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3월호

술을 풀자 갱단도, FBI도 □을 주목했다

알 카포네와 금주법

  • 이창무│한남대 경찰행정학과 교수·형사사법학 jbalanced@gmail.com

    입력2013-02-20 18: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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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란의 20년대’라는 조어가 있다. 금주법 시대의 미국을 가리킨다. 술을 밀매하는 조직폭력배가 창궐했다. 밀주 판매를 둘러싼 폭력조직 간 살인사건이 잇따랐다. 폭력조직이 벌어들인 검은돈의 일부는 부패 경찰과 관료의 주머니로 들어갔다.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다. 새로운 범죄 또한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다. 1933년 금주법이 폐지되자 갱단은 다른 돈벌이를 모색하는데….

    1929년 2월 14일 미국 시카고 북쪽의 한적한 동네 차고에 경찰관 복장을 한 2명과 깔끔한 코트 정장을 입은 5명이 들어섰다. 경찰복을 입은 남자가 차고 안에 있던 7명의 남자를 일렬로 세웠다. 불심검문이라고 여긴 남자들이 한 줄로 서자 갑자기 총기가 난사됐다. 드럼 탄창을 장착한 톰슨 기관단총 세례에 7명은 그대로 쓰러졌다. 이른바 ‘밸런타인데이 대학살’이었다.

    이탈리아계인 알 카포네는 부하들을 동원해 아일랜드계 경쟁조직 벅스 모런의 조직원들을 무참히 살해했다. 주류 밀매권을 둘러싼 암투 끝에 벌어진 참극이었다. 시카고 경찰이 수사에 나섰으나 큰 진전은 없었다. 총탄 14발을 맞고도 경찰이 도착할 때까지 숨이 끊어지지 않았던 한 피해자마저 “누가 쏘았느냐”는 질문에 “아무도 나를 쏘지 않았다”고 대답했다. 조직에 화가 미칠까 우려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몇 시간 뒤 숨졌다. 이윽고 수사를 통해 용의자들이 검거됐지만 증거 불충분 등의 이유로 모두 풀려났다.

    사건 해결은 애초부터 기대하기 힘들었다. 알 카포네가 쌓아놓은 거대한 인맥이 움직인 것이다. 경찰과 검찰은 물론 ‘빅 빌’로 불리던 윌리엄 톰슨 시카고 시장도 알 카포네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다. 당시 미국에는 낮과 밤 두 명의 대통령이 존재한다는 얘기가 나돌았다. 밤의 대통령이 바로 알 카포네였다.

    1927년 알 카포네의 1년 수입은 당시 화폐가치로 1억 달러가 넘었다. 기네스북에 ‘세계 최고의 시민’으로 선정된 적도 있다. 1931년 탈세 혐의로 체포돼 징역 11년형을 선고받고 애틀랜타 교도소에 갇힐 때까지 아무도 그를 함부로 하지 못했다. 1934년 8월 탈옥이 불가능하다는 샌프란시스코 알카트라즈 섬의 교도소로 이송돼 또 한 번 유명세를 치른 그는 1939년 매독을 앓으면서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하지만 과거와 같은 영화(榮華)는 더 이상 없었다. 균이 뇌까지 퍼져 거의 식물인간 상태로 시름시름 앓다 1947년 숨졌다.

    알 카포네는 1899년 미국 뉴욕의 브루클린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6학년 때 학교를 그만두고 갱단에 들어갔을 만큼 떡잎부터 노랗던 인물이다. 젊을 때 싸우다가 왼쪽 뺨에 칼을 맞아 큰 흉터가 생겼는데 이로 인해 훗날 ‘스카페이스(scarface)’란 별명을 얻는다. 1919년 갱단 보스 조니 토리오가 성매매 사업 확장을 위해 그를 시카고로 부르면서 알 카포네의 시대가 열린다. 1925년 토리오는 다른 갱단의 습격으로 심각한 부상을 당하자 손을 털고 이탈리아로 돌아갔다. 토리오에게서 조직을 인계받은 알 카포네는 다른 갱단을 힘으로 제압하면서 시카고 암흑가를 장악한다.



