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8월호

테이스터 박영순의 커피 인문학

커피 시원지는 예멘 아닌 에티오피아

  • 박영순|경민대 호텔외식조리학과 겸임교수 twitnews@naver.com

    입력2017-08-13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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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커피의 시원지(始原地)는 예멘이 아니라 에티오피아다. 그럼에도 예멘은 커피 역사에서 보석 같은 존재다. 예멘이 없었다면, 아직도 커피는 아프리카의 깊숙한 계곡에 숨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예멘은 아시아 서쪽 끝의 나라다. 아라비아반도 남단에 위치, 홍해를 사이에 두고 에티오피아와 마주 보고 있다. 커피나무가 에티오피아에서 처음 자라나 예멘으로 전해졌다는 사실은 지금에야 상식으로 통하지만, 1000년을 훌쩍 넘는 긴 세월 동안 커피의 시원지는 예멘으로 알려졌다. 인류 역사에서 커피를 처음 경작한 나라가 예멘이며, 커피나무들이 이곳에서 네덜란드와 프랑스를 거쳐 아시아와 아메리카로 퍼져나갔기 때문이다.



    칼디의 고향을 따지는 이유

    에티오피아엔 커피에 관한 구전이 있을 뿐이지만 예멘, 사우디아라비아, 시리아, 이란 등 이슬람 권역에선 9세기쯤부터 커피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이에 따라 커피는 에티오피아를 제치고 애초부터 이슬람의 음료인 것으로 오랫동안 받아들여졌다. 그러다 18세기에 커피가 유럽인을 매료시키며 세계 구석구석으로 퍼질 즈음 진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카를 폰 린네(1707~1778)가 식물을 분류하고, 찰스 다윈(1809∼1882)이 종(種)의 뿌리를 추적한 데 이어 왓슨과 클리크가 1953년 유전자 구조를 밝히는 등 일련의 과학적 탐구 끝에 커피 시원지는 예멘이 아니라 에티오피아인 것으로 뒤늦게 밝혀졌다. 그럼에도 예멘은 커피 역사에서 보석 같은 존재다. 예멘이 없었다면, 아직도 커피는 아프리카의 깊숙한 계곡에 숨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커피의 기원과 관련해 ‘마호메트(Mahomet)의 전설’이 있다. 마호메트가 동굴에서 고행을 하면서 거의 죽을 지경이 됐는데, 꿈에 가브리엘 천사가 나타나 빨간 열매를 따 먹으라고 알려줬다는 내용이다. 빨간 열매가 바로 커피나무 열매였으며, 마호메트는 천사의 말대로 열매를 따먹고 건강을 회복했다. 이 이야기가 전해지면서 무슬림 사이에선 “커피를 몸에 담은 자는 지옥불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소문이 났다. 무슬림들은 커피가 ‘마호메트를 살린 신의 음료’라고 자랑하길 좋아한다. 

    마호메트의 전설이 사실이라면, 커피 시원지는 에티오피아-예멘이 아닌 사우디아라비아다. 마호메트가 태어난 곳도, 고행을 한 곳도 메카였기 때문이다. 더욱이 커피의 기원 시점도 7세기 초로 특정된다. 마호메트는 570년 태어났으며, 40세 되던 610년에 동굴 고행에서 신의 계시를 받고 이슬람교를 창시했다.



    이보다 시기가 앞선 기원설로 ‘칼디(Kaldi)의 전설’이 있다. 염소지기 소년 칼디가 커피나무를 처음 발견했다는 내용이다. 칼디는 어느 날 염소들이 체리처럼 생긴 붉은 열매를 따 먹고 흥분해 춤을 추는 듯한 모습을 목격했다. 궁금한 마음에 자신도 열매를 따 먹어보니 정신이 맑아지고 기분이 상쾌해지는 걸 느꼈다. 칼디는 마을의 수도원을 찾아가 이 사실을 알리며 열매를 건넸다. 수도사들이 커피 열매가 잠을 쫓는 효과를 낸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밤새워 기도를 올릴 때 커피 열매를 먹게 되면서 점차 주변으로 퍼져나갔다는 이야기다.


    커피의 진정한 축복

    칼디가 어느 시기 인물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사연이 구전으로만 이어져서다. 말을 전하는 사람마다 기원전 2~3세기, 기원후 2~3세기, 기원후 6~7세기 등 가지각색이다. 따라서 칼디의 전설을 소개할 땐 그 시기를 ‘아주 먼 옛날(A long time ago)’이라고 언급한다. 칼디와 염소들이 어우러져 춤을 추는 여러 종류의 상상도엔 칼디가 아랍인 복장을 한 무슬림으로, 때론 웃통을 벗은 아프리카 원주민으로 묘사된다. 칼디가 예멘인인지, 에티오피아인인지 구별이 명확하지 않은 탓이다.

