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2월호

“남편이 모는 기차 타고 北 고향땅 달리고 싶어요”

1987년 ‘일가 탈북’ 김만철 막내딸 김광숙 부부

  • 송홍근 기자 | carrot@donga.com

    입력2015-01-22 11: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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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 탈북 인사가 말했다. “김만철 씨 막내딸 기억해요? 그 꼬맹이 광숙이가 남편 잘 만나 고생 다 끝났어요.” 광숙, 용수 씨는 따뜻하고 행복하게 꿈을 키우며 산다.
    “남편이 모는 기차 타고 北 고향땅 달리고 싶어요”

    한용수·김광숙 부부 .

    1월 8일 김광숙(42) 씨가 말했다.

    “남편이 20년 동안 직장을 성실히 다녔습니다. 대학원에 진학해 공부를 더 한다는데, 보태주지는 못해도 방해는 말아야죠. 열심히 도와드려야죠. 남편 뒷바라지 잘하려고요.”

    남편 한용수(40) 씨는 웃었다.

    “나, 결혼 잘했죠? 아내에게 더 잘해야 할 것 같아요.”

    광숙 씨는 1987년 1월 가족 10명과 함께 탈북한 김만철 씨의 막내딸이다. 2000년 용수 씨와 결혼했다. 남편은 서울지하철 1, 2, 3, 4호선을 운영하는 서울메트로에서 일한다. 3월부터 한양대 대학원에서 철도 시스템을 공부한다.



    광숙, 용수 씨가 사는 경기 수원시 아파트는 아늑했다. 스물네 평. 2009년 구입했다. 광숙 씨가 말했다.

    “내 집 장만해 처음 이사왔을 때는 잠도 잘 못 잤어요. 침대에 누우면 천장이 아니라 하늘이 보이는 것 같았어요. 정말로 내 집 맞나 싶었죠. 빚을 안고 샀지만, 전셋집처럼 2년 살다 이사할 일도 없고요.”

    처가 식구들의 트라우마

    용수 씨는 “딸이 방이 생겼다며 신 나게 쓸고 닦던 게 생각난다”고 했다. 딸은 올해 중학교 2학년. 광숙 씨에게 남편 자랑을 해달라고 했다.

    “자랑요? 하하하. 직장 생활할 때 성실성 같은 거 말하면 되는 거죠? 결혼하고 아이 낳으면 성실하게 사는 게 기본이잖아요. 그런데 북한에서 온 사람들이 어떤지 잘 알잖아요. 한두 명이 아주 성실하면 100명이 그렇지 못한 게 현실입니다.”

    부부의 살림살이를 들여다보게 된 것은 지난해 11월 한 탈북 인사가 “탈북자 대부분이 한국에 적응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귀감이 되는 부부가 있다”고 말하는 것을 들어서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김만철 씨 막내딸 기억해요? 그 꼬맹이 광숙이가 남편 잘 만나 고생 다 끝났어요. 수원 집에 다녀왔는데 정말로 행복하게 살더군요. 용수가 정말 성실하거든요. 이런 말하기 뭣하지만, 나고 자란 체제 탓인지 성실한 사람이 드문 게 사실이에요.”

    광숙 씨는 15년 넘게 근황이 알려지지 않았다. 용수 씨의 설명이다.

    “아내는 물론이고 처형, 처남들이 어릴 적 트라우마가 굉장히 컸나봐요. 언론이 일거수일투족을 다 보도했잖아요. 언론을 굉장히 싫어해요. 얼마 전에도 KBS가 다큐멘터리를 찍겠다는 걸 거절했습니다.”

    김만철 씨 가족이 북한을 탈출해 표류하다 일본에 도착하기 하루 전인 1987년 1월 19일, 경찰은 닷새 전 일어난 박종철 군 고문치사를 인정했다. 11명 일가족 집단 탈북은 분단 후 처음 일어난 일로 일대 사건인 데다 군사정권 처지에선 박종철 군 사망에 쏠린 시민의 관심과 시선을 분산시킬 기회였다.