    두 얼굴의 보스

    알 카포네의 활약상은 언론과 미디어에 의해 부풀려진 면이 많다. 물론 갱단의 잔학무도함과 위험성을 널리 알려 연방수사국(FBI) 조직을 키우려 한 존 에드거 후버 FBI 국장의 공작도 주효했다. 알 카포네는 뉴욕에서 태어났고 그의 아버지는 이탈리아 나폴리 출신이다. 시칠리아 출신이 아니면 명함을 내밀기 어렵던 이탈리아 마피아 세계에선 정통파가 아니었다. 실제보다 부풀려진 세간의 평가를 그는 오히려 즐겼다. 기자들을 불러 일부러 과장된 모습을 연출했다.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복장과 차량, 경호원과 미녀에게 둘러싸인 알 카포네는 폭력조직 보스의 모습은 이렇다는 전형을 보여줬다. 훗날 범죄조직을 다룬 숱한 영화와 드라마에서 갱단 보스는 대개 알 카포네와 비슷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알 카포네는 범죄행위를 합리화하는 데도 거리낌이 없었다. 기자들에게 천연덕스럽게 “나는 단지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가져다주는 사업가일 뿐”이라고 말하곤 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을 받고 필요한 물건을 파는데 뭐가 잘못됐느냐는 논리였다. 그는 어머니에게 효심 깊은 아들이었으며 가족을 지극히 아끼는 자상한 가장이기도 했다. 또한 무료식당에서 가난한 사람에게 음식을 나눠줬으며 돈이 없어 수술을 받지 못하는 이들의 병원비를 대신 내주기도 했다. 그래서 일각에선 그를 의적(義賊)으로 두둔했다. 밀주, 성매매, 도박으로 돈을 벌던 그가 아인슈타인, 헨리 포드와 함께 당시 시카고 젊은이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 중 한 명으로 꼽혔다는 점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시카고가 주류 밀매의 근거지로 떠오른 것은 지리적 이유가 크다. 미국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 철도교통의 중심지였고, 미시간 호를 끼고 있어 운하를 이용한 수송도 용이했다. 특히 호수를 끼고 캐나다와 접해 있어 금주법 시기에 금주법과 상관없는 캐나다로부터 술을 몰래 들여오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뉴욕도 갱이 창궐하긴 마찬가지였다. 이탈리아에서 무솔리니가 집권한 후 많은 이가 배를 타고 뉴욕으로 건너왔다. 이들은 맨해튼 남부에 모여 살면서 ‘리틀 이탈리아’라는 거주지를 형성했다. 시칠리아 마피아들도 무솔리니 정부가 대대적인 범죄조직 소탕에 나서자 단속을 피해 미국으로 건너왔다. 뉴욕에 갓 도착한 이탈리아인이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게 뻔했다. 시칠리아 마피아 갱단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이처럼 무솔리니의 집권은 뉴욕의 조직폭력 세력이 갑자기 커지게 된 요인의 하나다.

    때마침 금주법 시행으로 주류 밀매가 폭력조직의 커다란 수입원으로 자리 잡자 새로운 조직원의 충원이 필요했다. 시카고에서 알 카포네가 아일랜드계 갱단인 벅스 모런 파와 주도권 다툼을 벌인 것처럼 뉴욕에서도 이탈리아계 갱단은 앞서 터를 잡고 있던 아일랜드 및 유대인 갱과 주도권 전쟁을 치러야 했다.

    주류 밀매권을 둘러싼 주도권 다툼은 ‘카스텔라마레스 전쟁’이라고 불리는 일대 격돌로 일단락된다. 1931년 유력한 경쟁 세력 보스가 암살되자 살바토레 마란자노가 뉴욕 암흑가를 접수한다. 마란자노는 곧 뉴욕 시를 5개의 패밀리로 나누고 행동 강령과 패밀리의 세부조직을 완성한다. 그러고는 스스로 ‘보스 중의 보스(Boss of All Bosses)’라고 일컬으며 모든 마피아 패밀리의 충성을 요구했다. 하지만 그 역시 암흑가를 접수한 지 6개월도 채 지나지 않아 암살되고 만다.

