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8월호

영원한 18번 황선홍 VS 축구광 최영미 시인

  • 정리·정호재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 demian@donga.com 진행·육성철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 sixman@donga.com

    입력2004-09-01 16:5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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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황선홍의 축구인생은 한(恨)으로 뒤엉킨 한국 현대사를 연상케 한다. 국가대표 14년, 월드컵 4회 연속 출전, A매치 50골…. 그는 한국축구사에 빛나는 금자탑을 쌓았지만, 잦은 부상 때문에 다른 스타들처럼 전성기를 오래 누리지 못했다. 황선홍과 태극마크의 이별은 그래서 더욱 아쉽고 애틋하다. ‘신동아’는 황선홍이 일본으로 떠나기 직전 이색적인 만남을 기획했다. 월드컵 4강 신화의 주역들 중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삶을 살아온 백전노장과, 축구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난다는 시인의 만남을 주선한 것이다. 이 자리에는 ‘신동아’ 육성철 기자가 게스트 자격으로 참여했다.(편집자)
    ‘신동아’가 황선홍 선수와 최영미 시인의 만남을 준비한 것은 6월18일 스페인전 직후다. 하지만 이 무렵 대표선수들을 밖으로 불러낸다는 건 ‘이적행위’나 마찬가지였다. ‘신동아’는 여러 경로를 통해 월드컵 직후 인터뷰를 성사시키기 위해 노력했지만, 황선수와의 만남 자체가 어려운 상태였다.

    6월29일 대구에서 3·4위전이 열렸다. 황선홍에게 이날 터키전은 대표선수로서 마지막 경기였다. 하지만 그는 부상 때문에 그라운드에 나서지 못했다. 3·4위전의 승자는 터키였지만, 한국선수들의 표정은 어둡지 않았다. 이미 목표를 초과 달성한 까닭이다. 이 때문인지 경주로 이동한 선수들은 새벽까지 흥겨운 축제를 벌였다.

    황선홍 선수는 휴대전화를 꺼놓았다. 분당 집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원래 인터뷰나 방송출연을 꺼리는 성격인 데다, 하루에 수백 통씩 걸려오는 전화를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런 까닭에 7월3일 오후가 돼서야 그를 만날 수 있었다. 이날 대표선수들은 축구협회에서 열린 현대자동차 기증식에 참여했다. 행사시간보다 20분 일찍 도착한 황선홍은 차량인수 서명을 요구하는 현대자동차 직원에게 “우리집에는 더 이상 차가 필요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황선홍의 옆에서 그랜저를 받았다며 신명이 난 젊은 선수들과는 한참 다른 모습이었다.

    황선홍은 최영미 시인과의 만남을 기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문제였다. 국내일정이 워낙 빡빡한 데다 일본 J리그 개막에 맞춰 귀국을 서둘러야 했던 것이다. 그는 고심 끝에 “그분께서 괜찮으시면 내일 밤에 집으로 오셨으면 합니다”라고 말했다. ‘황선홍-최영미의 심야 데이트’는 이렇게 해서 성사될 수 있었다.

    “이제야 큰일을 한 것 같아요”



    7월4일. 황선홍은 이날 숨가쁜 일정을 소화했다. 오전에는 모교인 건국대에서 ‘자랑스런 건국인상’ 시상식이 있었다. 황선홍은 건국대 재학 시절 처음으로 국가대표가 되었고, 그의 뒤를 이어 유상철 이영표 현영민이 태극마크를 달았다. 고등학교에서 잘한다는 스타들을 연고대와 한양대가 쓸어가던 시절, 건국대 선수들의 투혼은 인상적이었다. 황선홍은 고정운과 함께 ‘건국대 신화’를 만든 1세대인 셈이다.

    오후엔 황선수가 태어난 충남 예산으로 내려갔다. 고향 사람들은 카퍼레이드까지 벌이며 황선홍의 금의환향을 축하했다. 황선홍은 감사의 인사를 전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쓰려왔다. 바로 6년 전 세상을 떠난 아버지 때문이다. 아버지가 살아 계셨더라면…. 1500명의 주민들이 태극기를 들고 ‘황선홍’을 연호하는 모습에 황선수는 남몰래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황선홍은 꼼꼼한 사람이다. 그는 환영행사 도중과 예산을 출발하면서 전화를 걸어왔다. 그때마다 도착 예정시간을 알려줬다. 황선홍은 혹시라도 최영미 시인이나 ‘신동아’ 기자가 자기보다 먼저 와서 기다리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그런 사람이다. 사람을 불편하게 만들지 않고, 한번 약속하면 꼭 지키고야마는….

    밤 9시30분. 어둠이 짙게 깔린 분당 장안타운. 아파트 입구에 걸린 ‘장하다 태극전사 황선홍’이라는 플래카드가 보이고, 현관 앞에는 선물을 든 여중생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20분 먼저 집에 들어온 황선수는 여덟 살 된 딸(현진)과 함께 TV를 보고 있었다.

    황선수는 축구협회 마크가 새겨진 운동복에 맨발을 그대로 드러내놓고 소파에 앉아 있었다. 아버지 품에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딸아이가 잠투정을 부렸다. 딸이 잠들자 아내에게 잠자리를 부탁하는 황선홍의 모습은 폴란드전에서 선취골을 넣고 포효하던 장면과 묘한 대조를 이뤘다.

    TV에서는 예산에서 벌어진 황선홍 선수의 환영식 장면이 흘러나왔다. 그래서 황선수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황선홍 : “고향집에서 출발하는데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몰려서 굉장히 힘들었어요. 이제야 큰일을 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시합할 때는 몰랐거든요. 그동안 대표선수들은 경찰의 통제를 받으면서 편하게 다녔는데, 오늘은 옷이 찢어지고 정말 대단하더라고요.”

    최영미 : “안녕하세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나중에 잊어버릴지도 모르니 사인부터 부탁할게요. 부탁하는 사람이 너무나 많아서…. 공짜로는 안될 것 같아서 제 책을 한 권 가져왔습니다. ‘시대의 우울’이라고 1997년에 쓴 책입니다. 사실 저는 이번 월드컵 이후 유럽에 진출할 가능성이 있는 선수들에게 먼저 이 책을 보냈답니다. 유럽을 다니며 쓴 거라서 유럽생활에 도움이 될까 해서요. 황선수는 직접 만나서 주려고 가져왔어요.”

    황선홍 : “고맙습니다. 잘 읽겠습니다.”

    최영미 : “저는 이번 월드컵을 제대로 보고 즐기기 위해 서점에 나온 축구관련 서적을 몇 권 사서 보았어요. 모르는 것은 체크해가며 읽고 있습니다. 제일 어렵고 잘 이해가 안 가는 규칙이 오프사이드 같아요.”