    유전자 분석 결과, 에티오피아가 커피나무 시원지로 밝혀졌다고 해서 예멘보다 더 깊은 역사를 지닌 건 아니다. 에티오피아 건국신화를 보면, 그들의 핏줄엔 예멘 조상의 피가 흐른다. 에티오피아의 기원은 지금부터 3000년 전 솔로몬왕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아프리카에선 드물게 뼛속 깊이 구약성서를 믿는 국가인 것이다. 반면 예멘의 역사는 이보다 앞서면서 종교적 색채가 다신교를 거쳐 이슬람교로 굳어진다. 아랍인의 유래와 그 문화의 시작을 찾을 수 있는 곳이 바로 예멘이다.

    이런 점에서 칼디의 정체성을 따지는 건 곧 예멘과 에티오피아의 기원은 물론 고대 종교들의 뿌리, 상호 연관성과 변화상을 성찰하는 멋진 실마리가 아닐 수 없겠다. 유대교와 다신교의 만남이 에티오피아를 잉태했으며, 이 과정에서 다신교는 구약성서에 눈을 떠 훗날 이슬람교를 내면화할 수 있는 경험을 한다. 이스라엘-예멘-에티오피아의 역사가 커피에서 만나 한데 어우러지고, 유대교-다신교-기독교-이슬람교가 구약성서를 토대로 교감을 나눈다는 사실은 커피 애호가로선 가슴 벅찬 일이다.

    종교로 인해 인류는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어왔는가. 종교는 화합보다는 역설적이게도 인류를 적과 동지로 파편화하는 쐐기로 작용하기도 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런 현실에서 커피를 통해 인류가 같은 뿌리에서 나왔음을 얘기하며 동질감을 찾아가는 기회를 갖는 건 값진 일이다. 이것이야말로 커피가 우리에게 주는 축복이다.



    시바 여왕, 역사적 사실로 재탄생

    예멘의 기원을 찾아가다 보면 아랍(Arab)의 시작을 만난다. 아랍은 페르시아만, 인도양, 아덴만, 홍해에 둘러싸인 아시아 서남부를 일컫는 지명이다. 아라비아(Arabia)반도가 곧 아랍을 의미한다. 고대 페르시아어의 ‘아라비아(Arabya)’ 역시 메소포타미아 서쪽과 남쪽 땅을 가리킨 지명에서 나왔다. 4대 문명 발상지 중 하나인 메소포타미아의 사람들은 유프라테스 강 너머 서쪽에 거주하는 민족을 아랍인이라고 불렀다. 메소포타미아에선 기원전 5000년경 문자를 사용한 역사시대가 열렸으며, 기원전 3500년경엔 수메르인이 도시를 형성했다. 그러다 기원전 1000년경부터 아라비아반도 남부(지금의 예멘)에 거대한 무리가 살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들은 셈족 언어를 구사했는데, 아라비아 중북부 사막지대의 유목민과 달리 정착 생활을 하며 도시국가 성격의 왕국을 형성했다. 이것이 기원전 955년부터 840여 년간 부유함을 자랑하며 번영한 시바(Sheba) 왕국이다. 사바(Saba)라고도 하는 이 왕국엔 여왕이 군림하고 있었다.

    시바의 여왕(Queen of Sheba)은 명확한 이름 없이, 그 존재마저도 구약성서 일부와 구전을 통해 전설처럼 전해져왔다. 그러나 2000년에 영국-캐나다-미국 발굴팀이 예멘 북부 루브알칼리 사막의 마리브(Marib)에서 시바 여왕의 신전 등 왕국의 유적을 발굴함으로써 실존한 역사임이 입증됐다. 마리브는 현재 예멘 수도인 사나(Sanaa)에서 동쪽으로 100km 떨어져 있으며 해발고도 1200m 고지대에 조성된 고대 도시로 시바 왕국의 수도였다. 당시 마리브의 규모는 인근의 ‘그레이트 마리브댐(Great Dam of Marib)’을 통해 추정할 수 있다. 기원전 7~8세기에 건설된 이 댐은 길이 580m에 높이는 4m에 달했다. 기원전 2세기경엔 높이가 14m로 증축돼 주변 100㎢ 면적에 사는 수만 명에게 물을 공급했다.


    아랍인은 어디서 왔나

    시바의 여왕이 이끈 아랍인은 어디서 왔을까. 이들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언어 중 하나인 셈어(Semitic languages)를 사용했다. 셈은 구약성서 창세기에 나오는 노아의 세 아들 중 장남. 아랍인은 셈의 후손으로서 셈어를 구사하는 민족들 중 하나였다.

