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7월호

고 이우정 선생의 아름다운 삶

민주화와 결혼한 ‘작은 거인’

  • 정호재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 demian@donga.com

    입력2004-09-07 13:4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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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는 있으나마나예요. 나는 어디 있으나 잘 보이지 않아요.” 고인은 수줍은 낯빛으로 이렇게 말하곤 했다. 하지만 고은 시인의 말마따나 그는 어디에서나 잘 보였다. 이우정(李愚貞) 선생은 유신체제 이래 이 땅의 민주화와 인권, 통일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거인이자, 진실로 민중을 사랑한 어머니, 언니, 누나였다.
    ”아니 선생님은 뜨개질도 못하세요?”

    “허허, 구박하지 말고 잘 좀 알려줘….”

    1970년대 중반 서울 종로5가 기독교 회관 301호 여신도회 사무실. 1974년 민청학련사건으로 학생과 교수 1024명이 수사대상에 올라 169명이 실형을 받고, 1976년 3·1 구국선언으로 거의 모든 민주화 인사들이 구속되는 사건이 이어졌다. 긴급조치가 세상사람들의 눈과 귀를 막고 있던 그 시절, 301호실은 구속자 가족들을 위한 공간이었다.

    기독교장로회 여신도들은 이 방에서 ‘빅토리 숄’이라고 이름 붙인 보라색 숄을 매일같이 뜨개질해서 해외 교회에 내다 팔았다. 보라색은 고난의 색이자 승리의 색. 여신도들은 “민주회복, 민주회복…”이라 되뇌어가며 뜨개질을 했다. 이우정 선생은 뜨개질을 못한다고 제자들에게 면박을 받았지만 금방 익숙해져 많은 숄을 만들었다.

    그로부터 3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지난 6월3일 서울 수유리 한신대학교. 수많은 인사들이 지난날의 ‘빅토리 숄’을 떠올리게 하는 보라색 스카프를 매고 교정으로 모여들어 고인이 된 이우정 선생 앞에 헌화했다. 여성운동, 통일운동, 노동운동, 민주화운동…. 굴곡진 우리 현대사의 중심에 서서 어느 곳 하나 빼놓지 않고 보듬어준 고인의 빈자리는 너무도 컸다.



    강단 떠나 현장으로

    “하나님! 저희들의 피와 땀의 결실로 100억달러 수출을 달성했다고 거리는 들떠 있는데 저희들은 왜 이렇게 외로워야 합니까? 다들 잘살게 됐다는데, 저희는 왜 이렇게 배가 고픕니까?…하지만 저희는 압니다. 당신만은 이 가난한 무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방림방적 근로자도, 평화시장 근로자도, 구로공단의 근로자도….”

    1978년 원풍모방의 열악한 근로여건에 맞서 싸우다 구속된 장남수(당시 20세)양의 기도는 1970년대의 암울한 노동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혹독했던 그 시절, 학생들은 거리로 뛰쳐나가야 했고, 양심적인 교수들은 가르침을 이어갈 수 없었다. 인권과 통일, 민주화를 향한 열망은 뜨거웠지만, 누구도 그런 단어조차 입에 올릴 수 없었다.

    1970년 한신대 사태는 저항의 시발이었다. 이로써 박정희 정권은 돌이킬 수 없는 길로 들어선다. 그해 한신대 교수 전원이 박정권의 독재에 항거하다 사직서를 내기 전까지만 해도 선생은 17년 동안 헬라어와 신학을 가르치는, 학생들을 끔찍이도 아끼는 온화한 교수님일 따름이었다. 독신으로 기숙사 사감을 하면서 학생들의 고민을 함께 나누려 했던 어머니 같은 존재였다고 제자들은 회고한다. 학생들을 감싸다 동료 교수들과 함께 해직된 후 선생은 기독교장로회 여신도회에 적극 참여하면서 사회활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그때 나이가 48세였다.

    “한신대에서 보낸 17년은 제가 산 게 아니었어요. 밖에선 노동자들의 인권이 그처럼 혹독하게 유린당하고 있는데, 저는 그런 일이 있는 줄조차 모르고 학교 울타리 안에서 강의에만 충실했죠…그래서 교수노릇 그만둔 것을 진실로 후회하지 않아요.”