    “회사 선배들이 아내의 어린 시절을 저보다 더 잘 알더군요. 선배들이 아내가 한국에 와서 다리 수술을 받았다기에 ‘너 다리 수술 받았니?’ 물어봤죠. 그랬더니 ‘받았어요’라는 겁니다.”

    광숙 씨는 1987년 2월 8일 가족과 함께 한국에 도착했다. 이듬해 서울 방이초등학교 6학년에 입학했다. 1989년 1월 27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사진 속 광숙 씨 얼굴이 앳되다. 용수 씨가 웃으면서 말했다.

    “결혼할 때까지만 해도 예쁘고 귀여운 데가 남아 있었는데 지금은 안 귀여워요, 하하.”

    “즐겁게 사는 장인어른”

    1987년 1월 15일 새벽 1시, 함경북도 청진 바닷가에서 11명이 배에 올랐다.

    “장인어른 말씀이, 정한 목적지가 따로 없었다고 해요. 무인도 같은 곳에서 식구끼리만 살고 싶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농사지을 씨앗도 다 준비했고요. 군사지도 구하고, 해도(海圖) 보는 법 배우고, 배가 고장 나면 어떻게 고치는지 익히고 그러셨답니다. 지금도 자랑 삼아 말씀하세요. 좋은 말로 하면 모험심이 많은 분이고, 안 좋은 말로 하면 무모한 데가 있어요. 일본에서 대만으로 추방됐을 때만 해도 한국으로 올 생각이 크지 않았답니다. 1983년 전투기를 몰고 귀순한 이웅평 씨가 대만으로 날아와 설득했다고 해요. 장인 말씀이 전두환 당시 대통령이, 한국에 오면 병원도 지어주고(김만철 씨는 북한 의사 출신) 하고 싶은 것 다 하게 해준다고 약속했다더군요.”

    “남편이 모는 기차 타고 北 고향땅 달리고 싶어요”

    부부의 가족 앨범.



    김만철 씨 가족은 평범하게 살아간다.

    막내아들 광호(40) 씨는 고등학교 1학년 때 미국 유학을 떠나 캘리포니아대(UCLA)를 졸업한 후 서울대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미국에서 박사 공부를 하려 했으나 김만철 씨가 사기를 당해 재산을 잃으면서 한국에 돌아왔다. 일본인 여성과 결혼해 현재 학원 강사로 일한다. 미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청소년들에게 수학을 영어로 가르친다.

    장남 광규(50) 씨는 서울 잠실에 살면서 LH공사에 다닌다. 차남 치일(43) 씨는 중소기업에서 일한다. 장녀 광옥(45) 씨는 경기 고양시 일산에 살면서 버스운전을 한다. 광옥 씨 남편은 트레일러 기사다. 광숙 씨 외할머니 허문화 씨는 2011년 1월 92세로 별세했다.

    김만철 씨는 수차례 사기를 당해 정착금과 강연 등으로 번 10억 원가량의 재산을 날렸다. 경남 남해에 기도원을 세웠는데 목사가 기도원을 담보로 수억 원을 대출받고는 필리핀으로 도주했다. 지인 소개로 거액을 들여 구입한 땅이 알고 보니 가치가 형편없는 곳인 적도 있다. 그는 경기 광주시에서 농사를 지으며 산다. 광숙 씨는 주말마다 부모 댁을 찾는다.

    “목사도 사기 치고, 권사도 사기 치고, 여러 번 사기당했습니다. 그래서 장인어른이 아주 힘들게 사는 것으로 아는 분이 있던데, 그렇진 않아요. 농사지으면서 즐겁게 사십니다. 종교기관이 소유한 땅인데, 그쪽에서도 어차피 놀리는 땅이라 배려를 해줬습니다. 광주에 가면 닭도 잡아먹고, 삼도 캐 먹습니다. 산에 장뇌삼 씨앗을 뿌렸거든요. 자식들도 다 잘 컸고요

    장인 차는 쏘나타, 장모님 차는 코란도 스포츠예요. 나이가 있어 운전하는 게 위험하니 그만두라 말씀드려도 안 들으십니다. 장인이 재미난 분인 게, 멜라민 우유 파동이 났을 때는 염소를 사서 직접 젖을 짜 드셨어요. 언젠가는 장인어른이 창고에 보트와 모터, 경유 4t, 벼 형태의 쌀 8t을 보관하고 있길래 ‘이건 뭡니까?’ 여쭤보니 ‘전쟁 나면 먹고 살아야지, 하다하다 안 되면 배 타고 도망가야지’라고 말씀해 웃은 기억도 납니다.”

