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4월호

바이올린과 낙지가 만났을 때

  • 글·최영재 기자 사진·김용해 기자

    입력2005-04-19 14: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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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주를 유난히 좋아하는 임현식씨는 손수 음식을 만들면 십중팔구 술안주다. 주특기를 내세우자면 재료가 푸짐하게 들어가 술 한잔 거나하게 걸칠 수 있는 낙지전골이다. 이 낙지전골은 어렵지 않아, 남자들이 집에서 만들기에 그만이다.
    바이올린과 낙지가 만났을 때
    소시민의 영원한 대명사 순돌아빠 임현식씨(55). 그를 보면 사람들은 행복해진다. 닭똥집과 꼼장어가 지글지글 익고, 우동국물이 설설 끓는 포장마차에서 소주 한 잔을 마시고 싶을 때, 생각나는 탤런트가 바로 그다.

    “왜 나는 일류가 못 될까?, 왜 나는 직장에서 인정받지 못할까? 왜 나는 이 나이가 되도록 이 모양 이 꼴일까?” 살아가면서 이런 자괴감이 들 때 그와 마주앉아 소주잔을 기울이다 보면 맺힌 응어리가 풀릴 것만 같다. 잘생기고 재능 많은 사람들이 판치는 텔레비전 속에서 이 키 작고 평범한 남자를 통해 보통 사람들은 대리 만족을 느낀다. 고되고 힘든 생활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그의 캐릭터를 보면 절로 힘이 솟는 것이다.

    사실 세상사와 삶이라는 것이 천상의 구름 위같이 향기로운 백합이 만발한 곳은 아니다. 민중의 삶은 어쩌면 김치냄새 나는 음식점 주방 행주에 가까울지 모른다. 그 소시민의 애환과 눈물을 닦아주고 풀어주는 이가 바로 임현식씨다. 더구나 그에게는 특유의 익살과 웃음이 있다. 가히 한국 리얼리즘 연기의 선봉이라 할 만하다.

    소설가는 자신의 절절한 체험을 형상화할 때 가장 좋은 작품을 쓸 수 있다고 한다. 연기 역시 배우의 삶과 동떨어질 수 없는 것이다. 소시민을 울리고 웃기는 임현식씨는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그는 역시 평범한 삶을 살고 있었다. 그 증거가 가족이다.

    그는 현재 여든이 넘는 노모와 아내, 딸 셋과 함께 살고 있다. 50대 중반인 그에게 술을 끊으라고 잔소리를 하는 팔순 노모, 27년 동안 초등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하다가 최근에 퇴직한 아내 서동자씨(50), 평생 조연만 하는 아빠를 친구들과 교수님에게 자랑하는 대학생 세 딸. 보통 사람들에게 웃음과 감동을 주는 그의 끝없는 에너지는 가족에게서 나오는 것 같았다.



    직업이 직업이니만큼 그는 집에 들어오지 못하고 여관방을 전전하며 촬영하는 때가 많다. 하지만 촬영이 없는 날은 온종일 집에서 쉬기도 한다. 이럴 때는, 초등학교 교사였던 아내는 출근하고 없기 때문에 직접 밥상을 차려 먹어야 한단다. 자주 하는 편은 아니지만, 그는 아내가 직장에 나가고 없을 때 세 딸을 위해서 음식을 만든다. 냉장고의 묵은 반찬을 뒤섞어 만드는 비빔밥이 바로 그것이다.

    정식으로 하더라도 거창하고 어려운 요리는 하지 못한다. 소주를 유난히 좋아하기 때문에, 손수 만들면 십중팔구 소주 안주가 될 수 있는 요리다. 주특기를 내세우자면 재료가 푸짐하게 들어가 술 한잔 거나하게 걸칠 수 있는 낙지전골이다.

    전라도에는 낙지나 문어로 만든 향토 음식이 많다. 이는 낙지가 서해 뻘밭 어디서나 잡히기 때문이다. 임현식씨의 고향은 전북 순창이다. 순창은 전국에서 고추장과 간장, 된장이 가장 맛있다는 곳이고, 국밥을 하나 끓여도 타지방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뛰어나다는 곳이다. 임현식씨가 만드는 낙지전골은 그리 어렵지 않아, 남자들이 집에서 술안주로 만들기에 그만이다.

