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5월호

트루먼 행정부, 6·25 이튿날부터 원폭 투하 검토

美 비밀문서로 본 6·25전쟁 원자탄 사용계획

  • 글: 이흥환 미국 KISON 연구원 hhlee0317@yahoo.co.kr

    입력2005-04-25 10:5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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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국이 6·25전쟁 당시 핵폭탄 사용을 검토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과연 어떤 맥락에서 어떤 의도로 관련논의가 진행됐는지에 대해 정작 당사자인 한국에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 최근 해제된 미 국무부 비밀문서를 바탕으로 당시 검토된 핵폭탄 사용계획의 전모를 짚어본다. 기록에 따르면 백악관은 전쟁 발발 이튿날 이미 핵폭탄 사용계획을 논의했으며, 이후 국내·국제정치적 필요가 생길 때마다 핵무기를 전략적 카드로 활용했다.
    트루먼 행정부, 6·25 이튿날부터 원폭 투하 검토

    6·25전쟁 당시 원자폭탄의 운반수단으로 검토됐던 B-29의 공중폭격 모습. <br>6·25전쟁 때 촬영된 것이다.

    지난 3월초 국내 언론매체들은 6·25전쟁 당시 맥아더 유엔군 총사령관이 원자탄 사용을 요구했다는 내용의 기사를 일제히 보도했다. ‘맥아더, 6·25전쟁 때 원자탄 30여 발 투하 요구’ 등의 제목이 달린 이 기사들은, 북한의 ‘통일신보’가 미국 시카고대 브루스 커밍스 교수의 글을 인용해 이 사실을 전했다면서 보도 내용을 요약해 소개했다. 그중 한 기사의 첫머리를 그대로 인용한다.

    “한국전쟁 당시 맥아더 유엔군 총사령관은 총사령관에 임명되자마자 원자폭탄 사용을 요구했고, 그후에도 30여 발의 원자탄을 투하하면 10일 안에 전쟁을 종결시킬 수 있다고 공언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미국은 또 맥아더 사령관을 해임한 뒤에도 원자폭탄 사용을 여러 차례 검토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중략) 이는 맥아더 사령관이 1950년 10월 중공군의 참전을 계기로 핵무기 사용을 검토했고, 맥아더 사령관 해임의 주요사유가 핵무기 사용을 둘러싼 워싱턴 행정부와의 갈등이라는 그간의 알려진 사실과 다소 차이가 있다.”

    이 인용기사는 ▲ 맥아더가 유엔군 총사령관 취임 직후 원자폭탄 사용을 요구했으며 ▲맥아더가 원자탄 30개로 전쟁 종결을 주장했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맥아더 해임 후에도 미국은 원자탄 사용을 수차례 검토했다는 세 가지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세 가지 모두 사실과 거리가 멀다. 우선 마치 맥아더만이 원자탄 사용을 요구했고 워싱턴이 이를 반대했으나 맥아더 해임 뒤에 워싱턴도 원자탄 사용을 검토한 것으로 표현하고 있지만,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

    6·25전쟁 당시 원자탄 사용 논의는 개전 초기부터 정전협상이 진행되던 시점까지 전쟁 기간 전체를 통해 워싱턴에서 시기별로 여러 차례 심각하게 이루어졌다. 또 원자탄 사용에 대한 맥아더의 구체적인 발언내용은 이번에 처음 밝혀진 것이 아니라 이미 알려질 만큼 알려진 사실이다. 정전 이후 지금까지 미국에서 쏟아져나온 6·25전쟁 관련 자료 곳곳에 맥아더의 발언내용이 인용되어 있다.

    더구나 커밍스 교수의 글이나 ‘통일신보’의 인용기사문 어디에서도 인용된 부분이 ‘(처음으로) 밝혀졌다’는 표현은 찾아볼 수 없다. 커밍스 교수가 이 글에서 강조하려 한 점은 6·25전쟁의 참혹상이다. 네이팜 폭탄 사용으로 전투지역뿐 아니라 민간인 거주지역이 초토가 됐고, 미 공군의 화력은 일반인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가공할 만한 것이었으며, 핵무기 사용이 검토됐다는 사실마저도 이제는 ‘잊히고’ 있다는 것이다. 현재의 북미간 핵 갈등의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 6·25전쟁이라는 ‘과거사’를 재조명하고 있을 뿐, 그는 이 글에서 단 한번도 ‘이러이러한 사실이 처음 밝혀졌다’는 말은 쓰지 않았다.