    알 카포네 같은 갱이 활개를 치면서 엄청난 돈을 긁어모은 결정적 계기가 금주법 제정이다. 미국 의회는 헌법을 고쳐가며 술의 제조와 판매를 금지했다. 역사 속으로 사라진 수정헌법 18조는 미국 국민의 절대적 지지를 등에 업고 만들어졌다. 헌법을 중시하지 않는 국가는 없지만, 미국에서 헌법의 의미는 남다르다. 미국은 한마디로 헌법의 나라라고 할 수 있다. 건국의 아버지들은 헌법을 통해 미국 정신의 토대를 다졌다. 오랜 기간 한 영토에서 숙성된 역사와 전통, 문화를 공유하지 못했기에 국민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뭔가가 필요했다. 그게 헌법이었다.

    “술은 惡의 원천”

    그래서 궁금증이 더해진다. 국교(國敎)와도 같은 존재인 헌법을 뜯어고칠 정도로 금주가 절실하게 필요했던가. 법으로 술을 만들지 못하게 한 게 미국이 처음은 아니다. 여러 나라가 이런저런 사정을 들어 금주법을 만들었다. 우리나라도 여러 차례 금주령을 내려 술을 못 만들게 했다. 조선시대 영조가 3차례에 걸쳐 금주법을 시행한 게 대표적이다. 모두 흉년이 들었을 때다. 곡식이 없어 끼니 잇기도 힘든 판국에 곡식을 빚어 만든 술을 마시는 게 가당키나 하냐는 이유로 금주령을 내렸다. 지금도 상당수 이슬람 국가에서 금주법이 시행되고 있다. 얼마 전 파키스탄에서는 금주법 규정을 기독교인에게까지 적용해 논란이 됐다.

    그러나 미국의 경우는 사뭇 다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는지 이해하려면 당시 미국의 상황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미국은 19세기 말 산업자본주의가 정점에 치달으면서 돈이면 뭐든지 다 된다는 생각이 팽배했다. 지방정부 관리는 물론이고 연방정부 관료에 이르기까지 비리가 만연했다. 지각 있는 사회 지도층을 중심으로 혁신운동(progressivism)이 일어났다. 미국의 초심(初心)을 되찾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강렬하게 울려 퍼진 것. 목숨을 걸고 종교와 정치적 자유를 찾아 만든 나라가 타락의 나락으로 빠지는 꼴을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주지하듯, 미국은 이민자의 나라다. 초기 영국 청교도 이민자를 중심으로 토착 인디언을 몰아내고 북아메리카대륙 동부지역에 식민지를 건설했다. 이후 네덜란드, 독일 등에서 주로 신교도가 정치·종교적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건너왔다. 이들은 나름대로 교육 수준과 경제력을 갖췄기에 신대륙에 정착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그러나 19세기 중반 아일랜드에 대기근(Great Famine)이 닥쳐 아일랜드인이 미국으로 대거 몰려오면서 상황이 변하기 시작했다. 아일랜드는 당시 국민의 3분의 1이 굶어죽었다는 말이 있을 만큼 끔찍한 기근에 시달렸다. 그들은 살기 위해 고국을 떠났다. 바로 옆 영국으로 들어가는 항로가 막히자 궁여지책으로 대서양을 건너 미국으로 향했다. 배라고 생긴 것은 모두 타고 바다를 건넜다고 할 만큼 절박했다. 운 좋게 미국에 건너와도 손에 쥔 게 없었다. 교육 수준도 높지 않았고 가져온 돈이나 귀중품도 많지 않았다. 당장 생계를 해결하려면 대기근 이전 미국에 정착한 동포들이 사는 곳 주변으로 몰려들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뉴욕의 ‘파이브 포인츠(Five Points)’와 같은 악명 높은 슬럼가가 만들어졌다. 마땅한 직업이 없던 이들에게 범죄는 일상이 됐다. 더욱이 아일랜드 출신은 거의 대부분 가톨릭, 즉 구교도였다. 술에 관대한 문화 탓에 이들 중엔 알코올 중독자가 많았다. 이들의 술주정과 행패 탓에 주변 지역은 엉망으로 변했다. 엄격한 생활윤리를 강조하는 프로테스탄트들이 건설한 미국의 원래 모습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19세기 말부터는 동유럽과 남유럽 사람들이 자유와 부를 찾아 미국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들 역시 대부분 가톨릭 신자였다. 엄격한 생활윤리보다 사람들 사이의 끈끈한 정(情)과 와인이 없으면 안 되는 이들이었다.

