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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구는 내 인생의 기초공사”

‘영원한 농구인’ 최·희·암 고려용접봉 사장

  • 이영미 | 스포츠 전문기자 riveroflym22@naver.com

“농구는 내 인생의 기초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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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7년째 철재회사 근무…능력 인정받아 사장 승진
  • ● “최 사장? 아직도 나는 어색해”
  • ● ‘농구’ 아닌 ‘공부’로 연세대 진학
  • ● “이상민, 서장훈이 있어 최희암이 있었다”
“농구는 내 인생의 기초공사”

이영미

고려용접봉(KISWEL) 최희암(61) 사장. 7년 세월이 흘렀는데도 ‘최희암’ 이름 뒤에 따르는 호칭이 ‘감독’이 아니라 ‘사장’이란 건 여전히 부자연스럽다. 그는 연세대 명감독으로 ‘농구대잔치’를 부흥시켰고 이후 프로농구 모비스와 전자랜드를 이끌었다. 2009년 전자랜드를 떠난 뒤 그해 11월, 전자랜드 자매회사인 고려용접봉 홍민철 회장의 권유로 중국 다롄의 고려용접봉 현지법인을 맡게 된다.
2014년 귀국해서는 고려용접봉 본사가 있는 경남 창원공장 사장으로 부임했다. 쇠를 다루는 회사이다 보니 건설 현장, 조선소, 자동차 공장 등을 돌며 새로운 영업 파트너를 구축한다. 40년 이상 농구 코트를 누빈 농구인이 용접할 때 필요한 철재 제조회사 사장으로 자리를 잡은 것이다. 물론 가슴속 한켠에는 여전히 농구에 대한 애정이 꿈틀대고 있다.



농구감독 최희암

“농구는 내 인생의 기초공사”

1월 4일 ‘신동아’와의 인터뷰에서 최희암 고려용접봉 사장은 “농구장은 마음의 고향 같은 곳”이라고 말했다. 동아일보

1980~90년대 겨울 스포츠의 꽃은 단연코 농구였다. 프로농구가 출범하기 전에는 대학팀과 실업팀이 모여 자웅을 가리는 농구대잔치가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다. 그런 가운데 대학팀 연세대가 현대전자, 삼성전자, 기아자동차 등 쟁쟁한 실업팀을 누르고 우승을 차지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당시 연세대 문경은, 우지원, 이상민, 서장훈, 김훈 등은 연예인보다 더 뜨거운 인기몰이를 하며 ‘오빠부대’의 중심에 있었다.
최희암은 선수들의 역할을 철저하게 분업화하고, 외곽 슈터 중심의 농구를 통해 연세대를 강팀으로 만들었다. 실업팀과 대학팀을 망라한 농구대잔치에서 3차례 우승했고, 특히 1993~94년 시즌 우승은 대학팀 최초의 농구대잔치 우승 기록으로 남아 있다.
전북 무주 출신인 최희암은 휘문고와 연세대를 졸업하고 실업팀 현대전자에서 선수로 뛰었다. 그러나 대학 시절에는 동기생인 박수교, 신선우 등에 가려 출장 기회를 많이 잡지 못했고 실업농구에서도 빛을 보지 못해 선수로선 크게 성공하지 못했다. 이후 현대건설에 취업해 이라크에서 근무했고, 귀국 후 삼일중 체육교사로 임용됐으나 곧 사임하고 1986년부터 연세대 농구단 감독을 맡으며 지도력을 인정받았다.
“1986년 3월 연세대 코치로 부임했는데, 후임 감독이 올 때까지만 팀을 맡는 한시적 감독 대행이었다. 그런데 후임 감독이 17년 뒤에 오더라(웃음). 처음에는 잘 가르치고 열심히만 하면 좋은 성적이 나올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더라. 좋은 선수를 모으는 것이 70%, 잘 가르치고 관리하는 것이 30%임을 깨달았다. 그래서 스카우트에 힘을 쏟게 됐다.”
최희암은 문경은을 연세대로 스카우트한 비화를 털어놓았다.
“당시 경은이는 광신상고에 다녔는데 이 학교 농구부장이 경희대 농구후원회 부회장을 맡고 있었다. 그래서 광신상고 선수들은 경희대로 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내가 직접 농구부장을 만나보니 문경은을 데려가고 싶다고 한 감독은 처음이라고 했다. 다른 대학 감독들은 광신상고와 경희대의 관계를 의식해 미리 포기했던 모양이다. 문제는 경은이를 데려가려면 동기생 4명을 다 데려가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순간 큰 결심을 했고, 경은이와 다른 3명의 선수를 다 데려왔다. 그게 ‘신의 한 수’였다. 경은이가 연세대의 기둥 노릇을 맡게 됐으니까.”
문경은 SK 감독은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감독 최희암을 ‘두 얼굴을 가진 사나이’라고 표현한 적이 있다. 연습할 때는 ‘독사’나 다름없는데, 경기할 때는 선수들에게 무척 살갑게 대한다고 했다. 선수들이 실전에서 자신이 가진 기량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능력이 탁월하다는 얘기다. 문 감독은 연세대 시절 최 감독의 강권에 못 이겨 하루에 슈팅 1000개 씩을 쏘며 지옥훈련을 한 게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문경은이 프로 생활을 거쳐 현재 지도자 생활을 하고 있는 배경에는 최희암의 역할이 컸다. 