    6월26일의 첫 회의

    그렇다면 진실은 무엇인가. 기록에 따르면 6·25전쟁이 터진 이후 워싱턴에서 ‘원자폭탄(A-bomb)’이라는 말이 처음 거론된 것은 미국 시각으로 6월25일 일요일 저녁이다(한국 시각 6월26일 아침). 오후 7시45분 저녁식사를 겸한 블레어 하우스(미 대통령영빈관) 비밀회의 내용을 기록한 국무부의 1급비밀 해제문서에는 이 회의에 참석했던 미 공군의 밴던버그 참모총장이 원자폭탄 사용에 대해 언급한 내용이 나온다.

    이 회의에는 해리 트루먼 대통령을 비롯해 애치슨 국무장관, 루이스 존슨 국방장관, 오마 브래들리 합참의장, 셔먼 해군 작전참모장 및 밴던버그 공군참모총장 등 고위직 14명이 참석했다. ‘한국의 상황(Korean Situation)’이라는 문서 제목이 시사하듯, 전쟁 발발 이후 한국 상황을 논의하기 위해 열린 첫 번째 고위직 확대회의였다. 문서의 일부 내용을 대화체로 재구성해본다. 러시아 극동함대의 전력을 묻는 트루먼의 질문에 셔먼 제독이 상세하게 브리핑한 직후의 대화다.

    밴던버그 : 북한군을 저지해야 합니다. 소련이 싸움에 끼여들지 않으리라는 가정 아래 행동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북한 공군이 나설 경우 우리 공군력으로 북한군 탱크를 전멸시킬 수 있을 겁니다. 소련 제트기가 행동을 취할 수도 있지만, 그럴 경우 아주 가까운 공군기지에서 발진할 것입니다.트루먼: 소련의 극동지역 공군력은 어떤가?밴던버그: (소련 공군력에 대한 설명 후) 소련 제트기 상당수가 중국 상하이에 주둔하고 있습니다.트루먼: 극동지역에 있는 소련 공군기지를 분쇄할 수 있는가?밴던버그: 시간이 걸리지만 가능합니다. 원자탄을 사용한다면 말입니다.

    회의를 주재한 트루먼은 다섯 가지 지시사항을 하달한다. 그 가운데 네 번째가 바로 “공군은 극동지역 소련 공군기지 전체를 쓸어버릴 수 있는(wipe out) 계획을 수립해야 함. 이는 실행을 위한 지시가 아니라 계획수립을 위한 지시임”이라고 되어 있다. 소련 공군이 6·25전쟁에 개입할 경우 핵 공격을 할 준비를 하라는 지시였다. 서던캘리포니아대 역사학과의 로저 딩먼 교수는 ‘6·25전쟁 시기의 원자탄 외교(Atomic Diplomacy During the Korean War)’라는 글에서 “회의 참석자 가운데 누구도 대통령의 지시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밴던버그는 자국 영토가 공격당하지 않는 한 소련이 드러내놓고 6·25전쟁에 발을 들여놓지 않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이때만 해도 워싱턴은 중국의 개입 가능성에 대해서는 주목하지 않았다. 북한은 러시아의 종속국이지 중국의 종속국이 아니라는 판단이었다.

    6·25전쟁 발발 당시 미국의 핵 능력은 소련을 능가했다. 미국은 핵폭탄 300여 개를 비축하고 있었고, 소련 내 목표물을 향해 핵폭탄 공격을 할 수 있는 폭격기도 292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이에 비해 소련이 1950년 말까지 비축한 핵폭탄은 10~20개였다. 하지만 6·25전쟁 발발 당시 미국은 본토 바깥으로는 한 대의 전략 폭격기도 내보낸 적이 없었고, 미 전략공군사령부(SAC·Strategic Air Command)도 모스크바에 대한 핵공격을 준비하는 데 최소한 3개월의 시간이 걸린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폭격기가 발진할 적절한 전진기지가 없고, 미 본토 바깥에서 작전하는 데 필요한 폭격기에 연료공급이 여의치 않았기 때문이다. 즉각 사용할 수 있는 핵무기가 한반도 인근에는 없었던 셈이다.

