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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봉관의 옛날 잡지를 보러가다 ⑩

조선의 ‘노라’ 박인덕 이혼사건

‘신여성 선두주자’는 왜 남편과 자식을 버렸나

  • 전봉관 한국과학기술원(KAIST) 교수·국문학 junbg@kaist.ac.kr

조선의 ‘노라’ 박인덕 이혼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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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학생 때는 이화학당 최고의 인재로 명성이 자자했고 졸업 후에는 모교 교사로 일하며 ‘민족의식을 고취했다’는 죄목으로 투옥되기도 했던 박인덕. 그러나 그는 쏟아지는 세간의 기대와는 달리 부유한 유부남을 이혼시켜 결혼하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으로 입방아에 오른다. 우여곡절 끝에 6년간의 유학을 끝내고 돌아온 후에는, 어렵게 결혼한 남편과 자식을 찾지 않아 다시 한 번 사람들을 어리둥절케 하는데…. 경성 안 호사가들을 자극했던 이 여인의 행보에 숨은 당대 결혼제도의 그늘과 ‘신여성’이라는 이름의 굴레.
조선의 ‘노라’ 박인덕 이혼사건

‘당대의 여성인재’ 박인덕의 이혼사연은 세간의 대대적인 관심을 끌었다. ‘신동아’ 1931년 12월호에 실린 ‘조선이 낳은 현대적 노라 박인덕’과 ‘제일선’ 1932년 7월호에 실린 ‘돌아오지 아니하는 어머니 박인덕’.

근대교육과 자유연애의 세례를 받은 1920~30년대 신여성들은 자신의 의지로 배우자를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얻은 첫 세대였다. 부모가 점지해준 남성에게 억지로 시집가지 않게 된 것은 분명 전시대에 비해 진일보한 것이었다. 그러나 스스로의 의지로 배우자를 선택했다고 가정 내에서 ‘아내의 의무’ ‘어머니의 의무’가 달라진 것은 아니었다.

사회는 개화됐어도 가정은 여전히 가부장적이었다. 많이 배우고 능력 있는 여성, 심지어 교사나 의사 같은 전문직 여성조차 결혼하면 쪽을 찌고 집안에 들어앉아 전업주부가 되는 게 보통이었다. 어지간히 독한 마음을 먹지 않고는 사회생활과 결혼생활을 병행하기 어려웠다. 자신의 의지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배우자뿐, 결혼 후의 삶은 전적으로 배우자의 의지와 능력에 좌우될 수밖에 없었다.

신여성에게 결혼은 일생을 건 도박과도 같았다. 한 남자에게 인생의 모든 것을 거는 위험을 감수하지 않으려면 평생 독신으로 지내는 수밖에 없었다. 근대와 전근대가 어정쩡하게 뒤섞인 결혼생활은 자유연애의 이상도 퇴색시켰다. 역설적이게도 자유연애가 일반화된 이후, 능력 있고 돈 많은 남성의 인기는 오히려 치솟았다. 아무리 사랑한대도 무능하고 가난한 남성과 결혼한다면 평생 감수해야 할 위험이 너무 큰 탓이었다. 당시 여학교 동창회에서는 이런 대화가 오갈 정도였다.

“아이고 저기 저이가 우리 3학년 때 4학년 반장으로 있던 이지?”

“그런데 어쩌면 쪽을 찌고 왔어! 퍽 예뻐졌는데. 옷도 예쁘게 지어입구…”

“저이가 신문기자한테 시집갔다지?”

“시집 잘 갔네!”

“잘 가긴 뭐가 잘 가. 하인 하나 없이 조석도 자기가 짓는다는데.”

“아이고 어쩌면! 신문기자가 그렇게 껄렁껄렁한가.”

“거기다 시어머니까지 있다는 걸.”

“아이고 징역살이로구려.”

(…)

“잘생긴 여왕님 뒤에 시종무관이 없을 리가 있나. 있지, 응? 무엇하는 양반이요?”

“문학가요, 교육가요, 실업가요, 예술가요, 말을 좀 해요.”

“몰라! 몰라!”

“물론 문학가나 예술가겠지. 원래 학생 적부터 취미가 많았으니까. 그런데 제발 월급쟁이나 시어미 있는 데는 연애도 걸지 말아요. 사람이 그냥 썩어요, 썩어!”

“혼자 살면 살았지 누가 그런 데로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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