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1월호

“슬펐다, 아팠다, 배웠다, 그래서 변했다”

‘가을남자’ 추신수 단독 인터뷰

  • 토론토=이영미 | 스포츠 전문기자 riveroflym22@naver.com

    입력2015-10-22 14:2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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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메이저리그史 남을 ‘크레이지 모드’
    • “가슴에 콕콕 박힌 비난들, 그러나…”
    • “슬럼프는 ‘실력’ 아니라 ‘정신’ 탓”
    • “아내는 그늘 만드는 큰 나무 같은 존재”
    “슬펐다, 아팠다, 배웠다, 그래서 변했다”
    “여기까지 그냥 온 게 아니다. 우리 팀은 올 시즌 하위권을 맴돌았다. 바닥에서부터 올라왔다는 사실이 위기를 겪을 때마다 헤쳐 나갈 수 있게 해주는 힘이 된다. 포스트시즌이 어떻게 마무리될지는 모르지만 끈질긴 승부로 ‘23-0’의 예측을 뒤집어버릴 것이다.”

    텍사스 레인저스는 메이저리그 아메리칸리그 서부지구 우승을 차지했다. 추신수(33)는 디비전 시리즈에서 맞붙는 토론토 블루제이스와의 경기를 앞두고 ESPN의 메이저리그 전문가 23명 전원이 토론토의 승리를 점찍었다는 얘기를 듣고 그들의 예측이 틀렸다는 걸 보여주겠다고 말했다.

    올 시즌 추신수의 야구 인생은 팀 성적의 흐름과 궤를 같이했다. 팀 성적이 바닥을 헤맬 땐 그도 정신이 없었고, 팀이 상승세를 타며 내달릴 땐 그도 자신의 진가를 드러내며 맹활약해 팀 승리에 기여했다.

    추신수의 2015년 시즌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반전 인생’이다. 4월 말까지는 바닥을 헤맸으나 10월 초 정규 리그를 마무리할 때는 전성기 못지않았다. 메이저리그 관계자들은 추신수가 9월 한 달간 보여준 성적을 두고 “21세기 메이저리그 역사에 남을 만한 크레이지 모드”라고 평했다. 추신수가 디비전 시리즈를 위해 토론토를 방문한 9월 9일, 텍사스 선수들이 묵는 호텔 로비에서 그를 인터뷰했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추신수는 미국 진출 이후 두 번째로 이달의 선수상을 수상했다. 9월, 10월에 펼쳐진 32경기에서 3할8푼7리, 6홈런, 23타점, 30득점, 출루율 5할, 장타율 6할1푼3리로 레인저스의 지구 우승을 이끄는 첨병 노릇을 했다.

    수상 소식이 알려진 다음 날 텍사스 레인저스 클럽하우스에서 만난 추신수는 “생각도 못했는데 의미 있는 상을 받으니 고맙고 감사할 따름”이라며 “팀에 도움이 되려고 노력한 것이 결국 개인 성적으로 이어졌다. 이 상을 받음으로써 정규 시즌을 ‘해피엔딩’으로 마친 데 대해 만족한다”는 소감을 전했다. 또 “어떻게 시작하느냐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마무리하느냐도 그 못지않게 중요하다. 마무리를 잘했다는 데 큰 의미를 두고 싶다”면서 환한 미소를 지었다.

    토론토 원정 때 한 인터뷰에서 추신수는 이달의 선수상과 관련해 “욕심이 나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일 것이다. 솔직히 받고 싶었다. 그러나 그런 큰 상이 내가 원한다고 해서 받게 되는 건 아니지 않나. 상은 하늘에서 준다고 믿는데 이번에는 그 운이 내게 있었던 모양”이라고 속내를 털어놓았다. 이달의 선수상은 상금이나 상품이 주어지는 게 아니다. 순전히 명예다. 9월 한 달간 아메리칸리그 선수 중에서 추신수가 성적이 제일 좋았다는 것을 의미하기에 수상의 의미는 클 수밖에 없다.

