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입학사정관 전형에 합격하려면 자기소개서와 면접 등을 통해 입학사정관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합니다. 능력 있는 컨설턴트는 단시간에 학생의 잠재력을 발견하고 이를 독창적으로 표현하는 방법을 찾아줄 수 있지요.”
서울 강남구 대치동에 있는 입학사정관제 전문 컨설팅업체 E사 관계자는 자신감에 넘쳐 보였다. 이곳에서는 요즘‘2010학년도 입학사정관 전형 합격을 위한 단기 컨설팅’수강생을 모집 중이다. 1회에 2시간씩 10회에 걸쳐 진행되는 프로그램 참가비는 350만원. 이 돈을 내면‘내공 있는 컨설턴트’와 일대일로 만나‘자신의 비전을 찾는 내비게이션 컨설팅(포트폴리오 방향 설계 및 주제 찾기, 성공 자서전 만들기)’, ‘입학사정관 전형에 맞춘 심층면접 컨설팅(프레젠테이션, 개별면접, 집단면접)’ 등을 받을 수 있다.
국내 대학 글로벌 전형과 해외 대학 진학 컨설팅을 주로 해온 대치동의 S컨설팅사도 최근 입학사정관제 전문 컨설팅을 시작했다. 적성검사 등을 통해 학생에게 가장 적합한 진로를 찾아주고, 입학사정관제를 위한 맞춤형 포트폴리오 제작, 경시대회 참가, 에세이 작성, 면접 준비 등을 도와준다. 이곳의 수강료는 1년에 700만원이 넘는다. 서울 종로구 적선동에 있는 G컨설팅사는 전문성을 내세운다. “입학사정관제에 완벽하게 대비하기 위해 전직 기업체 인사담당 임원, 면접 지침서 저자, 유명 논술학원장 등 베테랑 전문가를 영입했다”고 한다. 수강료는 과정에 따라 수십만원대부터 선택할 수 있다.
입학사정관제發 사교육 열풍
9월부터 시작되는 2010학년도 수시 모집을 앞두고 사교육 시장이 들썩이고 있다. 블루칩은 단연 입학사정관제다. ‘입학사정관 전형 대비’라는 이름만 붙이면 수강료가 천정부지로 뛰어오른다.
입학사정관제는 학생의 학과 성적뿐 아니라 잠재력과 성장가능성까지 종합적으로 판단해 합격자를 선발하는 전형 방식. 흔히 ‘미국식 입시제도’로 통한다. 경희대 과학인재특기자, 고려대 세계 선도인재, 동국대 자기추천 , 서강대 생활우수자, 서울대 기회균등 선발, 서울시립대 포텐셜 마니아, 성균관대 글로벌리더, 숙명여대 리더십특기자, 연세대 진리자유, 중앙대 다빈치형 인재 등의 전형이 이에 속한다.
입학사정관제는 2008학년도부터 일부 대학의 농어촌 전형 등에 시범적으로 도입됐지만, 선발 인원이 적어 큰 관심을 모으지 못했다. 최근 화제가 되는 이유는 올해 입시부터 관련 전형이 대폭 확대됐기 때문. 지난해 이 전형을 통해 163명을 뽑은 고려대가 인원을 1055명으로 늘린 것을 비롯해 연세대(571명→1377명) 중앙대(28명→1289명) KAIST(113명→1020명) 등 주요 대학이 대부분 전형 규모를 늘렸다. 2010학년도 입시에서 전국 대학이 입학사정관제를 통해 선발하는 인원은 2만690여 명으로, 지난해(4555명)의 4.5배가 넘는다.