    아라비아반도에 살던 셈족 일부가 기원전 3500년경 북상해 나일 강 인근에 살던 함족(함은 노아의 아들로 아프리카인의 조상)과 어우러지면서 이집트인이 됐다. 기원전 3000년경 아라비아 사막을 횡단해 메소포타미아로 진출한 셈족의 한 분파가 바빌로니아인의 조상이 됐다. 또 기원전 2500년경 팔레스타인에서 북부 메소포타미아를 거쳐 이란 고원에 이르는 ‘비옥한 초승달 지대(Fertile Crescent)’에 정착한 셈족은 아무르인, 레바논과 시리아 등 지중해 동부 연안으로 이동한 무리는 페니키아인이 됐다. 셈족의 이동은 계속됐다. 기원전 1400년경엔 시리아 남부지역에 거처를 정해 아랍인이 됐으며, 시리아 남부와 팔레스타인 지역에 정착한 분파는 유대인(Jewish)의 조상이 됐다.

    시바의 여왕이 등장하는 시점은 기원전 1000년경인데, 구약성서와 코란에 행적이 적혀 있다. 구약성서의 열왕기상(列王記上)에 시바의 여왕이 솔로몬 왕의 명성을 듣고 그를 시험해보려 예루살렘을 찾아간 대목이 나온다. 솔로몬 왕의 재위기간이 기원전 961~922년이므로 시바 여왕이 활약하던 시기도 특정된다. 성서는 시바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에 탄복하고 황금과 보석, 몰약, 향유 등 값진 물건을 바쳤다고 기록했다.

    이를 둘러싸고 기록은 없지만 흥미를 끄는 얘기가 다수 전한다. 솔로몬 왕은 시바 여왕의 미모와 현명함에 매료돼 묘책을 쓴다. 성대한 파티를 열고 시바 여왕에게 “나의 허락 없이 음식을 먹는다면 나의 요구에 응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시바 여왕은 기꺼이 수용했지만, 그날 밤 잠을 자던 중 너무나 목이 말라 물을 마셨다. 솔로몬이 파티 음식에 향신료를 많이 넣도록 책략을 부린 탓이다. 약속을 깨고 허락 없이 물을 마신 것을 빌미로 솔로몬 왕은 시바 여왕의 몸에 손을 대는 걸 허락받는다. 그 결과 둘 사이에 남자아이가 잉태되는데, 그가 훗날 에티오피아 초대 황제가 되는 메넬리크 1세다.



    어머니 나라, 예멘

    솔로몬 왕은 유대교를, 시바 여왕은 다신교를 숭상했지만 두 사람은 모두 셈족이었다. 셈족끼리 낳은 자식은 마땅히 셈족이므로 이스라엘과 시바(예멘), 에티오피아는 같은 핏줄인 것이다. 메넬리크가 황제에 오른 과정을 보면, 에티오피아의 초대 종교는 유대교였다. 22세 청년으로 성장한 메넬리크는 예루살렘을 찾아가 히브리 율법과 유대 신앙을 공부하고 유대교식 세례를 받았다. 에티오피아인들은 당시 메넬리크가 왕위를 물려주겠다는 솔로몬 왕의 뜻을 정중히 거절하고 에티오피아의 악숨(Axum)으로 돌아와 솔로몬 혈통의 왕국을 이어갔다고 주장한다. 솔로몬 왕은 메넬리크가 시바로 돌아갈 때 성직자와 학자, 기술자 등 1만2000명의 유대인을 동행케 했으며, 모세가 하늘에서 받은 십계명을 보관한 법궤(Art of the Covenant)를 준 것으로 전한다. 이 법궤는 수도인 아디스아바바에서 960km가량 떨어진 악숨의 ‘성 마리아 시온교회’에 안치돼 현재까지 보관되고 있다는데, 이를 실제로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에티오피아는 이처럼 시바 왕국에서 나왔다. 시바와 에티오피아가 같은 나라였다는 주장도 적지 않다.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무라노 수도원에서 1459년 제작한 세계지도에는 시바의 도시들이 에티오피아에도 있는 것으로 나와 있다. 홍해를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 나뉜 에티오피아와 예멘 지역 모두 시바 왕국의 영토였다는 견해가 우세하다. 홍해엔 바다의 폭이 8km 정도인 곳이 있어 오래전부터 양측의 왕래가 잦았으며, 이 과정에서 자연스레 예멘 쪽 시바인들이 에티오피아에 정착한 것으로 관측된다. 에티오피아에선 시바 여왕이 악숨에 수도를 정하고 동아프리카 전 지역과 예멘을 다스렸다는 구전도 이어지고 있다.



    힘야르 왕국의 출현

    그러나 에티오피아에 전해지는 시바 여왕의 이야기는 좀 다르다. 건국신화에서 시바의 여왕은 ‘에티에 아제브’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에티오피아 역사학자들은 시바 여왕이 홍해 건너 예멘 쪽이 아니라 에티오피아에 살았다고 주장한다. 악숨에선 시바 여왕 궁전이라는 고대 건축물이 발굴되기도 했다.

