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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적취재|율산 再起 8857일의 기록

집념의 신선호, 신화는 끝나지 않았다

  • 이나리byeme@donga.com

집념의 신선호, 신화는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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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년 3월20일, 신씨 집안 3형제는 느닷없이 들이닥친 ‘요원’들에 의해 모처로 연행됐다. 신선호, 신상호, 그리고 신명호. 율산그룹에 몸담고 있던 신상호씨는 원래 전남대 철학과 교수였다. 동생 일을 돕고자 교수직을 버렸던 것.

당시 재무부 국제금융과장이던 신명호 씨는 68년 행정고시에 합격, 이헌재 임창열과 함께 ‘이재국 3총사’으로 불리며 고속 승진을 거듭하고 있었다. 그런 신명호 씨마저 사무실로 들이닥친 사내들에 이끌려 어디론가 사라졌다. 당시 청와대 파견 검사였던 동창조차 행방을 찾는 데 꼬박 하루가 걸렸다고 한다. 조사 후 별다른 혐의가 드러나지 않아 옷 벗는 일만은 면했지만, 이후 그의 공직생활은 주위의 기대만큼 잘 풀려가지 못했다.

‘3총사’ 중 하나였던 이헌재씨도 율산 사태로 인생의 큰 굴곡을 경험한 사람이다. 금융정책심의관이라는 직책상 사건의 책임을 지고 사퇴할 수밖에 없었던 것. 그가 재정경제부(재무부 후신) 장관으로 금의환향하기까지는 꼭 20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3형제는 조사를 받는 와중에 모진 고초를 겪은 듯하다. 이미 옛 일이 된 탓일까, 가족 모임에서 간혹 그 때 얘기가 화제에 오르면 “손가락을 어찌나 세게 꺾던지 지금도 시리고 아프다”는 말이 농담처럼 툭 튀어나오기도 한단다. 특히 신회장은 당시의 후유증으로 인해 한동안 육체적으로도 힘든 나날을 보내야 했다.

한가지 의문점은 3형제가 끌려간 ‘모처’가 보안사 서빙고분실이었다는 신회장 최측근의 증언이다. 경제사범을 왜 검찰도, 그렇다고 당시 최고의 권력기관이던 중앙정보부도 아닌 보안사에서 연행·조사한 것일까. 신회장이 “아직은 말할 때가 아니다”라며 함구하고 있는 한 액면의 진실이 밝혀지기는 어려운 노릇이다.



1심에서 징역 7년, 2심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은 신회장은 사건이 대법원에 계류 중이던 80년 7월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1년이 넘는 복역 기간 동안 그는, 어린 아들의 사진을 한시도 놓지 않고 들여다보며 가슴에 쌓인 한을 달랬다고 한다. 보석 중이던 83년 4월 13일, 드디어 대법원 판결이 났다. 징역 5년에 집행유예 4년. 피 말리는 시간들이었다.

집행유예가 끝날 무렵인 85년까지 신회장은 대부분의 시간을 논현동 자택에서 보냈다. 한 지인은 그 때의 생활에 대해 “소식이 궁금해 찾아가 가보면 양주(兩主)가 나란히 화선지를 펼치고 앉아 한 편에선 난을 치고 또 한 편에선 글씨를 쓰고 있었다”고 전한다. 알고 보면 신회장 부부에게 서도는 고아한 취미, 그 이상의 무엇이었다.

친지에 따르면 신회장과 부인 부정애 씨는 각기 경기고와 이화여고에 재학 중이던 시절, 동양화의 대가 청전 이상범 선생 문하에서 서도를 배우며 첫 만남을 시작했다. 부씨는 조선일보 주필, ‘사상계’ 편집인을 지낸 당대의 문사 부완혁씨(작고)의 딸이다. 15세 때 국전 서예 부문에서 최연소 입선, 화제를 모았던 재원. 후에 서울대 역사학과에 입학했다. 신회장은 경기고 시절 서도부에 가입하면서 본격적으로 붓을 잡기 시작했다. 그 역시 재능이 많았던지 대학 1학년 때 유수의 미전에서 특선을 차지해 주위를 놀라게 했다. 나란히 대학생이 된 두 사람은 여초 김응현(金膺顯) 선생을 스승 삼아 서울대에 서도회를 만들기도 했다.

