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2월호

이영미의 스포츠 ZOOM 人

“농구는 내 인생의 기초공사”

‘영원한 농구인’ 최·희·암 고려용접봉 사장

  • 이영미 | 스포츠 전문기자 riveroflym22@naver.com

    입력2016-02-03 16:4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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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년째 철재회사 근무…능력 인정받아 사장 승진
    • “최 사장? 아직도 나는 어색해”
    • ‘농구’ 아닌 ‘공부’로 연세대 진학
    • “이상민, 서장훈이 있어 최희암이 있었다”
    고려용접봉(KISWEL) 최희암(61) 사장. 7년 세월이 흘렀는데도 ‘최희암’ 이름 뒤에 따르는 호칭이 ‘감독’이 아니라 ‘사장’이란 건 여전히 부자연스럽다. 그는 연세대 명감독으로 ‘농구대잔치’를 부흥시켰고 이후 프로농구 모비스와 전자랜드를 이끌었다. 2009년 전자랜드를 떠난 뒤 그해 11월, 전자랜드 자매회사인 고려용접봉 홍민철 회장의 권유로 중국 다롄의 고려용접봉 현지법인을 맡게 된다.
    2014년 귀국해서는 고려용접봉 본사가 있는 경남 창원공장 사장으로 부임했다. 쇠를 다루는 회사이다 보니 건설 현장, 조선소, 자동차 공장 등을 돌며 새로운 영업 파트너를 구축한다. 40년 이상 농구 코트를 누빈 농구인이 용접할 때 필요한 철재 제조회사 사장으로 자리를 잡은 것이다. 물론 가슴속 한켠에는 여전히 농구에 대한 애정이 꿈틀대고 있다.



    농구감독 최희암

    1980~90년대 겨울 스포츠의 꽃은 단연코 농구였다. 프로농구가 출범하기 전에는 대학팀과 실업팀이 모여 자웅을 가리는 농구대잔치가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다. 그런 가운데 대학팀 연세대가 현대전자, 삼성전자, 기아자동차 등 쟁쟁한 실업팀을 누르고 우승을 차지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당시 연세대 문경은, 우지원, 이상민, 서장훈, 김훈 등은 연예인보다 더 뜨거운 인기몰이를 하며 ‘오빠부대’의 중심에 있었다.
    최희암은 선수들의 역할을 철저하게 분업화하고, 외곽 슈터 중심의 농구를 통해 연세대를 강팀으로 만들었다. 실업팀과 대학팀을 망라한 농구대잔치에서 3차례 우승했고, 특히 1993~94년 시즌 우승은 대학팀 최초의 농구대잔치 우승 기록으로 남아 있다.
    전북 무주 출신인 최희암은 휘문고와 연세대를 졸업하고 실업팀 현대전자에서 선수로 뛰었다. 그러나 대학 시절에는 동기생인 박수교, 신선우 등에 가려 출장 기회를 많이 잡지 못했고 실업농구에서도 빛을 보지 못해 선수로선 크게 성공하지 못했다. 이후 현대건설에 취업해 이라크에서 근무했고, 귀국 후 삼일중 체육교사로 임용됐으나 곧 사임하고 1986년부터 연세대 농구단 감독을 맡으며 지도력을 인정받았다.
    “1986년 3월 연세대 코치로 부임했는데, 후임 감독이 올 때까지만 팀을 맡는 한시적 감독 대행이었다. 그런데 후임 감독이 17년 뒤에 오더라(웃음). 처음에는 잘 가르치고 열심히만 하면 좋은 성적이 나올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더라. 좋은 선수를 모으는 것이 70%, 잘 가르치고 관리하는 것이 30%임을 깨달았다. 그래서 스카우트에 힘을 쏟게 됐다.”
    최희암은 문경은을 연세대로 스카우트한 비화를 털어놓았다.
    “당시 경은이는 광신상고에 다녔는데 이 학교 농구부장이 경희대 농구후원회 부회장을 맡고 있었다. 그래서 광신상고 선수들은 경희대로 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내가 직접 농구부장을 만나보니 문경은을 데려가고 싶다고 한 감독은 처음이라고 했다. 다른 대학 감독들은 광신상고와 경희대의 관계를 의식해 미리 포기했던 모양이다. 문제는 경은이를 데려가려면 동기생 4명을 다 데려가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순간 큰 결심을 했고, 경은이와 다른 3명의 선수를 다 데려왔다. 그게 ‘신의 한 수’였다. 경은이가 연세대의 기둥 노릇을 맡게 됐으니까.”
    문경은 SK 감독은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감독 최희암을 ‘두 얼굴을 가진 사나이’라고 표현한 적이 있다. 연습할 때는 ‘독사’나 다름없는데, 경기할 때는 선수들에게 무척 살갑게 대한다고 했다. 선수들이 실전에서 자신이 가진 기량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능력이 탁월하다는 얘기다. 문 감독은 연세대 시절 최 감독의 강권에 못 이겨 하루에 슈팅 1000개 씩을 쏘며 지옥훈련을 한 게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문경은이 프로 생활을 거쳐 현재 지도자 생활을 하고 있는 배경에는 최희암의 역할이 컸다. 