    선생은 그때껏 이론으로 공부해온 신학을 현실 사회에서 구현하려 마음먹었다. 민중신학을 받아들이고 사회에서 소외된 이들을 찾아다니면서 신학의 새로운 방향을 깨치기 시작했다. 늦은 나이에 세상의 어려움과 고통에 눈떴지만 그후의 활동은 누구보다도 열정적이었다. 1972년 서울여대에서 잠시 교편을 잡기도 했으나 사회 참여와 교수 노릇을 함께할 수는 없었다.

    유신시절 기독교회관 대강당에는 매주 목요일마다 민주인사들이 모였다. 이른바 ‘목요기도회’였다. 서슬이 퍼런 박정희 정권은 기도회 참여자를 끊임없이 감시하고 도청했다. 그러나 목요기도회는 억울한 이들과 그 가족들이 찾아드는 공간으로 변해갔다. 수사기관에 붙들려갔다가 풀려난 사람은 반드시 이곳에 찾아와 진실을 밝혔다. 그래서 이 모임은 당시의 인권상황을 생생하게 증언하는 모임이 됐다. 이곳말고는 어디에도 그들의 아픔을 들어줄 곳이 없었다. 이우정 선생은 그곳에서도 ‘중심’이었다.

    선생은 평화시장 뒷골목의 ‘삼일사’라는 피복공장에서 어린 여공들이 착취당하는 참상을 목격한 뒤 노동운동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그는 목요기도회에 찾아오는 여공들의 구원요청을 외면할 수 없었다. 동료인 박형준 목사와 조화순 목사가 이미 빈민운동과 노동현장에 참여해 노동자들과 아픔을 나누고 있었다.

    여성 노동자들의 대모로 불렸던 조화순 목사는 1968년 당시 국내 최대 규모의 방직회사인 동일방직에 들어가 노동조건 개선과 노동조합 설립을 위해 열과 성을 다했다. 동일방직, 원풍모방, YH상사 여성 노동자들은 노조 탄압이 이어지는 가운데 목요기도회에 나와서 진실을 증언하고 각계의 도움을 청했다. 노동운동이 곧 인권운동이며 인권운동이 곧 민주화운동인 시절이었다.

    이우정 선생은 구속자 가족들을 위로하는 등 늘 뒤처리를 도맡으며 동일방직, 원풍모방 대책위원회 등을 이끌었다. 교회여성연합회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시기에는 누구도 내켜하지 않는 인권위원장을 맡아 노동자들의 인권보호를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인권’이라는 말조차 입 밖에 꺼내기 어려웠던 그 시절, 선생은 “이 일은 가족이 없는 나의 소명”이라 생각했다.

    1978년 2월 동일방직에서는 사측에 매수된 직원들이 여성 노조원들에게 인분을 퍼붓는 만행을 저질렀다. 1979년 8월에는 YH상사 여공들이 피할 곳을 찾지 못해 신민당사로 몰려가 농성하다가 신민당 의원 및 취재기자들과 함께 무자비하게 구타당했다. 당시 21세의 김경숙 열사가 산화한 것도 그때다. 지금 돌이켜보면 박정희 정권의 몰락을 예고하는 사건이었지만, 이우정 선생은 늘 이때를 떠올리며 “1970년대 여성 노동자들의 목숨을 건 처절한 투쟁을 잊지말고 살아가자”고 강조했다.

    선생은 학생 때나 교수 시절에나 수줍음을 잘탔다. 봉건적인 유교윤리 속에서 자라난 명문가 출신이어선지, 늘 땅만 보고 다닌다고 해서 ‘벙어리’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다. 하지만 한신대 여자 기숙사 사감을 하면서 여학생들과 ‘언니’ ‘동생’하며 허물없이 지내던 시절부터 여성문제에는 특별한 관심이 있었다. 1953년 김재준 목사가 예수교장로회에서 이단으로 파문당한 뒤 한국기독교장로회로 독립했는데, 이우정 선생은 그 산하에 한국신학대학이 출범하자 곧장 여신도회 전국연합회 서기로 사회 참여에 첫발을 내딛었다.

    그후 1960년대까지는 신학적으로 이론을 무장한 시기였다. 문익환, 문동환, 강원룡, 김동환 선생 등과 함께 평신도들을 가르치며 민중신학이론을 배워나갔다. 한국의 민주화 역사에서 빼놓고 얘기할 수 없는 기독장로회(이하 기장) 인사들의 사회참여가 바로 이때 잉태됐다.

