이면서도 강고하다. 족보 밖의 사람은 철저히 배제한다.

    족보는 진보 단체로까지 넓게 뻗어 있다. 86세대 가운데 정치권에 진출한 인물은 소수다. 대부분은 노동운동을 거쳐 시민운동으로 넘어갔다. 86세대는 진보 단체 창설을 주도했고, 그곳에서도 긴밀한 네트워크를 구성했다. 이들 역시 정치권의 86세대와 마찬가지로 떼로 움직인다. 특정 단체가 캠페인을 시작하면 여타 단체들이 이름을 함께 올려 연대한다. 진보 단체를 창설하고 이끌었던 인물 중 일부는 그 경력을 토대로 뒤늦게 정치권에 진출하기도 했다. 정의기억연대 이사장 출신 윤미향 전 의원,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 상임대표 출신 최민희 의원 등이 대표적이다.



    조선시대 세도정치의 핵심은 누가 주군을 모시는지에 있었다. 86세대도 유사한 경향성을 보여왔다. 국민적 지지를 받으면서도 자신들의 이념 정체성에 합치하거나 동조하는 인물을 대선주자로 내세우고, 그를 대통령으로 옹립한 뒤 요직을 차지해 정권을 주도하는 방식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도, 문재인 전 대통령도, 이재명 대통령도 실은 이들에 의해 간택되고 옹립된 것으로 봐야 한다.

    이재명 대통령은 어떨까. 기본구도는 변하지 않았다. 다만 노 전 대통령처럼 부분적으로라도 독립된 결정을 내릴 수 있거나 문 전 대통령처럼 그저 업혀가거나 할 수 있을 뿐이다. 최근 ‘명·청 대전’으로 불리는 이 대통령과 정청래 대표 간 갈등이 세간의 관심사다. 이것이 어떻게 가닥을 잡아가느냐에 따라 이 대통령과 86세대 간의 향후 관계가 결정될 전망이다. 다만 이 대통령은 사법리스크 등 약점도 많은 터라 집권 후반으로 갈수록 문 전 대통령처럼 될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두 번째는 정치투쟁이다. 1980년대 학생운동 내에서는 이념 정체성과 운동 방식을 둘러싼 노선 투쟁이 치열했다. 그 투쟁에서 살아남아야 총학생회를 장악하고 학생운동을 주도할 수 있었다. 이들 대부분은 이후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는데, 노동운동 과정에서도 노선 투쟁은 이어졌다. 이들에게 정치투쟁은 생활이다. 당연히 정치권에 진입한 이후에도 정치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정치투쟁은 기본적으로 프레임을 짜고 선전선동을 거쳐 그것을 전파해 상대방을 압박하는 과정을 거친다. 86세대가 가장 잘하는 게 바로 이것이다. 최근 정청래 대표를 비롯한 민주당 주류는 내란 프레임과 동시에 국민의힘 정당 해산 프레임을 밀어붙이고 있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불법적인 비상계엄으로 탄핵을 당했지만, 내란죄 유죄 여부는 아직 확정된 것이 아니다. 하지만 유죄를 전제로 국민의힘을 내란 동조 정당으로 몰아가고 있다. 

    윤석열 정권 내내 민주당이 집중했던 것은 탄핵 프레임이다. 집권 초기부터 대통령 탄핵을 거론하기 시작했고, 장관들을 비롯해 검사들까지 무려 29명에 대해 탄핵소추안을 발의했다. 이 가운데 국회 본회의에서 처리한 13건 중 현재까지 인용된 사례는 단 한 하나도 없다. 탄핵 프레임으로 민주당은 국정을 마비시키는 전략을 썼고, 윤 전 대통령의 격노와 무리한 비상계엄을 유발했으며, 최종적으로 윤 전 대통령 탄핵을 얻어낼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매우 성공적인 정치투쟁이었다.

    민주화에 기여했지만 ‘협치 실종’ 주도

    86세대의 다음 목표는 무엇일까. 첫째는 대선 도전이다. 86세대 가운데 대통령이 나오는 그림이다. 뛰고 있는 인물은 많다. 이미 지난 대선 당시 도전 의사를 밝혔던 송영길 소나무당 대표와 이광재 전 강원지사, 임종석 전 대통령비서실장 등이다. 안희정 전 지사도 사면복권이 이뤄지면 대선 출마가 가능해진다. 최근 자기 정치에 열심인 정청래 대표도 도전 가능성이 높다. 만약에 이들 중에서 대통령이 나온다면 86세대는 4차 전성기를 맞을 전망이다.

    86세대는 민주화에 많은 기여를 했다. 반면에 악영향도 적지 않게 끼쳤다. 그 첫째는 협치 실종이다. 정치투쟁이 체질화된 그들로서는 당연한 일일지 모르겠지만, 문재인 정부 때도 이재명 정부에 들어서도 협치는 늘 뒷전이다. 문재인 정부 때에는 집권 기간 내내 여·야·정 상설 협의체를 거론했지만 제대로 가동된 적이 없다. 이재명 정부 들어서도 여야 민생경제협의체에 합의했지만, 아직 가동에 들어가지 못한 상태다.

    반면에 상대방을 몰아세우는 프레임을 개발하고 실행하는 데에는 언제나 열심이다. 여당일 때도 끊임이 없다. ‘공격이 최고의 수비’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이런 지적에 대해 그들은 이렇게 답한다. 

    “보수정당과 극우 세력이 끊임없이 공격해 오기 때문에 방어하지 않을 수 없다. 보수 기득권을 해체해야 개혁이 완수되기 때문에 멈출 수가 없다. 친일과 군사독재의 잔재를 해소하기에는 아직 가야 할 길이 멀다.”

