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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것과 새것 섞어 신문명 일군 융합의 땅

콘스탄티누스의 도시 콘스탄티노플

옛것과 새것 섞어 신문명 일군 융합의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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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것과 새것 섞어 신문명 일군 융합의 땅

콘스탄티누스의 대리석 두상.

콘스탄티누스는 옛 비잔티움의 경계에 있는 밀리온 자리에서 새로운 시가지가 뻗어나가는 지점에 원형 광장을 만들고 중앙에 테베의 돌로 거대한 자신의 기념주(지금은 불탄 채 남아 있는)를 세웠다. 이 기념주 맨 꼭대기엔 프리기아에서 가져온 아폴론 신상의 몸통에 자신의 두상을 붙인 동상을 세워 도시 전체를 내려다보게 했다. 도시 어디서나 보이는 높은 언덕에 세워진 거대한 기념주 위의 동상은 콘스탄티누스가 새로운 로마를 건설한 확고한 중심이며 세계에 평화와 질서를 가져다준 구원자라고 웅변한다. 콘스탄티노플은 옛 로마의 중심 상징과 도시 구조를 모방한 새로운 로마지만, 콘스탄티누스의 정치적 비전과 구상을 주요 건축물에 형상화한, 철저하게 계획된 도시였다.

콘스탄티누스의 관용령에 따라 박해받는 소수종교에서 황제의 후원을 받는 종교로 격상된 그리스도교는 콘스탄티노플의 새로운 지형을 만들어냈다. 콘스탄티누스의 정치적 구상과 그리스도교의 역사적 조우는 건축물, 상징물을 배치하는 방식에 점진적 변화를 야기했다. 이를테면 로마와도 예루살렘과도 다른 비잔틴 제국의 특징을 담은 모델이 모호한 형태로나마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4세기의 콘스탄티노플은 극적으로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대제가 로마가 상징하는 이교(異敎)와 절연하고 세운 그리스도교식 도시는 아니었다. 그리스도교 교부가 윤색한 이야기에 따르면, 결전을 앞두고 하늘에서(혹은 꿈에서) 본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문자를 신의 계시로 받아들인 콘스탄티누스는 밀비우스 다리 전투에서 그 문자를 수놓은 라바룸 군기를 앞세워 정적 막센티우스를 물리친 후 그리스도교에 자유와 평화를 가져다줬으며, 승리에 대한 감사로 콘스탄티노플을 세워 그리스도교의 신에게 봉헌했다.

그러나 좀 더 객관적인 사료에 기대는 많은 역사가는 콘스탄티누스의 소명과 환시, 종교적 순수성에 의혹을 제기할 뿐 아니라 새 수도 창건의 그리스도교적 의미에 대해서도 회의적이다. 콘스탄티누스와 그리스도교의 관계, 그가 세운 콘스탄티노플의 성격에 대한 평가는 각양각색이다. 개종 이후에도 그가 종교적으로 애매한 태도를 보였음을 입증하는 자료 또한 적지 않다. 개종 동기와 신심(信心)의 진정성을 놓고 서로 엇갈리는 주장이 맞선다. 제국 통합을 위한 전략적 선택, 아들과 혈족 살해에 대한 양심의 가책, 신의 소명에 사로잡힌 자의 종교적 과대망상 등 개종을 놓고 다양한 내외적 동기가 추론돼왔다. 그만큼 콘스탄티누스는 복합적 면모를 지닌 인물로 보인다.

박물관 같은 도시



콘스탄티누스가 밀라노 칙령 이후 그간 몰수한 교회 재산을 되돌려주고 성직자 세금 면제, 막대한 기부 등 특혜를 제공하며 친(親)그리스도교 정책을 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여러 사료와 고고학적 증거를 볼 때 그가 온갖 형태의 이교를 근절했으며 이교와 관련한 관습조차 용인하지 않았다는 일부 그리스도교 교부의 서술은 사뭇 그들의 소망이 투영된 것으로 보인다. 그가 자주색 황제 옷을 벗고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인으로서 흰옷을 입은 것은 임종에 이르러서였다.

콘스탄티노플의 기공식 및 준공식 때도 명시적으로 그리스도교가 언급되지 않았다. 즉위 25주년을 기념해 40일간 열린 축제와 함께 성대하게 거행한 콘스탄티노플의 준공식 때는 금박을 입힌 대제의 거대한 목상이 거리 행렬의 중심에 서 있었는데, 목상의 손에는 도시의 수호신인 튀케 여신의 작은 신상이 들려 있었다. 로마 종교의 전통적인 유혈 희생제의는 제거됐지만, 이교의 의식과 황제를 숭배하는 의례는 그대로 재현된 것.

다만 축제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콘스탄티누스가 성 에이레네 교회의 미사에서 새로운 도시 콘스탄티노플을 공식적으로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했다. 그리스도교 신앙을 명시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기공식 때는 이와 비슷한 의식이 없었다.

흥미로운 것은 제국의 이 새로운 수도가 마리아에게 봉헌되는 준공식 때 튀케 여신이 수호신으로 간주된 대목이다. 다른 신들의 신전이 전격적으로 폐쇄될 때도 튀케의 신전은 콘스탄티노플에서 예외적으로 건재했다. 나중에 ‘테오토코스’(하느님의 어머니) 논쟁을 낳은 마리아 숭배가 이 지역의 전통적 여신 숭배와 교감한 것은 아니었을까 추측해볼 수 있다.

이렇듯 콘스탄티노플은 단지 그리스도교의 이상에 따라 세워진 도시도, 전통적 로마를 답습한 도시도 아니었다. 콘스탄티노플은 그리스도교와 그리스, 로마의 고대 문명이 남긴 유산이 후기 로마제국의 격변 속에서 서로 공존하고 하나로 통합돼 새로운 문명을 일으키는 요람 구실을 했다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콘스탄티노플의 준공식 때 수도를 마리아에게 봉헌한 것처럼 그러한 통합의 구도 속에는 이교와 그리스도교의 위치가 역전되는 조짐이 엿보였다. 이와 관련해 두 가지 사안에 주목할 만하다.

첫째는 콘스탄티노플의 거대한 공공장소가 제국의 여러 도시에서 가져온 진귀한 기념물로 화려하게 장식됐다는 것이다. 콘스탄티노플은 각 지역의 문화재로 가득한 거대한 박물관 같은 모습이었다. 히포드롬에 있었으나 현재는 베네치아의 산 마르코 성당에 있는 대형 청동 말들이나 테오도시우스의 오벨리스크 뒤에 있는 세 마리 청동 뱀 기둥은 현존하는 유물 중 단연 눈에 띄는 사례다.

청동 뱀 기둥은 본래 기원전 479년 플라테이아 전투에서 그리스 도시국가 연합이 페르시아에 승전한 것을 기념해 델피의 아폴론 신전 앞에 세웠는데, 콘스탄티누스가 330년 청동 말들과 함께 콘스탄티노플의 광장으로 옮겨왔다. 그리스도교 교부 히에로니무스는 “콘스탄티노플이 등장하자 모든 도시가 발가벗겨졌다”고 독설을 퍼부었다. 고대 종교의 힘이 깃든 성물을 신도시의 새로운 공간에 재배치한 콘스탄티노플의 도시 풍경은 후대에 점진적으로 진행될 그리스도교의 제국종교화와 이교의 쇠퇴를 예시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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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연희 | 서울대 강사·종교학 chjang120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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