    ‘두 얼굴의 사나이’

    최희암은 선수들에게 굉장히 가혹한 지도자였다. 얼음물에 팬티만 입고 들어가기, 시궁창에 빠트리기, 팬티만 입고 산을 타게 하는 등 인간의 한계를 실험하는 듯한 훈련으로 악명이 높았다. 오죽했으면 우지원, 문경은, 서장훈 등이 최 감독의 훈련에 반발해 숙소에서 도망치기까지 했을까.
    최희암은 2002년 프로행을 결심한다. ‘코트의 마법사’로 불리며 CF까지 찍을 정도로 인기를 누리던 그의 프로행은 당연한 수순이었는지도 모른다.
    “이전에도 몇 차례 프로팀 감독 제의가 있었다. 그때마다 아내가 ‘남의 자식만 키우지 말고 우리 아이들 교육에도 신경을 써달라’고 만류하는 바람에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큰아이가 2002년에 대학에 입학하면서 프로행을 결심했다. 솔직히 말해서 돈도 작용했다. 대학 감독 월급이 프로 감독 연봉의 40%만 됐어도 학교에 남았을 것이다. 연세대 감독 시절, 남들은 내가 돈을 많이 벌 거라고 생각했지만 지인들 경조사 때 축의금, 조의금 넉넉하게 내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유명해지면 돈도 좀 있어야겠다는 생각도 프로행을 결심한 이유 중 하나였다.”
    프로와 첫 인연을 맺은 울산 모비스에서 성적 부진으로 물러난 뒤 잠시 동국대 감독을 맡아 학교로 돌아오기도 했다. 본인은 그 시절을 ‘회춘한 1년’이라고 떠올렸다. 그 무렵 뒤늦게 깨달은 리더십이 전자랜드 감독으로 갔을 때 빛을 발했지만, 또다시 성적 부진 책임을 지고 사퇴한다. 최희암과 프로농구는 깊은 인연을 맺지 못했다.
    최희암 사장의 근무지는 경남 창원시 성산로에 있는 고려용접봉 생산공장이다. 중국·말레이시아·미국·유럽 등에도 공장이 있고, 일본 도쿄와 오사카엔 공장 없이 판매법인만 있다. 50년 역사의 고려용접봉이 최희암과 인연을 맺은 사정이 궁금했다.





