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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아버지들

아들과 서로 공경 대 이은 禮學의 사표

스승이자 친구이자 아버지 김장생

  • 백승종 | 한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 chonmyongdo@naver.com

아들과 서로 공경 대 이은 禮學의 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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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세기 조선 사회에 예학(禮學)의 새바람을 불러온 김장생·김집 부자는 서로에게 공경의 예를 다했다. 두 사람의 위패는 성균관 문묘에 나란히 배향됐다.
아버지가 아들을 가르쳐 자신의 학문을 후세에 전한 경우는 드물다. 자식을 직접 가르치다 보면 부자의 정(情)이 엷어지기 쉽다. 아들 사도세자의 교육에 지나치게 열중하다가 현왕(賢王) 영조는 부자간에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을 낳았다. 현대에도 지나친 ‘치맛바람’은 부작용을 가져오는 일이 잦다. 일찍이 맹자는 그 점을 경고했다. ‘부자간에는 사랑이 으뜸이라. 좋은 일을 권하는 책선(責善)도 서로 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모든 일엔 예외가 있기 마련이다. 17세기 조선 사회에 예학(禮學)의 새바람을 불러일으킨 김장생(沙溪 金長生·1548~1631)과 김집(愼獨齋 金集·1574~1656) 부자의 경우가 그랬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최고의 스승이자 세상에 다시없는 친구였다. 그들 부자는 서로에게 공경의 예(禮)를 극진히 다함으로써 신기하고 오묘한 조화경(造化境)을 이뤘다. 상호 존중의 극치였다.



‘小學’ 그대로의 삶

그들 부자는 충청도 연산의 향리에 묻혀 지낼 때가 대부분이었다. 김장생은 학자로서 명성이 자자해, 그의 거처는 이름난 ‘연산서당(連山書堂)’이 됐다. 전국 각지에서 많은 선비가 찾아와 가르침을 청했다. 선비들의 눈엔 아버지의 곁을 조용히 지키는 아들 김집의 모습이 꽤 인상적이었다.

1606년(선조 39) 전라도 고부 출신의 권극중이란 선비가 두 달간 연산서당에 머물며 김장생의 가르침을 받았는데, 스승 부자의 조화로운 삶을 목격하고 감동을 받았다. 그리하여 자신이 살핀 바를 글로 정리해 후세에 남겼다. 그에 따르면 두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은 ‘소학(小學)’에 기술된 것과 일치했다고 한다. 권극중의 붓끝을 따라 연산서당의 정경을 그려보면, 김장생 부자의 일상이 손에 잡힐 듯 선명히 다가온다. 아들 김집의 효성은 지극했다.





침실이나 서재에 훼손된 곳이 있으면, 신독재 선생(김집)이 손수 살펴보고 수리했는데 흙손질도 직접 했다. (…) 선생(김장생)께서는 준치[眞魚], 식혜, 메밀국수를 즐기셨다. (김집은) 식혜를 끼니마다 챙겨 그릇에 가득 담아 올리고, 국수는 사흘마다 한 번 올리는 것을 규칙으로 삼았다. 당시 선생의 집이 매우 가난했다. 그러나 신독재가 음식 모두를 미리미리 준비해 부족하지 않게 했다. 만일 상에 올릴 고기가 없으면 (김집은) 몸소 그물을 들고 서당 앞 시냇가로 가서 물고기를 낚아왔다. 밭 갈고 김매고 수확하는 일이며 요역(徭役)을 바치는 일 등 집안의 모든 일을 (김집이) 손수 다 맡아서 어버이께 걱정을 끼치지 않았다. 그는 선생이 타시는 말도 살찌게 잘 보살폈고, 안장과 굴레 등도 항상 빈틈없이 손질했다. 다니시는 길까지도 항상 깨끗이 쓸었다. 울타리 밑까지도 항상 손을 봤다. 이처럼 보통 사람으로서는 하기 어려운 온갖 일을 묵묵히 차분하게 다 하면서도 (김집은) 전혀 힘든 기색이 없었다.

