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기춘-우병우 직통 라인 가동
- ‘꼬리로 몸통 흔들기’로 탈출?
- 배제된 김영한 민정수석, 항명→사퇴
박근혜 대통령의 ‘복심(腹心)’인 이정현 새누리당 대표가 여당 지휘봉을 잡은 8월 9일 이후 정가와 법조계 주변에서 나돈 말이다. 우병우 수석은 강남의 처가 땅을 넥슨코리아가 매입하는 데 간여했다는 등 온갖 논란에 휩싸여 있다. 야당은 물론 여당 비주류에게서도 퇴진 압박을 받았지만 우 수석은 “정무적 책임을 지거나 그만둘 생각이 없다”고 버텼다. 그러다 사정 라인의 총책임자인 그가 이석수 특별감찰관의 ‘1호 감찰대상’이 되는 지경에까지 몰렸다.
박근혜 정부 들어 청와대 민정수석실은 수난의 연속이었다. 초대 곽상도 수석은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의 성 접대 연루 의혹이 제기되자 ‘인사검증 실패’ 책임을 지고 2013년 8월 물러났다. 임명 6개월 만이다. 그런 그가 대구에서 ‘진박(眞朴) 공천’을 받아 국회의원으로 부활했으니 ‘새옹지마’라는 말이 딱 여기에 해당한다.
후임 홍경식 수석은 세월호 참사 이후 국무총리 후보자 2명의 연쇄 낙마 사태로 인해 2014년 6월 교체됐다. 임명된 지 10개월이 지나서였다. 바통을 이어받은 김영한 수석은 지난해 1월 정윤회 문건 유출 사건의 여파로 자진 사퇴했다. 임명된 지 7개월밖에 안 됐을 때였다.
대타(代打) 부재론
‘박근혜 청와대’의 제4대 우병우 민정수석은 지난해 2월 임명됐다. 그는 본인과 관련된 의혹이 쏟아지고 있는데도 최장수 민정수석이 됐다. 이 과정에서 박 대통령은 우 수석에게 변함없는 신뢰를 보내면서 힘을 실어줬다.박 대통령은 7월 21일 국가안전보장회의(NSC) 회의에서 “요즘 저도 무수한 비난과 저항을 받고 있는데, 지금 이 상황에서 대통령이 흔들리면 나라가 불안해진다. 여기 계신 여러분도 소명의 시간까지 의로운 일에는 비난을 피해가지 마시고, 고난을 벗 삼아 당당히 소신을 지켜가시기 바란다”고 말했다. 청와대는 ‘국가 안보를 위한 소명을 강조한 발언’이라고 설명했지만, 우 수석을 감싸기 위한 ‘중의법’이란 해석이 쏟아졌다.
박 대통령이 우 수석을 감싼 것은 제기된 의혹만으로 물러나게 할 수 없다는 소신에 따른 듯하다. 정윤회 문건 파문 당시 ‘문고리 권력’ 비서관 3인방(정호성·이재만·안봉근)에게 적용한 잣대와 같다. 또한 우 수석 같은 ‘정무적 감각이 있는 사정 라인 관리자’를 구하기 어렵다는 이른바 ‘대타(代打) 부재’ 현실을 감안한 결과로 비치기도 한다.
통상적으로 정권 말기에는 대통령과 권력 주변을 겨냥한 공세가 밀려온다. 지금도 최경환 전 경제부총리, 안종범 청와대 정책조정수석을 비롯한 박 대통령 핵심 측근들에 대한 의혹 폭로가 봇물을 이룬다. 정확한 ‘팩트’를 파악해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면 옴짝달싹 못하고 허둥대는 사이에 레임덕에 빠져들게 된다. 더구나 권력 말기엔 검찰, 국가정보원, 국세청 같은 사정기관이 차기 권력으로 눈길을 돌리는 현상도 생긴다.