    철재회사 사장 최희암

    “전자랜드 감독에서 잘렸을 때 전자랜드 구단주의 친형인 홍민철 고려용접봉 회장님으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만났더니 내게 고려용접봉 다롄법인장을 맡아달라고 하시는 게 아닌가. 경영을 전문적으로 배운 적도 없고, 철을 다루는 회사인 데다 무엇보다 중국어 소통이 불가능한 내게 중국 사업을 통째로 맡기겠다니 내가 얼마다 당황했겠나. 그런데 한 달 뒤 나는 다롄에 가 있었다. 114명의 직원과 동고동락하며 진한 인생 공부를 경험했다.”
    ‘농구만 아는 놈이 용접봉에 대해 뭘 알겠나’ 하는 시선을 의식해 직접 몸으로 부딪치며 배워갔다고 한다. 무엇보다 직원들과의 소통을 중시했다. 용접봉에 대해 문외한임을 솔직히 고백했고, 직원들에게 다가가 현장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일일이 묻고 배웠다.
    다롄법인장 시절 연간 매출이 50% 늘어나는 수완을 발휘하며 최희암은 경영인으로서도 서서히 안정궤도에 접어들었다. 독주(毒酒)를 좋아하는 중국 거래처 관계자들과 술잔을 기울이며 가끔 농구 얘기를 꺼냈고, 농구광인 중국인들은 최희암이 유명한 농구감독 출신이란 사실에 마음의 문을 열고 다가왔다.
    중국 공장보다 규모가 10배 큰 창원공장 사장으로의 영전은 그가 리더십을 인정받았음을 입증한다. 선수들이 가진 잠재력을 이끌어내고 장점과 단점을 깨닫게 하면서 전력을 극대화하는 리더십이 기업 경영에서도 빛을 발한 것이다. 최희암 사장과의 인터뷰 자리에 함께한 이 회사 박휘철 관리부장은 이런 얘기를 들려줬다.
    “한번은 거래처인 거제도 대우조선소를 사장님과 함께 방문했는데 거제도 분들이 모두 사장님을 알아보고 사인을 해달라고 했다. 스포츠 분야에 있던 분들의 사회생활이 ‘명함’만 걸어놓고 대충 일하는 거라고 여기는 사람이 적지 않은데, 우리 사장님은 원래 이곳에서 성장하신 분처럼 일할 때는 정확하게, 밖에선 인간적으로 소통하는 걸 좋아한다. 창원공장 사장으로 오실 정도면 능력이 대단하다는 걸 인정받았다는 의미다.”
    최 감독, 아니 최 사장이 말을 잇는다(기자는 인터뷰 내내 그를 ‘감독님’으로 불렀다. ‘사장님’이란 호칭이 입에 붙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자 최 사장은 “어색하죠? 사실 나도 아직 어색해”라며 웃었다).

    “지금도 밖에서 사람들을 만나면 내 손을 잡고 반색하며 ‘프로농구보다 농구대잔치 시절이 더 재밌었다’고 한다. 내게 건네는 의례적인 인사치레일 수도 있겠지만, 솔직히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가슴이 아프다. 가끔은 요즘 농구가 이전보다 재미없어진 이유가 뭘까, 팬들이 경기장을 많이 찾지 않는 이유가 뭘까 생각해본다.