    “지구 우승을 차지한 다음 날 이달의 선수상이 발표됐다. 오후에 집에서 쉬고 있는데 친구가 소식을 전해줘서 알게 됐다. 메이저리그 사무국에서 공식 발표했다는데 통 믿기지 않아 몇 번이나 ‘진짜냐’라고 물었다. 뛸 듯이 기뻤다는 게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상에는 신경 쓰지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것만 하자고 생각했는데 그게 엄청난 결과로 나타나니 얼마나 기뻤겠나.

    내 통산 OPS(장타율+출루율)가 .837이다. 그런데 올 시즌 OPS가 .838로 .001이 더 높다. 그 얘기를 듣고 깜짝 놀랐다. 내가 가장 신경 쓰는 기록이 OPS인데 통산 기록보다 .001이 더 높다는 데 매우 만족한다. ‘야구는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라고 한 요기 베라 선수의 명언이 새삼 떠올랐다.”

    시즌 내내 하위권을 맴돌던 텍사스 레인저스가 지구 우승을 차지한 배경에는 베테랑 선수들의 활약이 컸다. MLB.com은 텍사스는 전반기보다 후반기에 강했고, 우승의 중심에 추신수와 애드리안 벨트레가 있었다고 봤다. 텍사스 선수들도 후반기 상승세의 주역으로 대부분 추신수를 지목했다.

    특히 추신수와 함께 테이블세터를 이루는 딜라이노 드실즈는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추신수의 올 시즌은 믿기 힘들 정도로 엄청나다. 한 경기당 최소 두세 차례는 출루하는 것 같다. 초반에는 이런 모습을 보이지 못했지만 후반기에는 그 누구보다 팀을 위해 필요한 존재로 거듭났다. 그가 팀에 없었다면 우린 이 자리에 오르지 못했을 것이다”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추신수에 대해선 제프 배니스터 감독도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이달의 선수상을 받은 것으로 다 증명됐다고 본다. 모두가 추신수의 가치를 눈앞에서 지켜봤다. 그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게 사실이다. 단언컨대, 추신수가 아니었더라면 우린 토론토에 가지 못했을 것”이라는 말로 고마움을 나타냈다.

    “슬펐다, 아팠다, 배웠다, 그래서 변했다”


    “秋 덕분에 토론토 갔다”

    FOX스포츠의 텍사스 전담 리포터인 에밀리 존스도 추신수의 남다른 가치를 높이 평가했다. 존스는 추신수에게 선수 이전에 인간적으로 더 큰 매력을 느낀다고 말했다.

    “추신수를 알면 알수록 놀라운 것은 하는 일마다 열정을 갖고 임한다는 점이다. 팀을 위해, 계약 내용을 성실히 이행하기 위해, 또한 한국을 대표한다는 생각으로 그는 매 경기 최선을 다해 뛴다. 그게 전반기에는 부담으로 작용했고, 후반기에는 뛰어난 성적으로 나타났다. 뭔가를 해내야 한다는 중압감 때문에 전반기 오랫동안 슬럼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올스타 휴식기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그는 후반기에 들어와 이전의 추신수로 돌아왔고, 자신의 자리를 잘 지켰다. 야구선수로서도 훌륭하지만 자신의 어려움을 스스로 극복해 나가는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다.”

    존스는 추신수가 부진에 빠졌을 때 그와 나눈 대화를 소개했다.

    “추신수가 힘들어할 때 그와 이런 얘길 나눴다. ‘추, 당신은 야구를 잘하는 선수예요. 그런데 필드에 있는 당신은 혼란스러워 보여요. 당당해지세요. 당신은 충분히 그럴 만한 자격이 있습니다’라고 말을 건네자 추신수는 ‘고맙다’면서 빠른 시일 안에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그 약속을 제대로 지켰다. 요즘 추신수를 보고 있으면 자신감이 펄펄 넘친다. 야구가 사람을 살리기도, 나락으로 떨어뜨리기도 하는 것 같다.”

