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여러 언론에서 인터뷰 요청을 해왔지만 안 했어요.”
김 목사는 짧게 언급한 뒤 침묵을 유지했다. 고심하는 듯했다. 식당에 도착해서도 그는 내내 말이 없었다.
반공강연 기수에서 목사로
그는 1970년대 반공강연의 기수였다. 정부의 요청으로 군부대, 학교 등 전국을 누비며 반공강연을 했다. 언론도 그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이 뉴스거리였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그는 언론에 많이 시달렸고 그 때문에 어려움도 겪어야 했다. 이름까지 바꾸고 조용히 살려고 했지만 언론은 그냥 놔두지를 않았다.
그런 경험이 있기에 그는 인터뷰 제의를 받아들이는 데 많이 망설였다. 점심을 같이 먹는 동안에도 내내 침묵을 지켰고, 기자의 시선을 피한 채 힘겹게 숟가락을 드는 듯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자니 기자를 떠나 한 인간으로서 마음이 무거워졌다.
‘방황하며 힘겹게 살다 하나님을 만나면서 평온하게 살게 됐는데, 이제 다시 언론에 그의 얘기를 쓴다는 게 마땅한 일인가.’
갈등 끝에 그에게 말했다.
“인터뷰 안 하셔도 괜찮습니다. 목사님 찾아뵙고 좋은 말씀 듣는 것만으로도 족합니다. 괜히 부담을 드려 죄송합니다.”
김 목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묵묵히 숟가락을 들었다. 그런데 식사가 끝나갈 때쯤, 정말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내 삶을 쓴다면 댐을 지을 때 기초공사도 하고 철근도 세우고 하듯, 출발부터 말해야겠죠. 이번 주는 도저히 시간을 못 낼 것 같고, 다음주 월요일에 시간을 내도록 하죠.”
김 목사는 고심을 거듭한 끝에 어렵게 결정을 내렸을 것이다.
“두 시간 정도 낼 수 있을 것 같은데, 괜찮나요? 질문 목록을 작성해서 시간 내에 끝낼 수 있도록 하죠.”
김 목사는 월요일 오후에 연락을 주겠다며 연락처를 적어달라고 했다. 그러나 당일 12시쯤 그에게서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 다음에 기회를 봐서 하자”는 연락이 왔다. 그 사이에 또 수없이 갈등한 듯했다. 그 고뇌가 목소리에 묻어났다.
아이들의 놀라운 변화
이후 한동안 김 목사와 연락하지 않고 뜸하게 지냈다. 왠지 어색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지난 8월2일 수요일, 다시 S교회를 찾았다. 신도들이 이날 수련회를 떠나서 그런지 교회는 텅 비어 있었다. 김 목사는 밀짚모자를 쓰고 제초작업을 하고 있었다. 영락없는 시골 농사꾼의 모습이었다. 그는 기자를 보자 “인터뷰 때문에 온 것이라면 아직 준비가 안 됐으니 그냥 돌아가라”고 했다. 그래서 “인터뷰 때문에 온 게 아니라 목사님을 뵙고 싶어서 왔다”고 하자 “그럼 예배나 드리고 가라”고 했다.
그가 풀을 뽑는 동안 예배당에서 땀을 식히며 김 목사의 부인 최정화 전도사에게서 그동안 살아온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다음 인터뷰 내용은 지난 4개월여간 김 목사를 만나며 그와 주고받은 이야기와 부인 최 전도사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토대로 쓴 것이다. 글에 나오는 연도는 김 목사가 태어난 1942년을 기준으로 환산해서 썼음을 밝혀둔다. 그는 “스물일곱 살 때…” “마흔 살 때…” 하는 식으로 이야기를 이어갔기 때문이다.
▼ 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 무척 바빠 보이는군요.
“평일에는 수요일 오전 10시, 목요일 오후 8시에 예배를 드리고, 일요일에는 오전 11시에 예배를 드려요. 월요일에는 서울에 있는 S교회에 나갑니다. 예배를 드리지 않는 시간에는 간증하러 다니고 있습니다. 참, 하나가 빠졌네요. 잠들기 전에는 꼭 서재에서 아내와 함께 기도하며 하루를 돌아보고 감사하는 시간을 가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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