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종만에 대한 인물기사가 실린 1937년 당시의 잡지.
“이번에도 틀린 것인가.”
1905년 약관의 나이에 청운의 꿈을 안고 고향을 떠난 지도 벌써 15년이 흘렀다. 한 해에 한 번꼴로 어김없이 맛본 실패였지만, 이처럼 무기력하게 당하기는 처음이었다. 지난해 강원도 양구의 중석 광산에서 실패하고 얼마 남지 않은 재산을 정리해 옮겨온 곳이 금강산 유점사 아랫마을이었다.
시세 변동도 크고 어디에 얼마나 묻혔는지 알 수 없는 광물을 찾아다니는 광업은 본질적으로 투기사업이 될 수밖에 없었다. 거듭된 실패에 지친 이종만은 안정적인 사업을 하고 싶어 금강산에 들어와 목재상을 차렸다. 금강산 일대에서 무진장으로 나오는 값싼 원목을 사서 철로 침목이나 광산 갱목으로 가공해 팔면 세 곱절은 족히 남았다. 일확천금을 바랄 만한 사업은 아니지만 그럭저럭 재기의 발판은 마련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재수 없는 사람은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던가. 이번엔 천재지변이 멀쩡한 사업을 송두리째 앗아갔다. 하구로 옮기기 위해 개천 옆에 쌓아둔 목재가 수마에 쓸려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
“차라리 화마(火魔)라도 맞았더라면, 숯이라도 건졌을 것을….”
이제는 정말로 빈털터리였다. 가슴속 깊은 곳에 품은 꿈을 이루기 위해 바다로, 산으로, 들로 악착같이 떠돈 15년 세월이 이종만에게 남긴 것은 감당하기 어려운 빚과 이마에 깊게 팬 주름, 손바닥에 단단하게 박인 굳은살이 전부였다. 이종만은 땅을 치며 통곡하고, 밤낮으로 술을 마시고, 운명을 저주하고, 심지어 고단한 인생을 끝내버리려 모진 마음도 먹어보았다. 그러나 원망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더구나 이대로 죽어버리기에는 가슴속에 품은 꿈과 피끓는 청춘이 너무나 아까웠다.
“어떡하긴 어떡해. 다시 시작해야지.”
이종만은 지난 15년간 언제나 그래왔던 것처럼 지나간 일에 대한 미련을 훌훌 털어버리고 살길을 찾아 나섰다. 한여름 찜통더위 속에서 수마가 할퀴고 간 금강산을 터벅터벅 내려가는 이종만에게는 다행히도 한 가지 밑천이 남아 있었다. 나빠지려 해도 더는 나빠질 것이 없는 상황이라는 점이었다.
작인에게 토지를!
1937년 5월12일, 경성 남산정(남산동) 천진루여관에서 대동광업(大同鑛業)주식회사의 창립을 알리는 기자회견이 열렸다. 천진루여관으로 향하는 기자들은 자본금 300만원(현재 가치로는 대략 3000억원), 광구 면적만 4억평에 달하는 거대 금광회사의 창립 기자회견이 조선호텔이나 철도호텔 같은 특급호텔이 아니라 허름한 일본식 여관에서 열리는 것을 의아하게 생각했다. 더욱이 새로 출범하는 대동광업의 대표취체역(대표이사)은 바로 전날 영평금광을 동조선(東朝鮮)광업주식회사에 155만원을 받고 매각해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금광왕 이종만이었다. 그러한 금광 졸부가 자신들을 허름한 여관으로 불러들이는 것은 사람을 대놓고 무시하는 것 아니냐는 게 기자들의 은근한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