‘두 얼굴의 사나이’

최희암은 선수들에게 굉장히 가혹한 지도자였다. 얼음물에 팬티만 입고 들어가기, 시궁창에 빠트리기, 팬티만 입고 산을 타게 하는 등 인간의 한계를 실험하는 듯한 훈련으로 악명이 높았다. 오죽했으면 우지원, 문경은, 서장훈 등이 최 감독의 훈련에 반발해 숙소에서 도망치기까지 했을까.
최희암은 2002년 프로행을 결심한다. ‘코트의 마법사’로 불리며 CF까지 찍을 정도로 인기를 누리던 그의 프로행은 당연한 수순이었는지도 모른다.
“이전에도 몇 차례 프로팀 감독 제의가 있었다. 그때마다 아내가 ‘남의 자식만 키우지 말고 우리 아이들 교육에도 신경을 써달라’고 만류하는 바람에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큰아이가 2002년에 대학에 입학하면서 프로행을 결심했다. 솔직히 말해서 돈도 작용했다. 대학 감독 월급이 프로 감독 연봉의 40%만 됐어도 학교에 남았을 것이다. 연세대 감독 시절, 남들은 내가 돈을 많이 벌 거라고 생각했지만 지인들 경조사 때 축의금, 조의금 넉넉하게 내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유명해지면 돈도 좀 있어야겠다는 생각도 프로행을 결심한 이유 중 하나였다.”
프로와 첫 인연을 맺은 울산 모비스에서 성적 부진으로 물러난 뒤 잠시 동국대 감독을 맡아 학교로 돌아오기도 했다. 본인은 그 시절을 ‘회춘한 1년’이라고 떠올렸다. 그 무렵 뒤늦게 깨달은 리더십이 전자랜드 감독으로 갔을 때 빛을 발했지만, 또다시 성적 부진 책임을 지고 사퇴한다. 최희암과 프로농구는 깊은 인연을 맺지 못했다.
최희암 사장의 근무지는 경남 창원시 성산로에 있는 고려용접봉 생산공장이다. 중국·말레이시아·미국·유럽 등에도 공장이 있고, 일본 도쿄와 오사카엔 공장 없이 판매법인만 있다. 50년 역사의 고려용접봉이 최희암과 인연을 맺은 사정이 궁금했다.



철재회사 사장 최희암

“전자랜드 감독에서 잘렸을 때 전자랜드 구단주의 친형인 홍민철 고려용접봉 회장님으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만났더니 내게 고려용접봉 다롄법인장을 맡아달라고 하시는 게 아닌가. 경영을 전문적으로 배운 적도 없고, 철을 다루는 회사인 데다 무엇보다 중국어 소통이 불가능한 내게 중국 사업을 통째로 맡기겠다니 내가 얼마다 당황했겠나. 그런데 한 달 뒤 나는 다롄에 가 있었다. 114명의 직원과 동고동락하며 진한 인생 공부를 경험했다.”
‘농구만 아는 놈이 용접봉에 대해 뭘 알겠나’ 하는 시선을 의식해 직접 몸으로 부딪치며 배워갔다고 한다. 무엇보다 직원들과의 소통을 중시했다. 용접봉에 대해 문외한임을 솔직히 고백했고, 직원들에게 다가가 현장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일일이 묻고 배웠다.
다롄법인장 시절 연간 매출이 50% 늘어나는 수완을 발휘하며 최희암은 경영인으로서도 서서히 안정궤도에 접어들었다. 독주(毒酒)를 좋아하는 중국 거래처 관계자들과 술잔을 기울이며 가끔 농구 얘기를 꺼냈고, 농구광인 중국인들은 최희암이 유명한 농구감독 출신이란 사실에 마음의 문을 열고 다가왔다.
중국 공장보다 규모가 10배 큰 창원공장 사장으로의 영전은 그가 리더십을 인정받았음을 입증한다. 선수들이 가진 잠재력을 이끌어내고 장점과 단점을 깨닫게 하면서 전력을 극대화하는 리더십이 기업 경영에서도 빛을 발한 것이다. 최희암 사장과의 인터뷰 자리에 함께한 이 회사 박휘철 관리부장은 이런 얘기를 들려줬다.
“한번은 거래처인 거제도 대우조선소를 사장님과 함께 방문했는데 거제도 분들이 모두 사장님을 알아보고 사인을 해달라고 했다. 스포츠 분야에 있던 분들의 사회생활이 ‘명함’만 걸어놓고 대충 일하는 거라고 여기는 사람이 적지 않은데, 우리 사장님은 원래 이곳에서 성장하신 분처럼 일할 때는 정확하게, 밖에선 인간적으로 소통하는 걸 좋아한다. 창원공장 사장으로 오실 정도면 능력이 대단하다는 걸 인정받았다는 의미다.”
최 감독, 아니 최 사장이 말을 잇는다(기자는 인터뷰 내내 그를 ‘감독님’으로 불렀다. ‘사장님’이란 호칭이 입에 붙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자 최 사장은 “어색하죠? 사실 나도 아직 어색해”라며 웃었다).

“지금도 밖에서 사람들을 만나면 내 손을 잡고 반색하며 ‘프로농구보다 농구대잔치 시절이 더 재밌었다’고 한다. 내게 건네는 의례적인 인사치레일 수도 있겠지만, 솔직히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가슴이 아프다. 가끔은 요즘 농구가 이전보다 재미없어진 이유가 뭘까, 팬들이 경기장을 많이 찾지 않는 이유가 뭘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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