    배니스터 감독과의 갈등

    미국 텍사스 주 지역 매체 ‘포트워스 스타 텔레그램’의 제프 윌슨 기자는 추신수의 올 시즌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추신수의 9월과 10월을 보면 지난해 부상과 수술 후 복귀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다. 물론 4월까지 최악의 성적을 기록해 걱정하기도 했다. 5월에 반짝 했다가 또다시 깊은 수렁에 빠졌다. 그런데 후반기 들어 완전히 다른 선수가 됐다. 베이스 러닝에도 자신감이 붙었고, 타율이 올라가면서 수비까지 좋아졌다. 지금 모습이 바로 구단에서 기다려온 추신수의 모습이다. 그는 자신이 구단으로부터 받는 몸값이 얼마나 합당한 금액인지 충분히 보여줬다.”

    윌슨 기자는 추신수의 9월 활약만 놓고 보면 지금보다 더 많은 연봉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해 눈길을 끌었다.

    “메이저리그 선수 중 최고의 성적을 냈는데, 그 정도면 연봉을 더 받는다고 해서 이상할 게 전혀 없다. 팀의 구심점 노릇을 하면서 선수들을 이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개인적으로 추신수같이 투지가 넘치는 선수를 좋아한다. 그가 원래의 자기 모습으로 돌아온 게 진심으로 반가웠다.”

    올 시즌 추신수의 숙제 중 하나는 배니스터 감독과의 껄끄러운 관계 개선이었다. 배니스터 감독은 스프링캠프 때만 해도 베테랑 선수에 대해 최대한 배려하고 예우하는 태도를 보였지만, 상대팀에서 좌투수가 나오면 추신수를 라인업에서 제외하고 우투수가 나와도 기용하지 않는 이해하기 힘든 처사로 의문을 자아냈다. 추신수도 처음엔 꾹 참고 현실을 받아들이며 자신의 플레이에 집중하려 했지만, 시간이 흘러도 좀처럼 변화를 보이지 않는 감독의 행동에 대해 결국 감정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추신수는 일기를 통해 감독의 선수 기용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다. 물론 선수 기용은 감독 고유의 권한이지만 메이저리그에서 커리어를 쌓은 선수를, 왜 이런 방식으로 대하는지 잘 모르겠다는 얘기를 전했다. 자신은 매일 경기에 나가 타격감을 되찾고 싶은데 휴식 차원의 결장이 계속되고, 야구장으로 출근해 라인업을 확인하며 자신의 이름을 찾아보는 상황이 익숙지 않다는 메시지를 전했다.

    한국에 소개된 이 일기는 큰 반향을 불렀다. 텍사스 현지 기자들이 일기를 번역해 소개했고, 급기야 배니스터 감독과 존 다니엘스 레인저스 단장까지 그 내용을 확인하게 된다.

    군기 잡기 시범 케이스?

    흥미로운 부분은, 그 일기가 알려진 이후 추신수가 정규 시즌을 마칠 때까지 단 한 경기도 빠진 적이 없고 계속 출전하면서 성적이 상승 가도를 달렸다는 점이다. 다니엘스 단장이 ‘일기 사건’ 후 배니스터 감독과 면담했고, 이후 추신수를 계속해서 경기에 출전시켰다는 얘기도 떠돌았다.

    위에서 언급한 제프 윌슨 기자는 추신수와 감독의 관계 중 감독의 행동에 문제가 있었다고 지적했다.