    일견 타당해 보이지만 그렇지 않은 이유도 분명하다. 86세대만이 그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다음 세대 곧 MZ세대도 그 일을 물려받아 할 수 있다.

    둘째는 기득권 강화다. 고인 물은 썩는다. 그래서 과거 세대교체를 명분으로 내세워 동교동계를 밀어냈지만, 86세대의 기득권은 이미 동교동계의 그것을 넘어선 지 오래다. 앞서 언급했듯이 2024년 총선 당시 ‘86세대 청산론’이 불거졌지만, 그들은 그것을 버텨냈다. 일부 마음 약한 86세대 중진만 출마를 포기했을 뿐이다. 버텨낸 그들의 힘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주군으로부터 나왔다. 이재명 대통령을 주군으로 내세운 것이 생명 연장의 묘책이었던 셈이다. 그 판을 깔아준 인물은 친노계 좌장 곧 86세대의 대부 이해찬 전 국무총리였다.

    대의명분 실종되고 실리 추구만 남아

    셋째는 대의명분의 실종이다. 이 대통령을 주군으로 섬기기 전과 후에 그들이 달라졌다. 86세대가 지금껏 행동 지침으로 삼았던 대의명분을 버린 것이 달라진 점이다. ‘진보 이념 정체성을 지키겠다’는 건 그들의 오랜 대의명분이었다. 17대 국회 초선 시절 그들에게는 대의명분이 거의 전부였다. 그것이 과도해서 오히려 문제였다. 그들에게 ‘108번뇌’라는 별명이 붙은 이유이기도 했다. 당시 그들은 ‘개혁’을 입에 달고 살다시피 했다. 그것으로 노무현 전 대통령은 물론 당 지도부를 상시 압박했다.

    이제는 180도 바뀌어 ‘실리 추구’만 남은 형국이다. 문재인 정부 당시 미투 운동으로 기득권화가 논란이 됐을 때만 해도 그들은 수치심을 알았는데, 요즘에는 그조차 발견하기 어렵다. 최근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장인 최민희 민주당 의원이 딸 결혼식 축의금 논란에 휩싸였다. 관련 보도가 쏟아지는 와중에 최 의원은 이런 글을 자신의 SNS에 올렸다.

    “악의적 허위 조작 정보는 사회적 가치관을 병들게 하는 암세포라고 생각했다.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효과가 없었다. 결론은 하나, 우리가 판단력을 잃지 않는 것이 핵심이다. 허위 조작 정보에 휘둘리지 않도록 우리가 깨어 있어야 한다. 다시 노무현 정신으로 무장할 때다.” 

    이 글에 대해 노무현 전 대통령 사위 곽상언 민주당 의원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타인의 이익과 공동체의 가치를 해하는 것은 노무현 정신이 아니다”고 정면으로 맞받아쳤다.

    최민희 의원처럼 다른 86세대 정치인들도 노무현 정신을 금과옥조(金科玉條)로 여긴다. 그때 그 시절 곧 열린우리당 초선의원 시절의 대의명분을 잊지 말자는 결의일 것이다. 하지만 최 의원의 현재 인식은 그때의 그것과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 대의명분보다는 실리 추구로 우선순위가 바뀐 상태로 볼 수밖에 없다. 최 의원은 당내외의 위원장직 사퇴 요구도 거부했다. 17대 국회 시절이었으면 어땠을까. 도저히 그만두지 않고는 못 배겼을 것이다.

    그들이 초선의원 시절 개혁을 부르짖을 때는 그래도 신선함이 살아 있었다. 반면에 여전히 개혁을 입에 달고 사는 것을 보면 피로감만 밀려온다. 개혁에 진심이라기보다는 개혁을 자기들의 정치생명 연장에 활용할 뿐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그 개혁이 정말 필요한 것이고 실효성이 있는 것인지도 이제는 의문이다.

    1993년 문민정부가 들어선 이후 개혁을 외친 세월만 30여 년이다. 그사이에 진보 정권만 3차례 거쳤다. 김대중 정부 시절 과거사진실규명위원회를 시작으로 노무현 정부 시절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를 거쳐 문재인 정부 시절 적폐청산위원회까지, 진보 정권 때마다 과거사를 다시 파헤치고 개혁을 명분으로 인적 청산까지 단행해 왔다. 검찰개혁과 사법개혁 그리고 정치개혁도 거듭 추진해 왔다.

    그런 개혁 덕분에 윤석열 전 대통령의 12·3비상계엄이 실패로 끝났고 탄핵까지 했지만, 그들은 여전히 부족하다고 목청을 높인다. 이재명 정부 들어 추진 중인 사법개혁이 결국 이재명 대통령의 사법리스크 해소 아니냐는 지적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문재인 정부 시절 이뤄진 검·경 수사권 분리와 고위공직자법죄수사처 설치에 부작용이 발견됐지만, 기어이 검찰청 해체를 결정하고 말았다. 이 때문에 서민의 기본권이 침해될 것이라는 지적도 외면했다. 그러면서도 다른 한편에서는 검찰로 하여금 대장동 재판 항소를 포기하도록 해 논란이다.

    이런 정도면 이제 86세대도 효용을 다한 것이 아닐까 한다. 초심도 잃었고, 노욕만 남은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사실 지난 총선이 그들에게는 박수받으며 떠날 좋은 기회였다. 하지만 그들은 명예로운 퇴진 대신에 끝까지 버티는 쪽을 선택했다. 이 때문에 민주당은 세대교체 타이밍을 놓쳤다. 이것은 장기적으로 민주당에 악재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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