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22년 명치정에 건립된 경성주식현물취인시장. 1932년 인천미두취인소와 합병돼 조선취인소로 이름이 바뀐다. 큰 사진은 조선취인소 주변풍경을 묘사한 ‘삼천리’ 1938년 8월호 ‘황금이 끓는 전시하 명치정 주식가’ 기사.
이듬해 1월 ‘ML(마르크스 레닌)당 사건’으로 7년형을 선고받은 형 김복진이 만기 출소했다. 김기진에게 조각가 김복진은 형이기 이전에 도쿄 유학 시절부터 프롤레타리아트 예술운동을 함께한 동지였다. 미술계와 문학계에서 막중한 영향력을 가진 형제였지만 일상으로 돌아오면 초라한 ‘전과자’와 ‘실업자’ 신세일 뿐이었다. 한 달 후, 근 1년간 집에 눌러앉아 빈둥거리던 김기진에게 ‘조선일보’ 서무부장으로 있다가 지난해 그와 함께 퇴사한 김웅권이 찾아왔다.
“이보게 팔봉(김기진의 아호), 3년 전 우리가 총독부 광산과에 출원한 평남 안주의 금광이 허가되었네. 출자할 친구도 한 사람 구해놓았으니 허구한 날 방구석에 틀어박혀 있을 게 아니라 안주로 내려가서 금광이나 하세. 그깟 신문 같은 것에 미련을 갖고 서울에 있느니보다 산골에 가서 노루 피나 먹는 것이 낫지 않겠나.”
김웅권의 동업 제의를 받은 김기진은 주저없이 승낙했다. 1934년 4월16일, 김기진과 김웅권 두 사람은 서울을 떠나 평남 안주의 궁벽한 산골로 떠났다. 금광으로 떠나는 찻간에서 김기진은 장차 산에서 큰 재수가 터지면 돈 백만원 움켜쥐고 보란 듯이 신문사를 하나 차리겠다는 행복한 꿈을 꾸었다.
금광에서 주식시장까지
일확천금의 꿈을 품고 금광으로 달려간 김기진은 낮이면 광부들과 어울려 금을 찾고 밤이면 소설 ‘청년 김옥균’을 써서 ‘동아일보’에 연재하는 고단한 일과를 보냈다. 조선에 프롤레타리아 문학을 소개한 작가가 금광을 하러 떠났다는 소식은 문단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켰다.
일찍이 김기진씨는 ‘개벽’지에 시대적 고뇌상을 담은 여러 편의 수필을 실어 독자의 주목을 받았다. 또한 ‘붉은 쥐’‘젊은 이상주의자의 사’ 등 새로운 형식과 내용을 담은 소설을 발표하고, 날카로운 필봉으로 문예월평을 쓰면서 문단의 중요한 평론가로서 대우받는 동시에 필자에게도 큰 감동을 주었다. 한 사람의 독자로서 또 문학청년으로서 김기진 씨를 만나고 싶던 차에 김기진 씨를 논하게 되니 외람된 생각도 나거니와, 그때 그와 같은 정열을 가지고 나섰던 선배가 금광으로 일확천금의 이상을 안고 출발하였다니 세사와 인심의변천에 새삼스럽게 무상함을 느끼게 되기도 한다. (민병휘, ‘김기진론’, ‘삼천리’ 1934년 9월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