    미국 근대 조직범죄 역사를 보면 1세대는 아일랜드 갱, 2세대는 유대인 갱, 3세대는 이탈리아 갱, 4세대는 중국 갱이라고 할 수 있다. 1970년대 이후엔 베트남 갱과 러시아 마피아를 비롯한 동유럽 갱 등 미국 이민의 순서대로 새로운 갱 문화가 등장했다. 미국의 조직범죄 역사는 이민 역사를 그대로 반영하는 셈이다. 주류 세력과 문화에 동화하지 못한 아웃사이더들이 그들 나름의 생존전략으로 만든 것이 갱이다.

    反술집연대 결성, 그러나…

    어쨌든 와스프(WASP·White Anglo -Saxon Protestant)가 대표하는 미국 주류 지배계급의 문화, 정서와는 너무나 다른 새로운 이질적 집단의 등장에 기득권 세력은 긴장했다. 뭔가 새로운 방안을 마련해야 했다. 비주류 집단이 카페에 모여 밤늦도록 술을 마시고 정부와 기득권층에 대해 이런저런 불만 섞인 얘기를 나누는 것이 위협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결국 금욕과 절제를 강조하는 청교도 정신에 따라 술은 악의 원천으로 간주됐고 금주법을 제정하자는 주장이 터져 나왔다.

    1893년 마침내 ‘반(反)술집연대(ASL·Anti-Saloon League)’가 만들어졌다. 초기 ASL의 주된 후원단체는 기독교 복음 선교 교회였다. 이윽고 ASL은 기업에 지원의 손길을 내밀었다. 금주법이 시행되면 술로 인한 각종 사고가 줄어드는 동시에 국민 건강이 증진돼 소비 경제가 활성화하므로 기업에 도움이 된다는 논리를 폈다. 지금도 일부 금주법 지지자는 1920년대 미국 경제에서 자동차, 가전제품 등의 소비가 크게 늘고 생산성이 올라간 게 금주법 시행 효과라고 주장한다.

    어쨌든 ASL을 비롯한 금주법 지지 단체들은 처음엔 금주법 시행을 자치단체 차원에서 시행하려고 로비했다. 1906년부터 주정부 차원에서 금주법 시행을 촉진한 결과 1919년까지 무려 30개 주가 금주법 시행에 동의했다. 1913년 ASL은 한 발 더 나아가 헌법 개정을 통한 연방 차원의 금주법 제정을 시도한다.

    금주법 제정을 앞당기게 한 또 다른 사건은 제1차 세계대전. 전쟁으로 인해 여성의 사회참여가 크게 늘었다. 남자들은 전장에 투입됐고 여자들이 공장 일을 맡았다. 당연히 여성의 발언권이 커졌고, 이는 참정권에 대한 강력한 요구로 이어졌다. 캐나다 독일 영국 폴란드 등 많은 나라가 1차대전 이후 여성의 참정권을 인정했다. 미국에선 1920년 8월 수정헌법 19조에 의해 여성의 참정권이 인정됐다.

    여성이 투표권을 갖게 되자 여성에 대한 정치인들의 구애가 시작됐다. 앞 다퉈 여성의 입맛에 맞는 새로운 정책을 내놓았다. 금주법도 그중 하나였다. 술을 마시고 저지르는 폭력 등으로 고통 받던 이들이 금주법 제정을 강력하게 요구한 것이다. 자신들의 자식 세대만큼은 남성들이 마시는 술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를 원천적으로 막겠다는 심정에서였다.

    전쟁은 평시에는 기대할 수 없는 많은 변화를 가능케 한다. 1917년 9월 1차대전에 참전하면서 미국 정부는 전쟁 식량 확보를 위해 곡물을 원료로 하는 위스키와 같은 증류주 생산을 금지했다. 1918년에는 알코올 함량 2.75% 이상 주류 판매가 제한됐다.

    그러나 금주법은 성공할 수 없는 법이었다. 아인슈타인 같은 학자마저 “합리성과 실용성을 강조하는 미국에서 이런 실효성 없는 법이 제정됐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고 비판할 정도였다. 금주법을 시행하면 사람들이 술을 안 먹으리라고 여긴 것은 지나치게 순진한 생각이었다. 금주법 시행으로 거대한 암시장이 생겨났고 그곳에 기생하는 조직범죄 세력만 키워준 꼴이 되고 말았다. 법에 대한 경시 풍토도 생겨났다.

