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창기 룸살롱에 대해 좀 설명해 주시죠.
“1970년대 중반, 주로 맥주를 팔던 술집을 살롱 또는 클럽이라 불렀습니다. 수준으로 따지면 요즘의 ‘쩜오(1.5, 즉 15%)’나 ‘20%’ 룸살롱 정도죠. 종업원 팁은 3000원 정도였고요. 룸살롱은 그 클럽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한 거였습니다. 1970년대 후반 양주가 도입된 것이 계기였죠. ‘밀폐된 공간에서 양주를 파는 것’이 당시나 지금이나 변함 없는 룸살롱의 기본 컨셉트입니다.
소공동에서 시작해 충무로로 옮겨갔는데, 손가락으로 꼽을 만큼 수가 적은 탓에 그야말로 고급, 고품격이었습니다. 가게당 10평이 채 안 되는 크기의 룸이 4~6개 있었어요. 여자종업원은 7~8명, 대개 대학생이나 무명 연예인, 모델 들이었습니다. 매너와 화술이 뛰어나지 않으면 예뻐도 받아주질 않았죠. ‘얼굴이 안 팔린다’는 장점 때문에 장안의 가난한 미녀들이 많이 모여들었습니다. 하이클래스 손님이 많아 분위기는 점잖은 편이었어요. 요즘의 ‘15%’나 ‘20%’ 같은 룸살롱은 그 때 없었습니다.”
-10%니 20%니 하는 것은 무얼 뜻합니까.
“이런 용어가 생긴 지는 5~6년쯤 됩니다. 나중에 다시 설명하겠지만, IMF 경제위기가 찾아오면서 1종 허가(유흥주점 허가) 규정이 완화됐고 이어 엄청나게 많은 수의 룸살롱이 새로 생겨났어요. 룸 수가 18~30개씩 되는 기업형도 다수 등장했죠. 마담, 아가씨, 밴드 할 것 없이 공급이 수요를 못 따라갔고 손님층이 다양해지면서, 가게마다 어떤 ‘등급’이 매겨지게 됐습니다. 기존의 고급 룸살롱 분위기를 충실히 고수하며 신뢰할 만한 단골 중심으로 영업을 하면 10%, 그보다 대중적이면서 이른바 ‘2차’(손님과 여종업원 간 매매춘)가 비교적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면 20%, 10%와 20%의 성격을 반반씩 갖고 있으면 ‘쩜오’ 하는 식으로요. 물론 이런 식의 등급을 결정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는 건 그 가게에서 일하는 마담들의 수준과 영업 스타일이죠.”
-룸살롱이 강남으로 옮겨가기 시작한 건 언제부터인가요.
“1980년, 그러니까 12·12 사태가 날 때쯤 국산양주 소비가 급격히 늘었습니다. 또 룸살롱에 가면 대우가 좋은 데다 아가씨들도 괜찮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손님이 크게 늘었지요. 이에 힘입어 한남동, 이태원 등지에 방 5~6개짜리 룸살롱들이 문을 열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이태원에 있는 카페들이 1982년쯤까지는 대부분 룸살롱이었어요.
1980년대 초 룸살롱의 근거지가 강남으로 옮겨간 건 자연스런 현상입니다. 그 지역을 중심으로 엄청난 부동산 붐이 일었잖아요. 룸 7~10개로 규모가 좀더 커졌으며 아가씨 수도 10명 내외에서 20명쯤으로 늘어났죠.”
공채 개그맨에서 ‘새끼마담’으로
-그때쯤 피미선씨는 어디에 몸담고 있었습니까.
“종업원이 아닌 가수이긴 했지만 유흥업소에서 오래 일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어느 정도 돈이 모이자 고속버스터미널 지하에 수입품가게를 차렸어요. 그런데 사실은 그게 다 미군 PX 물건을 빼다 파는 거거든요. 미군과 결혼했거나 동거중인 기지촌 여성들과 연을 맺을 수밖에 없어요. 예를 들어 30만원어치 물건이 필요하다, 그러면 아가씨들에게 60만원을 줘야 해요. 남는 30만원은 물건 빼다 주는 이의 몫이죠. 큰 돈 벌 수 있는 장사가 아니었습니다.”
가게를 하면서도 간혹 돈이 궁하면 가수 일을 했다. 그러는 새 대학을 졸업했고, 그 해 친구들의 권유로 MBC 개그맨 공채 1기 선발대회에 나가 덜컥 합격했다. 이경규씨 같은 이가 그 동기다.
“1년2개월 동안 방송국 생활을 했습니다. 1기 중 가장 주목받는 편이었죠. 그러다 보니 동료들에게 질시를 받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자존심 상하는 일도 자꾸 생겨, ‘결혼하마’ 그렇게 거짓말을 하곤 방송국을 그만뒀지요. 사실은 대학 시절부터 잠 못 자고 고생해 모은 돈으로 방배동에 카페를 열 요량이었는데, 그만 그 돈을 고스란히 다 날려버리고 말았어요. 계가 깨진 거였죠.”
-그래서 다시 업계로 돌아갔습니까.
“한 달여를 넋 나간 사람처럼 살았습니다. 당장 가족의 생계가 막연했거든요. 그 때 길에서 우연히, 이전 가수로 일할 때 알던 업소 전무 한 분을 만났어요. 그를 계기로 이 일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게 됐죠. 논현동의 한 룸살롱에 가수 겸 ‘새끼마담(보조마담)’으로 취직을 한 겁니다. 그렇게 피하고 싶던 물장사였는데…. 운명인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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