-권극중, ‘유사(遺事)’, ‘신독재전서’, 제20권



克己復禮

그런 아들을 둔 아버지 김장생의 성품은 어떠했을까. 권극중의 글을 따라가면 답이 보인다. “유심히 살펴보니, 사계 선생(김장생)은 덕성이 얼굴에 넘치고, 기상이 온화하고 단아하셨다. 가까이 모시고 있노라면, 마치 봄바람 속에 있는 것과 같았다.”

권위를 내세우거나 독선적으로 행동하는 인물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누구보다 온화하고 관대하며 참을성이 많은 인물이었다. 극기복례(克己復禮), 곧 사적 욕망을 이기고 예를 회복하는 데 평생을 바쳤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김장생과 김집 부자가 함께하는 공간은 화기애애했다. 그들 부자의 고제(高弟)였던 송시열의 회고담이 참고가 된다.



선생(김집)이 서제(庶弟)와 함께 노선생(김장생)을 모시고 계셨다. 마침 서제는 참봉 윤재(尹材)에게 답장을 쓰고 있었는데, 상대를 ‘존형(尊兄)’이라고 불렀다. 그러자 선생은 “세상 풍속이 그렇지 않다”고 말씀하셨다. 서제가 고쳐 쓸 때까지 (선생은) 온화한 말로 거듭 타이르셨다. 노선생께서는 묵묵히 그 광경을 지켜보더니 빙그레 웃으셨다.

-송시열, ‘어록(語錄)’, ‘신독재전서’, 제18권



이 일화에서 확인되듯, 아버지 김장생은 매사에 개입을 자제했다. 그는 두 아들이 어떻게 하는지 미소를 지으며 지켜볼 뿐이었다. 김장생은 서자를 차별하지도 않았다. 그는 9명의 아들을 뒀는데, 적서(嫡庶)에 관계없이 모든 이름을 ‘목(木)’자가 들어간 외자로 지었다. 또한 모든 아들의 자(字)엔 한결같이 ‘사(士)’자를 넣었다. 17세기 조선에선 그처럼 적자와 서자를 동등하게 대하는 아버지가 드물었다.

아버지의 그런 뜻에 부합하는 아들이 김집이었다. 그는 40여 년 동안 아버지를 시봉하며 크고 작은 예법을 철저히 배웠다. 윗방의 아버지와 밥상을 따로 했지만, 아랫방의 김집은 윗방에서 젓가락 내려놓는 소리가 들리기 전엔 결코 밥상을 물리지 않았다.

예를 다하긴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아들의 질문이 있으면, 아버지는 병상에 누웠다가도 몸을 일으켜 앉은 채로 대답했다. 부자간은 지극히 가까운 사이지만, 그래도 예를 잃으면 안 된다는 게 그들의 신념이었다.


인생의 파도, 시대의 격랑

평화롭고 정겨운 연산서당 풍경과 달리, 김장생 부자의 삶은 불운의 연속이었다. 무엇보다도 16~17세기 조선의 파행적인 정치 상황 탓이었다.

김장생은 본래 병약했다. 1558년(명종 14), 11세의 김장생은 어머니를 잃었다. 아버지 김계휘(金繼輝)는 명종의 외삼촌, 곧 윤원형 일파의 미움을 받아 시골로 쫓겨났다. 그래서 할아버지 김호(金鎬)의 슬하에서 외롭게 자랐다.

청년 김장생은 뜻을 세워, 스승을 발견하고 학문에 정진했다. 그러나 세상사는 그의 편이 아니었다. 당파 싸움이 크게 일어나 그의 스승 이이(李珥), 성혼(成渾), 송익필(宋翼弼) 등이 서인의 우두머리로 낙인찍혔다. 동인들은 김장생의 스승들을 거세게 비판했다. 1586년(선조 19), 스승 송익필 일가는 혹심한 고난에 빠졌다. 일족 70명이 한꺼번에 노비 신분으로 떨어졌다. 젊은 김장생은 송익필에게 피신처를 제공하고 종신토록 봉양했다.