    하지만 트루먼 행정부는 6·25전쟁이 일어나자마자 이튿날부터 핵무기 사용 가능성을 전쟁수행계획에 포함시켰으며, 이 계획은 1953년 아이젠하워 행정부로 바뀐 뒤에도 유지됐다. 6·25전쟁에서 원자탄은 언제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문제였지, 사용 여부의 문제가 아니었다. 원자탄의 사용시기와 방법, 사용지역(한반도 안이냐 아니면 중국이나 소련이냐) 등에 내부 이견이 있긴 했지만, 미 군부 지도부든 정치권 지도자든 원자탄이 군사·외교·정치적 면에서 6·25전쟁에 임하는 아주 유용한 도구라는 점만큼은 누구도 부인하지 않았다.

    정치 드라마의 소도구

    워싱턴에서 핵무기는 군사용 전략병기의 기능만 가진 것이 아니었다. 6·25전쟁에서 원자탄은 민주당 트루먼 행정부가 공화당 보수파와 맥아더를 상대로 펼치는 숨막히는 정치 드라마에서 써먹기에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소도구였다.

    트루먼이 핵공격 계획 수립을 결정한 이후 브래들리 합참의장은 핵무기 사용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맥아더 사령관에게 권한을 위임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합참 내부에서는 맥아더에게 권한을 줘서는 안 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고, 결국 브래들리는 합참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트루먼의 백악관이나 애치슨의 국무부, 심지어 펜타곤 군부도 맥아더를 신뢰하지 않았다. 우선 대규모 병력 투입으로 6·25전쟁 확대를 주장하는 맥아더는 외교·군사전략에서 유럽을 우선시하던 트루먼 행정부에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더구나 결정적인 전황이 아닌데도 맥아더가 핵무기를 사용하는 그릇된 판단을 내릴 가능성도 있었다.

    한국에서의 원자탄 사용 여부 및 시기와 방법 등을 놓고 트루먼의 참모들은 심하게 엇갈리는 의견을 내놓았다. 국무부 정책수립팀(PPS·Policy Planning Staff)은 머리를 맞댄 끝에 “모스크바나 베이징이 전쟁에 개입해 군사적 승리를 거둘 가능성이 있을 경우에 한해 원자탄을 사용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핵무기 비축고를 관장하는 특수무기 프로젝트 팀장은 “북한군에 의해 미군이 한반도에서 밀려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면 핵무기를 사용할 수도 있다”는 소극적 사용론을 내놓았다.

    하지만 1950년 7월, 연합군은 낙동강 전선까지 밀려나고, 상황은 악화일로였다. 전쟁을 한반도에 국한시키고 중국과대만의 분쟁을 방지하기 위해 대만해협에 7함대를 배치시킨 전술도 별 소용이 없었다. 7함대 사령관은 중국의 대만 침공을 막으면서 동시에 6·25전쟁을 수행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불평했다.

    7월 중순, 원자탄 사용을 줄기차게 주장하던 밴던버그 공군참모총장과 신중론을 펴던 콜린스 육군참모총장은 함께 도쿄로 날아가 맥아더를 만난다. 콜린스는 이때 ‘군사목표물에 대한 원자탄 사용’이라는 제목의 작전참모부 보고서를 읽은 뒤였다.

    트루먼 행정부, 6·25 이튿날부터 원폭 투하 검토

    더글러스 맥아더 당시 유엔군 사령관.

    3자 회동에서 콜린스는 한국에서의 원자탄 사용 가능성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맥아더는 자신이 원자폭탄 사용을 요청할 권한을 가지고 있으며, 핵사용 명령이 떨어지면 72시간 내에 핵무기를 손에 쥘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당시 맥아더가 머릿속에 그리고 있던 주요 핵공격 목표는 압록강 발전소였다.