    “감독이 베테랑 선수를 그런 식으로 군기 잡을 필요가 있었나 싶다. 베테랑들은 바보가 아니다. 오히려 믿고 맡겨야 한다. (배니스터) 감독도 첫 시즌인 만큼 좋은 성적을 내고 싶었을 테고, 그러려면 뭔가 본보기가 될 만한 일이 있어야 하는데, 그게 추신수의 라인업 제외였을 것이다. 다행인 것은 감독의 마인드에 변화가 일어났고, 추신수가 경기에 나가면서 팀도 상승세를 탔다는 점이다. 배니스터 감독은 추신수에게 고마워해야 한다.”

    추신수는 감독과 관련된 질문을 던지자 한참을 생각하다 이렇게 입을 뗐다.

    “그때만 해도 너무 힘들다보니 내 감정을 감추지 못했다. 올스타 휴식기 이후부터는 감독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 나를 라인업에 넣든 빼든 되도록 신경 쓰지 않으려 했다. 내가 잘하면 언젠가는 라인업에 계속 넣을 수밖에 없지 않겠나 생각했다.

    나는 나를 믿고 데려온 사람들한테 뭔가 보답하고 싶었다. 그들의 믿음이, 그들의 지지가 틀리지 않았다는 걸 보여주려 했고, 그런 기회가 줄어드는 데 대해 서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일을 겪으면서 깨달은 점이 있다면 ‘아무리 안 좋아도 마음 아파하지 말고, 아무리 좋은 일이 있어도 너무 좋아하지 말자’는 거다. 내가 1할을 치든 2할을 치든, 시간이 지나면 2할7푼, 2할8푼 또는 3할의 성적을 낼 테니까.”

    올스타 브레이크 修心

    추신수의 올 시즌 성적은 7월 14일부터 4일간 휴식을 취한 올스타 브레이크 전과 후로 나눠볼 수 있다. 과연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추신수는 이와 관련해 다소 길게 설명했다.

    “3, 4일밖에 안 되는 휴가를 받고 할 수 있는 건 가족과의 여행이었다. 그래서 대여섯 시간을 운전해 바닷가를 찾았고, 아이들과 낚시를 하며 온전한 휴식을 취했다. 그때 이런 생각을 했다. 큰 걸 보여주려고 하기보단 작은 부분에서부터 다시 시작해보자고. 작년에 두 차례 수술을 하고 재활 과정을 거쳐 올 시즌 복귀했기에 무조건 잘해야 한다는 생각이 굉장히 강했다. ‘반드시 보여주고야 말겠어’라는 생각이 앞서다보니 부드러운 면을 잃었다.

    후반기부터는 좋은 공만 치자고 다짐했다. 스트라이크가 아닌 공에 방망이를 대지 말고 안타 치는 데 급급하기보다는 출루율을 높이는 데 집중하자고 마음을 다잡았다. 그러다보니 좋은 공을 치면 안타가 나오고, 나쁜 공에 손을 안 대니 볼넷이 나오면서 출루율이 올라갔다. 그렇게 시즌을 보내다 좀처럼 2할5푼을 넘지 못하던 타율이 반등 조짐을 보였고, 2할6푼, 2할7푼, 그리고 2할7푼6리에 도달했다.”

    비록 힘든 시즌을 보냈지만, 아무리 성적이 좋지 않아도 시즌 마칠 때엔 어느 정도의 성적을 낼 거라는 자신이 있었다고 한다. 실제로 추신수는 시즌 중 기자와 통화할 때도 “지금은 성적이 안 좋아도 시즌을 마칠 때쯤이면 2할7푼, 2할8푼 정도의 성적을 올리게 될 것”이라고 자주 얘기했다. 4월 말, 9푼6리의 타율을 기록할 때도 비슷한 얘기를 한 적이 있는데, 지금에 와서 고백하자면, 기자인 나도 그때 추신수의 말을 믿기 어려웠다. 참담할 정도로 형편없는 성적을 낸 그가 2할7푼까지 타율을 끌어올린다는 건 기적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그때는 어느 누구도 내가 잘할 거라고 기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팬들도, 기자들도 모두 등을 돌렸으니까. 포털사이트에 ‘추신수 일기’를 연재하는데, 그 일기 댓글들이 대부분 나를 비난하는 내용으로 가득 채워졌다고 하더라. 나에 대한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감도 컸을 것이다. 물론 처음에는 그런 비난이 서운하기도 했다. 선수가 못할 때 좀 기다려주면 안 될까, 기다려주면 반드시 해낼 선수라고 믿고 응원해주면 안 될까 하는 생각도 했다.