    황선홍 : “오프사이드는 논란이 많죠. 축구규칙 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부분입니다. 수비수가 앞에 있어도 공격상황과 수비수들의 행동에 따라서 판정이 달라질 수 있거든요. 가령 공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공격수라면 최종 수비수 뒤에 있어도 오프사이드가 아니에요. 그래서 오심도 자주 나옵니다.”

    최영미 시인은 집에서 가져온 축구교본까지 펼쳐가며 오프사이드 규칙에 대해 물었다. 그 책에는 밑줄과 메모도 보였다. 과연 축구광이다. 월드컵 기간에는 글쓰는 일도 잠시 중단하고, 축구에 몰두했다는 그다. 축구 기사를 보기 위해 한동안 끊었던 신문을 다시 구독하고 TV까지 큰 걸로 바꾸기 위해 할인매장을 뒤졌던 그다.

    최영미 : “우선 제 소개부터 할게요. 저는 작가입니다. 축구를 좋아하지요. 저의 아버님은 운동선수였어요. 해방 후 전국체전에 나가서 투해머 고등부 일등을 하셨죠. 그 영향인지 저도 초등학교 때 핸드볼을 했습니다. 계속 운동을 했더라면 제 인생이 더 행복했을 텐데…. 이번 월드컵 때는 포르투갈전을 보러 직접 인천에 갔습니다. 황선수는 우선 굉장히 멋쟁이에요. 경기를 보면서 패션감각이 뛰어나다고 느꼈어요.”

    황선홍 : “선수들 유니폼은 다 똑같은데요.”

    최영미 : “폴란드전에서 목걸이 하고 나왔잖아요. 폴란드전 이후 황선수의 목걸이가 여성 팬들에게 회자되고 있어요. 누가 선물한 거죠?”

    황선홍 : “아내가 선물한 건데 우여곡절이 많은 목걸이입니다. 2번이나 운동장에서 잃어버렸거든요. 1998년 월드컵을 못 뛰고 일본에 갔을 때 아내가 다치지 말라는 의미로 사주었어요. 그래서 항상 몸에 지니고 다녔습니다. 세레소 오사카에서 득점왕할 때도, 가시와 레이솔에서 뛸 때도 찼습니다. 목걸이 잃어버렸을 때는 일본 선수들에게 한국요리 사줄테니 찾아달라 부탁하고 총동원해서 운동장을 뒤졌어요. 이번 월드컵에서는 폴란드전 전반전에만 찰 수 있었습니다. FIFA가 목걸이 착용을 금지하고 있거든요.

    최영미 : “가죽 목걸이도 안되나요?”

    황선홍 : “안돼요. 이번 월드컵에서 터키전 때 또 한번 분실했는데, 장비책임자의 파카 호주머니에서 겨우 찾았어요. 목걸이는 저에게 부적 같은 물건이에요. 첫 경기 때 목걸이 차고 나가서 득점했잖아요. 그런데 전반전 끝나고 심판이 벗으라고 했어요.”

    육성철 : “그러니까 목걸이를 찼던 경기에서만 골을 넣은 셈이군요.”

    황선홍 : “하하하. 얘기를 만들자면 그렇게 되는 거죠.”

    최영미 : “머리 염색하셨어요? 염색은 어디서 하세요. 미용실인가요 집인가요?”

    황선홍 : “저는 스타일이 잘 안나와서 아무데나 막 가는 편입니다. 제 스타일을 고집하는 편이 아니라서 때로 실패할 때도 있고 성공할 때도 있습니다. 검은 머리는 머리가 길면 지저분하다고 아내가 살짝 염색하라고 해서 했는데, 점점 색깔이 들어가네요.”

    최영미 : “우리나라 선수들의 머리가 갈수록 노래져요. 박지성 설기현 선수가 검은 머리로 오래 버텼는데 결국 염색해서 좀 아쉬웠습니다. 저는 일본 대 벨기에전 때 유럽선수보다 일본선수들의 머리가 더 노란 걸 보고, 아예 처음부터 기싸움에서 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사흘에 한 번씩만 신은 축구화

    황선수는 아내를 끔찍하게 아낀다. 인터뷰 때마다 아내 얘기를 빠뜨리는 적이 별로 없다. 이건 그의 축구인생에 굴곡이 많았다는 점과 무관하지 않다. 부상과 수술로 선수생활이 끝날 수도 있었던 상황에서 그는 아내 정지원(32)씨에게 의지하는 일이 많았다. 최영미 시인이 목걸이와 머리 염색에 관해 묻는 동안 정씨와 정씨의 어머니는 부엌 쪽에서 거실을 내다보고 있었다. 황선수가 멋쩍은 듯이 한마디 던졌다. “걱정하지 마시고 들어가서 주무세요.”

    최영미 : “축구화 처음 신었을 때 기억나세요?”

    황선홍 : “초등학교 3학년 때입니다. 징이 박힌 축구화는 중학교 올라가서 신었고…. 처음에는 1000m 달리기를 했어요. 초등학교 3학년이 그냥 뛰기만 하는 게 너무 힘들었는데, 축구는 육상과 다르더군요. 뛰면서 골도 넣을 수 있고 변화가 많았어요. 하루는 아버님이 추리닝과 축구화를 사오셨어요. 저는 너무 아까워서 사흘에 한 번씩만 신으면서 신발을 아꼈습니다. 그때 기억이 아직도 생생해요. 아버님이 운동을 좋아했고 그 덕인지 나는 축구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축구가 흥미로웠고 재미있었습니다.”

    최영미 : “언제부터 축구선수가 될 것이라는 자각을 하게 되었나요?”

    황선홍 : “고등학교 2학년 때 축구선수로서 앞으로 어떻게 헤쳐나가야 할 것인지 고민했어요. 대학에 가고 나면 다른 길로 갈 수가 없으니까 결정을 해야 했거든요. 그때는 정말 축구가 좋았을 때였습니다. 선배들이 몽둥이 들고 기합을 주는 때였지만, 운동장에서 공을 찰 수만 있으면 그런 게 문제가 아니었어요. 축구하기 위해 대학에 갔고, 아버님도 계속 제가 축구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아버님은 제가 얻어맞고 와서 얘기해도 ‘그 정도는 참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어요. 그 다음부터는 맞더라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최영미 : “축구 시작할 때 어떤 포지션이었나요?”

    황선홍 : “저는 처음부터 스트라이커였어요. 초등학교 때는 포지션에 대한 개념보다도 앞에서 골 넣는 게 제일 잘하는 사람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때 이후 한번도 스트라이커를 양보한 적이 없습니다. 전술상황에 따라 미드필드에 서기도 했지만 주로 공격수였어요.”

