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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명관의 조선사회 뒷마당

어우동과 양반의 성문화

임금 주최한 파티에서 기생과 섹스… 장교들간엔 ‘특급 기생’ 쟁탈전

  • 글: 강명관 부산대 교수·한문학 hkmk@pusan.ac.kr

어우동과 양반의 성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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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사회는 축첩제, 기생제를 근간으로 양반 남성이 성적 욕망을 한껏 충족시킨 ‘소돔과 고모라’의 시대였다. 양반 가문에선 간통, 강간이 횡행했다.
  • 특히 조선시대엔 많은 여성이 기생으로 활동한 것으로 추정되며 기생제도는 양반 남성이 피지배 계층 여성을 마음대로 취하는 통로였다.
어우동과 양반의 성문화
어우동이란 여인이 있다. 잘 알려진 사람이다(‘왕조실록’에는 ‘어을우동’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어우동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도 있고 영화도 있다. 조선시대 최대의 성적 스캔들을 일으킨 여인으로, 이 여인의 거침없는 남성편력, 성적 욕망의 표출은 자못 현대인의 관심을 끌었다. 어우동을 테마로 소설을 쓰거나 영화를 만든 작가들은 아마 이렇게 생각했으리라. ‘성적 억압이 강고했던 중세사회에서 한 여인이 성적 자유를 구가했다면 근대화의 단초가 되는 행동이 아닌가’라고. 이건 그럴 법한 생각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어우동을 돌출적인 존재로 보고 있다. 뒤집어보면 어우동과 관계를 맺은 남성들이 없다면 어우동 역시 없다. 조선시대 지배층인 양반들은 성리학이란 도덕철학으로 무장한 도덕적인 인간으로 알려져 있다. 어우동의 존재는 양반에 대한 이러한 이미지에 오류가 있음을 암시한다.

조선시대는 축첩제가 공인되었으나 여성의 투기는 칠거지악으로 금기시되었다. 축첩제의 본질은 무엇인가. 그것은 남성의 성적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제도였다. 그런가 하면 기생제도도 존재했다. 조선시대 남성에게 성적 스캔들은 제도화, 일상화되어 있었던 것이다. 여성의 경우에는 축첩제는 커녕 남편 아닌 자와 성관계를 맺으면 철저하게 응징되었다. 불균형이었다.

어우동에 앞서 어우동과 비슷한 길을 걸었던 사람이 있다. 유감동(兪甘同)이다. 이 인물의 일화도 1988년 ‘깜동’이란 제목으로 영화화된 바 있다. 유감동은 세종 때의 실존인물이다. 감동의 아버지는 검한성(檢漢城·일종의 벼슬 이름) 유귀수(兪龜壽), 남편은 평강현감 최중기(崔仲基)였다. 말하자면 감동은 당당한 사족(士族), 즉 양반이었다. 만약 양반이 아니었다면, 감동의 남성편력은 사건도 되지 않았을 것이다.

사건이 처음 보고된 세종 9년 8월17일의 ‘실록’ 자료에 의하면, 남편 최중기는 무안군수로 부임할 때 감동을 데리고 갔다. 그러나 감동이 병을 핑계로 도로 서울로 올라와 방종하게 굴자 최중기가 버렸다고 한다. 여기서 방종이라 함은 아마도 성적 방종을 의미할 것이다. ‘실록’은 감동의 사건을 처음 보고하면서, 그가 관계했던 남자로 이승(李升)·황치신(黃致身)·전수생(田穗生)·김여달(金如達)·이돈(李敦) 등 6명의 이름을 밝혔다. 그 외 이름을 숨긴 간통자 역시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라고 했다.

이 사건은 세종 9년 9월16일 최종 종결될 때까지 거의 두 달을 끌었다. ‘실록’ 자료를 정리하여 간통자의 이름을 모아보면, 거의 40명에 가깝다. 그 중 압도적인 다수를 차지하는 것은 당연히 양반들이다. 총제 정효문(鄭孝文), 상호군 이효량(李孝良), 해주 판관(海州判官) 오안로(吳安老), 전 도사(都事) 이곡(李谷) 등이 제법 고관들이었고 장연 첨절제사(長淵 僉節制使)·사직(司直)·부사직·판관·찰방·현감 등의 벼슬도 보인다. 그런가 하면 수공업 기술자인 공장(工匠)으로 수정장(水精匠)· 안자장(鞍子匠)·은장(銀匠)도 있었으니 감동은 신분에 상관없이 애정행각을 벌였던 듯하다.

간통한 여성은 사형, 상대남은 곤장형

이효량과 정효문은 양반답지 못한 처신을 했다. 이효량은 감동의 남편인 최중기의 매부이면서 감동과 간통했다. 정효문은 숙부 정탁(鄭擢)이 감동과 간통한 사실을 알면서도 감동과 성관계를 가졌으니, 근엄한 양반이 할 일은 아니었다. 물론 정효문은 정탁과 감동과의 관계를 알지 못했다고 밝혔으나 사헌부의 조율(照律, 법규를 구체적 사건에 적용하는 것)은 정효문의 변명을 일축했다.

조선 정부는 남자 40명과 간통한 여인을 어떻게 처리했을까. 감동에 대한 문책은 그가 결혼한 여인이라는 데서 시작되었다. 세종 9년 9월16일 사헌부는 감동의 형량을 결정했다. 감동에게 적용된 죄목은 간통이 아니라 “남편을 배반하고 도망하여 개가한 자”에 해당하는 처벌이었다. 즉 “유감동이 최중기와 부부로 살 적에 김여달(金如達, 최초의 간통자)과 간통했던 바, 후에 남편과 함께 자다가 소변을 본다는 핑계로 달아나 김여달에게 갔다”는 것이 구체적 죄목이었고, 그 형량은 교형(絞刑), 즉 사형이었다. 이에 반해 감동과 간통한 남성 20명은 훨씬 가벼운 처벌을 받았다. 곤장 40대, 곤장 100대, 태형 50대, 파면 등 다양했으나 사형에 비하면 처벌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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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강명관 부산대 교수·한문학 hkmk@pusan.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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