    아팠기에 얻은 것

    그렇다고 흔들리진 않았다. 비난하는 사람들의 마음까지 내가 어떻게 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기자들도 그렇다. 내 연봉을 거론하며 올 시즌 내가 몸값을 못하고 있다며 쉽게 ‘먹튀’라고 표현한다. 잘할 때는 칭찬하고, 못할 때는 못한다고 지적하는 게 기자가 하는 일이니 오케이다. 그러나 나도 사람이다보니 가슴에 콕콕 박히는 글을 읽을 땐 슬프더라.”

    추신수는 세상을 보는 시야가 넓어진 것 같다고 했다.

    “아팠던 순간들 덕분에 얻은 게 많다고 본다. 그조차 나한테는 새로운 경험이고, 배움이고, 인생이다. 내가 멘토로 삼은 혜민 스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어차피 안 될 땐, 뭘 해도 안 될 때는 어려운 사람들을 돌아보라’고. 굉장히 큰 도움이 된 메시지다. 야구가 안 된다고 해서 세상이 끝난 게 아니지 않나. 난 야구만 슬럼프였을 뿐 다른 생활은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야구를 못한다고 내 모든 삶이 불행해지는 걸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가족과 더 살갑게 지낸 것 같다.”

    올 시즌 지옥과 천당을 오간 추신수로선 그 과정에서 자신만의 ‘느낌표’를 만들고 있었다. 그가 왜 대단한 선수인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나는 이렇게 착각하려고 노력했다. ‘보이는 곳보다 보이지 않는 데서 응원을 보내주는 분이 더 많다’라고.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게 중요했다. 그래서 이달의 선수상을 받을 때 정말 기뻤던 것이다. 나 자신과의 약속을 지켰기 때문에.”

    추신수는 지구 우승 달성 소감을 말하면서 아내 하원미 씨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그는 클럽하우스에서 샴페인 파티를 하던 중 한국 취재진에게 “늘 나무처럼 내 옆에서 날 지켜봐주는 아내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에게 “파티 하느라 정신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그런 멋진 말이 떠올랐냐”고 물었다. 그는 “나도 모르겠다. 아내에게 고마운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는데 순간적으로 뜨거운 여름날 시원한 그늘을 드리우는 나무를 떠올렸다”고 했다.

    “아내와 어린 나이에 만나 12년 동안 희로애락을 함께했다. 빈손으로 시작한 결혼생활이 지금은 남이 부러워할 정도가 됐다. 지금 아내를 만났다면 이런 기분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마이너리그 때 처음 만나 함께 고생하면서 사랑을 쌓았다. 아내는 시간이 흐르면서 큰 나무가 됐다.

    가끔 이런 생각을 해본다. ‘내가 지금까지 결혼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아마 일찌감치 은퇴했거나 한국으로 돌아갔을지도 모른다. 아내가 옆에서 날 잡아주고 응원해줬기에 여기까지 온 것이다.”

    야구선수 남편과 리틀야구 선수인 두 아들, 사랑스러운 딸을 둔 하원미 씨는 하루 종일 야구로 시작해서 야구로 끝나는 일상을 경험하곤 한다. 서로 다른 팀에서 뛰는 두 아들의 리틀야구 게임에서 소리 높여 ‘파이팅’을 외치다 저녁에는 남편의 경기장을 찾아 응원을 펼친다.

    시즌 초반, 남편이 극도로 부진할 때 옆에서 어떤 얘기를 해줬느냐고 묻자 하원미 씨는 이렇게 답했다.

