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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따귀…“너는 달라야 한다”

아버지의 따귀…“너는 달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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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동생 병환이 귓병을 앓아 군에 못 가는 것을 아시고 매우 섭섭해 하셨다. 병환은 지금 자영 택시를 운전하고 있다. 막내인 병도가 군 입대 신체검사를 받으러 갈 때 아버지는 군대에 갈 수 없다면 집에 와도 별 대우(待遇)가 없을 것이라고 선언을 하셨다. “대우가 없을 것”이란 아버지의 표현은 엄중한 경고였다. 병도는 신체검사장에서 “군에 못 가게 되면 나는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아버지에게 사람대접 못 받으니 재심해 주십시오”라고 사정사정하고, 별 쇼를 다한 끝에 겨우 갑종을 받아 왔다고 한다. 그는 육군 단기하사로 복무하였다.

아버지는 인천으로 장사하러 다니셨다. 어린 맘에도 아버지가 안 계시면 불안하였다. 그러나 잠결에 아버지가 돌아오신 것을 알면 마음이 푹 놓이고 안심이 돼 단잠을 잘 수 있었다. 그런 아버지는 회초리를 자주 드셨다. 한번은 꼼짝도 못하고 아버지의 회초리를 맞고 있는데, 어머니께서 “저 녀석은 도망칠 줄도 몰라” 하시는 것이었다. 그 다음부터는 부모님이 은근히 도망치기를 바라시는 줄 알고 회초리를 치기 시작하면 냅다 뛰어 도망쳤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한 해 전 어느 가을 날 아버지는 시제(時祭)를 지낸 다음 제상에 차렸던 과일을 동네 아이들에게 나누어주셨다. 제일 좋은 과일이 모두 동네 아이들 차지가 되면 내 것은 없다는 생각이 들어, 아이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드디어 내 차례가 되었다. 무엇을 주실까? 기대가 컸던 내가 아버지께 다가갔을 때 아버지는 그 큰 손으로 별안간 나의 따귀를 후려치시는 것이었다. 나는 풀밭에 나둥그러지고 말았다. “어디다 손을 내밀어? 다음-!”

그때의 그 창피함이란!

초등학교 저학년 때 가끔 동무들 집에서 자고 다음날 바로 학교로 가곤 했다. 어떤 때는 이틀 연속 같은 집에서 자기도 했다. “미리 알리고 왔으면 반찬 좀 더 마련할 걸”하는 동무 어머니 말씀 때문이었다. 그러나 둘째 날도 반찬은 마찬가지였다. 어린 아이가 그렇게 외박을 했건만 엄한 아버지는 찾지 않고 말씀도 없으셨다.



초등학교를 당진군 송악면에서, 중학교를 예산에서 다니고, 인천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아버지는 형·누이·동생 등 일곱 남매를 어머니(이점례)께 맡기시고 나 하나만 데리고 인천으로 나오셨다. 아이들을 다 가르칠 수 없으니 선별해서 교육시키겠다는 아버지의 방침에 따라 우선 내가 선발되었던 것이다. 형이 매우 섭섭해 했다. 다음으로는 동생 병구(현 해군 준장)와 막내인 병도(현재 금형공장 경영)가 선발되었다.

당신께서 딱히 말씀한 바는 없지만 교육받은 애들이 나머지 형제들을 도와줄 수 있지 않겠냐는 생각을 하셨던 것 같다. 요즘 말로 하면 거점 확보 전략이다. 동네의 아버지 친구 분들께서는 그러한 아버지의 결단력을 나중에 매우 부러워하셨다.

인천 숭의동에서 아버지와 같이 방 하나를 빌려 자취하며 고등학교 1학년을 다녔다. 아버지는 과자와 채소·과일을 리어카에 싣고 인근 동네의 가게를 돌아다니며 파셨다. 그런데 외상 장부는 만들지 않고, 거래 내역을 모두 외우시는 것이었다. 아버지의 머리가 굉장히 좋다고 느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께 맘속에 꽁하고 있던 것을 물어보았다. “어릴 적에 시제를 지내고 난 다음 과일을 나눠줄 때 왜 제 따귀를 때리셨어요?” 하고. 그리고 “동무네 집에서 자고 집에 들어오지 않아도 찾지 않으셨는데, 그것은 저에게 무관심했다는 뜻이 아닙니까?”라고.

아버지는 10여 년 전 일을 모두 기억하고 계셨다. “너는 다른 아이들과 달라야 하지 않아!”

그 말을 듣는 순간 망치로 머리통을 세게 얻어맞은 것 같았다. 아버지는 말씀을 이어나가셨다. “나는 네가 어디가 무얼 하더라도 크게 잘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네가 데리고 살 여자일 수도 있다”

우리 부자가 세 들어 살던 주인댁 최씨 아저씨네 큰딸이 숙명여대 1학년이었다. 아주 명랑하고 생기발랄한 학생이었다. 나는 그녀가 우울해 있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어느 날 아버지는 그녀가 나에게 반말하는 것을 들으신 모양이었다. 나는 고등학교 1학년이고 그녀는 대학생이니 나는 그녀의 반말을 아주 당연시했다.

그날 저녁상을 물린 다음 아버지께서 엄하게 말씀하셨다. “너, 주인집 딸이 아까 반말할 때 왜 가만히 있었느냐? 네가 그 여자를 데리고 살 수도 있는 건데, 어디다 반말을 하느냐고 따졌어야 할 게 아니냐?”

나는 아버지의 말씀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내가 데리고 살 수도 있는 여자라는 말씀은 엉뚱하다고 생각했다. 세월이 지나 세상 이치를 조금 알 때까지도 아버지의 말씀은 안개 속에 있었다. 어리석은 연작(燕雀)은 대붕(大鵬)의 뜻을 몰랐던 것이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숭의동 생활을 끝내고 수도국(水道局) 산 근처로 이사를 갔다. 그때도 자취를 했고 가난하기는 매일반이었다. 하지만 나는 궁색한 것은 크게 느끼지 못했다.

어느 날 아버지께서 배다리시장에 가서 흰 고무신을 사오라고 하셨다. 말씀대로 했는데 그 고무신이 아버지 발에 조금 작았다. 아버지는 바꿔오라고 하셨다. 나는 갔다 오기 싫은 생각에 “좀 신으시면 늘어날 텐데요”라고 대꾸했다. 그 순간 아버지는 정색을 하시더니 “나는 네 일이라면 지구라도 한 바퀴 돌 텐데…”라고 하셨다. 또 한번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은 울림이 왔다. 아아, 아버지, 아버지….

그렇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해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 아버지는 내가 소위로 임관한 후 10여 년간 집안 생활비를 보탠 것을 매우 안쓰러워하셨다. 내 결혼이 늦어진 것이 그 때문이라고 여기셨다. 사실은 그게 아닌데…. 배를 타고 두어 달씩 출동을 나갔다 오고, 외국으로 두 번 유학을 다녀오느라 여자를 사귈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시곤 했다. “얘, 너는 지금 하늘이 와르르 쏟아져도 한쪽 손으로 떡 받치고 살 수 있을 것 같지? 그런데 그게 아녀, 성인(聖人)도 시속(時俗)을 따르라고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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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병태 < 전 해군 참모총장·한국해양전략문제연구소 상임고문(현) > ptan@unte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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