    밴던버그는 맥아더에게 중국군이 개입할 경우 퇴치방법을 물었고, 맥아더는 “중국군을 북한지역 내에 고립시키기 위해서는 독특한 방법으로 원자탄을 사용해야 한다”고 대답했다. 밴던버그는 즉각 B-29를 보내겠다고 약속했다.

    두 마리 토끼 노린 워싱턴의 기만술

    워싱턴으로 돌아온 밴던버그는 브래들리 합참의장에게 전략공군사령부의 B-29를 즉시 한반도에 보내 북한 주요 도시를 폭격할 것을 건의한다. 하지만 브래들리는 이를 거부하는 대신 전술 핵폭격기 B-29 10대를 괌에 배치했다.

    트루먼 행정부는 핵폭격기 B-29를 괌에 배치하기 이전에도 영국과의 사전 조율을 거쳐 유럽에 배치한 바 있다. 소련을 겨냥한 것이었음은 물론이다. 영국은 처음에는 미국의 핵능력 과시가 소련을 자극할 수 있다고 염려했지만, 사실상 이 핵폭격기에는 핵탄두용 핵심부품이 실려 있지 않았다. 1948년 베를린 봉쇄 때 써먹은 일종의 기만전술이었다.

    트루먼 행정부, 6·25 이튿날부터 원폭 투하 검토

    해리 트루먼 당시 미국 대통령.

    B-29의 괌 배치는 정치적 의도가 깔린 군사전략이었다. B-29를 한국에 가까운 서태평양에 배치함으로써 브래들리와 트루먼은 두 가지 효과를 노렸다. 하나는 중국을, 하나는 공화당과 맥아더를 겨냥한 것이었다.

    우선 이를 통해 백악관이 중국에 보낸 강력한 신호는 ‘대만을 넘보지 말라’는 것. 동시에 장제스에게는 ‘중국 본토를 공격할 생각을 하지 말라’는 암시였다(이런 의도가 중국에 정확하게 전달됐는지는 지금도 논쟁의 여지가 있다).

    다른 한편, 당시 맥아더는 워싱턴에 인천상륙작전을 건의해놓고 답변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맥아더의 구상을 반신반의하던 워싱턴은 확실한 답을 내놓지 않았고, 맥아더는 불평을 털어놓았다. B-29의 괌 배치는 맥아더를 다독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트루먼 행정부는 맥아더뿐 아니라 공화당에도 강력한 전쟁의지를 보여준 셈이었다. 공화당은 당시 기회가 있을 때마다 트루먼 행정부의 동아시아 정책이 미적지근하다고 공격해댔다. 트루먼의 대중적 인기는 하락세였고, 확전을 주장하는 맥아더는 대중의 인기를 독차지하고 있었다.

    괌에 배치된 B-29는 압록강을 넘은 중국군의 공세가 시작되기 전에 미국으로 돌아왔다. B-29가 돌아오기 전에 국무부는 미 공군의 중국 내 폭격 목표물 선정에 가장 도움이 되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검토하고 있었다. 단순한 핵능력의 세(勢) 과시 차원에만 머물렀던 것은 아니다.

    ‘필요한 모든 수단’

    1950년 11월, 중국군의 한국전 개입으로 원자탄 사용 위기는 또 한번 고조된다. 6월 트루먼의 지시사항과 7월말 비공개적인 B-29 이동은 기본적으로 적에 대한 억제력 발휘 차원이었고, 워싱턴은 이 억제전략이 효과가 있었다고 보았다. 따라서 이후로도 원자탄을 이용한 억제력의 효용성은 여전히 유효할 것이라 판단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중국군의 개입은 6·25전쟁의 양상을 완전히 뒤바꿔 놓았다. 트루먼은 이번에는 공개적으로 핵무기 사용에 대해 언급했다. 11월30일 기자회견에서 트루먼은 “필요한 모든 수단을 사용하겠다”고 단호한 입장을 보였다. 핵무기 사용 가능성은 “항상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 기자회견에서 트루먼은 ‘현지 군사령관의 책임 아래(in charge of)’ 핵이 사용될 것이라 덧붙였고, 이 한마디는 미 정계는 물론 국제사회에 걷잡을 수 없는 파장을 몰고 왔다. 핵무기 사용의 최종결정권자인 대통령이 그 책임을 ‘현지 군사령관’에게 떠넘긴 셈이었기 때문이다. 트루먼의 숨은 의도를 궁금해하는 영국의 애틀리 총리가 워싱턴으로 날아왔고 워싱턴의 정치판이 발칵 뒤집혔으나 더는 이렇다 할 진척이 없었다.