    “남편이 모는 기차 타고 北 고향땅 달리고 싶어요”

    1989년 1월 27일자 동아일보. ‘오는 2월 국민학교를 졸업하게 되는 김광숙양’이라는 사진 설명 아래 “역사 과목 달라 당황…탤런트나 의사 되고 싶어”라는 제목이 붙었다.

    첫 탈북인 부부

    용수 씨는 1995년 북한군에 징집됐다가 휴전선을 넘어 귀순했다.

    “강원도 창도군에서 근무했습니다. 양구, 화천 맞은편 1제대 보병으로요. GOP대대를 1제대라고 부릅니다. 국군 GP에 도착하는 데 3시간 걸렸어요. 산세가 험해 감시를 피하기 쉬웠습니다. GP에 도착해 문을 두들겼죠. 몇 년 전 ‘노크 귀순’이 문제가 됐는데 10년, 20년 전에도 다 노크 귀순이었어요. 그때만 호들갑을 떤 거예요. GP에 도착할 때까지 아군이 알아챌 수가 없습니다.”

    광숙 씨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법무사 사무소에서 일하다 용수 씨를 만났다. 2000년 5월 한 이벤트 회사가 탈북인을 위해 연 미팅 행사 때다. 용수 씨가 2호선 방배역에서 역무원으로 일했고 광숙 씨 사무실은 서초동이었다. 용수 씨는 “말 통하는 이성을 만난 게 무엇보다 반가웠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두 사람은 운명의 짝을 만난 것처럼 연애를 시작했다. 그해 9월 데이트가 늦게 끝나 용수 씨가 김만철 씨 집으로 광숙 씨를 바래다줬다. 자정이 넘은 시각이었다.

    “아내가 집에 들어와 커피 한잔 마시고 가라는 겁니다. 어른들은 주무시니 걱정하지 말라면서. 몰래 들어갔는데, 장인이 떡하니 서 계신 겁니다. 둘이 서로 좋아하느냐고 물으시더군요. ‘그런 것 같습니다’라고 했더니 ‘방 하나 비었으니 오늘부터 여기서 살아’라고 하셨어요. 장인과는 전부터 안면이 있었습니다. 얼떨결에 결혼한 셈이죠. 탈북자 부부는 우리가 처음이에요. 그때까지는 북한에서 온 사람들끼리 결혼한 예가 없었어요.”

    두 사람은 한 달 후(2000년 10월 28일) 서울 종로구 구기동 이북5도청에서 화촉을 밝혔다. 광숙 씨는 이렇게 말했다.

    “남편 직장이 탄탄하잖아요. 빨리 붙잡아야죠, 하하. 일하는 곳이 가까워 자주 만나다보니…. 결혼 적령기였고요. 용수 씨가 혼자 한국에 온 터라 친척도 없고 외로운 처지였습니다. 저보다 더 외로워하는 것 같았어요. 남편이 저보다 두 살 아래인데, 연하인 것은 별로 생각을 안 했어요. 주위에서도 남편을 다 좋게 봐주셨거든요.”

    광숙 씨는 연하 남편에게 존댓말, 용수 씨는 연상 아내에게 반말을 한다.

    “아내가 부모님 사는 모습을 봐서 그런 것 같습니다. 북한이 더 가부장적이에요. 가끔 딸이 ‘아빠, 누나한테 그렇게 하면 안 돼’라고 놀리곤 하죠.”

    광숙 씨는 “존댓말을 썼다, 안 썼다 한다”고 멋쩍어했다.