반대파는 이미 작고한 김장생의 아버지마저 탄핵했다. 그는 참혹한 정치 현실에 좌절한 나머지 현실정치에 대한 희망을 잃었다. 이후 몇 차례 지방관으로 부임했지만 생계를 꾸리기 위한 임시방편일 뿐이었다.

설상가상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미처 난을 피하지 못한 김장생의 장남 김은(金檃) 내외와 손자가 실종됐다. 서제(庶弟) 김연손(金燕孫)은 왜적과 싸우다 전사했다. 둘째 아들 김집이 곁에 머물렀지만, 아들에겐 말 못할 고충이 있었다. 김집의 아내는 병이 심해 대소사를 전혀 돌보지 못했다. 후사도 못 남겼다. 아내는 마침내 세상을 떴다. 김장생은 이미 큰아들과 큰손자를 잃었기에 김집이 새장가를 들었으면 했다.

하지만 아들의 생각은 달랐다. “사람은 저마다 운명을 타고나기 마련일 것입니다. 저는 운수가 나빠 첫 결혼에서 큰 곤욕을 치렀습니다. 이제 다시 장가를 들더라도 전보다 나은 결혼생활이 보장될 리 없을 것입니다.” 김집은 재혼을 거부하고, 앞서 첩으로 맞이한 이씨(이이의 서녀)와 해로할 마음이었다. 김장생은 아들의 마음을 헤아렸다. 그들 부자는 적장손(嫡長孫)에 대한 열망마저 분에 넘친 사욕으로 간주했다.



이심전심

광해군 시절 김장생 일가는 더한 위기를 맞았다. 1613년(광해군 5) 계축옥사(癸丑獄事, 癸丑禍獄) 때였다. 집권층인 대북파는 7명의 서자를 강도 혐의로 체포해 고문했다. 이들이 영창대군을 추대할 계획이었다며 역모죄로 몰았다. 김장생의 서제 김경손(金慶孫)과 김평손(金平孫)도 이 사건에 연좌돼 옥중에서 죽었다. 김장생에게도 역모 혐의가 씌워졌다.

김장생은 천신만고 끝에 풀려났다. 그는 연산으로 내려갔다. “(그는) 시골집에 숨어 살았다. 문을 닫아걸고 외부 인사의 방문을 사절하고, 오직 경서(經書)만 쌓아두고 읽었다.”(‘연보’, ‘사계전서’)

김집은 아버지 곁을 지켰다. “그때는 천지가 암흑이었고, 인간의 윤리도 말살됐다. 선생(김집)은 세상에서 자취를 숨기고 어버이를 봉양하며 그대로 일생을 마치기로 결심했다.”(송준길, ‘시장(諡狀)’, ‘신독재전서’, 제19권)

인조반정(1623년)이 일어나 서인이 재집권하자 사정은 좀 달라졌다. 1624년, 이괄의 난이 일어나 인조는 공주까지 피난길에 올랐다. 고령의 김장생은 나아가 인조를 뵈었다. 김장생의 나이 어언 75세, 아들 김집도 50세였다. 얼마 뒤 인조는 김장생 부자에게 관직을 내렸다. 김장생은 학자로서 고명했기에 실권은 없지만 명예로운 자리에 등용됐다. 김집에게도 부여현감 자리가 주어졌다.

서울로 간 김장생은 이따금 시골의 아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아버지는 실권도 없이 집권세력에게서 은근히 따돌림을 받고 있었다. 자신의 울적한 신세를 아들에게 털어놓았다.