    딘 스미스, 도널드 휴스턴

    스토리가 없어서 그런 게 아닐까. 과거에는 삼성 대 현대, 연세대 대 고려대, 한국화장품 대 태평양 등 붐업을 일으킬 요소가 많았다. 더욱이 고등학교, 대학교, 실업팀 등으로 팬들의 관심이 분산됐다. 지금은 모두들 프로의 화려한 꽃만 보려 하지, 줄기나 뿌리는 외면하지 않나. 프로라면 시스템적으로 운영해야 하는데 지금은 10개 프로팀이 다들 비슷한 이미지를 보여주는 것 같다.”
    그는 “현장을 떠나면 그곳을 잊어야 하는데, 아직도 농구 얘기를 하며 흥분하는 걸 보면 농구에 대한 애정이 남아 있는 모양”이라며 이렇게 덧붙였다.
    “시스템적으로 문제가 있는 농구를 보면 열 받기도 한다. 왜 저렇게밖에 못하나 싶어서. 내가 다시 하면 더 잘할 것 같기도 하고(웃음). 사실 회장님으로부터 회사로 들어오라는 제의를 받고 일주일쯤 고민했다. 만약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난 여기서 은퇴할 때까지 버티고 있을 각오를 해야 했다. 조금 하다가 안 된다고 해서 다시 농구판으로 돌아가는 짓은 안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주일이란 시간이 필요했다. 능력이 안돼 도태되거나 잘리면 ‘고향집’을 찾아가야겠지만 나이 50이 넘어 선택한 새로운 분야에 대해 나도 책임의식을 갖고 임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곳에 오며 농구를 잊으려 했는데, 지금의 농구는 내게 잊지 말라고 신호를 보낸다. 문제점들을 노출하면서.”
    최희암은 휘문고를 졸업하고 농구 실력으로 연세대 입학을 못하게 되자 예비고사를 보고 대학에 입학한 특이한 케이스이다.
    “중·고등학교 때 농구를 하면서도 공부를 놓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시험 치르고 연대 들어가는 내가 대견했던지 휘문고 감독님은 물론 교장선생님까지 연세대 농구부를 찾아가 최희암이란 애가 입학하면 농구부로 받아달라고 부탁을 드렸다. 제자가 농구로 대학 진학을 못하게 된 데 대한 미안한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선생님들의 도움 덕에 74학번으로 농구부에 입단했다.
    그런데 체육특기자로 뽑힌 선수들의 실력은 대단했다. ‘불멸의 가드’로 불린 인창고 박수교, 고교 최고 센터인 용산고 신선우가 내 동기였다. 실력이 뛰어난 동기가 많다 보니 내겐 출전 기회가 잘 주어지지 않았다. 2학년 때 반짝 활약했지만 1학년 후배들로 신동찬, 박인규 등이 입단하면서 다시 벤치로 물러났다. 당시 국가대표 선수 12명 중 연세대 출신이 6명이나 됐을 정도로 다들 실력이 좋았다.
    6명 모두 대표팀에 합류했을 때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대학에서 아마추어 농구지도자로 명성을 날린 딘 스미스 감독으로부터 직접 농구를 배운 도널드 휴스턴이란 사람이 연세대 농구부를 찾았다. 이화여대 교환교수로 오신 분인데 학교 측의 주선으로 우리 학교에서 농구를 가르치게 된 것이다. 그때 처음으로 딘 스미스의 농구가 무엇인지, 그가 어떤 기술을 전파하고 있는지 알게 됐다. 그 시간이 향후 지도자 생활을 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동기생 신선우, 박수교, 장봉학과 1년 후배 신동찬, 박인규 등이 모두 대표팀에 나가 있는 동안 학교에 남은 최희암은 딘 스미스에게 농구를 배운 도널드 휴스턴을 만났고, 그로부터 프리징 플레이(freezing play), 페이크 스위치(fake switch), 트래핑 디펜스(trapping defense) 등의 기술을 배우게 됐다.