이러한 성장세는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이명박 대통령이 7월 말 대국민 라디오 연설에서 “임기 말쯤이면 상당수 대학이 정원의 100% 가까이를 입학사정관을 통해 선발하게 될 것”이라고 언급하는 등 정부의 의지가 확고하기 때문이다. 교육과학기술부는 학생의 능력을 정량화된 수치(석차 혹은 점수)가 아니라 질적인 면(잠재력)으로 평가하는 입학사정관제가 정착되면 기존의 획일화된 서열 평가를 깨뜨려 공교육 강화에 기여할 것이라고 보고 있다. 그러나 교육 현장에서는 이런 기대를 무색케 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자의적이고 불투명한 제도”
서울 강남 학원가에는 “초·중생 때부터 체계적으로 입학사정관제에 대비할 수 있도록 돕는다”고 강조하는 학원까지 생겨나고 있다. 이들은 영어·수학 등 특정 과목을 지도하는 대신 ‘입시 컨설팅’을 한다. 성적이 낮은 학생들에게 각종 경시대회 참가와 봉사활동 등을 주선해 경력을 관리하도록 하고, 면접에 도움이 되도록 현직 CEO와의 만남을 주선하는 식이다. 입학사정관제의 판단 기준인 ‘학생의 잠재력과 가능성’은 이렇게 체계적인 방식으로 ‘준비’되고 ‘관리’된다.
“미국 대입제도 연구자인 제롬 카라벨은 입학사정관제의 특징을 자유재량(discretion)과 불투명성(opacity)이라는 두 단어로 설명했습니다. 자유재량은 대학의 입학담당자가 종합적인 판단을 통해 학생을 선발할 수 있음을 의미하고, 불투명성은 선발 과정의 속사정이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음을 뜻하지요. 이런 상황에서 사교육이 번성하는 건 당연한 일일 수도 있습니다.”
조상식 동국대 교육학과 교수의 설명이다. 우리나라 유명 대학들이 마련한 입학사정관 전형의 이름을 봐도 이 전형의 ‘자의적인’ 특징이 잘 드러난다. ‘세계 선도 인재’ ‘포텐셜 마니아’ ‘글로벌 리더’ ‘리더십 특기자’ ‘다빈치형 인재’ 같은 수식어는 하나같이 가치 판단의 대상이다. 객관적이고 정형화된 기준이 없는 만큼, 이를 판단할 때 ‘보이지 않는 손’이 개입할 여지가 많을 수밖에 없다.
박남기 광주교대 총장도 입학사정관제가 태생적인 문제점을 갖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에 따르면 1920년대 미국에 입학사정관제가 도입된 것은 동유럽에서 이주한 유대인의 합격 비율을 낮추기 위해서였다.
“‘비주류’ 계층인 유대인의 명문대 합격률이 높아지자 기존 주류 계층에서 이에 대한 방어책이 필요했어요. 이때부터 시험 성적 외에 성격, 사회적 배경, 스포츠 활동 등 다양한 기준으로 학생을 뽑는 전형이 생겨났지요. 1940년대에는 하버드·예일·프린스턴 등 미국의 명문대를 중심으로 기부금을 내는 동문의 자녀를 우대하는 특별전형도 만들어졌습니다.”
그럼에도 미국에서 입학사정관 전형이 유지된 이유는 입학사정관들이 전문성과 공공성을 쌓으며 ‘사회적인 신뢰’를 높여왔기 때문이다. 하버드대에는 35명의 입학사정관이 있다. 이들은 1년 내내 학생 선발 관련 업무만 맡는다. 지원서가 들어오면 각기 담당하는 지역 학생의 데이터를 살피고, 고교 성적, SAT 점수, 과외 활동, 리더십, 추천서 등을 검토해 요약한 뒤 1차 대상을 선발한다. 이 자료를 다른 사정관들이 살펴서 2차 선발자를 뽑는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이렇게 세 단계를 거치는 동안 지원자의 7%만 남는다. 이후에는 입학사정관 35명이 한 자리에 모여 난상 토론을 벌이는 순서다. 각자 뽑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학생의 데이터를 발표하면, 나머지 사정관이 의견을 밝힌다. 전체 사정관 가운데 12명 이상이 찬성하는 학생이 신입생으로 선발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