오랜 기간 사랑을 키워 온 두 사람은 자연스레 결혼을 이야기하게 됐다. 그러나 곧 양가의 거센 반대에 부딪혔다. 부씨는 건강이 좋지 못했다. “수술을 하지 않으면 서른 살을 넘기기 어렵고, 출산도 쉽지 않다”는 진단이었다. 부완혁씨는 “건강 상태도 좋지 않은 딸아이를 시집보낼 수 없다”고 했고, 신씨 집안 역시 같은 이유로 사돈 맺기를 주저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끈질긴 설득전을 펴 마침내 결혼에 성공했다.

부씨는 위태로운 상황 속에서도 용감하게 아이를 낳았고 두 차례의 대수술도 무사히 이겨냈다. 주변 사람들은 이들을 두고 “동지애로 맺어진 아주 특별한 부부”라 칭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어떤 이는 “신회장이 곧이곧대로 믿고 따르는 이는 부인뿐일 것”이라는 이야기를 곁들이기도 했다.

신회장의 장인 부완혁씨가 작고한 건 85년 1월이었다. 70년 ‘사상계’에 김지하의 담시 ‘오적’을 실어 옥고를 치르기도 했던 그는, 사위가 수감되면서 풍비박산이 난 율산의 회장자리에 앉아 갖은 고난과 풍상을 대신 겪어 주었다. 또한 유고(遺稿)조차 율산 부도의 부당성을 조목조목 지적하는 내용으로 채워놓았을 만큼 사태 해결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래서일까. 장인의 빈소에서 신회장은 그간 쌓인 한을 다 풀어 내놓듯 몹시도 섧게 울었다고 한다.



터미널 부지 지켜낸 사연

이제 사연 많은 땅, 센트럴시티의 연원(淵源)을 짚어보자. 사는 집마저 담보로 잡혀야 했던 급박한 상황에서, 신회장은 어떻게 1만8781평의 금싸라기 강남 땅을 고스란히 지켜낼 수 있었을까.

율산이 서울시로부터 이 땅을 구입한 건 77년 4월. 평당 7만원, 총 13억여 원을 지불했다. 황무지나 다름없는 땅, 터미널 부지로 묶여 있어 용도조차 제한됐던 이 곳을 신회장은 높이 평가했다. 이미 그의 머리 속에는 복합문화생활공간의 아이디어가 들어 있었던 것이다.

78년 3월 율산은 가건물을 지어 호남·영동선 고속터미널 영업을 시작했다. 이어 본 건물 신축을 위한 허가를 제출하고 터파기 공사에 들어갔다. 그러나 지하 2층을 파 내려가던 79년 4월, 전면적인 부도 사태에 직면하면서 공사는 결국 중단되고 말았다.

당시 호남터미널에 근무했던 김모씨는 “지금 센트럴시티의 모습은 22년 전 계획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빌딩을 지어 아래층은 터미널, 중간층은 전문상가, 그 위는 호텔로 활용하겠다는 것이 신회장의 구상이었다. 건물 뒤 하천 복개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심지어, 멀티플렉스(상영관이 여러 개 있는 복합극장)에 대한 계획까지 잡혀 있었다. 멀티플렉스가 우리나라에 본격 소개되기 시작한 것이 겨우 5년 전 안팎의 일임에 비춰보면 놀라운 혜안이 아닐 수 없다.

신회장은 부도 직전 과천 서울랜드 공사를 수주했고, 석촌호수 주변에 백화점 및 종합레저시설을 설립하려 땅 매입을 계획 중이었다. 율산 부도와 함께 모든 일이 수포로 돌아가버리고 말았지만, 석촌호수 프로젝트의 경우 ‘롯데월드’라는 이름으로 실현돼 해마다 롯데그룹에 막대한 이윤을 남겨주고 있다.