    기존의 보수 교단과 달리 기장은 역사 비판적 성격이 강했다. 즉 “성서의 글은 인간의 글이고, 시대의 글이다.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려면 시대를 이해해야 하고, 성서를 분석하고 학문적으로 연구해야 한다”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따라서 우리 사회의 성격을 규명하지 못하고는 제대로 신앙생활을 할 수 없다는 절박함이 그들의 뇌리를 압박했다. 이우정 선생은 제자들, 그중에서도 특히 여제자들을 이런 신학사상을 바탕으로 가르쳤다. 그가 길러낸 제자들은 이후 각종 사회운동을 이끌었고 여성운동에서도 밑바탕이 됐다.

    선생은 1960년대 말 교수 시절, 그리고 1970년대 초 해직된 후 한국교회여성연합회를 이끌 무렵 일본에 자주 왕래하며 일본 기독교인들과 교류했다. 그때 선생에게 과제로 부여된 것이 ‘기생관광’이었다. 일본으로부터 차관을 들여오기 위해 굴욕외교를 벌이던 당시, 한국을 찾은 일본인 관광객들은 한국 여성들을 농락했다. 우리 정부는 정부대로 외화획득이라는 명분으로 이를 공창(公娼) 비슷하게 묵인했다.

    하지만 선생은 그런 불의를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그는 윤락여성들을 직접 설득하기도 하고, 정부 관련부처를 발이 부르트도록 뛰어다니기도 하며 사회적 인식을 바꾸어놓았다. 당시 문교부의 한 과장은 그에게 “지금은 과도기니 조금만 참아달라”며, 그러면서 “필리핀에서는 화대가 60달러지만 우리는 100달러나 된다”고 덧붙였다. 그러자 선생은 정색을 하고 매섭게 쏘아붙였다.

    “그게 그렇게도 자랑스러운 일이라면 당신 딸부터 내놓으세요.”

    이후 기생관광 문제는 정신대 문제로 확대발전됐다. 선생은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를 이끌던 이효재 선생과 함께 정대협을 꾸리며 이 문제를 국제적인 이슈로 부각시켰다. 김학순 할머니를 국제회의장에 보내 증언하게 했고, 일본 오키나와에서 삿포로까지의 현지답사를 벌이며 일본정부를 압박했다. 그 과정에서 일본의 지식인들을 설득했고 북한의 동참을 호소했다.

    1980년에 국제회의에 참가하기 위해 미국을 방문한 선생은 5·17사태로 귀국하지 못하게 되자 잠시 미국에 머물며 여성신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했다. 이로써 억눌린 이들에 대한 고민이 민중신학과 여성신학으로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귀국 후에는 여성신학 세미나를 조직하고 여신학자협의회 등을 만들며 여성신학 보급에 앞장섰다.

    “여성들은 관념적인 논리보다 생명의 위협에 즉각적으로 반응합니다. 말하자면 여성은 생명에 대한 모성애적인 사랑, 본능적인 사랑이 강해서 그것이 위협받는 것을 참을 수 없는 거죠. 박종철 열사가 고문으로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남영동으로 맨 먼저 뛰어간 것도 여성단체들이었습니다.”

    1980년대는 운동의 전문화가 요구되는 시기였다. 선생은 1986년 20여 개의 진보적 여성단체를 모아 여성단체연합(여연)을 만들었다. 그 덕분에 쉴 틈도 없이 1987년을 또 다시 거리에서 보내며 여성단체들과 민주화운동의 최선봉에 서야 했다.

    선생은 1992년 14대 국회에 진출했다. 국회에서 그는 여성특별위원회를 조직해 위원장을 맡고 성폭력 특별법 제정 등 실질적인 제도개선을 위해 땀을 쏟았다. 여성에 대한 선생의 관심은 평화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져 북한 및 일본 여성들과 함께 남북통일과 아시아의 평화를 위한 운동에 매진하게 만들었다.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서는 여성들이 먼저 화해하고 앞장서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신학에서 시작한 그의 실천철학은 그렇듯 끝없이 외연을 확장하면서 ‘여성·평화·생명’(선생의 고희 논문집 제목이기도 하다)이라는 거대한 주제를 향해 나아갔던 것이다.