    용수 씨 고향은 함북 연사군, 광숙 씨는 함북 청진시다. 어릴 적 같은 혁명유적지로 견학 간 기억, 즐겨 하던 놀이, 부르던 노래, 학교생활 등 공유하는 추억을 얘기하며 사랑을 나눴다. 광숙 씨는 이렇게 말했다.

    “어릴 적 한국에 왔지만, 청진에서의 일이 지금도 다 기억나요. 동네 모습, 학교 다니면서 친구들과 있었던 일이 오롯이 떠오릅니다. 용수 씨와 함께 있으면 편했어요. 서로 비슷한 추억을 가진 게 참 좋았습니다.

    둘 다 한국 생활을 오래해서 이제는 사투리를 안 씁니다. 사투리가 오히려 어색해요. 일부러 함경도 말로 대화하면서 서로를 웃길 때가 있습니다. 엉터리 사투리가 나와 배꼽을 잡기도 하고요.”

    “남북 철도 연결 참여하고파”

    용수 씨는 1996년 서울메트로에 입사해 구로공단·방배·잠실역에서 역무원으로 일하다 2003년 승무원으로 전직해 2호선 전동차 차장으로 일한다. 기관사 면허를 갖고 있다.

    “예전에는 탈북자 특채 제도가 있었습니다. 운이 좋았죠. 60세로 정년이 연장돼 근속 40년을 채울 것 같습니다. 어린 나이에 입사해 막내 생활을 10년 동안 했습니다. 1997년 입사자가 있는데, 나이가 저보다 많아 선배 노릇을 못했거든요. 외환위기 이후 공채가 끊겼다가 2006년 신입사원을 뽑았습니다.

    고등교육 받아도 직장 잡기가 어렵잖아요. 예전엔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출신은 찾아보기 어려웠는데, 요즘에는 있어요. 좋은 대학 졸업하고 왜 우리 회사 들어왔느냐고 물으면 ‘선배님, 이런 직장 없어요’라고 답하더군요. 서울메트로가 첫 직장입니다. 첫 사회고요. 북한에서 왔다는 꼬리표를 떼지 못하잖아요. 20년 일하면서 지각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손가락질 받지 않으면서 일해야 나중에 북한에서 온 사람들에게 마이너스가 안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용수 씨는 2010년 늦깎이로 대학 공부를 시작했다. 명지전문대 철도전기과에 입학했다. 같은 학교 전기과를 2년 더 다녀 학점은행 제도를 통해 학사학위를 받았다. 가슴속에 품은 꿈을 털어놨다. 조심스러운 목소리였다.

    “통일을 이루려면 경제 교류가 중요한 것 같아요. 기회가 닿으면 남북철도 연결사업에 참여하고 싶습니다. 석사 공부를 하면서 기술사 시험을 준비할 계획이에요. 박사 공부도 해보려고 합니다. 북한 출신이라는 배경도 있으니 기회가 주어질 것도 같고요. 역량을 갖춰놓아야 꿈을 이룰 기회가 왔을 때 요구할 수 있겠죠.

    딸이 결혼해 낳을 손자에게 할아버지가 통일에 작게나마 기여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내가 모는 기차가, 내가 연결한 철도를 달리는 것보다 더 이상적인 일은 없습니다. 고향 땅에도 철로가 들어갑니다. 기차를 타고 고향에 가고 싶습니다. 꿈이 현실이 되기를 바랍니다. 꿈을 이루지 못해도 공부를 더 하면 몸담은 조직에 도움이 될 것이고요.”

    “코피 터져봐야 정신 차려”

    “남편이 모는 기차 타고 北 고향땅 달리고 싶어요”

    한용수 씨는 한국에 적응하지 못해 힘들어하는 탈북자들이 안타깝다고 했다.

    용수 씨는 광숙 씨와 결혼할 때 무일푼이었다.