    육성철 : “황선수는 능력에 비해 참 불운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기대를 걸만하면 부상을 당했잖아요.”

    황선홍 : “1993년에 독일에 가서 십자인대 수술을 받았어요. 회복되고 2개월 뒤에 연골제거 수술을 했습니다. 그때 이후 몸의 밸런스가 무너졌어요. 복원이 쉽게 안돼서 매일 웨이트 트레이닝을 해야 했는데, 결과적으로 밸런스 때문에 부상이 잦았던 것 같아요. 1997년에도 십자인대가 끊어져 오른쪽 무릎을 세 번이나 수술했어요. 98프랑스월드컵을 앞두고 또 부상을 당했죠.”

    최영미 : 시련 속에서 자신을 지탱해준 힘은 무엇이었습니까.

    황선홍 : “개인적으로 억울하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나의 능력을 100% 다 보여주었으면 좋겠는데 그렇지 못했거든요. 특히 월드컵이 더욱 그랬죠. 제 자신이 만족할 만큼 인정받지 못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쓰러질 수가 없었던 거죠. 주변에서 불운하다고 그러는데 나 자신도 그렇게 생각해요. ‘나는 왜 이렇게 운이 없을까?’ 스스로 물어보곤 합니다. 부상이 많았던 만큼 자책도 큰 셈이죠. 그렇지만 나는 패배적인 생각을 한 적이 없어요. 이번 월드컵도 나 자신에게 100% 만족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나는 혼신의 힘을 다했고, 내 능력을 보여주려고 노력했어요”

    육성철 : “잉글랜드의 베컴 같은 선수는, 몸을 사리는 것이 눈에 보입니다. 그런데 황선수는 몸을 돌보지 않는 것 같아요. 이번 월드컵이 마지막이라서 부담이 컸을 텐데.”

    황선홍 : “1998년엔 월드컵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평상심을 찾지 못했어요. 이번 월드컵에서 저는 능력을 향상시키고 체력을 높이는 것보다 마음의 평정을 찾는 게 중요했습니다. 부담이 클 수밖에 없었거든요. 3차례 실패했고 4번째 참가인데 1승도 못했으니…. 그동안 대표팀 최전방을 맡으면서 아무것도 못했다는 자괴감이 있었어요. 그러나 자꾸 그런 생각을 하다보면 제 자신이 너무 힘드니까 그걸 떨치려고 노력한 겁니다. 사실 이번에도 좋은 컨디션은 아니었습니다. 다행히 첫 경기를 이기면서 마음을 컨트롤할 수 있게 됐고, 절반 정도는 이룬 것 같은 생각이 들었어요. 예전처럼 내가 다 만들고 넣어야 한다는 부담에서 벗어난 거죠.”

    최영미 : “국가대표로 뛸 때와 프로팀 소속으로 뛸 때를 비교하면, 마음가짐에서 차이가 있나요?”

    황선홍 : “선수들은 모든 경기에 마음가짐이 똑같아야 하는데 그게 잘 안돼요. 대표팀에 오면 누구나 조금이라도 더 열심히 하려고 하죠.”

    최영미 : “국가대표는 더 긴장되세요?”

    황선홍 : “그렇죠. 프로경기는 일주에 한두 경기씩 연속되는 일상이다 보니 부담이 크지 않습니다. 그러나 대표팀은 특정 기간에 팀을 만들어서 대회를 치르니까 온 신경이 집중될 수밖에 없어요.”

    황선홍 :의 투혼은 미국전에서 이미 진가가 나타났다. 그는 부상으로 인해 피가 쏟아지는 데도 붕대를 감고 그라운드에 나섰다. 98프랑스월드컵 때는 팀의 연패를 보다못해 주사를 맞고 몸을 만든 적도 있다. 자칫하면 치명적일 수도 있는 모험을 감행한 것이다. 자신의 몸보다 팀을 앞세우고, 개인의 명예보다 한국축구의 자존심을 생각하는 선수. 황선홍은 그런 사람이다.

    최영미 : “선수생활에 회의를 느끼거나 축구가 싫어진 적은 없어요?”

    황선홍 : “그런 적은 없습니다. 물론 부상당하고 못 뛸 때 다른 생각이 들 때도 있어요. 극단적으로 그만두겠다는 게 아니라 어떻게 하면 빨리 정상궤도에 오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죠. 왜 이리 운이 없을까, 나는 왜 안될까? 그러나 결국에는 다시 축구에 매달리고 자연스럽게 극복하게 되더군요.”

    최영미 : “다른 삶을 꿈꾼 적이 있나요?”

    황선홍 : “(단호하게) 없어요.”

    최영미 : “부럽군요. 저의 경우는 제 직업에 대해서 끝없이 회의하거든요. 오늘이 있기까지 가장 고마운 분은 누구인가요?”

    황선홍 : “당연히 아버님이죠. 1996년에 돌아가셨어요. 오늘도 묘소에 다녀왔고요. 어머님과 일찍 헤어지고 홀로 3남매를 키우셨는데 굉장히 힘드셨을 거예요. 금전적으로 풍요롭지 못했고 남자 혼자서 자식 셋을 키운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지요. 저를 많이 생각하셨고 제가 운동할 때 많은 도움을 주셨습니다. 옛날부터 제가 나온 신문 기사를 스크랩하시곤 했어요. 참 대단하신 분이었어요. 한번은 교통사고를 당해 목발을 짚고 다니실 때 경기도 시흥까지 구경을 오셨습니다. 경기 도중 아버지가 목발을 짚고 계단으로 걸어오시는 모습을 우연치 않게 봤는데 그 모습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아요. 집안이 굉장히 어려울 때도 제가 축구를 잘하도록 많이 도와주셨어요.”

    최영미 : “한때 홍명보 황선홍 유상철 선수가 모두 가시와 레이솔 소속이었습니다. 우연의 일치인가요 아니면 작당을 한 건가요.”

    황선홍 : “가시와는 우승에 목말라 있는 팀입니다. 명보가 먼저 갔는데 이후 조그만 대회에서 한번 우승하고 2년간 내리 4위를 차지했어요. 명보가 잘하니까 한국선수 이미지가 좋아져서 제가 두번째로 가게 됐죠. 그런데 우승을 못하고 2위를 했습니다. 그래서 ‘한 명이 더 필요하다’고 판단해 상철이를 요코하마에서 데려온 겁니다. 그런데 작년에 6위로 추락하고 명보도 이번에 한국으로 돌아왔어요. 이제 젊은 선수들로 바꾸어야 할 시기입니다.”

    최영미 : “일본 생활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일본에 대한 느낌은 어떠셨죠.”

