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을 기초로 앞의 인용문을 살펴보자. 이 인용에는, ‘주자학을 신봉하는’ 송시열이 ‘주자학과 다른 경전 해석을’ 했던 윤휴를 ‘이단’이자 ‘사문난적’으로 몰아서 귀양 보내고 사약을 내려 죽게 했다는 인식이 담겨 있다. 그리고 이는 학계의 매우 일반적인 통념이기도 하다. 이러한 통념에는 주자학(=성리학)과 견해가 다르면 좋은 나라 사람, 같으면 나쁜 나라 사람이라는 식민주의 콤플렉스 이데올로기가 담겨 있다. 내가 쓰는 학술용어로는 ‘콩쥐팥쥐론’이다.
성리학과 ‘다른’ 해석을 한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 ‘다른 해석’이 ‘왜’ 그 사회에 기존 학설들보다 더 기여할 수 있는지를 물어야 한다. 그런데 조선시대 사상사 연구에서는 그게 빠져 있다. 성리학과 다른 해석이라는 것만으로도 용서가 된다. 희한한 학문 풍조가 아닐 수 없다. 기실 간단한 몇 가지 사실만으로도 윤휴는 송시열보다 퇴행적이고 과격하다.(나의 책, ‘조선의 힘’, 오래된 미래, 조선성리학 참고) 그런데도 주자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윤휴는 좋은 나라 사람이 됐다. 앞으로 더 논의를 거치더라도, 그 논의가 진전을 보기 위해서는 적어도 그동안 조선 사상사를 보는 우리의 ‘태도’만은 고쳐야 한다. 그러기 전에는 학문 같지 않은 논의를 학문의 탈을 쓰고 계속하는 셈이 될 터이므로.
진실
윤휴는 사약을 받았다. 그러나 윤휴는 주자 주석과 다른 해석을 저술한 탓에 귀양을 가고 사약을 받은 것이 아니다. 윤휴의 ‘중용신주(中庸新注)’에 대해 사문난적이라는 송시열의 비판은 효종 4년(1653)경에도 있었다. 그런데 숙종이 즉위하고 서인이 실각한 뒤 남인 정권에서 윤휴가 우참찬(右參贊)으로 있다가 귀양을 간 것은 다른 이유에서였다. 후사(後嗣)가 없던 숙종이 건강이 악화되자 조정에서는 병권을 둘러싸고 김석주(金錫胄) 등 외척과 허적(許積) 등 정권을 잡고 있던 남인들의 대립이 치열했다.
윤휴는 체찰부(體察府)를 다시 설립해 허적이 당연직으로 도체찰사를 맡고, 자신이 부체찰사를 맡으려고 했다. 남인 중심으로 병권을 잡으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를 안 숙종은 김석주를 부체찰사에 임명했다. 윤휴는 항의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후일 이 사건이 사사(賜死)되는 이유가 된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숙종의 어머니인 명성왕후를 관리, 단속하라는 말이 위의 행위와 연결돼 숙종의 버림을 받았던 것이다.
거듭 말하거니와, 조선시대에 ‘주자의 주석에 손을 댔다 하여 사람을 죽이고 귀양을 보내는 야만적 행태’는 없었다! 이런 기초적인 사실조차 확인하지 않고 쓰는 행태야말로 야만적이다. 아! 이 기가 막히는 역설! 안타깝게도 조선 사상계에 대한 식민주의 이데올로기적 접근으로 실제 사상계의 현실에 대해서는 눈을 감고 오히려 자신들의 편협한 편견으로 도배했다. 단지 앵무새처럼 ‘정통과 이단’‘사문난적’이라는 스테레오타입의 반복을 학문의 이름으로 포장했을 뿐이다. 그래서 남은 것은 사실의 왜곡과 오해, 그리고 답답한 편견뿐이었다.
비판

파리의 에펠탑. 에펠탑은 1889년 파리 박람회가 보여준 문명과 야만의 질서를 공간화한 것이다.
15세기 이탈리아의 로렌초 발라는 그 문서에 의심을 품었다. 콘스탄티누스의 치세에 관해 기록한 사람들 중 왜 아무도 그가 나병에 걸렸다는 사실이나 그 기증을 언급하지 않았을까? 왜 그 문서에 훨씬 후대에 만들어진 용어가 사용된 걸까? 왜 9세기까지 누구도 그 문서를 인용하지 않았을까? 왜 그 문서에는 여러 가지 역사적 오류가 있을까? 결국 발라는 문서의 내용이 실제의 역사적 사건과 무관하고 콘스탄티누스 시대에 작성된 것이 아니라고 추론했다. 그리고 그의 견해는 훗날 공인됐다.
위조
하지만 이런 의심이 언제나 통하는 것은 아니다. 이상한 동양학자 에드먼드 백하우스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가 1944년에 죽은 뒤 30년이 지나 그의 회고록이 발견됐고, 이는 옥스퍼드대학 보들리언 도서관에 기증됐다. 그 회고록이 다소 외설적이라는 평이 있어 트레버-로퍼에게 분석을 의뢰했다. 그런데 백하우스는 특별한 재능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위조자(僞造者)라는 것이 밝혀졌다. 그는 중요 문헌을 정교하게 위조했고, 중국 문헌 자체도 엉터리였다(Trevor-Roper, H. R., Hermit of Peking - The Hidden Life of Sir Edmund Backhouse, Dufour Editions, 1993년, 남경태 역, 앞의 책, 재인용).
트레버-로퍼는 백하우스가 이런 짓을 저지른 이유, 즉 왜 회고록까지 꾸며내면서 사기극을 벌였는지 고민했다. 그의 결론은 이러했다.
“그에게 역사는 학문도 아니고 세상을 이해하는 수단도 아니었다. 보상심리의 대상이자 세상을 회피하는 수단이었다.”
그런데 6년 뒤 트레버-로퍼 교수는 논쟁이 된 역사기록을 만났다. 1983년 독일 잡지 ‘슈테른(Stern)’에 새로 발견됐다는 아돌프 히틀러의 일기를 발췌한 기사가 실렸다. 경험이 풍부했던 트레버-로퍼는 일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하나의 문헌이든 이런 문헌이든 서명은 쉽게 위조할 수 있다. 그러나 35년에 달하는 기간에 대해 일관성 있는 기록을 조작하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다. 비평가들은 틀림없이 공격을 가하겠지만 이런 문헌을 작성한 엄청난 노력은 쉽게 부정될 수 없다. 그 기록물은 사실 개별적으로 검증이 가능한 문서의 집합일 뿐만 아니라 전체로서 일관성을 가진다. 일기는 그 일부분에 불과하다. 그것이 그 문헌을 신뢰할 수 있는 내적 증거이다.”
그러나 결국 이 일기는 위조임이 밝혀졌다. 트레버-로퍼 같은 명성이 높고 이론적으로 무장된 역사학자마저 사기극에 말려들었던 것이다. 논문을 쓸 때 1차 사료의 진위를 따질 경우는 거의 없겠지만, 회의(懷疑)의 중요성은 강조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