    4인분 전골을 만들 경우 재료는 낙지 4마리(500g), 쇠고기 100g, 무 약간, 파 50g, 양파 1개, 당근, 미나리, 표고버섯 등이다. 먼저 전골 양념을 만들어야 한다. 전골양념은 4인분 기준으로 참기름 2큰술, 고춧가루 1큰술, 간장 2큰술, 설탕 1큰술, 다진 파 4작은술, 다진 마늘 4작은술, 다진 생강 2작은술, 깨소금 1큰술을 잘 섞어 놓으면 된다.

    이제 주재료인 낙지 차례다. 낙지는 굵은 소금을 뿌려 주물러 씻어서 4∼5cm 길이로 썬다. 다음은 미리 만들어 놓은 전골양념에 참기름과 고춧가루를 더 붓고 고루 으깬 다음, 썰어 놓은 낙지를 넣어 고루 무친다. 쇠고기는 채썰어 고기양념(간장 1큰술, 설탕 2분의 1큰술, 다진 파 2작은술, 다진 마늘 1작은술, 참기름 1작은술, 깨소금 1작은술, 후춧가루 약간)으로 고루 무쳐 놓는다. 무는 납작납작하게 썰고, 파는 어슷어슷 썰어놓는다. 당근과 표고버섯도 채썰고, 미나리는 4∼5cm 길이로 썬다.

    재료 준비가 끝나면 두꺼운 전골 냄비를 잘 달구어서 기름을 두르고 먼저 양파와 무를 넣고 잠시 볶다가 쇠고기와 낙지를 넣고 고루 볶는다. 낙지가 거의 익으면 나머지 재료와 물을 약간 붓고 전골 양념을 풀어 끓인다. 완전히 끓으면 파와 미나리를 넣고, 살짝 끓이다 불을 끄면 된다.

    단란한 가족에겐 무언가 비결이 있다. 임현식씨 가족에겐 음악이 비결이었다. 임현식씨는 바이올린과 피아노, 트럼펫 세 악기를 수준급으로 연주한다. 그가 가장 먼저 배운 악기는 바이올린으로 광주에서 중학교를 다닐 때 이모부가 갖고 있던 것으로 처음 시작했다.

    그는 악기 연주 실력을 세 딸에게 물려주었다. 큰딸 남실양(23)에게는 피아노를, 일란성 쌍둥이인 금실·은실양(22)에게는 트럼펫과 바이올린을 직접 가르쳤다. 그래서 세 자매는 학원 한 번 가지 않고 악기를 배웠다. 아버지에게 피아노를 배운 큰딸 남실양은 대학도 피아노 전공으로 진학하려다, 일반 학과로 바꾸었다.

    최근에는 아주 바빠지면서 잘 못하지만, 그는 틈만 나면 집에서 바이올린을 잡는다. 그렇게 한번 잡으면 두 시간은 족히 연주한다고 한다. 혼자 연주하기도 하지만 큰딸의 피아노와 합주를 하기도 한다. 그의 세 딸은 아버지와 악기를 함께 연주하는 순간이 가장 행복하다고 한다.

    연기자는 정년퇴직이 없는 직업이다. 연륜이 쌓일수록 연기는 더욱 빛을 발한다. 하지만 나이만 먹는다고 좋은 연기가 나오는 것은 아니다. 그는 폭넓은 체험을 쌓아야만 연기도 넓어진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앞으로 바이올린을 새로 배울 작정이다. 또 하나 결심이 있다면 요리를 자주 하겠다는 것이다. 가족들에게도 대접하고, 손님을 초대해서도 직접 만들겠다는 각오다. 매우 즐기는 술을 마실 때는 반드시 기분 좋게, 좋은 사람과 먹겠다는 다짐도 한다. 사실 좋은 술상대만큼 훌륭한 안주는 없다.

    이탈리아 배우 로베르토 베니니가 주연한 영화‘인생은 아름다워’를 보면, 주인공이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을 위해 오페라 아리아를 틀어주는 장면이 나온다. 가장 엄혹한 순간에서도 웃음과 음악을 잃지 않는 그 장면에서 많은 이들이 눈시울을 적셨다. 가족들에게 낙지전골을 만들어 대접하던 이날 임현식씨는 익살스럽게 바이올린을 잡았다. 아내와 두 딸은 ‘소리’보다 ‘몸짓’이 더 실감나는 그의 ‘엘가’ 연주를 들으며 낙지전골을 들었다. 무슨 맛이었을까 …. 그 광경이 너무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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