    황선홍 : “축구하기에 한국보다 훨씬 좋은 여건입니다. 한국은 히딩크 감독이 오고 나서야 선진 유럽의 체력 테스트나 훈련방법이 도입되었는데, 일본은 완벽하게 소화하지는 못해도 흉내는 내고 있어요. 일본은 프로리그가 생기기 전에 준비를 많이 했고, 경기운영이 유럽리그와 흡사해요. 처음 일본에 갔을 때는 선입견이 있었어요. 그런데 지내다보니 일본사람들이 참 친절하고 남을 배려한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래서 아무런 문제 없이 운동할 수 있었지요.”

    최영미 : “차별은 아니더라도 어떤 벽 같은 것을 느낀 적은 없었나요?”

    황선홍 : “그런 것은 못 느꼈어요. 일본이 외국선수에 대해서는 대우가 좋은 편이거든요. 처음에 오면 운동장에서 개인통역을 붙여주고 집안일에도 통역이 옵니다. 애가 아파도 도와줄 정도여서 전혀 불편하지 않았어요. 저는 운동선수가 아닌 진짜 일본사람들과 접하고 느낄 기회가 많지 않았습니다.”

    육성철 : “일본 프로야구에서 장훈이나 이종범 선수의 경우를 보면, 은근히 견제를 받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황선수는 1999년에 득점 랭킹 선두 달릴 때 그런 게 없었나요?”

    황선홍 : “가끔 있죠. 처음 6개월은 고생 좀 했어요. 공을 패스하지 않는 거예요. 그런데 팀에서 완전히 인정을 받고나니까 달라지더라고요. 인정받기 전까지의 과정이 힘들 뿐이죠.”

    황선홍은 스트라이커다. 따라서 그의 임무는 골을 넣는 것이다. 황선홍은 역대 한국대표팀 공격수 가운데 문전에서 공간을 만드는 능력이 가장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결정력에서는 차범근이나 최순호를 앞서지 못했다. 그래서 그의 플레이는 아쉬울 때가 많았고, 그것이 그의 축구인생을 한으로 얼룩지게 만들었다. 그런 의미에서 6월4일 폴란드전에서 그가 터뜨린 발리슛은 멋진 ‘한풀이 굿’에 비유할 만하다.

    육성철 : “폴란드전을 앞두고 선수들이 둥그렇게 모였잖아요. 그때 무슨 이야기를 했습니까.”

    황선홍 : “저와 명보가 주로 말했어요. 저는 냉정해지자는 요지의 말을 했죠. 명보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못했어요. 실전에 들어가면 첫 골을 넣거나 실점했을 때 흥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명보에게 ‘어떤 상황이 와도 똑같이 해달라’고 말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제가 첫골을 넣으니까 벤치도 선수도 흥분하는 게 느껴지더라고요. 그래서 10분 동안 스쳐지나가는 선수에게 ‘냉정해져야 한다’고 계속 말하고 다녔습니다.”

    최영미 : “첫골은 정말 환상적이었습니다. 저는 ‘어머’ 하고 놀랐어요. 황선수의 발리슛이 예술이었다고 생각해요.”

    황선홍 : “을용이 띄워준 센터링이 너무도 좋았고, 폴란드 수비가 서로 미루다가 나를 놓쳤습니다. 공격수는 그런 상황에서 공이 오면 골키퍼를 보지 않아도 구석을 느끼고 볼을 감으로 때리죠. 거기서 반대 골대로 돌려 차는 것은 어렵고 가까운 쪽 포스트로 보낸 것이 주효했어요. 딱 때리니까 골문 구석으로 가는 게 보이더군요.”

    최영미 : “지금까지 A매치에서만 100회 출전해 50골을 넣었는데, 그 골들을 다 기억하시나요?”

    황선홍 : “대부분은 기억이 나는데, 확실하게 상황을 다 적으라면 아마 못하겠죠.”

    최영미 : “골을 넣고 나면 경기가 끝나더라도 그 장면이 계속 생각나요?”

    황선홍 : “이번 월드컵 동안 첫 골을 계속 생각했습니다. 스트라이커는 골 넣는 순간을 많이 생각하는 게 좋아요. 좋은 기분을 유지해야 하거든요.”

    최영미 : “황선수가 가장 기뻐했던 골은 어떤 골이죠? 폴란드전인가요?”

    황선홍 : “폴란드전 골도 물론 기뻤죠. 가장 기뻤던 건 1998년 4월1일 한일전 에서 터뜨린 결승골입니다. 그게 왜 잊혀지지 않느냐면 1997년 5월에 수술하고 1년4개월 만에 대표팀에 복귀해서 치른 첫 경기였기 때문이에요. 당시 한국이 일본에 2연패를 당한 상태였어요. 그래서 진짜 한번 붙어보자고 작심한 경기였죠. 비가 엄청나게 왔는데 제가 결승골을 넣었습니다. 그 골을 계기로 재기에 성공한 것 같아서 기억에 남습니다.”

    육성철 : “저는 황선수가 네팔전에서 넣은 9골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황선홍 : “그때는 제가 골을 넣을 수 있는 모든 방법이 다 나온 것 같아요. 머리로 넣고, 발로 넣고, 제가 가진 걸 다 보여준 경기였습니다.”

    최영미 : “이번 월드컵에서 터진 그 많은 골 중에 같은 골이 하나도 없다는 걸 알고 무척 흥미로웠어요. 마치 작가가 같은 문장을 절대로 안 쓰는 것처럼. 제가 황선수에 대해서 느낀 건 판단이 빠르다는 점입니다. 또 황선수가 들어가면 그동안 정체됐던 한국팀의 공격이 살아나는 것같았어요.”

    황선홍 : “판단력이 빠르다는 것은 제대로 보신 거 같습니다. 저는 패스나 슛이 편하고 물 흐르듯이 전달되는 축구를 원합니다. 미리 생각하고 뛰니까 볼터치가 빨라지는 거죠. 그것이 내가 하고자 하는 축구입니다. 드리블하면서 몇 사람 제치는 것도 좋지만, 현대축구는 조직을 중시하는 원활한 진행이 더 중요합니다.”

    일반적으로 축구선수의 전성기는 20대 후반이다. 30세를 넘어서면 힘과 스피드에서 밀린다.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황선홍이 최근까지 국가대표팀의 스트라이커로 활약한 것은 아이러니다. 그러나 축구는 힘으로만 이길 수 없는 속성도 갖고 있다. 허정무 전 국가대표팀 감독은 “젊은 선수들로 베스트 11을 구성하는 것보다, 노장과 신인을 적절하게 섞었을 때 승률이 높다”고 말한다. 축구를 인생에 비유하자면 경험이 중요하다는 얘기고, 기업에 비유하자면 시스템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황선홍이 대표팀에서 중책을 맡았던 속사정이 바로 여기에 있다.

