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기도 구리시 자택에서 인터뷰 중인 황적준 교수.
오는 14일로 1주기를 맞는 고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은 사건 발생 다음날 밤 사체 부검을 통해 박군이 고문에 의해 숨졌다는 사실이 당시 강민창 치안본부장과 치안본부의 차장급 이상 고위간부들에게 정확히 보고됐으나, 이들 모두가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사실을 숨기고 ‘쇼크사’로 은폐 조작하려 했다는 새로운 사실이 드러났다. (…) 황 박사의 일기를 종합 분석한 결과, 박군 사건은 당시 사체부검 참가 의사 중 유일한 법의학 전문의로 부검집도의이기도 했던 황 박사가 경찰 고위간부의 집요한 은폐 조작 강요와 회유에 굴복하지 않고 정의와 양심에 입각해서 ‘경부압박치사’ 소견을 밝힘으로써 경찰의 은폐 기도가 무너졌음이 새롭게 밝혀졌다.
박 군은 1987년 1월 14일 교내 시위 주동 혐의로 치안본부(현 경찰청) 대공수사단에 연행돼 조사를 받다가 쓰러져 병원으로 옮기던 중 숨졌다. 당시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경찰 발표는 온 국민의 공분을 샀고, ‘경부압박에 의한 질식사로 인한 사망’이라는 부검의의 소견은 그해 6·10 민주항쟁을 촉발하는 기폭제가 됐다.
민주항쟁 한복판의 법의학자
박종철 고문사망 사건의 은폐 조작에 가담할 것을 종용받은 부검집도의이자, 그 사실을 일기장에 기록했다가 훗날 동아일보를 통해 세상에 알린 이가 바로 황적준(66) 고려대 의과대학 법의학교실 교수다. 사건 당시 국립과학수사연구소(현 국립과학수사연구원) 법의1과장이었던 그의 일기는 다시 한 번 온 나라를 뒤흔들었고, 강민창 당시 치안본부장은 직권남용 및 직무유기 혐의로 구속됐다.
올 2월 말 정년퇴임을 앞둔 황 교수를 경기도 구리시 아천동 자택에서 만났다. 격동의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맞닥뜨린 굵직굵직한 사건 현장에 얽힌 후일담과 40년간 법의학 외길을 걸어온 삶의 궤적을 들었다.
▼ 박종철 사건은 평생 잊을 수 없겠습니다.
“양심과 직업의식에 따라 배운 대로 했을 뿐인데, 하루아침에 저를 유명인으로 만들어준 사건이죠. 결과적으로 모교인 고려대에 자리 잡는 데 도움이 됐어요. 의대 시절에 법의학교실 문국진 교수님과 해부병리학교실 백승룡 교수님, 두 스승의 뜻을 거역하고 튀는 편이라 동기와 선배들로부터 ‘넌 케이스리포트 감’이란 말을 들었어요. 그런저런 일로 눈 밖에 나서 교수 발령을 못 받고 법의학연구소에서 2년간 연구조교를 하다 부산 고신대 해부병리학 교수로 갔어요.
그러다 국과수에서 연락이 와서 미련 없이 옮겼지요. 명색이 법의학을 전공한 의사인데 부검을 못하고 있으니 답답했거든요. 국과수로 가면서 5년 후엔 반드시 모교로 돌아가겠다는 목표를 세웠어요. 3년 뒤에 박종철 사건이 터졌고, 결과적으로 계획보다 1년 일찍 모교로 가게 됐습니다. 유명세를 치른 덕도 있고, 학교에서 맡은 바 일에 충실하다 직장을 나오게 된 데 대한 동정심도 있었던 것 같아요. 또 ‘저런 사람이 학교에 있어야 하지 않겠나’ 하는 분위기가 있었던 걸로 압니다.”
▼ 1년 후 동아일보에 일기장이 공개된 사정은.
“박종철 사망 1주기를 앞두고 동아일보 사회부 정동우 기자(현 건국대 언론홍보대학원 교수)가 전화를 했어요. 한번 보자고. 약속시간이 한참 지나 나타나선 대뜸 ‘안상수 검사(전 새누리당 의원)한테 다 들었다’고 해요. 사건 당시 참고인 자격으로 서울지검에 가서 안 검사에게 부검 결과와 경찰의 은폐 조작 강요까지 다 말했기 때문에, 정 기자가 당연히 그것도 모두 듣고 온 줄 알았죠. 이것저것 묻길래 책상서랍에서 노트를 꺼내 기억이 가물가물한 부분을 일일이 확인하면서 답해줬는데, 사실 정 기자는 은폐 조작 강요와 회유 사실은 모르고 있었어요.”

1988년 1월 13일 황적준 교수가 동아일보에 보도된 자신의 일기장 내용에 관한 참고인 조사를 받기 위해 대검 중수부에 출두하고 있다.
“그렇죠. 일기장을 들추면서 1시간 반쯤 얘기를 나눴어요. 그러고는 밖으로 나간 정 기자가 20분쯤 뒤 다시 들어와 일기장을 복사해줄 수 없느냐고 해요. 내가 법의학 의사로 증거물을 다루는 사람인데, 그때는 일기장이 정말 중요한 증거란 걸 미처 생각지 못했어요. 다음 날 아침에 대학병원에서 부검을 마치고 나오니까 영안실 직원이 신문을 건네줬어요. 전날 복사해준 일기장 사진이 신문에 실렸더군요. 그 순간 사색이 됐죠.”
▼ 국과수가 발칵 뒤집혔겠습니다.
“입구부터 기자들이 바글바글 진을 치고 있다가 내가 나타나자 카메라 플래시를 터뜨려댔죠. 이미 지나간 사건이라 동아일보가 그렇게 크게 다루리라곤 생각하지 않았고, 문제가 되리란 생각은 더더욱 없었는데…. 그길로 내 방에 들어가 사표를 썼어요. 거기까지 기자들이 밀고 들어오고…. 난리도 아니었어요.”
▼ 진실이 알려진 건데, 사표를 쓸 일인가요.
“지워달라고 했던 실명(實名)들이 그대로 다 나왔거든요. 당사자들은 사회에서 매장될 일 아니겠어요? 일기장을 복사해줬으니 다시 주워담을 수도 없고. 조직에 누를 끼쳤다는 생각이 컸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