율산 부도가 터지자 채권은행단은 한푼이라도 건지기 위해 계열 기업은 물론 회사의 모든 자산을 팔아치우기 시작했다. 터미널 부지도 당연히 그 대열에 끼여 있어야 했다. 그런데 사정이 여의치 않았다. 땅 주인은 율산이지만 법적으론 여전히 서울시가 소유주로 돼 있었던 까닭이다.

77년 율산이 이 땅을 매입할 당시에는 서울시의 환지 확정이 이루어지지 않아 율산측으로 소유권이 넘어가지 못했다. 82년 10월 환지확정이 됐음에도 서울시는 여전히 소유권을 넘기지 않았다. 애초 서울시가 율산에 터미널 부지를 매각할 때, 용도를 터미널로 못박고 계약서에 ‘일정 기간 내 터미널을 건축하지 않을 경우에는 계약을 무효로 할 수 있다’는 단서조항을 달아놓은 때문이다. 즉 ‘고속버스터미널을 완공해야만 소유권 이전 등기를 해주겠다’는 조건이었다.

채권단으로서는 멀쩡한 땅을 두고도 팔 수가 없으니 답답한 노릇이었다. 서울시가 붙여놓은 복잡한 조건이, 결과적으로 율산 재기(再起)의 유일한 ‘밑천’을 붙잡아두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셈이다.

부지 매각이 여의치 않자 채권은행단은 복합건물을 신축해 그 수익금으로 부채를 갚겠다는 율산측의 제의를 적극 검토하기 시작했다. 82년 율산은 주거래은행이던 서울은행(당시 서울신탁은행)과 터미널 신축에 대한 약정을 체결했다. 그러나 은행 측의 사정으로 약정 체결 3년 후인 85년 5월에야 수도권정비심의 실무회의(위원장 건설부차관)를 통과했다.

남은 과제는 재무부가 수도권정비심의위원회(위원장 국무총리)에 터미널 신축안을 상정시켜 통과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재무부는 적극적으로 나서주지 않았다. 여건 조성에 시간이 필요하고 채권은행단 간 협의가 미진하다는 것이 이유였다. 엄청난 물의를 빚은 율산을 다시 일어나도록 돕는 것은 사회정의에 어긋난다는 뜻도 밝혔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율산 사태 당시 재무부는 국장급 2명과 은행장 4명이 해직되는 등 깊은 상처를 입었다. 그러니 율산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갖고 있었겠느냐”는 수군거림이 터져 나오기도 했다.

율산과 재무부의 갈등은 87년 1월, 재무부가 경제기획원과 협의, 터미널 부지를 금호그룹에 넘기기로 했다는 소문이 나돌면서 절정에 달했다.

금호그룹은 83년 이후 줄기차게 정부 요로에 민원을 제출, 터미널을 계속 가건물로 둘 수는 없지 않느냐는 이유로 매각을 청원해 왔다. 광주고속이 섬유단지조성도매상가협의회와 손잡고 터미널을 짓겠다는 의사표시였다.

당시 정인용(鄭寅用) 재무장관은 김만제(金滿堤) 부총리와 합의, 빠른 시일 내에 터미널 부지를 금호그룹에 넘기기로 방침을 정하고, 서울시와 서울은행으로 하여금 구체적인 절차를 진행토록 했다. 율산에 맡겨놓았다간 도저히 터미널 신축을 할 수 없을 뿐더러, 엄청난 물의를 일으켰던 율산에 거액의 신규 금융지원을 해 줄 수도 없으니 같은 호남재벌인 금호그룹에 넘기는 게 현실적이라는 이유였다.

그러나 율산의 한 관계자는 전혀 다른 분석을 내놓았다. “김만제 부총리와 금호그룹 박성용 전회장은 매우 절친한 사이였다. 박 회장이 그 친분을 이용, 과욕을 부린 것이다”. 그는 또 “금호그룹은 부지에 걸려 있는 부채가 많다는 이유로 단돈 1원에 입찰에 나설 예정이었다”고 밝혔다.

사실이 어떻든, 결과적으로 이 거래는 성사되지 않았다. 소문이 기사화되면서 ‘금호그룹에 특혜를 주는 것 아니냐’는 여론이 일었던 것. 그러나 이 사건은 신회장이 회사 일에 더욱 적극적으로 매달리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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