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롤스가 대표 저작인 ‘정의론(A Theory of Justice, 1971)’의 기본 구상을 담은 최초의 논문 ‘공정으로서의 정의(Justice as Fairness, 1958)’를 발표했던 1950년대에 대부분의 철학자들은 규범학(normative science, 規範學)의 종언을 노래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도덕은 한갓 감정 표현이나 주관적 소견에 불과하다는 정의주의(emotivism)가 기세를 올렸고 지지자를 가진 정치철학은 기껏해야 사회복지의 극대화론인 공리주의가 전부였다. 사회·정치철학 불모의 시대에 ‘정의론’의 출간은 규범철학의 복권을 예고하는 일대 사건이었다.
당시 공리주의(utilitarianism)가 학계 바깥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그것은 공공정책 관리를 정치적 문제 해결에 이용 가능한 간명하고 엄정한 방법이라 여겼다. 모든 정책 대안가운데 각각이 가져올 이득을 더하고 비용을 계산하여(cost-benefit analysis) 순수 이득을 최대로 만드는 정책을 선택한다는 이론이다. 이는 복지정책에 유용한 길잡이를 제공하였으나 자본주의의 지배 이념이 되기에는 그것이 갖는 전체주의적 함축으로 인해 권리론자들(right-theorists)의 비판이 점증하게 되었다.
영향력 막강한 ‘정의론’

이같은 상황에서 사회·정치철학계는 1950년대부터 1960년대 초반에 걸쳐 적어도 세 가지 점에서 중대한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첫째, 많은 권리론자들이 마르크스주의적 비판의 일부를 수용함으로써 시민적, 정치적 자유에 대한 전통적 목록들을 옹호할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소외된 계층의 복지를 보장하는 데 있어 필수적인 취업과 교육, 의료 및 여타 재화들에 대한 평등한 분배를 요구하게 되었다.
둘째, 학계 분위기는 공리주의자보다 권리론자에게 유리해졌으며 대표적 정치 이론 학자들이 권리론자들로 바뀌어 갔다. 따라서 이제껏 학계를 주도해 온 공리주의는 수세에 놓였다.
셋째, 규범학의 불모지로 간주되었던 사회·정치철학계에서 다시 규범철학의 복권이 주창되면서 거대이론(grand theory)의 전통이 소생하기 시작했다.
이런 세 가지 변화는 모두 롤스의 ‘정의론’ 때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이 책의 영향력은 지대했다.
‘정의론’이 가장 대표적인 저작이긴 하나 롤스는 그 후에도 주목할 만한 두 권의 저서를 남겼다. 두 번째 저서인 ‘정치적 자유주의(Political Liberalism, 1993)’는 정의론을 부분적으로 변호하고 보완하기 위해 쓰여졌으나 동시에 갖가지 새로운 담론거리를 제시하고 있다. ‘정치적 자유주의’란 자유주의에 폭넓은 가능성을 부여하기 위해 공적이고 정치적인 영역에만 한정시킨 자유주의의 최소화 프로젝트라 할 수 있다.
롤스의 마지막 저술인 ‘만민법(The Law of Peoples, 1999)’은 그의 ‘정의론’을 지구촌 사회에 적용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원래 그의 정의론은 적용 범위가 개별 국가에 한정되었으나, 정치적 자유주의를 통해 문화 다원주의에 대한 인식을 기반으로 삼아 만민법에서는 자신의 정의론을 국제 사회에 확대 적용하려 시도했다.