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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비 안 통하는 법정’ 꿈꾸는 전직 판사의 참회록

‘봉투’에 판결 팔고, 차 할부금은 변호사가…

‘로비 안 통하는 법정’ 꿈꾸는 전직 판사의 참회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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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이토 히로부미가 ‘순망치한(脣亡齒寒)’이라는 4자성어를 농락하며 조선 병탄(倂呑)을 정당화했듯, 우리의 사법부는 ‘법조의 세 수레바퀴는 하나’라고 그 동지적 유대성을 필요 이상으로 강조하며 자신의 부정과 부패를 가려왔다. 대개 이러한 유의 동질성 강조는 그 속에 음침한 함정을 품고 있는 법이다. 그래서 법조부정이 발생해도 서로 쉬쉬하면서 사건 유발자에게 은밀히 정보를 흘려 사표를 내도록 한 뒤 입을 싹 닦고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해왔다. 물론 그들에겐 그렇게 해나갈 분명한 이익의 공유가 있었다.

이 글을 쓰면서 ‘내게 과연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가’라는 생각을 해본다. 10년이라는 짧지 않은 판사생활 동안 접대골프나 기생방 출입에 찌든 적도 있었고, 돈 봉투도 여러 번 받았다. 사건에 직접 관계된 돈을 받지 않았노라고, 또 그런 잘못된 법조문화에 저항하며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했다며 호소하고 싶지만, 이 또한 알량한 자기변명임을 잘 안다. 훗날 변호사를 할 때는 어린 자식들을 생각하며 자존심을 굽히고 열심히 판·검사를 접대하기도 했다.

필자는 ‘자신이 몸담고 있는 곳의 비리를 고발한 판사’로 낙인찍혀 사법부에서 쫓겨난 뒤 변호사 사무실의 직원을 구하는 데조차 애를 먹고, 개업한 지 한 달이 지나도록 고작 한 건의 사건밖에 수임하지 못해 참담해했다. ‘이 모든 것이 어쩌면 판사로 있을 때 억울한 판결을 내린 나 자신의 업보 때문이 아닐까’라며 잠 못 이루고 뒤척이던 날이 그 얼마였던가. 하지만 아이들을 생각하면 그대로 주저앉을 수 없었다. 그 업보가 고스란히 아이들에게 미치게 할 수 없다는 절박감에 자존심이니 뭐니 하는 생각은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사법부의 변화를 갈망하는 글을 쓰는 이 자리에서 ‘적어도 나는 약정한 액수 이외의 수임료는 절대 받지 않는 변호사였다’ ‘사건과 직접 관련된 판·검사 접대는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는 따위의 변명을 하고 싶은 게 사실이다. 그러나 오십보, 백보다. 그런 부패구조와 완전히 단절하지 못한 책임은 전적으로 자신이 져야 한다는 사실을 필자는 너무나 잘 안다.

또한 갖은 악조건 속에서 훌륭한 판결을 내놓는 판사,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고 올바른 변호로 귀감이 되고 있는 변호사가 더 많다는 사실도 잘 안다. 필자는 언제나 그런 분들을 존경하며 사법부에서 같이 일하고 있음을 자랑스러워했다. 엄동설한에 난방도 제대로 안 되는 판사실에서 두꺼운 옷을 몇 벌씩 껴입고 세상일을 모두 잊은 채 오직 사건을 파악하고 판결문을 작성하는 데 심혈을 기울이던 판사도 지근에서 보았다. 세상에 저런 성자(聖者)가 다시 있을까 하고 탄복하던 기억이 새롭다. 비록 그 정도는 아니어도 열과 성을 다해 판사로서의 직분을 대과(大過) 없이 수행하기 위해 청춘을 바쳐온 많은 판사에게 필자가 지금 쓰는 이 글이 얼마나 불경스러운 것인 줄 잘 안다.



그러나 감히 부탁하자면, 이 글을 사법부에서 늘 말하는 “인격체계가 그릇된 자가 근거 없이 사법부의 ‘염결성(廉潔性)’을 해치는 행위” 따위로는 취급하지 말아 줬으면 한다. 필자 또한 사법부의 염결성 운운하는, 치솟아 오르는 감정을 이기지 못해 눈물을 흘려가며 사법부를 위한 항변을 늘어놓는 사람 못지않게 사법부에 애정을 품고 있다. 이런 사람들은 대체로 자신이 속한 조직을 보호하려는 맹목적·방어적 의식에 사로잡혀, 그렇게 하는 것만이 과거의 영화롭던 사법부를 다시 회복시키는 지고(至高)의 일이라는 착각에 빠져 있다.

사법개혁이 실패한 까닭

어느 부장검사가 판사, 검사, 변호사가 함께 모인 자리에서 이런 말로 건배를 제의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나는 내가 속한 조직의 이익을 위하여 언제라도 이 한 몸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그가 말한 조직은 진정한 검찰조직일까, 아니면 자신이 마음대로 생각해낸 왜곡된 마피아식 조직일까.

권위주의 정권이 해체되고 민주화의 열풍이 거세지며 사회 곳곳에서 상당부분 민주화의 결실이 주어졌다. 그러나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가 과연 ‘민주화된 사법부’를 가졌을까 하고 묻는다면 그 대답은 그리 긍정적이지 못하다.

일례를 들어보자. 지금껏 세계 여러 나라에서는 배심제(陪審制) 혹은 참심제(參審制)의 형태로 재판과정에 직업 법관뿐 아니라 일반 국민도 참여시키고 있다. 그런데 유독 한국에서만 재판과정에 국민의 참여가 배제되어왔다. 한국을 제외한 세계 모든 나라가 그렇게 해왔다면 거기에는 분명 그만한 근거가 있고 이유가 있지 않겠는가. 그런데도 우리 대법원은 2003년 상반기까지 ‘우리 국민은 아직 이를 도입할 만한 수준이 되지 못한다’는 투로 완강한 거부반응을 보였다. 이 얼마나 비민주적이고 오만불손한 자세인가.

과거 사법개혁을 주장하는 측에서 상투적으로 내건 슬로건은 ‘외부의 부당한 간섭 때문에 사법부의 독립이 훼손되어 왔으니 이를 시정함이 사법개혁의 본령’이라는 것이었다. 과연 이 말이 사실인가. 결과를 보자. 지금 사법부의 공정한 재판을 저해하고 부당한 지시를 할 만한 자가 있는가. 또 이들 때문에 이런 ‘파렴치한’ 일이 계속 발생하고 사법부가 국민으로부터 존경받지 못하는가. 그렇지 않다. 이는 또 다른 집단이기주의의 발로다. 사법부의 독립을 그런 식으로 해석해 사법부의 권한을 더욱 강화하려는 의도일 뿐이다. 여전히 ‘철밥통’을 누리며 과거에 가졌던 것 이상으로 더 가지며 살겠다는 혐오스러운 의식이다. 사법개혁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재판권이 국민의 이익을 위해 적정하게 행사되도록 조율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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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평 경북대 교수·헌법학, 변호사 lawshin@k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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