    육성철 : “미국전 도중 그라운드에서 피를 흘렸는데 제 기억으로 황선수가 그런 모습을 보인 건 처음인 것 같아요. 팀의 맏형이 투지를 불사르게 되면 팀 분위기가 어떻게 달라지나요?”

    황선홍 : “그런 모습은 저도 처음이에요. 이왕이면 붕대를 예쁘게 감아주면 좋았을 텐데. 나중에 TV로 보니까 상가에서 초상 치르는 모습이더군요, 하하하. 축구는 개인경기가 아니라 단체경기입니다. 그래서 어떤 선수가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이면 누구라도 끊어 오르는 뭔가를 느낍니다. 저도 프로경기에서 누군가 피를 흘리면 정말 잘해야겠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우리 국민성이 확 하고 순간적으로 타오르는 게 있잖아요.”

    육성철 : “이탈리아전에서 후반 종료 직전 설기현 선수의 동점골을 어시스트했는데, 동료 선수를 보고 센터링을 올린 겁니까?”

    황선홍 : “그게 느낌이라는 겁니다. 그 순간은 제가 넘어졌다 일어난 상황이라 문전을 살펴볼 시간이 없었어요. 다만 저곳에 우리 선수가 있다는 막연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럴 때 툭하고 돌려놓으면 예기치 않은 찬스가 생기곤 하죠. 저는 그라운드에서 그런 느낌을 굉장히 중요시합니다. 골을 넣을 때도 공이 앞으로 올 거라는 확신을 가지고 뛰어 들어가면 정말로 앞으로 옵니다. 그리고 때리면 골이 됩니다. 물론 느낌이 적중하지 않으면 실수를 저지르고 욕을 먹죠.”

    육성철 : “이탈리아전 연장전에서 설기현 선수가 뒤꿈치 패스를 하다가 비에리 선수에게 단독 찬스를 허용한 장면이 있었습니다. 그때 진다는 생각은 안 들었어요?”

    황선홍 : “경기의 흐름이라는 게 있잖아요. 이탈리아전은 흐름 자체가 너무 좋았던 경기였습니다. 우리가 무너질 흐름이 아니었어요. PK까지 갔어도 우리가 이기는 상황이었다고 봐요.”

    “진심으로 말하면 다 이해해요”

    최영미 : “이탈리아전은 이번 월드컵 최고의 명승부였지요. 저는 후반에 투입된 황선수가 연장전에서 수비벽을 향해 찬 프리킥이 가장 인상적이었어요. 정말 독창적인 슛이라고 감탄했어요. 처음부터 계획한 슛이었나요?”

    황선홍 : “아니에요. 원래 저는 프리킥 전담이 아닙니다. 전반전에 벤치에서 자세히 관찰했어요. 상대편의 수비를 유심히 보았죠. 프리킥 상황에서 수비수의 점프가 높은 것이 인상적이더군요. 프리킥 얻었을 때 갑자기 그 생각이 떠올라 벤치에 내가 차겠다고 신호를 보낸 겁니다.”

    최영미 : “넓은 경기장에서 히딩크 감독에게 사인을 보내면 그게 정확하게 전달되나요?”

    황선홍 : “말로는 당연히 안되죠. 관중이 많고 시끄러우니까. 내가 차겠다고 손짓을 하고 감독이 엄지손가락을 내밀면서 OK하면 차는 거죠. ‘안돼 천수(이천수) 차’ 이러면 못 차는 겁니다.”

    최영미 : “평소에 궁금한 게 있었는데 상대선수와 경기중에 대화를 나누고 그러나요? 수비수와는 자주 부딪칠 수밖에 없을 텐데.”

    황선홍 : “제가 영어를 잘 못해서 대화까지는 안됩니다. 코너킥 같은 상황에서는 몸으로 막는 상황이 생기니까 부딪치면 서로 격해지기 마련이죠. 그런데 심하다 싶을 정도로 신경을 자극하면 ‘그래 너 한번 해보자. 너 일루 와 봐라!’라고 신호를 보냅니다.”

    최영미 : “자주 부딪친 선수끼리는 미운 정이 들 것도 같아요. 경기 후에 따로 만난 적은 없나요?”

    황선홍 : “내가 공격을 못하고 꽁꽁 묶인다거나 부상을 당한다던가 하면 미울 때가 있습니다. 아무래도 후배들하고 부딪치면 좀 그렇죠. 그러나 경기 후 후배가 와서 ‘미안합니다’라고 한마디하면 다 풀립니다. 경기장에서는 ‘네가 나에게 이럴 수 있냐?’고 하지만, 경기 끝나고 한마디만 진심으로 말하면 서로 다 이해할 수 있는 게 스포츠입니다.”

    최영미 : “인상적인 외국선수는 누구였나요?”

    황선홍 : “공격수는 만날 기회가 적으니까 잘 모르겠고, 수비수로는 프랑스의 드사이가 생각나요. 컨페더레이션컵 때였어요. 그 선수의 몸을 보면 아시겠지만, 어휴 정말 터프하고 지능적이에요.”

    육성철 : “컨페더레이션컵 개막전에서 프랑스한테 0대5로 패했는데, 그날 밤 황선수가 히딩크 감독을 찾아가 울었다면서요.”

    황선홍 : “그래요? 왜 울었대요?”

    육성철 : “히딩크 감독을 찾아간 건 맞죠?”

    황선홍 : “그건 이야기 안할래요.”

    최영미 : “한국축구의 문제점은 무엇인가요. 누구보다 한국축구에 대해서 잘 알고 있을 텐데.”

    황선홍 : “한국 프로축구는 전반적으로 열악해요. 현재의 국가대표팀 시스템이 프로팀에 전격적으로 도입되어야 합니다. GK전담 코치라든지, 피지컬 코치, 수비·공격 전문코치, 물리치료사 등이 필요해요. 일본은 이미 다 되어 있습니다. 무엇보다 피지컬 코치가 없는 게 아쉬워요. 체력은 사실 과학이거든요. 현대 스포츠는 과학을 무시할 수 없어요. 예를 들어 영표(이영표)와 종국(송종국)이와 저의 체력은 다릅니다. 그런데 똑 같은 운동을 하면 안되죠. 각자의 수준에 맞춰야 하는 겁니다. 한국 프로팀에는 이런 조언을 해줄 사람이 없어요. 그러니까 똑같이 산에 뛰어갔다가 내려올 수밖에요. 한국에서는 기술이 뛰어나도 체력이 없는 선수는 도태되는 실정입니다.”