    反금주단체들의 반격

    미국 내에서 술을 빚는 게 어려워지면서 캐나다와 멕시코, 카리브해 연안 국가로부터 위스키와 럼주가 대량으로 밀수입됐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와인과 같은 약한 술을 즐기던 사람마저 알코올 도수가 높은 증류주를 마시게 됐다. 게다가 법을 엄격하게 적용하기도 어려웠다. 개인적으로 술을 갖고 있거나 마시는 것을 금지하지 않았고, 종교적이거나 치료 목적 등으로 술을 합법적으로 구입해 마실 수 있는 예외가 다양했다. 집에서 만드는 와인이나 맥주 등에 대해서도 별다른 제재를 가하지 않았다.

    특히 헌법 개정에 뒤이어 실행 법안인 볼스테드(Volstead)법이 발효되기까지 1년이 걸렸다. 금주법 기간에 두고두고 소비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술을 비축해놓을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제공한 것이다. 볼스테드법은 연방정부와 주정부가 힘을 합해 금주법 시행에 나설 것을 주문했으나 연방정부와 주정부의 강력한 법집행 연대는 시작부터 삐걱거렸다. 뉴저지 주 등 금주법에 시큰둥한 곳들은 금주법 시행에 필요한 주정부 법안 통과를 막았다.

    금주법 시행으로 알코올 소비가 줄어든 것은 사실이다. 술을 덜 마셔서 간 질환 등 질병도 어느 정도 감소했다. 그러나 금주법은 부작용이 적지 않았다. 무엇보다 금주법 시행으로 범죄가 줄어들지 않았다. 미국 전역에서 금주법 시행 기간 살인범죄가 오히려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자들은 살인범죄 증가가 갱단 간의 전쟁을 비롯해 주류 밀매를 둘러싼 폭력이 잦아지면서 늘어난 것으로 보고 있다. 또한 경찰과 행정기관의 부패가 늘어났으며 일반 시민의 법 존중 의식도 크게 떨어졌다. 단속을 위한 정부 지출도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금주법 시행 2년 뒤인 1922년 한 언론기관에서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 응답자의 61.4%가 금주법 폐지를 원했다.

    1920년대 미국의 자유주의자들은 금주법이 시민의 자유를 억압한다고 여겼다. 이들은 미국의 근본인 헌법을 뜯어고쳐가며 이런 법을 만들었다는 점을 용서할 수 없었다. 니콜라스 버틀러 당시 컬럼비아대 총장은 “수정헌법 18조의 진정한 문제는 술이 아니라 헌법에 결코 들어가서는 안 되는 침입자가 수정헌법의 형태를 빌려 들어간 점”이라고 지적하면서 “신성한 헌법을 보호하려면 금주법 조항을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ASL이 금주법 시행을 주도한 것처럼 금주법반대연합(AAPA)을 비롯한 반(反)금주단체들이 적극적으로 폐지 운동에 나섰다. AAPA는 금주법이 수많은 시민에게 무법정신을 심어주고 정부 관리를 부패에 빠지게 했으며 조직범죄를 양산했다는 논리를 폈다. US스틸, 웨스팅하우스, 굿이어 등 재계의 유력인사들도 금주법 폐지 운동에 가담했다. 기부금 또한 착실하게 걷혀 1930년부터 AAPA는 주류산업과 관련한 곳에서는 기부금을 한 푼도 받지 않았다.

    그러나 금주법 폐지론자 어느 누구도 헌법 개정을 통해 금주법을 없애는 게 쉬우리라고 생각지 않았다. AAPA의 한 간부는 수정헌법 18조를 바꾸는 것은 아무리 빨라도 자신의 손자 세대에서나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역사의 전환점은 전혀 예기치 않던 사건에 의해 만들어지는 법이다. 1929년 10월 뉴욕 월스트리트 주식시장이 대폭락하고 세계는 대공황으로 접어든다. 경제가 급격하게 침체에 빠지자 일부에서 금주법을 폐지해 주류산업 활성화로 조세 수입을 늘리고 고용을 증대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금주법 철폐 운동을 폈던 ‘크루세이더’란 단체는 1920년부터 1931년까지 금주법 시행으로 약 340억 달러의 비용이 발생했다고 주장했다.