    하지만 펜타곤은 한반도에서 핵무기 사용은 불가능하다는 잠정적인 결론을 내려놓고 있었다. 군 전략가들이 내세우는 사용불가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 중국군 개입 이전에도 핵무기 사용을 검토했으나 6·25전쟁에 대한 중국의 태도와 의도가 분명하지 않았으며, 적군(북한군)의 소규모 부대를 상대로 핵무기를 사용하는 것이 전술적으로 바람직한지 확신할 수 없었다. 게다가 대규모의 중국군이 한반도에 투입된 후 펜타곤의 합참전략수립위원회(JSPC)에서는 중국군을 억제하기보다는 방어하는 수단으로 핵무기를 사용하는 것이 합당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둘째, 합참은 한국전 상황이 반드시 핵무기를 사용해야 할 정도로 절박한가에 대해 명확한 답을 갖고 있지 않았다.

    이번에도 합참은 두 명의 장성을 도쿄로 보낸다. 전술 핵무기 사용을 탐탁지 않게 여기던 콜린스 육군참모총장과소련을 상대로 핵무기를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던 찰스 케벌 공군 정보참모장이 그들이었다. 맥아더는 한국 상황이 안정을 되찾아가고 있으며 핵무기 사용결정을 연기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콜린스 총장은 워싱턴에 돌아와 한국전에서는 핵무기가 필요하지 않다고 아예 공개적으로 언급해버렸다.

    “원자탄 수십개로 만주 오염시키면…”

    워싱턴은 핵무기를 사용할 경우 치러야 할 대가도 계산했다. 유엔을 중심으로 한 동맹관계가 깨질 가능성, 아시아에서 미국의 신뢰도 추락, 중국과의 전면전 가능성 등….

    결국 핵 사용에 대한 대통령의 단호한 의사 표명에도 불구하고 트루먼 행정부의 고위참모와 군 전문가들은 한국에서의 핵무기 사용에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1951년 1월에는 맥아더조차 퇴각하는 유엔군을 방어하기 위해 핵무기를 전진 배치하는 것이라면 받아들일 수 없다는 의사를 밝혔다.

    하지만 맥아더가 전선을 중국으로 확대한다는 지론을 굽힌 것은 아니었다. 맥아더가 1950년 12월24일자로 워싱턴 합참에 보낸 전문은, 중국 해안을 봉쇄하고 군수품을 공급하는 중국 내 산업시설을 함포 사격과 공습으로 휩쓸어버릴 것을 제안하고 있다.

    맥아더는 또 펜타곤에 중국 내 폭격목표물 명단을 보내면서, 이 목표물을 폭격하기 위해서는 34개의 원자탄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 가운데 4개는 대규모의 중국지상군에게 사용하려는 것이었고, 또 다른 4개는 ‘적 공군력이 밀집된 주요 기지’를 목표물로 한 것이었다. 당시 한반도 내에는 공군력을 밀집시킬 만한 주요 기지가 없었으므로 결국 맥아더가 언급한 목표물은 중국, 즉 만주지역의 공군기지를 일컫는 것이었다.

    만주지역 핵폭격 구상과 관련해 존스홉킨스대 작전연구실의 육군 비밀연구보고서는, 중국군의 당시 총 병력이 120개 사단이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34개의 핵폭탄으로는 도저히 중국군을 제압할 수 없으며 360개의 원자탄을 사용할 경우에도 중국 총병력의 30%에만 피해를 줄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잠시 나중의 이야기를 덧붙이자면, 유엔군 총사령관직에서 해임되어 자연인으로 돌아와 있던 맥아더는 1952년 12월17일 공화당 대통령후보로 나선 아이젠하워에게 자신이 염두에 두었던 한국에서의 핵무기 사용구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얘기했다.