조정에는 특별히 긴요한 일이 없다. (…) 요즈음 사대부들을 보면, 견고한 뜻은 없고 물러날 생각들만 한다. 반정을 일으킨 사람들끼리만 마음을 함께하니, 한 나라의 일을 과연 두서너 사람끼리 다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김장생, ‘아들 집(集)에게 부침’, ‘사계전서’, 제4권



이렇게 근심하면서도, 아버지는 아들이 지방관 노릇을 잘한다는 풍문에 기뻐했다. 편지 끝에서 “네가 고을을 잘 다스렸다는 명성이 있으니 기쁘다”라고 칭찬의 말을 적었다. 아들도 아버지와 같은 심정이었다. 서인이 재집권했다지만, 세상은 반정 공신들의 차지였다. 뜻이 높은 아버지나 자신은 세상의 ‘을(乙)’에 불과했다. 팔 걷고 나섰댔자, 아무 일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처지였다. 1626년(인조 4) 2월 2일자 서한에서, 김집은 아버지에게 이렇게 고백했다.



(제가) 서울 가는 일에 관해 말씀드립니다. (올라오라는) 혹자의 말에도 일리가 있지만, 제 생각은 그렇지 않습니다. (간다 해도) 지금 가는 것은, 임금[君上]을 위로하기 위해서일 뿐입니다. (…) 더구나 진언(進言)하는 도리는 자기 생각을 그대로 아뢰는 것뿐일 터입니다. (…) 형편을 봐서 진퇴를 결정하려 합니다. (2월) 7, 8일 사이에 그리(집) 가서 (아버님을) 모시고 갈 예정이었습니다. 그런데 방백(方伯, 관찰사)의 회신이 아직 오지 않았고, 관청 사무 또한 너무 많습니다. 9일 전에는 이곳을 떠날 수 없을 듯합니다. (아버님) 말씀대로 여기서 하회를 기다리겠습니다. 혹시 중간에 상황이 달라지면,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김집, ‘부모님께 올리다’, ‘신독재전서’, 제4권



1627년(인조 5) 가을, 김집은 벼슬을 내려놓았다. 그 뒤 전라도 임피현령에 임명됐으나 금방 사직했고, 전라도사로 임명됐을 땐 부임조차 하지 않았다.

김장생 부자는 인조 초기부터 반정 공신들과는 정치적 견해가 달랐다. 뿌리는 동일한 서인이라도 사람들은 김장생 등 고매한 선비들을 ‘청서(淸西)’라고 불러, 공신 집단인 ‘훈서(勳西)’와 구별했다. 재야세력의 대표로서 김장생은 인조와도 정면충돌했다. 1631년(인조 9), 인조는 자신의 생부 정원대원군을 추숭(追崇)하려 했다. 공신 상당수는 물론 찬성했다. 그러나 예학의 태두 김장생은 반대했다. 격노한 인조는 교서를 내려 김장생을 꾸짖을 정도로 관계가 악화됐다.


실천의 禮學

조정의 비난이 쏟아지는 가운데, 김장생은 그해 8월 8일 운명했다. 향년 84세. 사람들은 김장생을 성덕군자(成德君子)라 불렀고, 학자들은 사계선생(沙溪先生)이라며 우러렀다(김집, ‘죽은 아우 참판(參判) 반(槃)의 묘표’, ‘신독재전서’, 제8권).

김장생은 17세기 예학의 우뚝한 사표(師表)였다. “(그는) 고금의 예설(禮說)을 취해 뜻을 찾아내고 참작해 분명하게 해석했다. 그리하여 변례(變禮), 곧 예법의 특수 사례에 직면한 사람들이 모두 그에게 질문했다.”(‘인조실록’, 권 25, 인조 9년 8월 9일) 역사가들의 평가가 그러했다.

김장생의 문하에서 배운 이는 많았다. 후세의 학자들 중 그의 영향을 받지 않은 이가 거의 없다. 그러나 김장생의 학문을 계승한 이로는 아들 김집이 손꼽힌다. “가정의 가르침을 이어받아, (그는) 선생(김장생)의 뒤를 이은 유종(儒宗)이 됐다.”(김집, ‘연보’, ‘신독재전서’)

하필 왜 예학이었을까. 공자는 말했다. “(군자는) 시로 고무되어, 예로 일어난다(興於詩 立於禮).” 또한 그는 인(仁)이란 개념을 ‘극기복례’라고 풀이하기도 했다. 인을 실천하는 최선의 방법이 예란 뜻이다.

