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수리. 경기도 파주시 장단면 장단반도 일대는 겨울 철새 독수리의 별천지다. 면적 35㎢의 개활지인 이 곳에선 200여 마리의 독수리가 겨울나기에 한창이다. 임진강 강바람에 춤추는 무성한 갈대밭에 새까맣게 몰려앉아 먹이를 뜯는 놈들, 나지막한 나뭇가지에서 조는 듯 꼼짝 않고 볕을 즐기는 놈, 창공을 유유히 활공하며 사위(四圍)를 경계하는 놈….
동물원의 그것과는 차원이 다른 야생 그대로의 독수리. 녀석들은 우리에 갇혀 더 이상 날지 못하는 가련한 동족(同族)의 존재를 알고나 있을까. 미국 국장(國章)의 독수리는 ‘자유의 새’를 의미한다. 그렇지만 ‘빵’대신 무한한 ‘자유’를 누리는 녀석들의 처지도 요즘 말로 ‘해피(happy)’한 것만은 아니다.
‘신동아’가 천연기념물 제243호(1973년 지정) 독수리를 찾아나선 까닭도 이와 무관치 않다. 최근 독수리들은 ‘수난사’를 써내려가는 중이다. 2002년 11월20∼21일 경기도 파주시 군내면 대성동 자유마을 앞 농경지에서 독수리 6마리가 숨지고 6마리가 위독한 상태로 발견됐다는 언론 보도를 시작으로, 독수리의 참변 소식은 줄을 잇고 있다. 이같은 참변은 지난 수년간 이어지며 ‘연례행사’로 굳어졌다.
어느 짐승에게나 겨울은 혹독한 계절. 그렇다 해도 먹이사슬 정점에 자리한 ‘하늘의 제왕’조차 맥없이 죽어나가는 현실을 아무런 의구심 없이 선뜻 받아들여야 할까. 독수리들이 죽음까지 감수하며 이 땅으로 찾아드는 까닭은 무엇인가. 대체 녀석들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걸까. 그들의 수난은 온전히 그들의 것에만 그칠까.
근원적인 질문 하나 더. 과연 우린 독수리를 얼마나 제대로 알고 있는가. 언뜻 떠오르는 독수리 이미지라고 해봐야 1980년대 초 방영돼 어린이들을 열광시킨 일본산(産) TV 애니메이션 ‘독수리 5형제’, 여름 별자리 중 하나인 ‘독수리자리’, 과거 바이마르공화국 국장(國章)에 그려진, 황금색 땅에 날개를 펼친 검은 독수리 따위가 고작 아닌가. 일련의 의문들로 해서 발길은 국내 최대 독수리 월동지, 장단반도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DMZ의 珍客
‘가는 날이 장날’이란 옛 속담은 대체로 맞다. 하필 올겨울 들어 가장 추운 날씨일까. 독수리를 찾아나선 2002년 12월10일. 문산기상대에 따르면 이날 파주 일대(문산 기준)의 최저 기온은 영하 13.9℃. 바람까지 강하게 불어 얼굴이 얼얼할 만큼 싸늘하다. 매운 날씨. 취재엔 지장이 없을까. 그나마 파주시 적성면 일대를 지나면서 심심찮게 눈에 띄는 독수리들을 한가닥 위안 삼았다.
낮 12시. 취재팀 승용차가 통일대교 남문 검문소로 들어서자 안내를 맡은 최주영 중위(24)가 뛰어나온다. DMZ(비무장지대) 접경지인 민통선 지역에 들어가려면 신분증을 맡기고 출입을 허가받는 이른바 ‘예통(豫通)’ 절차는 필수. 장단반도 출입은 관할 부대인 보병 제1사단이 관리한다.
중위가 동승한 뒤 검문소를 통과해 콘크리트 포장도로를 7∼8km쯤 지났을까. 임진강 강안(江岸)을 따라 죽 늘어선 철책과 마주한 6·25 당시 피탄지에 패목(牌木)이 박혀 있다. 패목 바로 뒤는 갈대와 잡풀로 둘러싸인 널찍하면서도 황량한 공터.
‘독수리 보호구역. 이 지역은 천연기념물 제243호인 독수리가 집단 서식하는 곳으로 문화재보호법에 따라 접근을 제한합니다.’
패목의 글귀를 읽어내려가는데 갑자기 역겨운 냄새가 강바람을 타고 진동한다. 필설로는 도저히 형언키 어려운, 묘한, 왠지 기분 나쁜 냄새. “동물 사체 썩는 냄새와 독수리 배설물 냄새가 뒤섞인 것”이라고 중위가 귀띔한다. 아무튼 난생 처음 맡는 지독한 냄새다.
바로 이 곳이 독수리들의 집단 월동지다. 화창한 겨울 햇살 아래 얼추 150여 마리는 족히 될 성싶은 독수리들이 몇 그룹으로 나뉘어 옹기종기 모여앉아 있다.
가만히 살펴보니 공터 한가운데엔 젖소와 돼지가 각각 한 마리씩 죽은 채 널부러져 있다. 배고픈 독수리들이 주위를 빙 둘러싸고 썩어가는 그 살점을 먹성 좋게 뜯어먹는 중이다. 차량 엔진음과 인기척을 충분히 알아챘을 법한데, 미동도 없다. 다행이다. 아직 식사시간이 끝나지 않은 듯하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다가갈 순 없는 일. 위장망(僞裝網)도 없이 직선거리 30m 이내까지 접근하면 독수리들은 ‘불청객’의 접근을 허용치 않고 비상(飛翔)할 게 뻔하다. 그러면 관찰이고 뭐고 말짱 도루묵이다. 어쩐다?
마침 독수리 관찰에 맞춤한 배수문이 하나 있다. 그 위에서 내려다보는 각도가 썩 좋다. 그런데…무척 춥다. 독수리 눈에 띄지 않으려 배수문 위 물탱크들 사이에 살그머니 웅크려 앉아보지만, 온몸 구석구석 파고드는 냉기에 한 시간도 버티기 힘들다.
도리 없다. 5∼6m 높이쯤 되는 빈 경계초소로 올라가 관찰하기로 했다. 독수리 보호구역(이하 보호구역)에서 50m쯤 떨어진 초소(몇 번 초소인지는 보안사항이므로 밝히지 않겠다)는 임진강에 면한 한 쪽 벽면이 완전히 개방돼 있어 안으로 여전히 강바람이 몰아친다. 그래도 아쉬운 대로 바람막이는 된다. 시계(視界)도 양호한 편이다.
그럼에도 독수리들의 동작을 세밀히 엿보긴 어렵다. 독수리들은 생김새가 온통 그놈이 그놈 같아 아예 분간이 안 된다. 독수리를 좀 안다는 사람들조차 암수 구별을 못할 정도라니 더 말해 무엇하랴. 난망한 심정으로 눈알 빠질 듯 독수리들만 노려보는데, 이번엔 까치란 놈이 초소 지붕을 무작정 쪼아대기 시작한다. 안에 ‘만물의 영장’이 있는데도 그러는 걸 보면 까치는 시쳇말로 ‘겁을 상실한’ 모양이다. 괘씸한 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