    “만주 진입지역에 30~50개의 원자탄을 떨어뜨린다. 우리 뒤로 동해에서 서해에 이르기까지 코발트 방사선 막을 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최소 60년 동안 한반도 내에는 북쪽에서 쳐내려올 땅이 사라지므로 소련으로서는 할 일이 없어질 것이다.”

    ‘코발트 방사선’이란 플루토늄 재처리를 통해 얻어지는 코발트 60을 말한다. 맥아더의 구상은 공상이 아니었다. 이미 워싱턴의 합참은 만주 국경지역의 북쪽에 방사선 방역선(radioactive cordon sanitaire)을 형성하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이 계획은 미 하원에서도 제안된 바 있다. 발의자는 앨버트 고어 시니어 하원의원(2000년 미 대선의 민주당 후보 앨 고어의 부친)이었다. 고어 시니어 의원의 고향 테네시주에 오크리지 원자력 실험실이 있었던 것으로 미뤄볼 때 그는 오크리지 실험실의 핵 과학자로부터 코발트 60 방역선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들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최대의 위기

    1951년 봄부터 워싱턴에서는 정전협상에 대한 얘기가 조심스러우면서도 진지하게 거론되기 시작한다. 트루먼과 맥아더의 신경전도 점차 노골적인 대립양상을 보였다. 백악관이 정전협상에 대한 대통령 발표문을 다듬고 있던 순간에 맥아더는 공개적으로 중국을 향해 “더 이상 관대할 수만은 없다”고 포문을 열어 트루먼과 그 참모들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트루먼의 지지도는 26%까지 떨어져 있었다. 워싱턴이 군 정보기관과 CIA의 정보보고를 바탕으로 소련군이 증강되고 있다고 입을 열면, 맥아더는 사실이 아니라고 곧장 맞받아쳤다. 중국군 비행기가 만주기지에서 대기상태에 들어갔으며, 소련 잠수함이 블라디보스토크에 집결했고, 소련군 일부가 사할린 남부로 이동했다는 정보가 트루먼에게 보고됐다. 그러나 맥아더는 공개적으로 이를 부인했다.

    1951년 4월 초 트루먼은 마침내 세 번째 결심을 한다. 완전한 핵 탄두를 탑재한 B-29 전술 핵폭격기를 태평양에 배치하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4월7일, 99 중형폭격기 편대에 괌으로 이동시킬 원자탄을 탑재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괌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최종 폭격명령이 떨어지면 오키나와로 날아갈 폭격기 편대였다.

    이때 트루먼은 맥아더를 해임하겠다고 결심한 상태였다. 브래들리 합참의장에게도 이미 자신의 의중을 통보했다. 핵폭격기 배치는 트루먼에겐 물러설 수 없는 선택이었다. 만약 트루먼이 핵폭격기를 배치하지 않을 경우 결과적으로는 현지 사령관 맥아더의 말(중·소군의 증강이 없다는)이 맞다는 것을 인정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핵폭격기를 배치한다는 것은 현지사령관의 판단이 틀렸다는 사실을 방증하는 것이고 따라서 맥아더를 해임할 좋은 구실이 될 수도 있는 조처였다.

    결국 트루먼은 1945년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폭 투하 이후 처음으로 미 본토 밖으로 전술 핵폭격기를 내보낸 대통령이 됐고, 맥아더는 유엔군 총사령관 자리에서 해임됐다. 괌에 B-29를 배치한 후 워싱턴은 여러 갈래로 핵무기 사용 가능성을 높여 나갔다. 전략공군사령부는 핵무기 지휘팀을 도쿄로 파견했고, 지휘사령관은 도쿄에 머물렀다. 언제 있을지 모를 핵공격을 총괄하기 위해서였다. 트루먼은 맥아더의 후임인 리지웨이 장군에게 한반도 바깥에서의 핵 보복공격에 따른 지휘권을 넘겼고, 공화당 지도부에는 핵무기를 사용한다는 의사를 분명하게 밝혔다. 한편 워싱턴에서는 중국측에 미국의 의도를 분명히 전달하기 위해 홍콩에 밀사를 파견했다. 최대 위기였다.

    핵무기 없었으면 정전협정도 없다?