    “탈북한 고향 선배에게 돈을 빌려줬다가 다 떼였습니다. 탈북자는 한 번쯤 사기도 당해보고 망해볼 필요도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야 정신을 똑바로 차립니다. 일확천금을 노리거나 불성실한 사례가 있어요. 적응하면서 코피 터져봐야 정신을 차립니다.

    농협, 한전 같은 좋은 직장에 취직한 선배들이 만족을 못하고 큰돈 벌겠다고 장사 시작했다가 하나같이 망했습니다. 젊은 친구들은 선배들의 전철을 밟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과거보다 사정이 더 나빠진 것 같아요. 고급 승용차부터 사려는 녀석들을 보면 너도 한번 망해봐야 정신 차리겠구나 싶죠.”

    용수 씨는 선배에게 자신 명의의 신용카드를 건네주고 마이너스 통장도 만들어줬다. 선배는 교도소를 수시로 들락거렸다. 교도소에서 나오면 용수 씨를 찾았고 돈을 빌려 쓴 뒤에는 다시 교도소에 갔다. 용수 씨는 결혼 후에도 한동안 이 선배에게 돈을 계속 빌려줬다. 2002년에는 아내와 이 일로 크게 다퉜다. 광숙 씨가 “도저히 더는 못 살겠다”고 했다.

    광숙 씨는 “언젠가 가족을 다시 만날 그날을 위해 열심히 돈 벌고 저축해야 하는데, 남편이 외로워서 고향 선배에게 다 줬던 것 같다. 한국에서 오래 살았는데도 외로움을 느끼는 모양이다”라면서 이렇게 말했다.

    “남편이 이제는 외로운 것에도 익숙해졌으면 좋겠습니다. 남편 선배가 교도소에서 나오면 갈 데가 없다면서 주민등록을 우리 집으로 옮겨놓곤 했습니다. 그러다 출소 후 3일 만에 교도소에 다시 간 적도 있어요. 호주로 일하러 갔는데 빌린 돈 이자를 보내주겠다고 하더니 감감 무소식이에요.”

    용수 씨는 “수원 아파트, 자동차 등 전 재산이 광숙 씨 명의로 돼 있다”면서 “아내가 힘들었죠. 돈 퍼주고, 날려 먹고…”라고 말끝을 흐렸다. 급여 통장을 광숙 씨에게 맡기고 매달 용돈 50만 원을 받는다. 광숙 씨가 웃으면서 말했다.

    “용수 씨가 저처럼 못되질 않아서, 어려운 사람을 보면 없어도 다 퍼주는 스타일이에요. 경제권을 넘겼다간 큰일 날지도 모릅니다.”

    용수 씨는 북한에 사는 형, 누나를 찾으려고 수소문했으나 아직 연락이 닿지 않았다. 형, 누나의 주소를 얻으려 중국 칭다오를 찾아 북한의 가족을 찾아주는 사람을 만났으나 성과는 없었다. 상당수 탈북자가 북한의 가족과 연락하면서 지낸다. 돈을 송금하는 경우도 많다.

    “군에 있을 때 누나가 시집을 갔고, 형도 군인이어서 주소를 모릅니다. 그래서 가족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처갓집이 부럽냐고요? 이젠 한국 생활을 오래해 그렇게 외롭지는 않아요. 한국, 북한에서 반반 살았죠. 외국 여행 갈 때 대한민국 여권이 자랑스러웠는데 요즘 정치권을 보면 부끄럽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람들 성격도 너무 급해진 것 같아요. 처음 왔을 때보다 인성이 나빠졌어요.”

    광숙 씨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여행이다. 지난해에도 어머니, 언니 등과 함께 미국, 일본을 다녀왔다.

    “돌아다니는 것을 참 좋아해요. 가고 싶은 도시가 생기면 책자, 인터넷으로 자료를 섭렵하면서 공부를 합니다. 남편이 이런 성격을 잘 알아선지 두말없이 보내줍니다.”

    용수 씨가 곶감을 내왔다.

    “처갓집 뒷산에서 딴 감을 말린 겁니다. 먹어보세요. 파는 것과 달라요. 어릴 적 먹던 그 곶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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