    패턴 농구

    “그때 농구부에서 통역 가능한 사람이 나밖에 없었다. 그분의 말을 통역하고, 그분이 가르치는 새로운 기술의 농구를 배우면서 농구에 푹 빠져 지냈다. 그때 김영기 감독(현 KBL 회장)과 김인건 코치가 국가대표팀을 이끌고 있었는데, 연세대 농구부와 세 차례 연습 경기를 했다. 우리로선 주전 멤버들이 모두 대표팀에 나가 있던 터라 2진 선수들을 데리고 연습경기를 치렀는데 휴스턴이 알려준 기술로 경기를 풀어가면서 대표팀을 상대로 한 번 지고, 두 번을 이겨버렸다. 김영기 감독이 얼마나 화가 나고 창피했겠나. 주전도 아닌 후보들이 뛰는 상대한테 두 번이나 졌으니. 나중에 우리한테 다가와선 ‘도대체 그 기술이 뭐야?’라고 물으시더라. 김영기 감독도 그때 처음으로 ‘프리징 게임’ ‘런 앤 점프’ 같은 용어를 들어봤을 것이다.”
    대학 졸업 후 현대전자에 입단한 최희암은 당시 팀을 이끌던 방열 감독에게 휴스턴으로부터 배운 전술 노트를 모두 건넸다고 한다.
    “방열 감독이 연세대 경기를 지켜보신 터라 그 전술에 대해 매우 궁금해하셨다. 그래서 내가 기록해놓은 노트를 모두 드렸다. 딘 스미스 감독이 한국 농구에도 많은 영향을 미친 셈이다.”
    최 사장 옆에서 조용히 얘기를 듣고 있던 고려용접봉 박휘철 관리부장이 말했다.
    “우리 사장님이 농구 얘기를 하시니까 표정이 확 밝아졌네요.”
    이어진 최희암의 곁들임.
    “농구는 시간이 지나도 내 마음속 고향처럼 남아 있을 수밖에 없어.”
    최희암은 연세대 감독 시절, 열린 사고로 팀을 운영했다. 예를 들면 이렇다.
    “연세대가 농구대잔치에서 우승할 때 내가 고려대 출신의 이우재 선생을 코치로 모셔왔다. 학교 측에선 라이벌 고려대 출신을 연세대 코치로 임명하는 데 반대했지만 나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선수들에게 다양한 농구를 경험하게 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겨울휴가 때면 선수들을 용산고, 휘문고 등으로 ‘단기 유학’을 보냈다. 서장훈, 문경은 등 핵심 선수들을 모두 고등학교로 보냈다. 나보다 더 훌륭한 지도법을 가진 선생님으로부터 실전 농구를 배워 오라는 의미였다. 농구를 배울 수만 있다면 어떤 상황도 다 받아들여야 한다는 게 내 철학이었다. 배우는 걸 부끄러워해서도 안 된다고 믿었다.”
    최희암을 설명하는 데 빠질 수 없는 게 ‘패턴 농구’다. 그가 패턴 농구에 빠진 계기는 인디애나대 농구감독 보비 나이트의 농구이론 서적이다. 이 책에 나오는 농구 기술을 연세대에 맞는 훈련으로 접목하면서 팀워크를 중요시하는 패턴 농구를 실행에 옮기게 된다. 공격하는 상황에서 패스를 주고받다가 완벽한 슛 기회를 만들어 성공률이 가장 높은 슛을 던지는 작전이다. 서장훈이라는 ‘빅맨’. 문경은 우지원 김훈의 막강 공격력, 팀을 진두지휘하는 이상민의 영리함이 최희암의 패턴 농구를 완성시켰고, 성적으로 결과를 증명했다.
    인터뷰 말미에 최희암의 농구 인생에 소중한 존재로 남은 선수들의 얘기를 꺼냈다. 먼저 문경은.