    이렇듯 트루먼이 초강경 조치를 취하며 강하게 압박하자 반응이 나타났다. 소련에서는 정전협상을 타진하는 신호를 보냈고 공세 일변도였던 중국군도 방어세로 변했다. 이러한 흐름을 확인한 백악관이 B-29를 미 본토로 귀환하도록 한 것은 1951년 6월이었다. 주 유엔 소련대표가 유엔에서 정전협상을 위한 문이 열려 있다는 내용의 연설을 하기 직전이었다.

    1953년 아이젠하워 정부가 들어선 이후 한반도의 핵위기는 주춤하는 듯했다. 아이젠하워 정부는 핵무기 사용 가능성에 관한 한 트루먼 정부 때보다 훨씬 신중한 자세를 취했다. 소련의 핵보복 능력이 커졌고, 해외 전진기지가 적절치 못한 점 등 핵무기 사용에 따른 제약도 여전했지만, 무엇보다 아이젠하워와 덜레스 국무장관의 핵무기에 대한 입장이 트루먼-애치슨 때와는 차이가 있었다. 아이젠하워는 선거공약대로 한국을 방문한 자리에서조차 핵무기 사용계획인 작전계획 8-52(Oplan 8-52)에 대해 언급을 꺼리는 태도가 역력했다. 핵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한국전에서 핵무기를 사용할 경우 미국의 핵 비축고 유지에 영향이 있다는 의견이 대두되기도 했다.

    그러나 아이젠하워 정부에서 핵무기의 사용 가능성이 완전히 배제된 것은 결코 아니었다. 만약 판문점에서 정전협상이 진척되지 않았다면, 즉 워싱턴이 수용할 만한 협상내용이 도출되지 않았다면 6·25전쟁은 핵전쟁으로 비화했으리라는 지적도 있다. 결국 아이젠하워 행정부도 트루먼 때와 마찬가지로 정전협상을 진행하면서 핵무기의 유용성을 충분히 활용한 셈이다.

    반면 학계 일부에는 미국의 이러한 핵 억제력이 실제로 중국에 먹혀들었다고 보기는 힘들다는 주장도 있다. ‘아이젠하워’의 저자 앰브로우즈나 ‘6·25전쟁’의 저자 버튼 카우프만 등은 미국의 핵위협이 사실상 없었다는 견해를 갖고 있다. 중국은 이미 미국의 핵능력에 대해 충분히 알고 있었으며, 아이젠하워가 핵을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기에 미국의 핵위협은 중국의 행동을 결정짓는 데 큰 영향을 끼치지 못했으리라는 것이다.

    어쨌든 아이젠하워는 1953년 5월 소련의 일본 공격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국가안보회의의 핵 비상계획을 승인했지만, 끝내 핵무기의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지는 않은 채 종전을 맞았다. 3년 동안 무겁게 한반도 상공을 떠돌던 핵전쟁의 그림자가 마침내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핵무기, 그 천의 얼굴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미국이 6·25전쟁에서 핵무기 사용 여부를 논의한 목적은 한 가지가 아니었다. 군부 강경파의 핵사용 계획을 백악관이 만류했다는 식으로 단순화할 수 없음은 이미 충분히 확인했다. 이 시기에 핵은 국내 정치·외교·군사전략용 등 다양한 방식으로 활용됐던 것이다. 작게는 “필요한 모든 수단을 강구하겠다”는 ‘언어폭격’에 동원되기도 했고 핵폭탄의 핵심부품을 빼놓은 채 폭격기를 배치해 억제력을 발휘하는 전술로도 쓰인 적도 있었으며, 실제로 핵탄두를 탑재한 폭격기를 태평양에 배치해 상대방에 대한 압박을 극대화하는 수단도 됐다.

    공화당과 맥아더를 상대로 한 트루먼의 정치 드라마, 펜타곤 장성들의 대(對)아시아 군사전략, 펜타곤 군부와 국무부의 세력 대결, 중국 마오쩌둥과 대만 장제스의 대립, 스탈린의 대미 견제…. 숨가쁘게 돌아가던 1950년대 미국의 국내·국제정치 회전판의 중심축에 바로 6·25전쟁의 핵무기가 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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