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7년 9급으로 교도관 생활을 시작한 후 전국의 교도소를 돌아다닌 그는 “30년 교도관 생활 중 공안사범이 많던 1970∼80년대가 가장 힘든 시기였다”고 했다. “시국사범 혹은 공안사범이 하루도 안 빠지고 구속되어 들어오던 그 무렵, 다수인 그들이 소수인 교도관들을 압도하면서 ‘전쟁’ 같은 체험을 했다”는 것.
특히 1980∼87년에는 국가보안법, 반공법, 정치정화법, 사회보호법,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등으로 검거된 공안사범이 1만2000여 명에 달했다. 여기에다 노동관계법 위반 등으로 검거된 숫자까지 포함하면 박정희 정권 18년 동안보다 2.5배나 많은 인사가 구속됐다.
“4.5평 공간에 21명까지 수용했습니다. 수용자가 너무 많아서 서로 발을 마주치게 두 줄로 눕혀 칼잠을 재웠어요. 용변을 보고 오면 자기 자리가 없어져버렸죠.”
운동권과의 전쟁
▼ 공안사범은 주로 대학생들이었는데 교도관을 특별히 힘들게 할 까닭이 있었나요.
“선동에 앞장섰거든요. 그들이 소리를 질러대면 일반 재소자들도 덩달아 목소리를 높였어요. 교도관의 주업무인 교정, 교화엔 신경 쓸 여유가 없었습니다. 목청 높여 소리 지르고 단식투쟁을 하면 거기에만 매달려야 했으니까요. 단식을 하면 건강을 해치니 밥을 먹게끔 설득하는 것이 주임무였죠. 교도관이 방에 들어가서 같이 먹기도 했어요.”
▼ 여사동(女舍棟)에는 여대생들이 들어왔을 테니 다루기가 편했을 것 같은데요.
“더 극렬했어요. 오히려 남자 대학생들이 얌전했고, 여대생들은 막무가내였습니다. 칼로 손목을 긋는 건 흔한 일이었고요. 자해를 막으러 들어가면 온몸으로 저항했습니다. 교도관의 손목을 물어뜯기도 했고, 임신한 교도관의 배를 걷어차 유산시키기도 했어요. 그들에게야 눈에 보이는 적은 오직 우리뿐이었겠죠. 식기에다 온갖 오물을 담아놓았다가 교도관들이 지나가면 ‘독재정권의 똥개’라고 소리치면서 내던졌어요. 그래서 우의를 입고 점검을 다녀야 했죠.”
▼ 교도관들이 운동권 인사들을 보는 시각은 남다르겠군요.
“그 시절 우리가 그런 일을 겪은 줄 누가 알겠습니까. 시대의 비극이죠. 그들은 젊고 순수한 열정으로 나라를 위한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우리는 법을 집행하는 처지였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잖아요. 시대가 바뀌어 그들이 영웅시되고 있는데, 착잡해요. 더러 그 사람들이 ‘감옥에서 고생했다’고 하면 직접 부딪쳤던 우리는 답답합니다.”
최 과장은 “부모가 자식 뒷바라지하면서 투사가 되는 경우도 많았다”고 회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