    “남편이 야구를 1, 2년 한 게 아니지 않나. 20년 넘게 했다. 야구는 올라갈 때도 있고, 내려갈 때도 있다. 그래서 난 가급적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 부상만 없다면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얘기해줬다. 남편이 너무 힘들어할 땐 나도 어떤 얘기를 해줘야 할지 모르겠더라. 그래도 오랫동안 메이저리그 커리어를 쌓으면서 자기 역할을 한 사람이라 믿고 기다릴 수 있었다.”

    운동선수의 아내로 산다는 건 자신을 내려놓고 많은 걸 참고 극복해나가는 삶의 연속이다. 마이너리그에서 만나 하나씩 단계를 밟아 지금의 자리에 오른 추신수와 하원미 씨는 단단하고 안락한 가정을 꾸리며 남다른 부부애를 나누고 있다. 돈 많이 버는 남편을 둔 행복한 아내라는 시선도 많으나 기자가 가까이에서 본 하씨는 부지런함과 성실함을 무기로 세 아이를 키우고 뒷바라지하면서 남편 내조에 최선을 다했다.

    “슬펐다, 아팠다, 배웠다, 그래서 변했다”

    추신수는 올 시즌 22개의 홈런을 터뜨렸다.

    가장 극복하기 어려운 것

    토론토 원정경기에는 선수들의 가족도 동행했다. 추신수와 인터뷰를 하던 중에 하씨도 자연스럽게 합석했고, 기자와 인터뷰 아닌 대화를 이어갔다. 하씨는 레인저스 아내들의 모임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맡고 있다. 리더인 벨트레의 선수 아내를 도와 자선행사와 바자 등을 열며 지역사회에 보탬이 되는 일들을 해나간다고 한다.

    “베테랑 선수들의 아내들이 중심축인데, 벨트레 선수의 아내와 뜻이 잘 맞는 편이라 좋은 일 하는 데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다. 경매도 하고, 물건도 팔아서 남는 수익금으로 기부도 하고, 아픈 아이들을 돕기도 한다. 레인저스에선 벨트레 부부와 특히 친하게 지내는 편이다. 원정경기에 동행하면 부부끼리 만나 같이 저녁을 먹으며 아이들 교육 문제, 살아가는 얘기를 나눈다. 그들도 어린 나이에 만나 우리처럼 세 아이를 낳아 키우다보니 사는 모습이 정말 비슷하다. 남편들 성향도 비슷해서 벨트레나 무빈 아빠나 서로를 믿고 의지한다.”

    인터뷰 말미에 추신수는 “메이저리그 선수들은 실력이 부족해서 슬럼프가 오는 게 아니다”라며 “세상에서 가장 극복하기 어려운 일은 ‘정신, 멘털’이다”라는 얘기를 꺼냈다.

    “야구를 후회 없이 하고 싶다. 어떤 상황도 극복하고 이겨내라는 가르침이 있었기에 포기하지 않는 삶을 살고 있다. 미국에서 처음으로 맞은 포스트시즌이다. 어떤 결과가 나올지 모르지만 즐겁게 야구하고 싶다. 나중에 후회하지 않게끔 내가 가진 모든 것을 포스트시즌에 쏟아붓겠다.”

    추신수의 ‘가을야구’는 10월 13일 현재 진행 중이다. 2승 2패. 토론토 블루제이스와 디비전 시리즈 마지막 한 경기를 남겨뒀는데, 그는 늘 그랬듯이 아름다운 마무리를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쉬운 길을 걷지 못했다. 항상 문제가 있었고, 어려움이 많았다. 그래도 지금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메이저리그 추신수’란 타이틀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야구한 날보다 야구할 날이 적게 남았지만 요즘처럼 야구장 오는 게 즐거운 때가 또 있었을까 싶다. 이 기쁨을 제대로 누릴 것이다. 우리 팀이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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