    급기야 1932년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시행한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74%가 금주법 폐지에 찬성했다. AAPA 지도부는 프랭클린 루스벨트 민주당 대선 후보가 금주법 폐지를 수용한다는 조건 아래 지지선언을 했다. 민주당은 곧 전당대회를 열어 금주법 폐지를 당 정강으로 채택했다. 공화당은 금주법 유지와 폐지 사이에서 확실한 의견을 나타내지 않으면서 양쪽을 다 끌어안으려 했다. 마침내 국민은 민주당을 선택했고 금주법 폐지를 주요 내용으로 하는 수정헌법 21조가 1933년 2월 의회를 통과했다.

    FBI, 마약으로 표적 바꿔

    금주법이 폐지되자 그동안 돈방석에 앉아 있던 갱단이 충격에 빠졌다. 곤란해진 이들은 갱들만이 아니었다. 싸워야 할 대상이 사라진 수사기관도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당장 조직 축소와 예산 감축을 요구하는 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FBI를 비롯한 수사기관은 술을 대신할 뭔가가 필요했다.

    오래전 20세기 초 미국의 유명한 재판과정을 조사하면서 1900년 발간된 ‘뉴욕타임스’를 꼼꼼하게 살펴볼 기회가 있었다. 마이크로필름으로 돼 있어 읽기 불편했지만, 흥미로운 광고가 눈에 띄었다. 다름 아닌 마약 광고였다. 코카인을 섞어 만든 술을 원기회복에 특효가 있다면서 선전한 광고였다. 당시 약국에서는 치통 등 통증 완화를 위한 진통제로 코카인 성분이 들어간 사탕을 팔았다. 코카인 성분이 들어간 상품은 사탕, 껌, 캐러멜 등 다양한 종류로 판매됐고,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이나 윈스턴 처칠 총리도 한때 애용했다고 알려졌을 정도다.

    코카인은 ‘코카콜라’의 탄생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코카콜라’가 처음 등장한 게 1880년대 말이다. 웨스트버지니아 탄광의 광부들이 코카인 성분이 들어간 음료를 마시고 쉽게 원기를 회복하는 것에 착안해 조지아 주 애틀랜타의 존 펨버튼이란 약사가 코카인과 카페인을 섞은 음료를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 코카인이 들어갔기 때문에 이름도 코카콜라라고 지었다. 지금도 코카콜라를 ‘코크(Coke)’라고 부르는데, 이는 코카인의 약칭과 똑같다. 하여튼 코카콜라는 처음 시판됐을 때 만병통치약인 것처럼 선전되면서 팔렸다. 이후 논란이 일면서 코카인 성분은 콜라 원료에서 빠졌다.

    이렇듯 불과 100여 년 전만 해도 미국에서 마약 사용은 범죄가 아니었다. 캘리포니아 주 등 몇몇 지역에서 19세기 말부터 마약 사용을 불법화했지만, 미국 전역에서 마약 사용을 금지한 최초의 연방규정인 해리슨 마약 법안은 1914년 만들어졌다. 하지만 마약 단속이 본격화한 것은 1930년대 중반 금주법이 폐지되면서부터다.

    1933년 금주법이 폐지되자 FBI와 같은 수사기관은 조직 및 예산 축소 요구와 마주쳤다. 조직을 만들기는 쉬워도 한 번 만들어진 조직을 없애기는 보통 어려운 게 아니다. 새로운 단속대상을 찾아 나선 이들 기관은 마약을 새로운 표적으로 선택했다. 1937년 대마초 금지법 공포도 대마 산업의 발전에 위협을 느낀 섬유업계와 제지업계의 강력한 로비와 새로운 업무가 필요했던 수사기관의 요구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이다. 밀주로 돈을 벌던 갱단도 마약으로 사업 방향을 전환했다. 금주법이 사라지자 갱단도, FBI도 마약에 주목한 것이다.

    미국은 지금도 마약 관련 수사와 법 집행을 위해 매년 300억 달러(약 33조 원) 넘는 돈을 사용한다.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다. 새로운 범죄 또한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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