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5월호

초보들과 어울리며 ‘氣 살리기 골프’를

  • 글: 오성식 ㈜오성식영어연구원 원장

    입력2005-04-25 18:4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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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보들과 어울리며 ‘氣 살리기 골프’를

    일러스트 임혜경

    지난 겨울 한 골프방송국의 개국 이벤트에 초대를 받았다. 이름하여 ‘연예인 스타 16강전’. 태국으로 떠나는 4박5일간의 골프여행이었다. ‘연예인’도 ‘스타’도 아닌 내가 그 자리에 함께하게 된 것도 어리둥절했지만, 골프를 치기 시작한 지 3년밖에 안 돼서 잘 치는 날에나 겨우 90대 초반의 스코어가 나오는 내가 감히 탤런트 김정현·차광수씨나 체육인 홍수환·강만수씨 등 프로 혹은 프로에 준하는 실력파들과 경기를 한다는 것 또한 상상만 해도 한숨이 나오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운명의 장난은 그렇게 시작됐고, 첫 라운드는 핸디 2 정도라고 겸손해하는 김정현씨와 맞붙게 되었다. 핸디 2와 핸디 20의 대결. 보나마나 하나마나 한 경기를 꼭 해야만 하고, 게다가 그 경기가 케이블 TV를 통해 방송에 나가기까지 한다니, 보는 사람은 재미있을지 모르지만 내겐 여간 모진 고문이 아니었다. 비록 나중에 방영될 때는 편집됐지만 그날 전반 홀 5개의 드라이브샷 가운데 한 개는 OB, 두 개는 30~40m를 날아가는 데 그쳤을 만큼 게임이 도무지 말이 아니었다. 평상시보다 줄잡아 10타는 더 쳤을 것이다.

    아무튼 게임은 어찌어찌 그렇게 싱겁게 끝났고 다음날부터 3일 동안은 방송 프로그램과 상관없는 프리 라운드가 하루 36홀씩 계속됐다. 평소 같으면 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매일 36홀을 주변의 방해를 받지 않고, 그것도 외국에서 공짜로 맘껏 즐길 수 있다는 것은 굉장한 특권임에 틀림없었다. 그러나 그 사흘의 시간 또한 내게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날들이 되어버렸다. 그 전말은 이러하다.

    전날 김정현씨와 경기하면서 기가 죽기 시작한 내 골프 실력은 남은 기간 내내 도무지 살아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4명이 한 조가 되어 100홀 이상 게임을 하는 동안 단 한 홀도 이겨보지 못했으니 그 괴로움이 오죽했겠는가. 클럽을 들고 어드레스를 하는 순간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불길한 예감. ‘안 맞을 것 같은데….’ 한번 그런 생각이 들면 어김없이 ‘뒤땅’이나 탑볼이었다. 대중가요 노랫말에도 잊지 않은가,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냐고.

    수준 차이가 크게 나는 고수들과 함께 공을 치며 기가 죽자 골프에 대한 흥미조차 유지하기가 어려웠다. 그간 비슷한 실력의 골퍼들과 주거니 받거니 하며 막 재미를 붙여온 골프가 일순간에 고통과 절망을 안겨주는 애물단지 운동으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기가 살아야 골프 기량도 살 텐데, 한번 죽은 기가 골프 재미까지 죽이고 만 셈이었다.



    그 일이 있고 난 후 3개월 동안은 골프와 완전히 인연을 끊고 살았다. 그리고 이제 본격적인 시즌이 됐는데도 아직까지 나의 골프는 구천을 헤매고 있다. 도무지 흥미를 되찾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쯤 되면 그때의 충격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직업이 직업이다 보니 “어떻게 하면 영어를 잘할 수 있나요?”하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그때마다 필자는 “나보다 영어를 못하는 사람을 파트너로 골라 영어에 흥미를 갖도록 해보세요” 하고 좀 얄궂은 충고를 한다. 듣는 사람은 단순한 우스갯소리로 흘려들을지 모르지만 그게 꼭 그렇지가 않다. 나로서는 뼈 있는 충고를 한 것이기 때문이다.

    기가 살아야 영어도 살고 인생도 사는 법인데, 나보다 영어를 잘하는 사람들 사이에 끼어서 영어를 연습하다 보면 점점 영어가 하기 싫어지고 그나마 알고 있던 영어와도 담을 쌓게 되기 십상이다. 사실 이렇듯 영어에 흥미를 잃어버리는 것이야말로 영어를 배우는 데 가장 위험한 상황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외국에 나가서도 마찬가지다. 영어가 꼭 필요한 상황인데 주변에 영어를 잘하는 사람이 딱히 없다면, 어떻게든 본인 스스로 나서서 의사소통을 하게 마련이다. 그렇지만 묘하게도 내 옆에 나보다 영어를 잘하는 사람이 ‘샬라샬라’ 해대면 내 입은 도대체 열릴 생각도 하지 않는 것이 인지상정. 아마 이런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또한 같은 외국인이라도 영어가 모국어인 미국인 앞에서보다는 우리와 처지가 비슷한 일본인이나 몽골인 앞에서 영어가 더 자신감 있게 나온다는 사실에 야릇한 쾌감마저 느낀 적이 있을 것이다.

    골프도, 영어도, 아니 세상 그 무엇도 잘하기 위해서는 많이 해야 하고, 많이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행위가 즐거워야 한다. 외국인과 연애하면 영어 실력이 금방 향상된다는 속설도 마찬가지다. 연인과의 속삭임만큼 즐거운 일이 또 있겠는가. 즐겁지 않은 일을 오랫동안 지속한다는 것은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한번 기가 죽으면 만사가 끝이다.

    기가 살아야 골프도 재미있고 영어도 재미있고, 나아가 사는 것까지 재미있어질 게 아닌가. 골프든 영어든 잘하고 싶은 생각이 있다면 만만한 대상을 파트너로 골라 우선 기부터 살리고 볼 일이다. 이렇게 말하면 앞으로는 프로급 골퍼보다는 초보들에게 라운드 제의가 밀려들지도 모르겠다. 하긴 뭐, 덕분에 나 같은 90대 골퍼들이 필드에 더욱 자주 설 수 있다면 매우 고마운 일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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