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한국에서 중·고등학교 영어교사 생활을 하면서 우리나라 영어교육의 문제점들을 통감한 후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미국에서 배우고 가르쳐온 ‘모국어로서의’ 영어학습 지도법을 ‘외국어로서의’ 영어학습 지도법에 도입하고 접목하는 데에 성공했다.
한국에서 태어나 30년을 살았던 내가 미국에서 초·중등학교의 미국인 학생들과 장차 영어 교사가 될 대학생들에게 영어 가르치는 방법을 지도한다면 쉽사리 믿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그것을 해낸 사람이다. 물론 그 과정은 지극히 어려웠다. 저절로 된 것은 아니다. 그렇게 되기까지 내가 공부한 과정을 돌이켜보면, 지금 내가 주장하는 ‘Whole Language(총체적 언어학습법)’ 원리에 딱 들어맞는 바로 그 방법이었다. 다시 말해서 내가 미국에서 원어민을 상대로 영어를 가르치기까지는 총체적 언어습득 방법을 실천했던 길고 외로운 여정이었다.
사실 우리나라만큼 영어공부에 열심인 나라도 드물다. 나라 전체가 영어공부 신드롬에 걸려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 같다. 그러나 그토록 열심히 한다는 영어 공부의 결과는 어떠한가? 대체로 부정적인 대답을 피할 수 없다.
우리는 영어를 왜 배우려고 하는가? 대답은 오직 하나, 영어를 사용하기 위해서다. 사용할 필요가 없는 언어는 배울 필요도 없다. 그런데 의사소통에 지장이 없는 수준으로 영어를 듣고 말하고 읽고 쓸 수 있는 한국인이 과연 얼마나 될까? 아마도 극소수에 불과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한국의 영어교육이 책임져야 할 부분이 아닐 수 없다. 그토록 수많은 한국인이 영어 공부에 긴 세월을 보냈으면서도 보잘것없는 결과를 나무라는 목소리만 요란했을 뿐 영어습득 과정의 잘못을 지적하고 올바른 영어학습 방법을 제시한 예는 드물었다.
진단과 해법 ① ‘따로따로 현상‘을 깨라
영어를 듣기 따로, 말하기 따로, 단어 따로, 읽기 따로, 글쓰기 따로 학습하는 ‘따로따로 현상’이 질병이라는 것이 나의 첫째 진단이다. 언어란 결코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통합체다. 듣고 말하고 읽고 쓰는 언어의 네 가지 기능은 표현 양식만 다를 뿐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다. 달리 말하면 이 네 가지 기능이 서로 맞물려서 도울 적에 언어학습에 놀라운 발전을 기대할 수 있다. 말하기를 익히기 위해서 회화책을 한 권 사서 혼자서 공부하려고 해도 사람들끼리 사교적 교제(social interaction)가 없다면 언어기능의 발휘 수준(functional level)에 도달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1978년에 프롬킨(Fromkin)과 로드맨(Rodman)이 발표한 연구결과는 바로 이와 같은 사실을 웅변하고 있다. 영어가 모국어인 제니(Genie)라는 소녀는 불행히도 어린 시절에 주변과 격리돼 다른 사람들과 접촉할 수 없는 방에서 보냈다. 지능지수도 높은 편이었으나 나이가 들어서 모국어인 영어를 집중적으로 지도받았지만 끝내 자주적인 삶을 영위하는 데에 필요한 수준의 말하기 능력을 가질 수는 없었다는 것이다. 영어가 모국어인 사회에서 있었던 이 실화는 무엇을 말해주고 있을까?
외국어인 영어를 배우는 한국의 학습자들에게도 이 사례는 큰 교훈이 될 수 있다. 한국에서 영어교육을 담당하는 사람들과 학습자들은 영어는 ‘실제로 사용함으로써’ 완전히 배울 수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달아야 한다. 책 속에 담긴 내용을 이해하고 많이 외운다고 해도 그것을 언어로 사용하지 않으면 의사소통 수단으로서의 언어 습득은 불가능하다. 듣기 능력만 있고 말하기 능력이 없으면 벙어리와 같다. 영어 읽기와 글쓰기 능력이 없다면 영어권 사회에서 ‘질 높은 삶’을 영위할 수 없다.