    ‘현장에서 성장한 아름다운 사람’

    이우정 선생은 신소설 ‘자유종’으로 잘 알려진 이해조 선생의 손녀다. 조선 왕가의 후예인 선생은 경기도 포천의 99칸짜리 집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그는 가부장적이고 봉건적 부친 때문에 고생한 모친에 대해 애틋한 감정을 품고 자랐다. 선생은 성장기에 스스로 정신대로 끌려갈 위협을 느끼며 살았기 때문에 훗날 여성문제와 정신대 문제에 그토록 열성을 보였는지도 모른다.

    그의 가족사는 비극적이었다. 부모는 물론 형제들도 모두 사망해 자신은 일찍이 고아가 됐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특히 선생의 작은오빠는 판사로 재직하다 북한군에 끌려가 광산에서 중노동을 하던 끝에 세상을 떴다.

    하지만 선생은 그런 슬픈 가족사와 민중의 아픔을 혼동하지 않았다. 그는 누구보다도 통일문제에 관심이 많았으며, 인권운동의 연장선에서 북한동포 돕기에도 적극적이었다. 1997년에는 후배들과 ‘평화를 만드는 여성회’를 만들어 1980년대 초부터 이어진 교단 차원의 북한돕기 운동을 본격화했다.

    선생의 이처럼 다양한 운동 스펙트럼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의 평생동지인 조화순 목사는 1971년 이후 운동의 성격에 대해 이렇게 회고한 적이 있다.

    “독재는 타도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법이 바뀌어야 하며, 이건 구조적인 악이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실제로 노동운동을 하다보면 기업주가 아니라 경찰, 검찰과 부딪치게 됩니다. 그러니까 정치적인 싸움이 되더군요. 그들은 우리를 빨갱이라고 매도해요. 불의를 위해 싸우는데 갑자기 빨갱이가 된 겁니다. 여기에서 통일문제에 걸립니다. 결국 우리나라가 분단이 돼서 이런 거야. 아, 그래서 통일운동도 해야 되는구나 하고 깨닫는 거죠. 또한 그런 삶의 과정에서 남녀차별 문제가 불거지니까 이번엔 여성운동이 필요하다는 걸 깨닫습니다. 완전히 몸으로 부대끼면서 정치의식도 생기고 사회의식도 생긴 거죠.”

    이우정 선생 역시 이와 비슷한 길을 걸었다. 문동환 목사는 선생을 가리켜 “현장에서 성장한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평했다. 선생의 제자인 김성재 전 청와대 정무수석은 “선생은 특정한 이념이나 사상, 자신의 틀을 가지고 운동한 분이 아니다. 그 중심에는 약자와 고통받는 이들에 대한 사랑이 있었다”고 기억했다. 민중에 대한 사랑이 선생에게 끝없는 용기와 힘을 줬다는 것이다.

    선생은 해방 이후 한신대 전신인 조선신학원에 진학하면서 새로운 삶에 눈을 떴다. 당시 조선신학원에는 김재준 목사를 비롯해 명망있는 교수들이 숱하게 자리잡고 있어 자연스럽게 사회문제에 대한 인식을 키워갈 수 있었다. 그후 1953년 선생이 한신대 교수가 됐을 때는 한신대 주변으로 진보적인 인사들이 모여들었다. 수유리, 창동, 방학동에 선생을 비롯해 문익환, 안병무, 함석헌, 이문영, 문동환 선생 등이 포진했던 것. 이들은 지속적으로 교류하면서 시국현안에 대해 토의하고 중요사항을 결정했다. 선생은 문동환 목사 등 16명과 함께 ‘새벽의 집’이라는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나눔의 삶을 실천하려 했다.

    이들 기독교 인사들은 한빛교회와 갈릴리교회, 목요기도회를 중심으로 뭉쳤고, 해직교수들과 학생들은 서울 충정로에 있는 한신대 선교교육원과 종로5가 기독학생총연맹(KSCF)에 모여 민주화를 구상하고 희망을 이야기했다. 선생은 선교교육원에서 해직교수인 백낙청, 박현채, 이영희, 정창열, 강만길 선생과 함께 민중신학과 우리 역사, 문학 등에 대해 토의하면서 민주화를 꿈꾸며 밤을 지샜다.

    1974년 민청학련사건 때 자금 연락책으로 몰리기도 했던 선생은 이를 계기로 ‘현장’에 더 적극적으로 파고들어갔다.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 초반에는 민주화운동 인사들에 대한 구속과 석방이 지리하게 반복됐던 만큼 선생은 토요일이면 늘 제자들을 이끌고 법정으로 출동했다.