    육성철 : “과학적인 체력훈련을 위해 피지컬 코치가 중요하다는 뜻이죠?”

    황선홍 : “우리가 체력이 강해졌다고 말하는데, 어느 정도 나아진 건 사실이지만, 예전보다 엄청나게 좋아진 건 절대 아닙니다. 그건 방법의 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한국 감독 밑에서 더 혹독한 훈련도 받았어요. 피눈물나게 훈련했지만, 운동장에 나가서는 지금처럼 뛰지 못했습니다. 그에 비해 지금은 전술적으로 세밀하게 잘 짜여졌습니다. 자기 위치에서 체력을 최소화하면서 뛰면 되거든요. 예전엔 명보(홍명보)가 공격까지 나와서 슈팅을 때렸지만, 지금은 감독이 못 나가게 합니다. 옛날 같으면 남일(김남일)이가 오버래핑 나가서 센터링을 올려주었지만, 지금은 자기 자리만 지켜요. 그러니까 지치지 않고 끝까지 뛸 수 있는 거죠.”

    최영미 : “앞으로 한국축구의 수준을 유지하기 위해 어떤 감독이 대표팀을 맡았으면 좋겠어요?”

    황선홍 : “한국인 감독을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외국인 감독이 오셨으면 좋겠어요. 한국축구는 아직 완성된 게 아니거든요. 이번에 한국이 4강에 들었지만 그건 저희 능력 이상이었어요. 지금은 우리가 완벽한 상태가 아니라 중간 과정이기 때문에 틀을 잡아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히딩크 감독이 정말 많이 도와주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이 했던 방식과 다르게 나가면 선수들이 소화해내기 힘들 거예요. 2006년, 혹은 2010년까지 외국인 감독이 맡아주면 한국도 일정한 수준까지 올라갈 것으로 봐요.”

    육성철 : “히딩크 감독은 앞으로도 한국축구의 발전을 위해 일하겠다고 말했습니다. 한국축구가 히딩크에게 다시 도움을 받는 것이 어떤 점에서 유리할까요?”

    황선홍 : “개인적으로는 히딩크 감독의 노하우를 배우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봐요. 하지만 4년 뒤 성적은 오히려 나쁠 수도 있어요. 저는 거기에 민감하게 반응하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언론에 계신 분들이 참아줘야 해요. 한국축구가 장기적으로 발전하기 위해 히딩크 감독이 계속 끌고 나가면 좋겠어요. 그런데 히딩크 감독이 다시 대표팀을 이끌고 월드컵에 나가면, 국민들은 준결승은 기본이고 최소한 결승까지 기대하지 않을까요?”

    비행기 태운다고 국가대표 되나요?

    최영미 : “축구담당 기자나 언론에 대한 생각을 말씀해주세요.”

    황선홍 : “우리 언론은 결과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일본만 해도 분석을 강조해요. 왜 그런 결과가 나왔는지를 중시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과정을 다 없애고 결과만 갖다 놓고 중요한 순간에 골을 못 넣었다고 죽일 놈이라고 평가하죠. 전술적으로 세심하게 생각하고 노력하고 연구하지 못하는 점이 아쉬워요.”

    최영미 : “사람들은 축구선수들이 어떤 사람인지 굉장히 궁금해합니다. 황선수가 한번 정의해주시겠어요?”

    황선홍 : “착한 사람들이죠. 생각 자체도 굉장히 순수한 거 같아요. 축구선수는 누구를 속이기 위해서 타협하고 협상하지 않아요. 자기가 한 만큼 얻는 겁니다. 단순한 게 단점일 수 있지만 저는 그런 점들이 너무나 좋습니다.”

    육성철 : “대표팀을 보면 어렵게 살아온 선수들이 많습니다. 역경을 이겨낸 사람들이 팀을 이루게 되면 어떤 특성이 있나요?”

    황선홍 : “제가 어릴 적만 해도 부유층자녀가 축구하는 경우는 드물었어요. 눈물 젖은 빵 이야기를 많이들 하지만 실제로 고생을 해보고 부족하게 자라봐야 어려운 일이 닥쳐도 가볍게 넘기고 다시 올라설 수가 있습니다. 특히 운동은 더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거 아니면 죽는다고 생각했고, 축구를 너무 사랑했어요.”

    최영미 : “월드컵 열기 때문에 축구유학을 꿈꾸는 사람이 많아졌어요. 축구선수를 꿈꾸는 아이들과 학부모에게 한마디해 주세요.”

    황선홍 : “저는 축구인이니까 대환영이지만, 조금 신중하게 결정할 문제입니다. 그런데 어릴 때는 축구선수를 만든다고 생각하지 말고 취미를 하나 만들어준다고 생각하면 좋겠어요. 직업은 자기가 원해서 선택했으면 합니다. 무작정 비행기 태워서 보낸다고 다 국가대표 되는 것은 아니거든요.”

    최영미 : 시인은 인터뷰를 시작하면서 “황선수의 인간적인 면을 자세히 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래서 질문도 그쪽에 집중됐다. 그에 비해 기자는 축구에 더 매달렸다. 국가대표 선수로서의 마지막 인터뷰였기에 밤새도록 묻고 싶은 얘기들이 가득했다. 그러자 최영미 시인이 제동을 걸었다. “내 질문과 기자의 질문은 꼭 구별해 정리해주세요.” 이쯤 되면 기자는 게스트 본연의 자세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자정이 가까워지면서 황선수는 사람 냄새를 더욱 진하게 드러냈다.

    최영미 : “언제 외로우세요?”

    황선홍 : “아무래도 가족이랑 떨어져 있을 때죠. 어느 날 TV를 보는데 딸 아이가 우는 모습이 나오더군요. 가슴이 많이 아팠어요. 그러고 나서 집에 왔는데 딸이 ‘아빠 운동 그만해. 아빠랑 같이 있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더군요. 여덟 살이니까 많이 컸죠. 떨어져 있으면 문득 가족이랑 함께 있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최영미 : “미혼일 때는 경기 없는 날에 뭐 하셨나요?”

    황선홍 : “친구들과 놀러다니고 술도 가끔씩 마셨습니다. 얼마 전 남일이가 기자들에게 나이트 가보고 싶다고 말했는데, 그 나이 때는 저도 나이트에 가봤고, 바람 쐬러 다니는 걸 좋아했어요.”

    최영미 : “가장 친한 친구, 상담도 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죠?”

    황선홍 : “인생의 동반자인 아내죠.”

    최영미 : “담배는 피우나요?”

    황선홍 : “아니요. 전혀 안하는데요. 옛날엔 호기심으로 핀 적이 있지만….”

    최영미 : “요한 크루이프도 골초였다는데….”