    구약성서를 믿는 에티오피아와 일부 아랍인은 커피나무가 태초부터 에덴동산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에덴동산의 위치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하다. 페르시아만 깊숙이 위치한 쿠웨이트와 이라크 남부 부근이라는 주장이 있으며, 예루살렘 동쪽에서 사우디아라비아와 에티오피아에 걸친 넓은 지역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에 근거해 시바의 후손들은 여왕의 시대에도 커피가 있었으며, 그가 예루살렘을 방문했을 때 솔로몬 왕에게 선물로 주었다고 믿는다. 이런 관점에선 칼디가 예멘인이냐, 에티오피아인이냐는 문제는 사소한 시빗거리일 뿐이다. 시바 시대엔 예멘과 에티오피아가 같은 왕국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오늘날 에티오피아와 예멘이 완전히 다른 나라가 됐을까. 시바 왕국 이후 양측은 서로 다른 길을 걷는다. 예멘은 지형상 비가 오면 물이 고이지 않고 그대로 바다로 흘러나간다. 이 때문에 시바 왕국이 수도인 마리브에 그레이트 마리브 댐을 지었는데, 이것이 예멘을 부흥으로 이끈 원동력이었지만, 쇠퇴를 부른 원인으로도 작용했다. 시바 왕국 말기에 관리 소홀로 댐이 일부 무너져 내리자 사람들이 예멘을 떠나 북부로 이주했다. 힘을 잃은 시바 왕국은 몰락하고 힘야르(Himyar) 왕국(기원전 115년~기원후 522년)이 출현한다. 힘야르는 예멘 남서부 고산지대에 살던 시바 왕국의 유력한 부족으로 같은 셈족이었다. 이들은 유향나무 경작민들로 정착 생활을 했는데, 바로 이 부근이 오늘날 예멘 커피의 주산지다. 그러나 이들이 커피를 먹거나 재배했는지에 관해선 물증이 없다.


    유대교→기독교→이슬람교

    당초 다신교를 흠모하던 시바의 여왕은 솔로몬을 만나면서 유대교로 개종한다. 이후 유대교이던 시바인들은 힘야르 왕국 때 기독교를 접하게 된다. 힘야르의 마지막 왕인 두 누와스(Dhu Nuwas)는 예멘과 에티오피아에 널리 퍼진 기독교를 몰아내기로 작정한다. 예멘 북부 나즈란의 기독교인에게 유대교로 개종할 것을 강요하고, 말을 듣지 않자 불에 태워 죽이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즈음 에티오피아는 나자쉬 황제가 통치하고 있었는데, 그는 기독교로 개종한 상태였다. 나자쉬는 기독교의 수호자인 유스티누스 로마황제에게 선박 지원을 요청했고, 7만여 에티오피아 병력이 530년 원정을 감행했다. 이 과정에서 두 누와스 왕은 바다에 뛰어들어 자결했고 예멘은 에티오피아의 식민지가 된다. 이때 에티오피아 전사들에 의해 커피가 예멘으로 전해졌다고 보는 시각이 있지만, 개연성만 있을 뿐 기록이나 증언은 전하지 않는다.

    이후 페르시아로 도망간 힘야르 왕자의 요청으로 기원후 600년경 페르시아 군대가 예멘에서 에티오피아인을 쫓아냈다. 72년간 지속된 에티오피아의 예멘 통치는 이렇게 막을 내렸다. 이후 마호메트의 이슬람교 창시(610)를 거쳐 631년 이슬람이 예멘을 지배했다. 당시 예멘을 통치하던 페르시아 총독 바단은 이슬람을 받아들이고 무슬림이 됐다. 시바 여왕 시절 하나이던 예멘과 에티오피아는 이렇게 이슬람 국가와 기독교(에티오피아정교) 국가로 갈라섰다. 코란은 시바 여왕을 쉬블림 발키스(Sublime Balkis)라는 이름으로 기록하고 있다. 내용은 유대교의 구약성서와 유사하다.

    커피를 처음 발견한 칼디의 고향이 예멘이냐 에티오피아냐를 따지는 건 부질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커피의 기원을 밝히려는 고단한 여정에서 얻게 되는 소중한 가치는 갈수록 파편화하는 인류로 하여금 동질감을 곱씹게 만드는 명상의 시간이겠다.





    박 영 순

    ● 충북대 미생물학과 졸업, 고려대 언론대학원 석사
    ● 세계일보 기자, 메트로신문사 취재부장, 포커스신문사 편집국장  
    ● 現 인터넷신문 커피데일리 발행인, 커피비평가협회장, 경민대 호텔외식조리학과 겸임교수, 경민대 평생대학원 바리스타과정 전담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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