한국에서 영어교육을 받은 사람 중에는 영어를 읽고 한국어로 번역하는 데에 능통한 사람이 많다. 그 사람들은 남이 쓴 영어를 받아 먹는 데에는 수준급 능력을 지녔으면서도 영어를 말로 사용하거나(회화) 글로 표현하는(편지, 공문서 등등) 데에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취약한 경우가 많다. 바로 이런 사실이 한국의 영어교육이 만들어낸 결과인 것이다. ‘받아 먹는’ 영어와 ‘생산할 수 있는’ 영어의 능력을 동시에 길러줄 수 있는 방법을 우리는 하루 속히 찾아야 한다.
자기 수준에 적당한 영어 글을 읽고 이해한 후, 그 글이 담고 있는 내용에 관해 이야기를 나눈다. 서툴러도 좋으니 용기를 내 영어로 이야기해야 한다. 상대방이 자기보다 영어사용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라면 더욱 좋다.
서투르나마 이야기가 끝나면 다시 글로 써보는 작업에 들어간다. 서툴러도 좋으니 글을 읽은 후에 독후감을 영어로 써보라는 것이다. 그 뒤에는 자기를 지도해줄 능력이 있는 사람을 찾아가 자기가 쓴 영어 문장을 다듬는다. 이렇게 할 때 진정한 문법실력이 습득될 수 있다는 것도 명심하라. 이 방법으로 하면 영어 듣기와 말하기, 읽기, 글쓰기가 한꺼번에 가능해진다.
진단과 해법 ② 문법은 그때그때 습득하면 된다
많은 한국인이 영문법 때문에 우리의 영어교육이 이 지경에 이르렀다고들 야단이다. 이렇듯 잘못의 원인을 ‘문법’에 두는 엄청난 착각도 한국의 영어교육을 좀먹고 있다. 진짜 주범은 문법이 아니라 ‘문법을 가르치는 방법’이라는 점을 명심하자. 주범은 따로 두고 억울한 문법만 탓해서는 우리 영어교육의 장래는 어둡기만 할 것이다.
이 세상에 문법이 없는 언어가 가능할까? 언어의 교통을 질서정연하게 해주는, 없어서는 안 될 규칙이 바로 문법이다. 문법이 있기에 인간은 일정한 규칙을 따라 자기 의사를 전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언어는 규칙이 통제하는(Rule-governed) 의사소통 수단이라고 하지 않는가.
품사 이름이며 문법 용어는 들어본 적도 없는 어린 아이들이 자기 모국어를 그토록 잘 사용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진짜 문법이 그들의 언어창고 속에 들어 있기 때문이다. 문법 용어는 문법 그 자체와는 상관이 없다. 다만 편의를 위해 붙인 이름에 불과할 뿐이다. 아이들은 그들 귀에 끊임없이 들어오는 모국어의 언어환경 속에서 이름(품사 이름, 문법용어)이 필요없는 진짜 문법을 조용히 주워 담는 것이다.
이는 문법을 지도하고 학습하는 올바른 방법을 암시하고 있다. 신문·잡지의 기사나 동화, 소설, 시, 정보문헌 등 텍스트를 읽고 독해를 하는 과정에, 꼭 필요한 문법을 ‘그때그때’ 지도하고 배우라는 것이다. 문법을 따로 공부하고, ‘문법을 위한 문법’식의 지도방법은 이제 그만둬야 한다. 문법이 있기에 의사소통에 지장이 없는 언어를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거듭 명심하자.
문법을 따로 공부하지 말고 재미있고 유익한 자료(동화, 소설, 신문, 잡지, 정보가 담긴 글)를 읽는 가운데 문법을 공부하라. 다시 말하면 영어로 된 글을 읽고 영어로 글을 쓰는 데에 필요한 문법을 그때그때 공부하라는 말이다. 이런 문법을 가리켜서 Grammar in Action 또는 Grammar in Context라고 한다. 문법은 영어를 사용하는 데 필요한 도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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