    이 대목에서 기자는 모 언론사 인물파일에 들어있는 황선수의 신상자료를 보여주었다. 거기에는 황선수가 하루에 담배를 한 갑씩 피운다고 나와 있다. 황선수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빨리 고쳐주세요. 이거 축구하는 어린 친구들이 보면 충격이에요.”

    최영미 : “영화 보고 울어본 적도 있어요?”

    황선홍 : “어릴 때 ‘엄마 없는 하늘 아래’ 말고는 울어본 일이 없어요. 요즘은 흥미 위주로 2시간쯤 웃고 즐길 수 있는 것으로 만족해요.”

    최영미 : “인상 깊게 읽은 책은 뭐죠?”

    황선홍 : “(최영미 시인이 선물한 ‘시대의 우울’을 집어들고) 아직 안 읽어 봤는데 아마 이 책 아닐까요?”

    최영미 : “하하하.”

    황선홍 : “책은 그리 많이 읽지 못했습니다. 읽어도 주로 흥미 위주죠.”

    “선홍이 형이 세 살만 젊었어도”

    최영미 : “자신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세요? 예를 들어 내가 왜 이런 실수를 했나라든지….”

    황선홍 : “예. 많이 생각합니다. 경기 중에는 금세 잊어버리지만 하루가 지나면 또 생각이 납니다. 이 상황에서 이렇게 때리거나 패스했더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많이 들어요.”

    최영미 : “이번 월드컵에서 가장 아쉬웠던 순간은 언제였죠?”

    황선홍 : “스페인전 연장전에서 찬스가 왔는데 골을 못 넣었어요. 그건 스트라이커가 해결해야 하는데….”

    최영미 : “왜 실수했나요?”

    황선홍 : “생각을 너무 많이 했습니다. 단순하게 그냥 때렸어야 했는데 골키퍼를 속이려다보니 템포가 약간 늦어져서 수비수에게 걸렸어요. 그런 게 병이라면 병이죠. 단순할 때는 단순해야 하거든요.”

    최영미 : “황선수의 단점은 무엇이죠?”

    황선홍 : “많아요. 저는 강인한 면이 별로 없어요. 스트라이커는 때론 독하고 강한 면이 있어야 하거든요. 저는 스스로 합리화하기 위해 ‘나는 샤프하고 깨끗하게 플레이하고 싶다’고 자주 이야기했어요. 그러나 스트라이커라면 용수(최용수) 같은 파괴력을 보여주어야 해요.”

    황선수에게 한 가지 고백할 게 있다. 기자는 황선수와 최영미 시인의 만남을 성사시키기 위해 황선수에게 편지를 띄운 적이 있다. 기자는 편지에 ‘최영미 시인은 황선수의 오랜 팬’이라고 썼다. 황선수의 집으로 가는 차 안에서 최시인은 “사실 황선수보다 김남일을 더 좋아한다”고 털어놓았다. 박진감 넘치는 최시인의 월드컵 참관기와 미국전에서 일전불사의 자세로 ‘맞짱’을 떴던 김남일. 어딘가 통하는 구석이 많다. 기자가 보기에 최시인은 김남일이라는 이름을 거론하는 것만으로도 행복을 느끼는 듯했다.

    최영미 : “요즘 김남일 선수가 인기 절정입니다. 저도 관심이 많은데, 약간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너무 언론에서 띄우니까요.”

    황선홍 : “남일이는 매력이 있죠. 나보다는 못생긴 것 같은데…. 남일이는 터프하고 밉지 않은 스타일입니다. 싹싹하고, 선배에게도 잘해요. 사실 저는 처음에 남일이를 좋은 선수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산만하고 몰입하지 못하는 선수처럼 보였거든요. 유럽전지훈련 때 체코에게 0대5로 질 때 남일이의 실수로 골을 먹었는데 별로 개의치 않는 것같았어요. 저는 태극마크를 달고 뛰면 책임감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자기 실수에 대해 진지하지 못한 자세가 좀 서운했어요. 그래서 제가 많이 질책했습니다. ‘여기는 네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남일이는 지금 너무 잘하고 팀에서 없어서는 안될 선수입니다. 그런데 정말 중요한 건 지금부터예요. 스스로 잘 관리해야 합니다. 어리기도 하지만, 외국으로 나가야 할 선수니까요.”

    육성철 : “젊은 선수들의 해외진출을 바라보면서 내심 부러울 것 같아요. 한국이 만약 1994년쯤 월드컵에서 큰 성과를 거두었다면, 황선수도 유럽에 갈 수 있었을 텐데.”

    황선홍 : “16강 진출하고 나서 대표팀 선수들끼리 밥을 먹다가 두리와 지성이에게 농담을 던졌죠. ‘너희는 외국 가서 펄펄 뛰면서 돈버는 일만 남았네.’ 그러면 애들이 따라서 농담을 해요. ‘아, 선홍이 형이 세 살만 젊었어도…’ 유럽에 진출하지 못한 건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물론 사람이 욕심대로 살 수는 없겠지만.”

    최영미 : “홍명보 선수에 대해서 한마디 해주세요.”

    황선홍 : “어릴 때부터 같이 컸어요. 명보는 아내 다음의 친구죠. 대단한 선수예요. 능력도 있고 선수들 융화시키는 탁월한 자질도 있고. ‘주장이 제일 잘 어울리는 선수’라는 표현이 적격이에요. 앞으로 우리나라에서 그런 선수가 다시 나올 수 있을까 의심스러울 정도입니다.”

    최영미 : “저는 홍명보 선수가 좀 무서워요.”

    황선홍 : “말이 없는 게 사실이에요. 재미도 없고요. 전화하면 ‘응 뭐해’ 그게 끝이에요. 하지만 사석에서 술을 마시면 정말 재미있고 말도 참 잘합니다. 보기와 다른 구석이 많은 친구죠.”

    자정이 넘었다. 당초 1시간 이상을 빼앗지 않겠다고 약속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인터뷰는 흥미를 더하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밤이 새도록 이야기꽃을 피우고 싶었지만, 그건 스타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마지막으로 궁금한 건 역시 대표팀 은퇴 이후의 계획이었다. 각종 매스컴에 황선수의 거취에 대한 추측성 보도가 무성했지만, 그가 직접 구체적으로 밝힌 적은 없다. 우리는 언제쯤 ‘황선홍 감독’이라는 말을 접할 수 있을까.

    최영미 : “은퇴 후 지도자 수업을 위해 영국으로 간다고 들었습니다.”

    황선홍 : “영어공부와 축구공부를 병행할 수 있는 곳은 영국뿐이더군요. 영어가 문제인데 가능하면 가고 싶습니다.”

    최영미 : “앞으로 감독의 길을 걷고 싶으세요?”