    최희암의 아이들

    “경은이는 연세대 시절 최고의 슈터였다. 아무리 작전이나 팀워크가 좋으면 뭐하나. 슛을 제대로 못 쏘면 말짱 도루묵인 걸. 경은이는 그 ‘점’을 찍을 줄 아는 선수였다. 그런 실력을 발휘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고, 나한테 혼나기도 많이 혼났다. 그걸 꾹 참고 살아난 덕분에 프로에서 지도자 생활을 하고 있는 거다.”
    최희암은 어느 인터뷰에서 ‘우지원은 얼굴, 서장훈은 실력’이라는 말로 두 선수를 평가한 적이 있다.
    “맞는 얘기 아닌가. 지원이는 스스로 ‘황태자’가 된 선수고, 장훈이는 센터로서 최고의 실력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난 상민이나 지원이가 여자들한테 인기 있는 게 신기했다. 걔네들이 뭐 아주 잘생긴 얼굴은 아니지 않나(웃음).”
    최희암은 이상민, 서장훈 때문에 ‘감독 최희암’이 인정받는 지도자가 될 수 있었다고 고백했다.
    “내가 대학 팀 시절 우승을 밥 먹듯 한 데에는 상민이와 장훈이가 큰 역할을 했다. 두 선수가 연세대에 오지 않았다면 그런 성적을 올리지 못했을 것이다. 장훈이가 상민이를 무척 좋아했다. 상민이 따라서 연세대에 온 것도 사실이고. 상민이가 심지가 깊어 장훈이를 살뜰하게 챙겼다. 상민이는 대학 4년 동안 한 번도 속을 썩이지 않았다. 때리면 맞고, 욕하면 받아들였다. 어떤 경우에도 자기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한마디로 팀을 위해 희생할 줄 아는 아이였다. 반면에 장훈이는 개성이 강한 만큼 논리적인 설명을 들이대며 접근해야 했다. 평소 책을 많이 읽는 터라, 감독이 우격다짐으로 몰아쳐도 절대 수긍하지 않았다. 논리적인 근거를 제시하면 쉽게 받아들였다.”
    현재 방송인으로 활발하게 활동하는 서장훈에 대해 스승은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
    “난 장훈이가 연세대에서 교수를 하기 바랐다. 워낙 머리가 비상한 아이라 충분히 가능한 얘기였다. 방송도 장훈이에겐 잘 어울리는 것 같다. 수입도 좋고, 인기도 누리면서 많은 걸 얻고 있지만 언젠가는 다시 농구판으로 돌아오지 않을까 싶다. 본인도 그러고 싶어 하는 것 같고.”
    대학에서 화려한 시절을 보낸 그가 프로에선 유독 많은 부침을 겪었다.
    “자존심 상했냐고? 전혀 그렇지 않았다. 프로에선 트레이드가 절대적으로 중요했다. 내 의지대로 선수를 스카우트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런 상황에서 시간을 갖고 차분히 기다렸어야 했는데, 빨리 뭔가를 보여주려고 무리수를 뒀다. 사람은 세월을 잘 만나야 하는데, 나로선 그때 프로 감독이 맞지 않았던 모양이다. 세월이 날 배반한 거나 마찬가지다.”



    “농구가 있어 행복했다”

    유재학(모비스), 유도훈(전자랜드), 문경은(SK), 이상민(삼성), 조동현(kt) 등은 감독 최희암과 사제의 인연을 맺은 지도자들이다. 그중에서 유재학 감독은 최희암 밑에서 연세대 코치로 활약했다.
    “많은 제자가 현역에서 활약하는 모습이 흐뭇하고 자랑스럽다. 그만큼 내가 나이를 먹었다는 뜻이기도 하고. 감독이란 자리는 직업의 특성상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을 수밖에 없다. 모두 건강하게 자기 역할에 충실했으면 좋겠다.”
    최희암은 창원에 농구 경기가 있을 땐 농구장에 가 후배들을 응원하기도 한다. 그가 말했듯 농구는 마음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고향의 정을 느끼고 싶을 때면 농구장을 찾는 것이다.
    “최희암에게 농구란 무엇이냐”고 우문(愚問)을 던졌다. 현답(賢答)은 이랬다.
    “내 인생의 기초공사를 해준 게 농구다. 우연한 기회에 농구를 접했고, 선수생활을 통해 성장했고, 연세대 진학과 졸업, 실업팀 입단과 회사 입사, 그리고 연세대 감독으로 지도자로서 전성기를 보낼 수 있게 해줬다. 농구로 인해 아픈 시간도 많았지만, 농구를 통해 행복한 시간이 더 많았다. 그래서 농구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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