김장생도 그렇게 믿었다. 그래서 그는 당대 정치·사회문제의 해법을 예에서 찾았다. 그는 사적 이익에 눈이 먼 정상배들이 날뛰는 현실에 가슴 아파했다. 그의 눈에 비친 대다수 선비는 겉으로만 성현의 가르침을 따랐지, 일상의 기본 예절조차 모르는 청맹과니였다. 그런 주제에 이기론(理氣論) 등 형이상학에 매달려 민생을 외면했다. 이런 현실에 김장생은 분노했다. 게다가 왜란과 호란을 겪은 뒤 사회의 혼란과 갈등은 더욱 고조됐다. 크고 작은 범죄가 만연하는 가운데 유교 본연의 가르침이 존립의 위기에 빠졌다. 김장생이 예의 이해와 실천을 자신의 소명으로 삼은 까닭이다.

도탄에 빠진 조선 사회를 구하기 위해 그는 실천학문으로서 예학에 주목했다. “예가 다스려지면 국가가 다스려지고, 예가 문란해지면 국가가 혼란해진다.” 김장생의 이런 뜻에 공감하는 선비가 늘어났다. 17세기 후반, 예학은 조선 성리학의 주류로 급속히 성장했다. 김장생이 지은 예학 서적은 필독서가 됐다. ‘상례비요(喪禮備要)’를 비롯해 ‘가례집람(家禮輯覽)’ ‘의례문해(疑禮問解)’ 및 ‘전례문답(典禮問答)’도 선비들의 사랑을 받았다.

일찍부터 김집은 아버지를 도와 예학 서적을 편찬했다. ‘의례문해’ 편찬엔 그의 헌신이 결정적이었다. ‘상례비요’ 역시 미진한 부분이 많아 김집의 손질이 요구됐다. 예학을 본격적으로 연구한 이가 김장생이라면, 그 완성도를 높인 이는 김집이었다.

예학이라면 형식에 얽매인 케케묵은 학문이라고 지레짐작하기 쉽다. 하지만 김장생의 예학은 실천의 학문이었다. 그의 예학엔 두 가지 특징이 있었다. 첫째, 예는 시·공간의 변화에 따라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는 통찰이다. 상황에 따라 예가 달라질 수 있다는 그의 견해는 새로웠다. 둘째, 형식으로서 예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 마음가짐이라고 했다.



문묘 배향된 유일한 父子

그러나 안타깝게도, 당초 김장생 부자의 실천적 예학은 곧 퇴락했다. 몇 차례 예송논쟁(禮訟論爭)을 겪고 나서 예학은 정쟁의 날카로운 도구로 변질됐다. 민간에서도 허례허식에 집착하는 악습이 생겨났다. 이래저래 예학은 김장생 부자의 본의에서 까마득히 멀어졌다.

후세는 김장생과 김집의 위패를 성균관의 문묘에 배향했다. 그들 부자는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오직 보편적인 예법을 추구하는 ‘천하동례(天下同禮)’로 당대의 문제를 해결하고 유교적 이상에 가까이 다가갔기 때문이다. 문묘에 모셔진 ‘동국 18현(東國十八賢)’ 중 부자가 배향된 경우는 그들이 유일하다. 도덕도 윤리도 실종된 채 탐욕의 도가니에 빠진 현대 한국에서 김장생 부자가 탐구한 예학의 의미를 되살릴 순 없을까.  


백 승 종



● 1957년 전북 전주 출생
● 독일 튀빙겐대 철학박사
● 서강대 사학과 교수, 독일 튀빙겐대 한국 및 중국학과 교수, 독일 막스플랑크 역사연구소 초빙교수, 프랑스 국립고등사회과학원 초빙교수
● 現 한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
● 저서 : ‘백승종의 역설’ ‘마흔 역사를 알아야 할 시간’  ‘금서, 시대를 읽다’ ‘정조와 불량선비 강이천’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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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종 | 한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 chonmyongd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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