    황선홍 : “한번 해보고 싶어요. 좋은 성적을 거두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축구인으로서 후배들에게 제 경험을 토대로 바람직한 틀을 짜주고 싶어요. 다음 세대를 위해 그런 징검다리가 되었으면 해요.”

    최영미 : “어떤 지도자가 되고 싶으세요?”

    황선홍 : “감독은 생각보다 어려운 위치예요. 흔히 감독이라면 권위적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요즘 많이 변했고, 저 역시 자율을 원합니다. 유럽도 일본도 자율적으로 하고 있으며, 우리도 결국 그렇게 가야 합니다. 가둬놓는 것보다 알아서 관리하고 훈련하고 경기에 임할 수 있는 시스템을 심어주고 싶어요. 물론 지금까지 그렇게 해서 실패한 분들도 많지만….”

    은퇴, 그것은 서글픈 일

    육성철 : “유능한 스타는 유능한 지도자가 되기 어렵다는 징크스를 어떻게 생각하세요?”

    황선홍 : “성적이 좋으면 더욱 좋겠지만, 나는 그런 감독이 되고 싶은 게 아닙니다. 한국축구의 시스템이 바뀌려면 좋은 감독이 필요하고, 그 자리에서 내가 생각하는 것을 한번 해보고 싶은 것뿐이에요. 실패나 성공은 신경 쓰고 싶지 않아요.”

    육성철 : “일본 프로팀은 자체적으로 지도자를 키우는 일에 적극적입니다. 황보관 코치가 대표적인 경우인데, 일본에서 지도자로 남을 생각은 없나요?”

    황선홍 : “저는 일본이 아닌 한국에서 일하고 싶습니다.”

    육성철 : “폴란드전을 앞두고 국가대표 은퇴 기자회견을 했는데 그때 느낌이 어땠습니까?”

    황선홍 : “서글펐죠. 저도 욕심이 굉장히 많거든요. 서른 살을 넘자 주위에서 마무리를 잘해야 한다고 충고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제가 귀담아듣지 않았어요. 저는 오로지 대표선수를 하는 것이 최고로 성공하는 길이라고 생각했거든요. 나는 더 이상 기회가 없고, 내가 풀고자 했던 것은 월드컵에 대한 한이니까요. 그때는 그것만 생각했어요.”

    육성철 : “J리그 가시와 레이솔이 마지막 팀이 되는 건가요?”

    황선홍 : “잘 모르겠어요. 제가 내년 시즌 전남에 입단한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은퇴한다는 보도도 있었는데, 아직 결정된 게 없어요. 일단 올해까지는 가시와와 계약되어 있으니까 시즌이 끝난 뒤에 결정을 내려야죠. 지금은 가시와를 우승시키는 게 목표입니다.”

    육성철 : “이제 공식 은퇴경기만 남았는데, 평소 어떤 은퇴경기를 꿈꾸었습니까?”

    황선홍 : “저에겐 18번을 달고 운동장에서 단 10분이라도 뛰는 것 자체가 감격스러운 일입니다. 저의 팬들도 그걸 중요하게 생각할 거고요. ‘황새가족’들이 많이 오셔서 지켜봐주었으면 합니다”

    최영미 : “저는 인천에서 포르투갈전이 끝난 뒤 숙명적인 고독감을 느꼈어요. 4년에 한번 자신의 모든 것을 보여주어야 하는 자들의 고독이죠.”

    황선홍 : “저 역시 그런 고독을 느꼈습니다. 실패가 많았으니까요. 4년은 너무나 길었습니다. 팬들의 뇌리에 제 잘못이 너무나 깊이 박혀 있기에, 4년을 온전히 버티기에는 너무나 힘들었죠. 마음이 조급해지고 그러다 보면 8년이 되고, 나이는 먹어가고 만회할 기회는 줄어들고…. 사실 16강진출은 엄청난 기쁨이잖아요. 그런데 우리가 그토록 꿈꿔왔던 일이 이루어진 그 순간에 엄청난 허탈감이 찾아오더라고요. 아무것도 아닌데…, 이렇게 간단한 건데…, 기뻐해야 하는데…. 갑자기 허무하기도 하고 복잡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황선수는 언제 어디서든 질문을 받으면 정성껏 대답하는 선수다. 기자는 황선수가 세레소 오사카에서 뛰던 시절 일본 나가이경기장에서 그를 인터뷰한 일이 있다.

    이날 황선수는 두 골을 터뜨리고 J리그 득점랭킹 선두로 올라섰는데, 그는 일본 기자들에게 30분을 시달리고도 기자에게 40여 분을 더 할애했다. 경기가 끝난 지 1시간이 넘었지만, 그는 땀에 절은 유니폼 차림 그대로였다. 땀방울이 목 줄기를 타고 계속 흘러내리는 데도, 그는 기자가 알아듣도록 아주 천천히 질문에 답했었다.

    최영미 : “자신의 인생에 만족하세요?”

    황선홍 : “못하죠. 그런 사람이 있을까요? 많이 채운 듯해도 또 욕심이 나죠. 그러나 만족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제 자신이 힘들어지니까. 이제는 ‘너 이 정도면 잘한 거야’라고 제 자신을 위로합니다.”

    최영미 : “지금이 가장 행복한 때인가요?”

    황선홍 : “가장 행복한 순간은 아니지만, 많이 행복합니다. 사람 욕심은 끝이 없잖아요.”

    최영미 :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 있으세요?”

    황선홍 : “저도 이번 월드컵을 통해서 많은 걸 생각했고 엄청나게 놀랐습니다. 정말 대단한 국민들이라고 생각해요. 솔직히 두려울 정도예요. 이런 모습을 모르고 그동안 서로가 냄비근성이라며 비하했잖아요. 앞으로는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축구뿐만 아니라 전반적으로 말입니다. 월드컵을 계기로 한국사회가 달라졌으면 좋겠어요.”

    최영미 : “밤늦게까지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황선수의 앞길에 행운이 가득하길 빕니다.”

    황선홍 : “저 역시 즐거웠습니다.”

    0시20분. 황선수는 아내 정지원씨와 엘리베이터 앞까지 배웅했다. 날짜를 넘겨가며 3시간 가까이 계속된 인터뷰에도 황선수는 웃음을 잃지 않았다. 나흘 뒤면 일본으로 건너가 새로운 도전을 시작할 황선수의 행운을 빌며 아파트를 빠져나왔다. 월드컵 기간 동안 한국경기가 열린 경기장에서 단 한번도 빠지지 않고 등장한 현수막이 있었다. ‘영원한 18번, 당신을 잊지 않겠습니다.’ 자동차는 분당에서 외곽순환도로를 타고 일산쪽으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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