따라서 권력자 처지에선 이를 통제하고 제압할 든든한 호위무사가 필요하다. 특히 사정기관들을 묶어두려면 민정수석실의 역할이 가장 중요하다. 그저 시스템만으로 될 일이 아니다. 누가 그 일을 맡느냐가 핵심이다. 여기엔 정무적 능력이 필수적이다. 결국 박 대통령은 그 적임자로 우병우 수석을 염두에 뒀고, 같은 맥락에서 보호막을 쳤다는 분석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우 수석은 어떻게 박 대통령으로부터 정무적 능력을 인정받았을까. 그 이유를 알려면 정윤회 문건 사건 당시로 돌아가봐야 한다.
‘세계일보’는 2014년 11월 28일 ‘박 대통령의 국회의원 시절 비서실장 출신인 정윤회 씨가 청와대에 근무 중인 대통령 측근 3인방과 정기적으로 만나 국정 개입을 시도했다’고 보도했다. 정씨가 김기춘 당시 대통령비서실장의 해임을 논의했다는 내용의 청와대 문건이 근거로 제시됐다. ‘비선(秘線) 실세의 국정 농단’ 파문이 일었다.
“김영한 빈틈 치고 들어가”
박근혜 정부를 위기로 몰아넣은 정윤회 사건 당시 우 수석은 민정수석실 민정비서관이었다. 2014년 5월에 발탁됐다. 당시 직속상관은 김영한 민정수석. 대통령비서실의 총사령탑은 막강 실세 김기춘 실장이었다.
TK(대구·경북) 출신인 김 수석은 박 대통령이나 김 실장과 별다른 인연이 없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대검 강력부장을 끝으로 법무법인 ‘바른’ 변호사로 있던 그를 박 대통령과 가까운 TK 유력 인사가 천거했다고 한다.
청와대는 정윤회 문건 파문 초기에 어떻게 대처할지 몰라 우왕좌왕했다. 당시 상황을 장악하고 진두지휘해야 할 인물은 김영한 민정수석이었다. 폭로된 문건이 청와대 민정 라인에서 생산됐다는 점에서 더욱 그랬다. 그러나 김 수석은 정무적으로 일을 처리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고 한다.
검찰 고위 간부를 지내고 청와대 내부 사정에 밝은 A씨는 “김영한은 그냥 (평범한) 검사였다. 수사검사로서의 직분엔 충실하고 능력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정치 감각이 부족했다. 민정수석은 특히 돌발 상황에서 정무적인 판단 능력이 절대 필요한 자리인데, 김영한 스타일엔 맞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 빈틈을 당시 김기춘 실장의 지원을 받은 우병우 비서관이 치고 들어갔다는 게 A씨의 전언이다.
정권 핵심부와 가까운 여권 고위인사 B씨에게서도 같은 맥락의 말을 들을 수 있었다.
“검사장 승진을 하지 못하자 옷을 벗고 변호사로 일하던 우병우를 청와대로 끌어들인 사람이 누구인지는 확실히 모르지만, 민정비서관으로서의 일 처리 능력을 김기춘 실장이 눈여겨본 것은 사실이다. 특히 정윤회 문건 파문 처리 과정에서 우병우는 정무적 능력을 제대로 인정받은 걸로 안다.”
여러 사람을 취재한 결과를 토대로 당시 긴박하게 돌아가던 청와대 내부 상황을 재구성해보면 다음과 같다.
‘진위 이슈’를 ‘유출 이슈’로
김영한 수석이 취임한 지 6개월 만에 정윤회 문건 파문이 터졌다. 김기춘 비서실장을 비롯한 청와대는 해결 방법을 놓고 골머리를 앓았다. 핵심은 두 가지였다. 첫째는 문건 내용의 진위, 둘째는 문건의 유출 경로였다.당시 우병우 민정비서관은 내부 회의에서 문건 내용의 진위는 무시하고 문건 유출 경로에 초점을 맞추자고 했다. ‘꼬리로 몸통을 흔들자’는 뜻이었다(A씨는 “당시 민정수석실 안에서 이런 정무적 판단을 할 수 있는 인물은 우병우밖에 없었다”고 했다). 국민과 언론은 문건 내용의 진위를 알고 싶어 했다. 그러나 우병우는 ‘진위 이슈로 가면 청와대가 늪에 빠진다, 진위 이슈를 유출 이슈로 전환시켜야 한다, 유출자들을 심판대의 전면에 내세워야 청와대가 산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결과론이지만, 이 판단이 박 대통령을 정윤회 사건의 질곡에서 구해냈는지 모른다.