    1976년 3월1일 명동성당에서 있었던 민주구국 선언문 사건은 민주인사들을 규합한 결정적 계기가 됐다. 김대중 대통령, 이희호 여사와의 인연도 이때 비롯됐다. 막상 선언일이 됐는데도 낭독할 사람이 나서지 않자 이우정 선생이 앞장서서 선언문을 읽어나갔다. 다 읽고 나서는 사람들이 자리를 피하라고 걱정하자 “뭐, 괜찮겠지. 왜 날 잡아가겠니?”라며 담담하게 받아넘겼다. 하지만 맨 먼저 잡혀간 사람이 선생이었다. 그는 3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는데, 독신여성에 나이도 있었던데다 해외 교회의 여신도들이 박정권에게 탄원서를 보낸 덕분인지 1주일 만에 풀려났다.

    선생은 독재정권에 맞선 언론 민주화운동에도 적극 참여했다. 여신도들의 금반지를 모아 동아일보에 십여 차례나 격려 광고를 냈고, KBS 시청료 납부거부운동에 앞장서기도 했다. 이는 우리나라 불복종운동의 선구이며, 정권의 시녀로 전락한 언론에 대한 대대적인 시민운동으로 자리매김했다.

    선생은 1980년대 말부터 정치권으로부터 끈질긴 러브콜을 받았다. 하지만 그때마다. “나는 정치를 잘 모르니까 직접 정치를 한다든가, 당적을 갖고 싶은 생각은 꿈에도 없다”며 고사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3당 합당에 따른 지역정당화, 그리고 제도권 내에서의 실질적인 변화 요구를 무시할 수 없었다. 그래서 선생은 재야세력을 규합, 신민주연합을 만들어 김대중 당시 평민당 총재와 손잡고 신민당을 만들기에 이른다.

    이우정 선생은 1987년 DJ·YS 결별과 그후에 벌어진 3당 합당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특히 이를 계기로 더욱 심화된 지역갈등에 가슴 아파했다. 선생과 40년을 함께 일한 나선정 장로는 그때를 이렇게 회고한다.

    “선생께서는 ‘목사들마저 경상도, 전라도로 갈라지니 이 일을 어찌하니…’라며 걱정하셨어요. 그래서 저희가 ‘선생님이 뭐라도 좀 하세요’라고 주문했죠. 이제는 제도권에 들어가 투쟁할 때라고 판단해서 선생님께 용기를 드린 겁니다. 선생님도 김대중 총재에게 힘을 실어야 할 때라고 보고 정치권으로 들어가셨죠.”

    1991년 고희를 바라보는 나이에 정치에 입문한 선생은 이후 제도권 안에서 많은 일을 이루고 평화통일의 길로 한걸음 나아갔다. 여성의 정치세력화에 많은 관심을 갖고 후배들이 제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후원자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다.

    당당하고 청빈했던 운동가

    선생은 늘 온화한 표정을 잃지 않았지만, 법정이나 정치현장에선 언제나 당당했다. 1990년대 중반 ‘평화를 만드는 여성회’에서 남북한 및 일본 여성들과 함께 평양에 갔을 때의 일이다. 김일성 주석을 만나자 참석자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조아렸지만 선생만은 꼿꼿한 자세로 김주석과 마주했다. 평생을 민중의 편에 서서 살아온 터라 남이든 북이든 절대권력 앞에서는 체질적으로 저항정신이 솟아나왔을 것이다.

    박정희·전두환 정권의 끊임없는 감시와 협박, 그리고 회유를 견디며 몸에 밴 청빈의 모습도 오래 기억될 것이다. 선생은 대학에서 해직되어 소득이 한푼도 없던 시절에도 내색하지 않고 민주화운동을 계속했다. 국회의원 시절 선생의 재산신고액은 1300만원이었다. 세상을 뜨던 날엔 이보다 더 줄어 있었다.

    선생은 파란 많은 80평생을 살아왔지만 그 흔한 회고록 하나 펴내지 않았다. 1980년대 이후 그가 그렇게도 애착을 보인 여성운동사와 평화사상을 정립하려고 애썼을 뿐이다.

    그를 떠나보내는 날 한신대 교정에는 선생이 생전에 가장 좋아했던 찬송가 ‘저 높은 곳을 향하여’가 울려퍼졌다.

    “내 주여 내 발 붙드사, 그 곳에 서게 하소서 그곳은 빛과 사랑이 언제나 넘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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