청와대 내부에서 이런 해법이 나온 시점에 박 대통령의 ‘찌라시’ 발언이 나왔다. 박 대통령은 2014년 12월 7일 김무성 대표 등 새누리당 지도부와 오찬을 하는 자리서 “찌라시에나 나오는 그런 얘기들에 이 나라 전체가 흔들린다는 것은 정말 대한민국이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앞서 12월 1일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에서도 문건 유출에 초점을 맞춰 “결코 있을 수 없는 국기문란 행위”라고 규정했다.
훗날 검찰 수사에서 문건 내용은 사실무근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사태 초기에 뚜렷한 해법을 제시하지 못한 김영한 수석은 이후 정윤회 문건 파문 수습 과정에서 철저히 배제된 것으로 알려진다. 일 처리는 김기춘 비서실장-우병우 민정비서관 직통 라인에 맡겨졌고 김 수석은 사실상 소외됐다고 한다.
그러던 중 국회 운영위에서 김영한 민정수석에게 출석을 요구했다. 김기춘 실장에게도 출석을 종용했다. 하지만 김 수석은 “국회에 출석해 설명할 만큼 문건에 대해 알지 못한다. 차라리 사퇴하겠다”고 배수진을 쳤다. 그러자 김 실장은 “대통령에게 해임을 건의하겠다”고 압박했다. 결국 지난해 1월 10일 민경욱 청와대 대변인은 “청와대 민정수석의 사표가 오늘 오전 수리돼 오늘자로 김영한 수석이 면직 처리됐다. 어제 사표가 제출됐고 김기춘 비서실장이 올린 서류를 대통령께서 오전 재가하셨다”고 발표했다.
김 수석은 자신이 문제 해결 과정에서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국회에 나가 야당 의원들로부터 온갖 공격을 대신 받으라니 참을 수 없었고, 이것이 항명 파동과 자진 사퇴로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바람 잘 날 없다?
김영한 수석의 후임에 우병우 민정비서관이 전격 발탁됐다. 정윤회 사건을 ‘매끄럽게’ 해결한 공로였다고 보는 이가 많다. A씨는 “국정원장도, 검찰총장도 못한 일을 우병우가 해낸 것 아닌가. 박 대통령은 우병우를 절대적으로 신임하게 된 것 같다. 박 대통령과 김기춘 실장으로선 정권 후반기 청와대를 겨냥한 각종 공격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정무감각을 갖추고 검찰을 통제할 수 있는 우병우 같은 인물이 필요하다고 인식한 듯하다”고 말했다.청와대 민정비서관이 민정수석으로 수직 상승한 건 유례없는 일이었다. 바통을 이어받은 신임 수석이 전임 수석보다 열 살이나 적다는 사실도 이례적이다.
‘검사 우병우’는 이명박 정부 시절 중앙지검 금융조세조사2부장, 대검 중수부 1과장, 중수부 수사기획관 같은 요직을 거치며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 출범 직후인 2013년 4월 허를 찔렸다. ‘검찰의 꽃’이라는 검사장 승진에서 탈락하고 옷을 벗었다. 연수원 19기 동기 6명이 검사장 승진에 성공한 터라, 그때껏 잘나가던 그의 탈락은 의외였다.
당시 채동욱 검찰총장이 ‘정치 검사’를 솎아내기 했다는 관측이 나돌았다. 그때 청와대에서 검사장 승진 인사 검증 총책임을 맡은 인물은 곽상도 민정수석이다. 이렇게 권력의 사다리에서 한 번 떨어져본 경험은 우병우가 실세 민정수석이 되는 자양분이 됐는지 모른다.
청와대 민정수석실은 정보·사정기관이 생산한 정보를 활용한다. 권력기관의 활동 방향을 정하고 조율한다. 민심의 동향을 살펴 국정에 반영토록 한다. 대통령의 처지에선 결코 아무나 앉힐 수가 없는 자리다. 임기 말엔 더 그렇다. 우 수석이 버티든, 새 수석이 오든 민정수석실은 바람 잘 날이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